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04화 (104/211)

* * *

루시엘은 천호의 말을 하나부터 열까지 허투루 듣는 법이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지금까지 천호가 미트라에 대해 한 이야기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 정신세계에서 미트라는 검의 모습이 아니다.

둘, 정신세계 속 미트라는 무척 귀엽다.

셋, 미트라는 ‘으앙’하고 운다.

‘귀여워!’

위 세 가지 모두를 조합한 루시엘은 으앙으앙 우는 작고 귀여운 동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사스치엘이나 엘리엘 같은 동물형 전투 천사들과 항상 함께하고 있었기에 동물 형태의 미트라를 떠올리는 데 거부감도 없었다.

‘토끼? 아기 고양이? 강아지? 아기 곰도 귀여운데.’

루시엘의 머릿속에서 미트라가 점점 형태를 잡아 가기 시작했다.

감정과 생각이 눈에 훤히 드러나는 루시엘답게 미트라를 보는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으으음… 뭔가 엄청난 오해를 사는 기분이다.]

미트라가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천호는 굳이 루시엘의 오해를 정정해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그리 틀린 망상도 아니었다.

사람도 일단은 동물이었으니, 미트라는 귀여운 동물이 맞았다.

[으으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지…….]

머리를 싸매고 주저앉은 채 끙끙거리는 미트라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때문에 천호는 흐뭇하게 웃은 뒤 상황을 정리했다.

“아무튼 이제 용사의 무구들을 회수하죠. 레온… 아니, 선배님께 허락도 받았으니.”

천호의 말에 루시엘이 파란 눈을 크게 뜨며 기뻐했다.

“와, 정말요?”

“네, 정말요.”

[그런데 그대여, 초 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레온의 장비라면…….]

“네, 너무 크다는 말씀이시죠?”

[으음, 이미 들었구나.]

사실 처음 제도로 향할 때만 해도 깜박 잊고 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무덤에 도착해서 일반적인 크기를 능가하는 석관을 보고 나니 레온이 얼마나 큰지가 새삼 떠오른 미트라였다.

“용사님, 너무 크다뇨?”

“레온 선배님은 키도 키지만 덩치가 엄청났거든요. 각종 기록에도 크다고 나와 있지만, 실물로 보면 진짜 어마어마해요.”

“와… 앗, 그 말은 그럼…….”

“네, 레온 선배님의 장비가 제게 안 맞는다는 말이죠. 그래도 태초의 대장간의 모루를 사용하면 조정이 가능하다고 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후, 다행이네요.”

정말로 안도했는지 가슴을 누르며 길게 숨을 토했다.

겉과 속이 똑같다 못해 맑고 투명하기까지 한 루시엘다웠다.

“아무튼 서두르죠. 밑에서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

“네, 용사님.”

천호는 루시엘과 함께 석관에 다가갔다.

멀리서 봐도 큰 석관인 만큼 가까이서 보니 더 컸다.

[다섯 여신들의 문장이다.]

석관 옆면과 뚜껑에는 여러 문장들이 양각되어 있었다. 때문에 짙은 회색빛 석관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천호는 조심스럽게 석관 뚜껑을 잡아 보았다. 무게가 상당했지만 천호도 괴력의 소유자인 만큼 그리 어렵지 않게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용사님, 잠시만요.”

천호가 뚜껑을 열기 전, 루시엘은 다시 한 번 기도를 했다. 아무리 허락받았다고는 하나 관의 뚜껑을 여는 일인 만큼 사죄와 용서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루시엘이 기도하는 동안 천호 역시 마음을 다잡았다. 안에서 레온의 미라나 해골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으니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몇 분.

마침내 천호는 긴 숨과 함께 뚜껑을 열었다.

쿵!

옆으로 밀려난 석관 뚜껑이 바닥을 찍으며 큰 소리를 냈다.

루시엘은 눈을 꽉 감았고, 천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다시 몇 초.

실눈을 뜬 루시엘과 뭘 봐도 놀라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천호는 당황했다.

석관 안에 레온의 미라는커녕 해골조차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에 있는 것은 사람 형태로 배치된 새하얀 투구와 갑옷, 방패가 전부였다.

두 사람이 놀라는 이유를 감지한 미트라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레온은 시신을 남기지 않았다. 수많은 자손들의 사이에서 잠자듯 영면을 맞이한 뒤… 전쟁의 여신 이브나일께서 레온의 영혼을 거두어 가셨으니 말이다. 지상에 남은 레온의 육체는 빛이 되어 사라졌었지.]

