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은 간단하다. 이리 와서 나와 손바닥을 맞대고 눈을 감으면 된다. 내가 마법을 사용할 때 거부하지 말고.”
“음, 알겠습니다.”
천호는 레온에게 다가섰고, 레온 역시 그러했다. 중간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손바닥을 마주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십여 초.
레온이 주문을 완성한 순간이었다.
충격이 영혼을 덮쳤다. 물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기분 속에 눈을 뜨니 레온이 보이지 않았다.
실리피안 고원.
아니, 미트라의 정신세계.
저만치 초원 위에 미트라와 레온이 마주 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아는 얼굴이었지만 무척 낯선 느낌이 들었다.
사실 레온의 경우는 당연했다.
눈앞의 레온은 지금처럼 거대하지 않았으니까. 천호 자신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작은 미소년이었으니까.
어린 레온? 아마도 처음 모험을 나섰을 때의 레온은 초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미트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아주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미트라는?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의 모습을 한 그녀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 레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것이 두 사람의 첫 만남.
구세의 용사로 선택받은 소년과 성검의 조우.
눈앞의 광경이 바뀌었다.
하지만 매번 레온과 미트라가 나오는 것은 똑같았다.
미트라가 레온을 격려하는 모습.
미트라가 레온을 훈련시키는 모습.
미트라가 레온의 성장에 기뻐하는 모습.
모두 익숙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낯설었다.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미트라가 졸라맨이나 소녀의 모습이 아닌,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보다 본질적인 부분에서 다른 부분이 있었다.
미트라와 레온의 관계.
천호 자신과는 달랐다.
미트라와 레온은 스승과 제자였다.
서로 편하게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였지만, 둘 사이에는 엄연한 사제의 벽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었다. 순차적으로 레온의 기억을 보았기에 자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시작부터가 천호 자신과는 달랐다.
레온은 분명 전투의 천재였지만 천호 자신처럼 준비된 자는 아니었다.
미트라를 만날 당시의 레온은 미숙하기 짝이 없는 소년이었다.
용사 스킬 관련 외로는 천호에게 딱히 이렇다 할 가르침을 내리지 않는 미트라였지만 레온에게는 달랐다.
요리를 비롯한 생활사 전반에까지 훈수를 둘 정도였다.
더욱이 레온에게 있어 미트라는 신께서 내려 주신 성검이었다.
최고위 천사라고도 할 수 있을 성스러운 검령이었다.
자연 대하는 태도가 평범한 여인을 대하는 것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천호가 미트라를 재주 많은 동료나 파트너 정도로 생각한 것과 달리 레온은 미트라를 숭배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시작부터 이렇게 다르니 과정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정신세계에서의 만남도 그리 많지 않았다.
서로 말을 편히 할 정도로 친해진 후에도 꼭 만날 필요가 있을 때만 만난다는 느낌이었다.
“음.”
천호는 미트라에게 집중하였다.
여전히 잘 울고 잘 웃으며, 엉큼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과 달랐다. 분명히 달랐다. 그리고 천호 자신은 지금의 미트라가 더 좋았다.
미트라가 천호 자신을 보았다.
레온의 기억 속인 만큼 진짜로 시선을 마주했을 리는 없지만, 마치 천호 자신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미트라가 미소 지었다. 레온과 함께할 때 곧잘 짓던 우아한 미소가 아닌,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였다.
다시 충격이 영혼을 덮쳤다.
천호는 눈을 떴고, 긴 숨을 뱉었다.
만족스러웠다. 꽤나 기분 좋은 기억 여행이었다.
때문에 천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고, 이내 움찔하고 말았다. 눈앞의 레온이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어서였다.
“어, 음, 어?”
레온이 눈을 껌벅이다 겨우 토한 말이었다.
컬쳐 쇼크에 빠진 외국인 같았다.
“으, 으앙?”
미트라의 전매특허.
하지만 레온에게는 아니었다. 레온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트라의 모습이었다.
처음 보는 것은 으앙만이 아니었다.
팔베개를 좋아하는 미트라.
천호의 품에 안겨 헤실헤실 웃는 미트라.
자기는 귀엽지 않다며 귀엽게 토라지는 미트라.
미트라만이 아니었다. 미트라를 대하는 천호의 태도 역시 충격적이었다.
“여, 역시 이계인.”
