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정신세계 밖에서 미트라와 루시엘이 일방통행인 대화를 이어 나갈 때.
태양의 용사로 거듭난 천호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외양상의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천호는 스스로가 달라졌음을 실감했다.
‘중심이 잡혔어.’
레온의 말대로였다.
그동안 천호에게는 중심이 없었다. 기술이 잡다한 것도 잡다한 것이었지만, 애당초 근원이 되는 마력 역시도 중구난방이었기 때문이다.
천마신공으로 갈무리하기 시작한 내공.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 포식한 신성.
어머니의 피를 각성함에 따라 얻게 된 태양의 마력.
연쇄우레 같이 마력을 요하는 기술을 사용할 때마다 세 가지 마력을 섞어서- 정확히는 되는 대로 사용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궁세계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마력이 없다시피 했던 천호였다. 당연히 마력을 운용해 본 경험도 없었다.
마력을 다루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두어 달이었으니, 사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간의 마력 운용이 조잡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중심이 잡혔다.
태양의 마력이란 큰 틀 안에서 신성과 내공이 하나가 되었다.
“놀랍군.”
레온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천호가 가진 태양의 마력이 놀라웠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설마 단 한 번의 체감으로 이렇게까지 달라질 줄이야.
사실 레온이 기대한 것은 천호가 태양의 용사로 각성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는 정도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단박에 태양의 용사로 각성했다.
‘잠깐, 진짜 놀라운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놀라움이 커졌다.
레온 자신이 한번 겪어 본 과정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미트라의 검을 기준으로 하여 자신의 검을 만든다.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본질을 키워 나간다.
말만 쉽지 적용은 어려웠다.
그래서 레온은 용사의 검을 체감시켜 준 것이었다.
용사의 검은 단순한 베기 기술이 아닌, 용사의 모든 것을 하나로 응축한 기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용사의 검을 체감하면 자신의 본질이 번개가 아님을 깨닫게 되리라.
거기서부터 시작해 자신을 찾아가고, 그에 따라 자신만의 검을 만들어 내리라.
레온이 기대한 것은 계기였다.
자신을 돌아보고, 본질을 발견하는 계기.
단순히 말하면 감이나 한번 잡아 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천호는 단 한 번의 체감으로 아예 자신의 본질을 각성해 버렸다.
태양의 검이라는, 자신만의 용사의 검을 사용하였다.
‘대놓고 천재네.’
아마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 물으면 ‘그냥 하니까 되던데요?’ 라고 답하겠지.
레온 자신이 주변의 물음에 늘 그렇게 답했던 것처럼.
‘그러네, 진짜 천재네.’
이제 열아홉밖에 되지 않았는데 익히고 있는 게 참으로 많았고, 그것들이 죄다 달인급은 되었다.
전투 쪽만 그러면 모르겠는데 요리나 재봉 같은 기술들도 그러했다.
배우지 않아서 그렇지 마법도 막상 배우면 금방 경지에 오를 것 같았다.
그야말로 재능덩어리.
이 정도쯤 되니 긍정적인 의미로 부모 얼굴이 궁금했다. 대체 어떤 양반들이기에 저런 재능덩어리를 낳았는지 말이다.
‘음,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다.’
천호가 태양의 용사로 각성했지만, 냉정히 보면 그냥 각성만 한 것이었다.
태양의 검을 사용했지만 아직 제대로 된 용사의 검은 사용하지 못했다.
마법사가 아니라 확신하진 못 했지만, 태양의 마력도 아직 완벽하지 않았다. 진정한 힘은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음, 좋아. 아직 내가 훨씬 더 강해.’
조금 이상한 결론으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레온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레온의 사고 과정을 모르는 천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음. 난 그저 등을 밀어주었을 뿐. 거기까지 해낸 것은 온전히 그대의 역량이다.”
“레온하르트…….”
천호는 루시엘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레온을 바라보았다.
역시 아버지와 비슷했다.
대단하고 놀랍고 훌륭하고 아무튼 굉장한 존재.
천사 네트워크에서 읽은 이야기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천호의 눈빛에 담긴 존경과 동경을 읽어 낸 레온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본질은 태양. 더욱이 중심이 잡혔으니 똑같은 기술을 사용해도 그 위력이 다를 것이다.”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에서 힘이 용솟음치는 것 같았다.
