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11화 (111/211)

“아무튼 기적이라니 대단해요. 막 두근두근거려요.”

에이젤이 심장에 무리가 온 사람처럼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물약을 사용하는 그 순간이 빨리 왔으면-하면서도 그런 날이 오면 뭔가 일이 꼬였다는 거니 오지 않았으면- 하는 실로 천사다운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다른 것도 보자, 다른 것도.”

루실리아가 천호를 보챘다. 사실 다른 천사들도 얼른 다른 캐리어들을 살펴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다들 예의도 바르지.’

남은 캐리어가 열한 개였지만 주인인 천호를 제쳐 두고 자기들끼리 살펴본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하는 천사들과 영웅들이었다.

[천사답구나.]

“그렇죠?”

미트라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답한 천호는 캐리어 뒤지기를 계속했다.

용갑주가 들어 있던 중단에는 딱히 더 든 것이 없었고, 하단에는 쓰고 남은 스크롤 다섯 개가 있었는데, 이건 이미 첫 분배 때 검토해 본 터라 더 볼 것이 없었다.

[그래도 아직 캐리어가 열한 개나 남았구나.]

생각만으로 배가 부른 듯 미트라가 푸근한 어조로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천호는 바로 두 번째 캐리어에 다가갔고, 문자 그대로 감동했다.

“아버지……!”

두 번째 캐리어도 일단 구조는 첫 번째 캐리어와 같았다.

물약들이 든 상단과 스크롤들이 든 하단.

큰 짐들이 들어갈 수 있는 중단.

상단 구성은 첫 번째 캐리어와 대동소이했지만 미라클과 변신 물약이 없었다. 척 봐도 귀한 물약들인 터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단에는 스크롤 여섯 개가 남아 있었다. 전투 중에 많이 소모한 탓이었다.

하지만 아까워할 일이 아니었기에 천호는 미련을 버리고 중단을 보았다.

중단.

첫 번째 캐리어에는 용갑주가 들어 있던 곳.

그곳에는 쌀가마니와 항아리가 있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쌀가마니와 항아리가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것으로 보이는 손 편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분명했다. 필체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힌 천호는 항아리를 열어 보았다. 순간 천사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코를 막았지만, 천호는 아니었다. 천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대여, 저게 대체 무엇인가.]

“장이요.”

고추장이랑 된장이랑 간장.

콩이 있으니 언젠가 만들어 먹겠다고 생각만하고 결국 실행에는 옮기지 못 했었는데.

‘아흑, 아버지.’

그저 빛입니다. 빛빛빛.

“요, 용사님, 먹는 것들이에요?”

“네, 루시엘 입맛에도 맞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오늘 저녁에 실력 발휘 좀 해 볼게요.”

천호의 대답에 천사들 모두가 다시 한 번 항아리를 돌아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기묘한 냄새가 나는 음식물이 몹시 불안했지만 그래도 이미 천호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천사들이었다.

천호가 요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큰 기대를 품었다.

“모종도 있는 것 같아요.”

에이젤이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며 말했다. 안에는 벼와 콩을 비롯해 각종 모종이 들어 있었다.

‘역시 아버지.’

언제 어디서나 자급자족을 모토로 하시는 분다웠다.

“계속 보죠.”

세 번째 캐리어는 두 번째 캐리어와 구성이 거의 동일했다.

차이는 아무리 봐도 농사용인 성장 촉진 물약이 몇 병 들어 있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 캐리어.

중단을 본 천사들 사이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아니, 정확히는 루시엘이 쌀을 발견한 천호만큼이나 기뻐하고, 나머지 천사들이 부러운 눈으로 루시엘을 보았다.

[어, 어머님…….]

미트라도 물기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정말로 감동했는지 작게 흐느끼기까지 했다.

네 번째 캐리어의 중단.

안에는 작은 옷상자 세 개가 들어 있었다.

아들꺼.

천사꺼.

성검꺼.

참으로 직관적인 라벨.

천호는 일단 자신 몫의 상자를 열어 보았다. 이번에는 어머니의 손 편지가 보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아무리 고성능의 용갑주라해도 결국엔 갑옷이었다.

옷상자 안에는 속옷과 편히 입을 옷 몇 벌이 들어 있었다. 지구의 옷도 있었고, 아무리 봐도 파이엔의 것으로 보이는 옷도 있었다.

“용사님, 저도 열어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우우, 빨리 열어 봐요. 구경이라도 하게.”

차례대로 루시엘, 천호, 에이젤이었다.

라구엘과 아우라엘 역시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열게요.”

루시엘이 방긋방긋 웃으며 옷상자를 열었다. 이번에도 어머니의 손 편지가 나왔다.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천호의 옷상자와 마찬가지로 속옷 몇 벌과 예쁜 평상복들이 들어 있었다.

“잘 입을게요, 어머님.”