때문에 시신 없는 장례식을 치러야 했었다.

미트라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천호는 다시 용사의 무구들에 집중했다.

투구와 갑옷, 방패 모두 천사의 날개를 형상화시킨 것 같은 날개 장식들이 달려 있었고, 미트라처럼 저마다 커다란 보석을 하나씩 달고 있었다.

투구는 이마 부분에, 갑옷은 가슴 부분에, 방패는 한가운데.

“미트라, 미트라처럼 다른 무구들도 자아가 있나요?”

[없다. 말을 하면 알아듣기는 하지만, 골렘이 주인의 명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무구들 각자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군요.”

딱히 아쉬울 것도 없는 이야기였기에 천호는 일단 방패를 꺼내 들어 보았다.

“제 키만 한 거 같아요…….”

하얀 카이트 실드는 정말 루시엘의 키 정도 크기였다.

루시엘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에 고기 구워 먹으면 다 같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방패 면이 그 정도로 넓었으니까.

[으음, 루시엘이 완전히 그대의 색으로 물든 것 같다…….]

용사의 무구를 보며 고기 구워 먹는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천호는 그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투구를 꺼내 머리에 써 보았다. 빈 공간이 참으로 많았다.

‘으음, 하긴. 비율이 좋아서 그렇지 덩치를 생각하면 충분히 대두이긴 했지…….’

키가 2미터 20이나 되었으니, 보기에 딱 좋은 머리 크기라 해도 실제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투구든 갑옷이든 일단 몸 위에 씌우는 것이었으니까. 실제 몸이나 머리보다 더 크게 만들어지기 마련이었다.

“눈사람이 된 것 같아요.”

레온의 투구를 써 본 루시엘이 웃으며 말했다. 투구가 어찌나 큰지 투구 장식이 루시엘의 어깨에 닿을 정도였다.

‘인형탈 같네.’

아니면 특대 사이즈 오토바이 헬멧이라든가.

투구가 이러니 갑옷까지는 입어 볼 필요도 없었다.

“일단 챙기죠.”

“네, 용사님!”

활짝 웃으며 답한 루시엘이 인벤토리에 레온의 무구들을 챙겨 넣었다.

그리고 작업이 끝났을 때였다. 텅 빈 석관 안을 들여다보던 천호가 말했다.

“저기, 루시엘.”

“네, 용사님.”

“이 석관도 챙겨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천호의 물음에 루시엘은 눈을 깜박였지만 당황의 시간은 짧았다. 이미 천호에게 적응한 루시엘이었기 때문이다.

“어… 개인 욕조로 쓰시려고요?”

“그것도 좋지만 침대로도 좋을 것 같아서요.”

레온의 시신이 누워 있던 곳이라면 아무리 천호라도 좀 찝찝했을 터였지만 그냥 무구만 들어 있던 관이면 사실상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대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관을… 아니, 그것도 아닌가.]

책장을 목욕탕으로 쓰고 있는 마당이었으니까.

“음, 챙기도록 하죠. 레온 선배도 괜찮다고 할 거예요.”

[으음, 레온 성격상 그러긴 하겠지만…….]

그렇잖아도 휑한 레온의 무덤이었는데 무덤의 아이덴티티라 할 수 있을 관 자체를 가져가겠다니.

하지만 이미 천호에게 물들 대로 물든 루시엘과 미트라였다. 저항의 시간은 참으로 짧았다.

“그럼 챙겨 가죠, 용사님.”

“네, 루시엘. 부탁할게요.”

인벤토리 안에 기어이 석관을 쑤셔 넣은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으으음… 뭔가 옆길로 엄청나게 샌 느낌이지만 아무튼 마무리가 되었으니 서둘러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용무를 마친 터라 천호도 동의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섯 여신들의 조각상- 그중 가운데 놓인 다섯 번째 여신의 조각상을 마주한 채 기도를 올렸다.

루시엘과 미트라 역시 저마다 짧게 기도했다.

“그럼 이제 진짜 가죠.”

무덤을 떠나기 전, 입구에 서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본 천호는 석관이 놓여 있던 자리에 시선을 두었다. 기분 탓인지 손을 흔들며 웃고 있는 레온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미트라를 잘 부탁한다.’

레온이 남긴 마지막 말.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트라의 황금색 보석을 어루만지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 * *

1층까지 내려오자 길 안내를 위해 다시 올라온 에이젤과 루실리아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실제 나이는 둘째 치고 외양이 또래라 그런지 서로 잘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이었다.

