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14화 (114/211)

“신성한 불꽃도 있으니 가능할 겁니다. 다만…….”

“다만?”

“이미 입고 계신 갑옷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 듯해서요.”

어머니께서 보내 주신 용갑주.

그랬다. 아버지께서 평소 입으시는 용갑주와 거의 동등한 물건인 만큼 범상치 않았다.

단순 방어력만이라면 레온의 갑옷 쪽이 위일지 몰라도, 그 외 다른 기능면에서는 용갑주 쪽이 더 우수했다.

특히 천호의 경우 태양의 마력을 강화시켜 주는 용갑주 대신 레온의 갑옷을 입으면 지금보다 약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으음, 역시 그런가.]

미궁 세계 최강의 성검인 미트라와 달리 레온의 다른 장비들은 딱히 미궁 세계 최고라 할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루시엘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 투구와 방패만 쓰시는 건 어떠세요?”

[좋지 않다. 레온의 무구들은 갑옷과 투구, 방패가 모두 갖춰졌을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물론 각기 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만…….]

소위 말하는 세트템이라는 이야기였다.

파츠가 모두 갖춰지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천호는 루시엘에게 미트라의 말을 전한 뒤 팔짱을 꼈다. 살짝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같았다.

“그럼 저 말고-.”

“아뇨, 주인님이 쓰실 수 있을 겁니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마키나가 가슴을 탕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전대 주인님께서 남겨 주신 특별한 도구들을 이용하면 용사의 무구들로 지금 주인님께서 입고 계신 용갑주를 강화할 수 있을 겁니다.”

“강화요?”

“네, 용사의 무구들은 모두 진은으로 만들어진 특별한 물건들이니까요. 용사의 무구들로 용갑주를 강화하면 진은의 힘을 가진 용갑주가 만들어질 겁니다.”

한마디로 레온의 무구들을 강화 재료로 쓰자는 말이었다.

솔직히 천호 입장에서는 제법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지만, 그렇다고 선뜻 받아들이기는 또 어려운 이야기였다.

[나를 신경 쓰는 것이라면… 괜찮다. 아마… 아니, 레온도 분명 허락할 거다.]

애당초 후대를 위해 남긴 물건이었으니까.

천호는 황금색 보석을 잠시 어루만진 뒤 마키나에게 다시 물었다.

“강화 재료로 사용하면 아예 사라지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인님의 용갑주에 용사의 무구가 더해진다고… 아니, 두 무구가 하나로 합쳐진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게임에서처럼 완전히 소멸하는 개념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쯤 되면 천호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시 한 번 황금색 보석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네, 주인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방긋 웃은 마키나는 그대로 뒤로 물러서더니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리고 이내 저만치서 덩치 큰 거한이 다가왔다. 레온보다도 더 큰, 루카나 여왕을 방불케 하는 거인족이었다.

“대장간 일을 전문으로 하는 몸입니다.”

마키나가 약간은 뽐내듯이 말했다. 대장간 일보다는 전투에 더 적합할 것 같은 몸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힘 하나는 확실할 것 같았다.

‘몸이 몇 개나 되는 거지?’

그리고 본체는.

대련용 육체와 대장간 업무용 육체는 남자가 분명했는데, 본체도 남자인 걸까?

“음.”

안 되는데. 병약한 미소녀여야 하는데.

잠시 망상을 이어 가던 천호는 이내 현실로 돌아왔다. 돌연 떠오른 것이 있어서였다.

“잠시만요, 마키나. 부탁할 일이 하나 더 있어요.”

“하나가 아니라 열이라도 좋습니다.”

[그대여, 무슨 일인가?]

천호는 바로 루시엘을 돌아보았고, 순간 눈을 깜박인 루시엘은 바로 이해했다. 천호가 무엇을 달라 말하기도 전에 인벤토리를 열더니 딱 천호가 원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

부러진 제국 수호검.

언젠가 다시 만들어 주겠다고 미트라에게 약속했던, 레온이 만든 미트라의 몸.

[아…….]

미트라가 목소리를 흘렸고, 천호는 씩 웃었다.

마키나 또한 꽤나 흥미 있는 얼굴이었다.

“진은으로 만들어진 검이군요. 더욱이… 전대 주인님께서 만드신 물건이 분명합니다.”

마키나가 손끝으로 검신을 어루만졌다. 전투용이라기보다는 의장용에 가까운 물건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진은이었고, 태초의 대장장이가 만든 물건이었다. 복구시키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터였다.

“해 보겠습니다.”

“부탁할게요.”

천호가 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라도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 다행이란 얼굴이었다.

[그대여.]

천호는 대답하는 대신 황금색 보석을 어루만진 뒤 잠시 일행들을 돌아보았고, 이내 다시 마키나를 보았다.