루시엘이 기뻐했고, 에이젤을 비롯한 천사들이 부러워했다. 아무리 천사라 해도 질투나 시기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적을 뿐, 부러워한다는 마음 자체는 있었으니까.

“그런데 미트라 님 꺼도 있네요?”

에이젤이 반쯤 질문하듯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트라는 성검이었으니 말이다.

“미트라, 지금 열어 볼까요?”

[아, 아니다. 나중에 둘만 있을 때 열어 보자. 그러고 싶다.]

용갑주처럼 정신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옷일 가능성은 낮았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런 식으로 미트라 자신에게 옷을 선물해 준 사람은 천호의 어머니가 처음이었으니까.

설사 입지 못 한다고 해도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었다.

“나중에 열어 보고 싶다 하시네요.”

천사들에게 미트라 대신 설명하자 다들 조금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고개들을 끄덕였다. 미트라의 선물을 미트라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뭐라 할 천사들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캐리어 탐방은 계속되었다.

다섯 번째 캐리어에도 옷상자가 들어 있었고, 이번에도 천호, 미트라, 루시엘의 몫인 터라 천사들의 부러움과 아쉬움은 배가 되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캐리어에는 아버지가 챙긴 것이 분명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공구 세트!”

그야말로 작업을 위한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삽, 곡괭이, 망치는 물론이고 마력으로 충전이 가능한 전동 드릴과 전기톱까지!

천호의 눈만 초롱초롱 빛난 게 아니었다.

작업이란 말에 흥분하게 된 천사들 역시 천호의 설명에 눈을 빛냈다.

이후에도 캐리어에서는 이런저런 것들이 튀어나왔다.

구급 세트만 보낸다는 느낌이었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반드시 도착한다는 확신이라도 있었는지 물건의 종류도 다양했고 숫자도 많았다.

그리고 마지막 캐리어.

조촐했다.

앞의 캐리어들에 비하면 중단이 비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천호는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숨을 멈추었다.

첫 번째 캐리어? 용갑주가 들어 있는 캐리어가 어머니의 한 수셨다면, 이 마지막 캐리어야말로 아버지의 한 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단에는 서책 두 권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거였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께서 준비하신 거였다.

그중 왼쪽,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서책.

낡은 고서가 아니었다.

현대적이고 깨끗한 서책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다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천호는 서책을 꺼내 펼쳐 보았다. 이번에도 아버지의 손 편지가 나왔다.

마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럼 이제 혼자서도 할 수 있지?

천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책의 페이지를 몇 장 더 넘겨 보았다.

기초밖에 배우지 못 했던 호세사천왕.

이후의 것들이 하나하나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무공 비급에 첨삭을 해 놓은 버전이라 해도 좋았다.

[여명의 검과 하나가 되겠구나.]

미트라가 작게 말했고,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이 말했듯 용사의 검은 용사의 모든 것이었다.

여명의 검 아래 천호의 모든 기예가 하나가 되었다. 앞으로 새로 익힐 호세사천왕의 기술들 역시 그러할 터였다.

[최선을 다해 돕겠다.]

“든든하네요.”

사실상 미궁 세계 최강의 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미트라였으니까. 호세사천왕을 여명의 검 아래 편입시키는 일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천호는 다시 호세사천왕의 표지를 어루만졌다.

강한 무공 비급을 손에 넣었다는 기쁨보다는 아버지의 무공을 익힐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크게 와 닿았다.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

아버지와 같은 경치를 보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다.

‘나도 참 단순하구나.’

저도 모르게 씩 웃은 천호는 호세사천왕을 내려놓은 뒤 오른쪽에 있는 서책을 보았다.

왼쪽 것처럼 보자마자 감동하게 되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이쪽 역시 중요했다.

판타지 느낌이 물씬 나는 가죽 표지 책 위에 자리한 것은 어머니의 필체가 분명했다.

설명서가 있다.

설명해야 할 정도의 기능이 캐리어들에 내장되어 있다.

천사들과 영웅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들 ‘어서 빨리!’를 속으로 외치며 천호를 바라보았다.

천호가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 적힌 목차를 보았다.

그리고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두 단락.

변신.

그리고 합체.

남자를 흥분시키는 마법의 단어들이었다.

* * *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잖니.

타향살이 힘들지? 가끔은 고향 음식을 먹어야 힘이 나는 거다.

용갑주는 결국 갑옷이잖니.

평소에는 편한 옷을 입어야 한단다.

우리 아들 잘 부탁해요.

이건 살짝 뇌물.

호세사천왕.

캐리어 사용 설명서.

“용사님은?”

“이제 막 잠드셨어요.”

행복과 웃음이 넘치는 캐리어 개봉으로부터 20여분 뒤.

여전히 응접실에 모여 앉은 천사들과 영웅들 사이에 천호는 없었다.