“용사님! 준비 끝났어요. 이제 용사님만 오시면 돼요!”

“맞아! 그리고 배고파!”

손을 번쩍 드는 에이젤과 흉내 내듯 폴짝 뛰어오르는 루실리아였다.

천호는 루실리아에게 육포를 하나 건네준 뒤 지하로 향했다. 에이젤이 굳이 마중 나온 이유를 증명하듯 포탈 시스템까지의 길은 꽤나 복잡했다.

[다 온 것 같다.]

어느 순간 미트라가 말했고, 그녀의 말마따나 눈앞의 광경이 일변했다. 겨우 문 하나를 거쳤을 뿐인데 좁고 답답한 느낌이 들던 비밀 통로가 무서운 느낌이 들만치 커다란 공동이 되어 버렸다.

“용사님!”

“가신 일은 잘되셨어요?”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정말 굉장합니다!”

천사들과 락 드워프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댔다.

공동 바닥에 커다란 마법진이 음각되어 있었고, 그 한가운데 일행이 모여 있었다. 루카스는 홀로 마법진 밖에 서 있었는데, 바닥에서 우뚝 솟아 있는 패널을 조작 중이었다.

“다행히 시스템이 멀쩡하네. 치유의 신님 말씀처럼 다른 층으로 이동은 무리겠지만, 10층 안에 있는 곳이라면 이동이 가능할 것 같네.”

제국의 포탈 시스템이 특정 좌표가 아닌, 마법진 간의 연계로 가동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범하게 정해진 좌표대로 이동하는 시스템이었다면 설사 같은 층이라 해도 이동이 불가능했을 터였다. 대미궁 안에 집어삼켜진 탓에 각각의 좌표가 모두 변했으니 말이다.

“그럼 바로 이동하도록 하죠.”

괜히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으니까.

“알겠네. 한 번에 모두 이동시킬 터이니 밀착해서들 서게나.”

루카스의 지시에 따라 일행은 마법진 중심에 옹기종기 모여 섰다.

“다 같이 소풍 가는 기분이에요.”

루시엘이 아주 작게 중얼거리자 천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왜인지 천호 또한 비슷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아마 적진으로 향하는 게 아니라 그럴 거다.]

싸우러 가는 것이기는 했지만 태초의 대장간 자체는 적진이 아니었으니까.

“포탈을 가동하겠네! 준비들 하게!”

루카스가 외치자 루시엘이 천호의 손을 꼭 잡았다.

다른 천사들 역시 저마다 손을 잡으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미트라가 고개를 갸웃할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대여, 뭔가 잊고 있는 기분이다.]

“중요한 건 아닐 거예요.”

중요한 거라면 지금 이렇게 바로 포탈을 가동시키지도 못 했을 테니까.

[음, 그렇겠지. 그대의 말이 옳다. 내 손잡이를 꼭 쥐도록.]

다들 손을 잡는데 혼자 가만히 있는 게 섭섭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천호는 남은 한 손으로 미트라의 손잡이를 꼭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시 몇 초.

모두가 숨을 멈춘 그때.

“가동!”

루카스가 외친 순간 세상 전체가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바닥에서 솟구친 빛이 천호 일행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초.

빛이 사라졌다.

마법진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후, 잘 된 모양이군.”

루카스가 안도의 숨을 토한 그때였다.

“으으으…….”

어마어마한 신성력을 소모한 정화의 신이 공동 구석에 위치한 작은 방? 포탈 시스템의 마력 충전실에서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그는 텅 빈 마법진을 멍하니 바라보다 말했다.

“뭐야, 다들 어디 갔어?”

“어… 다들 태초의 대장간으로 이동했습니다.”

“또?”

루카스는 정화의 신이 말하는 ‘또’가 무엇인지 직감했다. 정화의 신의 호위를 위해 따라왔던 전투 천사 둘이 어색한 웃음으로 정화의 신을 위로했다.

“으음, 뭐… 바쁘면 어쩔 수 없지.”

정말로 급한 일이기는 했으니까.

그래서 그런 것일 테니까.

정화의 신 자신을 잊거나 한 건 아닐 테니까!

“그… 같이 레온의 무덤 구경… 아니, 방문해 보시는 건 어떨지.”

루카스가 어색하게 말하자 정화의 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이왕 왔으니 그거라도 보고 가야지.

루카스와 정화의 신, 전투 천사들은 어정쩡한 걸음으로 공동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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