일행들 모두가 갈망하고, 천호도 원했지만 어째 말하기 좀 쑥스러웠던 것을 입에 담았다.

“마키나.”

“네, 주인님.”

“무기고를… 좀 돌아볼 수 있을까요? 동료들을 무장시킬 수 있는.”

천호의 말에 천사들과 영웅들이 동시에 반응했다. 다들 반짝이는 눈으로 마키나를 보았고, 마키나는 킥 하고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천호에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주인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천사들 사이에서 짧은 환호성이 터졌다.

* * *

꽤나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모처럼의 한식에 천호는 행복했고, 천호의 요리에 천사들과 영웅들 역시 행복했다.

1박 2일에 걸친 무기고 탐방도 즐거웠다. 태초의 대장간의 무기고답게 온갖 종류의 장비들이 갖춰져 있던 터라 마법사인 라구엘부터 동물형 전투 천사인 사스치엘 일행까지 모두가 각자에게 맞는 장비들을 갖출 수 있었다.

천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미 장구류 일체를 마키나에게 맡긴 천호였지만 그래도 필요한 것들이 있었으니까.

[이, 이제 그만… 조금만 쉬게 해… 꺼윽.]

태초의 대장간답게 비범한 무기들이 많았고, 비범한 무기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검이었다.

즉, 미트라에게 먹일 검들이 잔뜩이란 소리였다.

[허억… 끅, 꺼억.]

스무 자루쯤 먹었을까. 정말로 배가 꽉 찼는지 검신에 검을 가져다 대도 더 이상 흡수를 못하는 미트라였다.

“성과는 좀 있어요?”

[끄윽… 예상…대로다.]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오른 미트라였다. 여간한 수준의 마법검으로는 성검 레벨을 높이기 어려웠다.

고렙이 저렙몹을 잡아 봐야 경험치를 별반 얻지 못 하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래도 얻는 것들이 있었다.

조금씩이라고는 해도 경험치가 올랐고, 각각의 마법검들이 가지고 있는 기능들을 흡수했다.

“이젠 진짜 만능검이네요.”

새로 추가된 기능이 스무 개가 넘었으니까.

미트라 하나면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미트라.”

[으음, 그래. 그대를 위해서라면…….]

이제 세탁기나 조리 도구로 쓰이는 게 익숙하기도 하고. 적응이 되었는지 거부감도 딱히 없었다.

[그런데 그대여. 마키나의 강화 작업이 끝나면 다시 제도로 가는 건가?]

신기 탐색 임무가 끝났으니 이제 드디어 중앙으로 가 볼 때였다.

변방 중의 변방인 태초의 대장간에서 중앙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으니 올 때 그러했던 것처럼 포탈을 이용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천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돌아갈 때는 다른 방식을 이용해 보려고 해요.”

태초의 대장간과 제도 아이테리움 모두 10층 동부에 있긴 했지만, 각기 북동과 남동이었기에 제법 방위 차이가 났다.

더욱이 아이테리움에서 중앙까지의 길이 딱히 순탄한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천호는 아이테리움을 거치지 않고 태초의 대장간에서 중앙으로 바로 질러갈 계획을 세웠다.

[으음,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지 않나?]

물론 치유의 신의 전차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길이 너무 멀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후후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천호가 웃음을 흘렸다.

[그, 그대여?]

“방법이 있어요. 방법이.”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대었지만 사실 겉치레에 불과했다. 진짜 이유는 훨씬 더 단순하고 명확했다.

“변신.”

그리고 합체.

천호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 * *

태초의 대장간에 도착하고 사흘째.

마키나의 강화 작업이 마무리되었고, 일행은 다 함께 대장간 밖으로 나섰다. 중앙으로 향하기 위함이었다.

“그… 정말 함께 가도 될까요?”

대련용인 청년의 몸을 한 마키나의 물음에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요.”

어차피 찾아오는 이가 없는 대장간이었다. 마키나는 우수한 인재였으니, 이런 곳에 놀려 두기보다는 중앙에 데려가는 편이 나았다. 대장간이야 봉인해 버리면 되는 것이었고.

시원하기까지 한 천호의 대답에 마키나는 무척이나 기쁜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태어난 이래 쭉 머물던 대장간을 떠나야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천호는 그런 마키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뒤 다시 일행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치유의 신의 전차와 열두 대의 캐리어.

“용사님, 준비 완료예요.”

루시엘이 말했고, 천사들이 싱글벙글 웃었다. 천호 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시작하죠.”

요 며칠 참느라 힘들었으니까.

천호는 사용 설명서를 펼쳤다. 사흘 사이에 수십 번을 넘게 읽어 이미 내용을 숙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펼쳤다.