“용사지체 또한 그대의 마력에 맞춰 변화해 갈 것이다. 번개 일변도였던 용사 스킬에 태양과 관련된 스킬들 역시 추가되겠지.”
여러모로 기대가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제 겨우 첫걸음을 내디딘 것뿐이다. 그러니 정진하여 진정한 태양의 마력을 이끌어 내라. 그대에게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큰 힘이 잠들어 있다.”
“예,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 감사합니다.”
“음, 그래.”
다시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레온은 석관 쪽을 돌아보았다.
“후대와의 대화는 무척 즐겁지만 이제 남은 시간이 별로 없군. 남은 이야기를 마저 진행시키도록 하지.”
거기까지 말한 레온은 석관에 다가가더니 석관 뚜껑을 탕탕 두드렸다.
“제국이 멸망했다고 하니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성소가 무사하다면 아마 내용물도 무사할 거다.”
초대 용사 레온의 무구들.
용사의 투구, 용사의 갑옷, 용사의 방패.
여기에 미트라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용사 풀 세트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다만…….”
레온이 돌연 말끝을 흐리더니 어색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아무래도 안 맞을 것 같군.”
“네?”
“아니, 덩치 차이가 좀 크니까.”
천호는 눈을 깜박였고, 이내 이해했다.
천호 자신과 레온과의 덩치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했으니까.
키 차이는 20~30cm 정도였지만 덩치 차이는 실로 현격했다.
“나도 예전에는 지금처럼 크진 않았는데, 어찌 되었든 이건 내가 마지막으로 쓴 무구들이라 전부 지금 몸에 맞춰져 있거든.”
양산품이 아닌 레온 전용의 무구들이었으니까.
“사실 내 후손들에게 물려줄 생각을 못한 것도 그래서고.”
용사의 무구들이었지만, 솔직히 미궁 세계 최강의 성검인 미트라와는 격의 차이가 나는 물건들이었다.
미트라처럼 오직 용사만이 진정한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조건 같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관에 고이 모셔지기만 한 것은 입고 쓸 수 있는 자가 없어서였다.
“그, 자동으로 사용자 크기에 딱 맞게 변한다든가…….”
“그런 기능이 없지는 않은데, 그래도 정도가 있지 않나.”
레온이 말했고, 천호는 납득했다. L사이즈가 M이나 XL은 될 수 있었도 XXL는 될 수 없었으니까.
“어, 그럼 어떡하죠?”
천호가 조금 멍하니 묻자 레온은 턱을 긁적이며 답했다.
“태초의 대장간이라고 아나?”
“네, 거기 가는 길입니다.”
“마침 잘 되었군. 태초의 대장간이라면 그대 체형에 맞게 용사의 무구들을 고쳐 줄 수 있을… 표정이 왜 그런가? 설마 태초의 대장간도 멸망했나?”
“아뇨, 그… 대장간 자체는 남아 있는데, 태초의 대장장이가 죽은 모양이라…….”
“으으음… 펠릭스 그 사람이…….”
잠시 죽여도 안 죽을 것 같았던 덩치 큰 대장장이를 추억한 레온은 고개를 흔든 뒤 말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도 대장간 자체가 남아 있다면 태초의 모루를 쓸 수 있을 거다. 용사의 무구들을 제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태초의 모루와 신성한 불꽃뿐이니, 솜씨 좋은 대장장이를 구해 어떻게든 해 봐라.”
“어, 음, 예.”
신성한 불꽃은 잔불이로 대체가 될 것 같았고, 대장장이도 일단은 락 드워프들이 있었으니까.
레온의 말마따나 어떻게든 되긴 될 것 같았다.
“얼굴을 보니 뭔가 대책이 있나 보군. 다행이네.”
새삼 안도의 숨을 내쉰 레온은 다시 천호에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어느새 표정과 말투도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친근하게 변해 있었다.
“그대와의 만남은 여기까지일세. 수백 년 후의 미래가 꽤나 개판인 것 같지만, 그래도 그대라면 잘 해낼 수 있겠지. 나는 믿고 있다네.”