루시엘의 말마따나 자러 갔기 때문이다.

사실 천호도 당장 캐리어들의 변신 합체를 실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이래저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일단은 실내.

제법 천장이 높다고는 하나 그래도 하나하나가 3~4미터는 족히 될 캐리어들의 합체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변신 합체를 실험해 보려면 대장간 밖으로 나가야 했는데, 그냥 집앞에 잠깐 나가는 것도 아니고 거의 성문 개방에 가까운 일을 해 가며 나가야 하는 터라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마력도 문제였다.

악신 카블라카사를 쓰러트리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을 정도로 마력과 체력을 소진한 천호였다. 캐리어들을 변신 합체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마력이 필요했는데, 실험 한번 해 보자고 수량이 한정된 물약들을 쓰는 건 솔직히 말해 낭비였다.

그래서 천호는 일단 쉬기로 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체력과 마력도 회복될 터이고, 잠자는 동안에는 얼른 변신 합체를 해 보고 싶다는 조바심도 안 들 테니까.

“과연 용사님. 대단하셔.”

라구엘이 작게 말하며 락 드워프들과 영웅들 쪽을 돌아보았다.

남자는 종족을 불문하고 다들 똑같은지 안달이 난 얼굴로 캐리어들을 보고 있었다.

‘남자만이 아닌가.’

루실리아도 으으거리며 캐리어 구경을 하고 있었으니까.

“저기, 그런데 말이야.”

바로 그때 실리키엘이 슬쩍 다가와 말문을 열었다.

루시엘은 천사다운 천사답게 웃으며 화답했다.

“네, 실리키엘 선배님. 무슨 일이세요?”

“어, 그러니까. 좀 궁금해서 그런데.”

자연스럽게 라구엘 옆에 앉은 실리키엘은 손을 잡아당겨 루시엘도 자리에 앉혔다.

루시엘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깜박이자 실리키엘이 약간은 멋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용사님 부모님들… 뭐 하는 분들이셔?”

실리키엘이 그렇게 물은 순간 캐리어를 구경하던 이들은 물론이고 각자 앉아 쉬고 있던 천사들까지 모두 루시엘 쪽을 돌아보았다.

사실 다들 말을 안 하고 있어서 그렇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

루시엘도 이해했다. 생각해 보면 실리키엘과 루실리아, 그리고 대장간에서 합류한 천사들과 영웅들은 천호의 내력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게 말이죠.”

“응응, 그게 말이야.”

실리키엘이 눈을 빛냈고, 천사들과 영웅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사이에 자리하게 된 루시엘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흘렸다. 볼이 자꾸만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용사님의 아버님은 용사님이세요.”

“응?”

“용사님이요. 파이엔이라는 세계를 구하신 용사님이라고 하셨어요.”

루시엘이 자랑스럽게 말하자 에이젤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우리 용사님 아버님은 굉장하세요. 마왕도 잡았다고 하셨어요.”

“마왕님을?!”

루실리아가 헉하며 숨을 삼켰지만 이미 그녀와 친해진 일행은 그녀가 헉하는 이유를 알았다. 때문에 실리키엘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어, 그럼 저게 사실상 그 파이엔이라는 세계의 지원이라는 거네?”

“네, 그리고 용사님 어머님도 굉장하세요.”

“맞아요, 잘은 모르지만 아무튼 굉장하세요.”

루시엘과 에이젤이 연달아 말하자 실리키엘이 미간을 좁혔다.

저런 것들을 보낸 사람들이니 굉장하긴 할 텐데,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굉장하단 말인가.

“저기 말이야, 너네도 혹시 잘 모르는 거 아냐?”

“으윽.”

“읏.”

이번에도 루시엘과 에이젤이 동시에 목소리를 냈다. 옆에서 지켜보던 라구엘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에 대해서는 용사님께서 이야기해 주신 게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치유의 신께서는 용사님의 어머님께서 초월종일 거라 하셨습니다.”

“초월종!”

실리키엘만이 아니었다. 천사들과 영웅들 모두가 헉하고 숨을 삼켰다.

“과연, 그래서 저렇게 강한 건가?”

세계를 구한 용사와 초월종 사이의 자식이었으니까.

미궁 세계로 치자면 초대 용사 레온과 치유의 신 사이에 태어난 자식쯤 될 터였다.

실리키엘은 새삼 캐리어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이계의 초월종이 보내 준 지원 물품.

그렇잖아도 대단한 캐리어가 한층 더 대단해지는 기분이었다.

“헤헤.”

모두가 감탄하자 루시엘이 미소를 흘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자꾸만 볼이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우리 용사님이세요. 우리 용사님이요. 우리 아버님이랑 어머님이고요.’

속으로나마 자랑을 한 루시엘은 덩달아 으쓱으쓱거리는 에이젤과 서로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실리키엘이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작게 웃더니 다른 것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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