마키나가 강화해 준 용갑주로 태양의 마력을 이끌어 낸 뒤 남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마법의 단어들을 읊조렸다.

“변신, 합체.”

명령한 그 순간이었다. 열두 대의 캐리어들이 동시에 변모했다. 하늘로 솟구쳐 오르더니 크게 원을 그렸고, 치유의 신의 전차를 인식했다.

애당초 열두 대 모두가 도착하지 못하는 상황 또한 고려한 어머니였다. 때문에 캐리어들의 합체 기능은 하나가 아니었다. 마치 레고를 조립하듯 다양한 형태의 변신 합체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중에 하나.

“오오, 오오오!”

천사들이 경탄했다.

영웅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캐리어들이 치유의 신의 전차와 결합했다. 추가 파츠가 되어 전차에 장갑과 날개를 더하였다.

그리하여 탄생하는 것.

순백과 황금이 더해져 만들어진 한 척의 비공정.

짝짝짝짝짝.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박수를 쳤고, 천호는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직 남은 합체 기능들을 떠올리며 행복해했고, 미트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 애구나.]

하지만 목소리에 즐거움이 어려 있었다. 천호는 척척척 걸어 나간 뒤 비공정의 문을 열었다. 모두에게 말했다.

“가죠.”

천사들이 환호했고, 비공정이 날아올랐다.

* * *

약 한 시간 뒤.

제도 아이테리움.

포탈 시스템 앞에 앉아 있던 정화의 신은 해탈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이번에도 그냥 갔다고?”

“어, 으, 네.”

호위 격인 전투 천사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답했다.

그냥 갔다.

돌아오면 같이 중앙으로 가기 위해 포탈 시스템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그놈의 용사 놈은 정화의 신 자신을 패스해 버렸다.

그래, 뭐 바쁘니까.

비공정 타고 질러간다니까.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치유의 신의 동생들 중에서도 가장 성격이 좋은 정화의 신이었다. 때문에 그는 분통을 터트리는 대신 똑같이 멍한 표정이 된 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냥 갔단다.”

파이엔 출신의 영웅 크리스 폰 크리사오르.

천호를 만나기 위해 제도 아이테리움까지 찾아온 그녀는 눈을 깜박이다 물었다.

“네?”

“그냥 갔다고.”

“그, 그럼 어쩌죠?”

“어쩌긴, 우리도 중앙으로 가야지. 걸어서.”

치유의 신의 전차도, 비공정도 없었으니까.

“후, 가자.”

갈 길이 멀 테니.

정화의 신이 앞장섰고, 전투 천사들이 바로 뒤를 따랐다.

잠시 멍해 있던 크리스 역시 서둘러 발걸음을 내디뎠다.

‘만날 수… 있겠지?’

중앙에 가면.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크리스였지만 애써 억눌렀다.

짐짓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황금색 비공정이 잿빛 하늘을 갈랐다.

본래 전차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안정적인 비행이었다.

하지만 쾌적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천호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어서였다.

‘좁아.’

천사 넷에 영웅이 셋.

여기에 다시 마키나의 여러 몸체들이 들어 있는 커다란 관이 둘.

단순 계산으로도 일행이 열 명이나 늘어난 셈이니 전차 내부가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전차 내부는 무척이나 평온했다.

아니, 오히려 화기애애했다.

일행의 절반 이상이 착하디 착한 천사들이었고, 락 드워프들은 대부분 기관실에 매달려 있느라 딱히 더 좁아진 게 없었다.

영웅들 또한 괜히 영웅들이 아닌지라 천사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선량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애당초 여행이 몸에 밴 자들이라 여기서 불만을 터트려 봐야 서로 짜증만 날 것이란 사실을 잘 알았다.

천호야 애당초 좁은 것을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말이다.

“음.”

천호의 양옆에는 천사들이 있었다. 오른쪽엔 루시엘, 왼쪽엔 에이젤.

이 구성이라면 좁은 전차 정도가 아니라 아예 퇴근 시간의 만원 지하철이라 해도 괴롭지 않은 천호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천호를, 양옆의 천사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있었다.

마목마목.

천호의 앞에 놓인 화분 위에서 마목이가 덩실덩실 춤을 췄다. 미트라도 먹이고 잔불이도 먹인 김에 마목이도 잔뜩 먹인 결과였다.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루시엘이 환히 웃으며 말하자 에이젤이 따라 웃으며 말을 보탰다.

“움직임이 훨씬 좋아졌어요. 덩치도 많이 커졌고.”

성장의 물약.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 농작물들 사이에 들어 있던 물건이었다.

종자를 뿌린 뒤 빠르게 성장시키라고 보내 주신 물약이었는데, 예상대로 마목이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