미궁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존귀한 성검을 저런 식으로 대하다니.
이쪽 세계 출신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흠흠.”
괜히 머쓱해진 천호는 헛기침을 토했고, 레온은 다시 작게 으앙이라 중얼거렸다.
으앙의 충격이 정말 컸던 모양이다.
‘뭐지, 이 우월감은.’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천호 자신을 바라보는 레온의 시선에 약간이지만 부러움이 섞인 것 같았다.
“아, 아무튼 미트라는 잘 지내나 보군.”
“어, 음, 예.”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번에도 침묵을 먼저 깨트린 것은 레온이었다.
“어찌 되었든 대강 알겠군. 내가 죽고 수백 년 후에 이 세계가 마신이란 놈의 침공을 받았고, 이에 맞서기 위해 선신들과 천사들이 이계의 영웅들을 불렀다는 거군. 그대 역시 그렇게 불려 온 자들 가운데 하나이고.”
“네, 정확합니다.”
“허어.”
레온이 어지럽다는 듯 머리를 내젓더니 석관 위에 털썩하고 앉았다.
사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금의 레온은 아이테르 제국 건국 당시의 레온이었으니까.
근 십년에 걸친 싸움 끝에 마왕을 물리쳐 겨우 평화를 되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큰 환란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심란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더욱이 십 년에 걸친 만남을 압축해서 보느라 부분 부분만 보았던 천호와 달리 레온은 천호와 미트라 사이의 이야기를 제법 소상히 살펴볼 수 있었다.
때문에 레온은 알 수 있었다.
제국이 멸망하고 황가의 대가 끊어진다는 사실을.
“하아, 미리 사과하지. 욕 하나만 하겠네. 이런 씨발 좆같은.”
이제 막 시작했는데 그 끝이 엉망이란 사실을 알아 버렸으니까.
물론 제국이 영원할 거란 생각은 레온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결말 또한 생각하지 않았었다.
천사 네트워크에서 구해 볼 수 있는 이야기 속의 레온은 완벽한 초인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존재는 있을 수 없었다. 레온도 감정을 가진 인간이었다.
“새삼스러울지 모르지만… 감사하네. 황가의 마지막 아이를 해방시켜 주어서.”
천호는 입술을 움츠렸다. 뭐라도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퍼뜩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괜찮네, 먼 미래의 일이고, 어찌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좀 이상한 이야기지만… 산의 일족도 나의 후예이니까. 그들이 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네.”
레온이 한평생 남긴 자식의 숫자는 공식적으로 서른을 넘어 마흔에 육박했다. 비공식까지 헤아리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을 터이니 황가는 끊어졌을지언정 레온의 피는 끊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후손이 많이 남았으니 그중 하나가 끊어져도 괜찮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레온 나름대로 천호를 신경 써서 꺼낸 이야기일 뿐이었다.
“아무튼… 이야기가 너무 옆길로 샜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네. 애당초 내가 이곳에 남은 이유는 그저 미래의 이야기를 엿듣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니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레온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자세와 표정뿐만 아니라 말투까지 바꾸었다.
“이 장소에서 나와 마주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미트라에게 성검의 사용자로 인정받을 것. 그리하여 용사의 힘을 다룰 수 있을 것.”
레온의 후손들 가운데 용사는 없었다. 미트라의 힘을 일부 빌려 쓸 수 있는 자는 있어도 미트라에게 주인으로 인정받은 자는 없었다.
그렇기에 레온 사후 수많은 후손들이 이 장소를 방문했지만 누구도 레온을 만나지 못 했다.
“새로운 싸움을 시작한 나의 후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남기고자 한다. 석관 안에는 나의 무구들이 잠들어 있다.”
용사의 투구와 갑옷.
용사의 방패.
“분명 좋은 장비들이다. 하지만 결국 장비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용사 그 자체이다.”
레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호를 내려다보았다. 무엇이든 꿰뚫어 볼 것 같은 눈이었다.
“기억을 살피며 그대를 보았다. 그대는 준비된 자이다. 놀랄 정도로 많은 재주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많은 것들을 할 줄 아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하나를 달인 급으로 해내는 존재이지. 하지만 그렇기에 난잡하기도 하다. 할 줄 아는 것들이 너무 많아 제대로 조화를 이루지 못 하고 있다.”