그냥 빈 말이 아니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만남의 밀도가 높았다. 레온은 천호를 진정으로 믿었다.
“미트라를… 스승님을 잘 부탁하네.”
스승님.
레온과 미트라의 관계를 함축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천호 자신과 미트라는 어떠할까. 어떤 말로 관계를 표현할 수 있을까.
천호는 작게 웃었다. 찬찬히 고민해 볼 일이었다. 지금은 레온과의 작별이 우선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귀여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울리진 말고.”
“흠, 예.”
천호가 약간 자신 없다는 투로 답하자 레온이 껄껄껄 호탕하게 웃었다.
“자, 마지막 인사일세.”
레온이 내민 손을 흔들었고, 천호가 레온의 손을 맞잡았다.
세계를 구한 용사의,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후대에게 무운이 함께하기를.”
“선대께서 좋은 곳에 가시기를.”
무운을 빌 수는 없었으니까.
천호의 대답에 레온은 다시 크게 웃더니 천호의 손을 크게 흔들었다.
“작별이다, 후대여.”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하지만 그 유쾌함에 걸맞게 윙크한 레온이 빛으로 화하였다.
마지막 빛줄기가 흩어질 때까지 그 모습 전부를 눈에 담은 천호는 이내 미소 지었다.
레온의 마지막 당부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 * *
“저기, 미트라 님…….”
[으앙! 빨리 좀 오란 말이다! 벌써 몇 번이나 대답했단 말이다! 빨리 와서 대답 좀 전해 줘!]
“음.”
천사와 성검이 똑같이 울상을 짓는 그때, 눈을 뜬 천호가 목소리를 내었고, 루시엘과 미트라는 동시에 반응했다.
“용사님!”
[드디어! 드디어 온 건가!]
반갑다 못해 아주 환희에 찬 목소리들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번에도 거의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용사님?”
[그대여, 무언가가 변했다.]
태양의 용사로서의 각성.
미트라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쪼그려 앉아 있던 루시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급히 천호를 살펴보았다.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신 곳은 없고요?”
“괜찮아요, 오히려 힘이 넘치는 걸요.”
천호의 대답에 루시엘은 안도의 숨을 토했다.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참으로 천사답고 예쁜 루시엘이었다.
[으음, 그대여. 괜찮은가? 어디 아프지 않고?]
미트라가 한 박자 늦게 같은 질문을 했다.
묘하게 루시엘을 흉내 낸 것 같은 그 질문에 천호는 작게 웃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을 만났어요.”
초대 용사의 기억과.
천호는 천천히 레온과의 만남을 이야기했다.
미트라에 대한 기억을 교환한 일과 용사의 검을 체감해 본 일, 그로 인해 태양의 용사로 각성한 일.
[레온…….]
미트라가 물기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그저 간추린 이야기일 뿐이었지만, 천호의 이야기 속에서 레온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축하드려요, 용사님.”
루시엘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찌 되었든 결론은 천호가 태양의 용사로 각성했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군. 나도 축하한다. 다음 정신세계에서의 만남이 기대되는군.]
태양의 용사로 각성하며 무엇이 변하였을까. 어떤 스킬들이 새로 생겼을까.
“미트라를 잘 부탁한다고 했어요.”
루그와 베르가프가 그러했던 것처럼.
레온 역시 마지막에 남긴 것은 미트라를 잘 부탁한다는 말이었다.
[그래…….]
미트라의 목소리에 다시 물기가 어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기, 그런데 용사님.”
“네, 루시엘.”
“미트라 님이 ‘으앙’하고… 우세요?”
루시엘의 물음에 미트라가 흠칫했다. 레온과 기억을 교환한 이야기를 할 때 으앙 이야기가 지나가듯 잠깐 나오기는 했으니까.
천호는 잠시 고민했고, 이내 웃으며 답했다.
“네, ‘으앙’하고 울어요.”
“으앙…….”
작게 중얼거린 루시엘이 미트라를 돌아보았고, 미트라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놀라움이 섞인 루시엘의 눈을 보며 온갖 망상을 진행한 결과 언제나와 같이 소리쳤다.
[으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