아버지께 배운 무공인 호세사천왕과 천마신공.
용사 스킬에 접목해서 사용하고는 있었지만 결국 따로 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호세사천왕은 배움이 얕아 기초에서 나아가지 못했고, 천마신공은 아직 성취가 낮아 제대로 된 기술을 쓸 수 없었다.
순수한 검술 쪽은 더했다.
기본은 달 세뇨 왕국검법이었지만 여기에 실전 중에 만들어진 자기류 검술과 미트라에게 배운 제국검법이 뒤섞여 있었다.
여기에 용사 스킬을 배우고 있었다. 용사의 검 또한 흉내 내기였다.
그 밖에 천호가 익히고 있는 많은 것들.
어머니의 피와 아버지의 피.
태양의 마력과 신성.
“그대가 익힌 무공이란 것을 나는 잘 모른다. 때문에 나는 용사의 검에 대해 조언하고자 한다.”
천호의 검술이 뒤죽박죽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레온은 그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레온 자신 또한 그러했으니 말이다.
“그대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검은 미트라의 검으로부터 기인했다. 미트라가 제시한 용사의 검으로부터 나만의 검을, 용사 레온하르트의 검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대 역시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용사의 검에 도달할 수 있다.”
결국 자기류였다.
누군가가 닦아 놓은 길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나아가야 했다.
“그대는 번개의 검을 사용하고 있다. 틀리지 않았다. 미트라의 말처럼 번개는 하늘의 힘이니까. 용사의 힘이라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대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대의 힘은 번개만이 아니다. 그대에게는 더 큰 힘이 숨겨져 있다.”
레온이 단정했다.
레온 스스로가 경지에 오른 용사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천호의 기억을 살펴보아서도 아니었다.
천호 스스로가 이미 무의식중에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많은 것들을 익히고 있다. 너무 많은 것들을 익히고 있기에 중심이 필요하다.”
모든 힘들의 가운데 우뚝 설 힘이.
그리하여 나머지 모든 것들을 조화롭게 이끌 힘이.
“그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대가 가진 용사의 검이 무엇인지. 그대의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필요하지 않았다.
레온이 천호에게 다가섰다. 다시 한 번 천호와 손을 맞대었다.
“그대는 아마 홀로 깨우칠 수 있겠지. 하지만 이왕 이렇게 만난 거 조금이지만 등을 밀어주겠다. 약간의 편법이라 해도 좋다.”
씩 하고 웃은 레온이 눈을 감았다. 천호 또한 따라서 눈을 감았다. 설명해 주지 않아도 레온이 무엇을 할지 알 수 있었다.
천호와 레온의 영혼이 이어졌다.
레온의 모습이 천호에게 보였다.
4층에서 보았던 것과 같았다.
용사의 검을 사용하는 레온.
하지만 단순히 보기만 했던 그때와는 달랐다.
천호는 레온이 되었다. 레온이 되어 용사의 검을 사용하였다.
엄청난 힘이었다. 하늘과 땅을, 나아가 세상을 가를 것 같은 무지막지한 힘이 용사의 검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레온이 알려 주고자 한 것은 단순히 힘의 크기가 아니었다.
힘의 운용법.
더 높은 경지를 체험시켜 감을 잡게 하는 것.
이어짐이 끊어졌다.
하늘과 땅이 사라졌다.
실리피안 고원 대신 온통 새카만 공간 속에 천호와 레온만이 남았다.
어둠이 뒤덮인 그곳에서 레온은 납득했다. 어찌하여 이런 광경이 펼쳐졌는지 이해했다.
미궁 세계가 왜 천호를 용사로 선택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천호가 힘을 발했다.
미숙하기 짝이 없었지만 흉내 내기가 아닌, 천호 자신의 용사의 검을 사용하였다.
일검에 어둠이 갈라졌다.
모든 것을 비추는 강렬한 빛 앞에 사그라들었다.
태양의 검.
밤의 어둠을 몰아내고 아침의 영광을 이끌 위대한 힘.
천호가 레온을 보았다.
레온이 미소 지었다.
태양의 용사를 맞이하였다.
* * *
천호가 레온과 대화를 시작했을 때, 정신세계 밖 현실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미트라와 루시엘은 거의 동시에 천호에게 일어난 이변을 감지했다.
[그대여?]
“용사님?!”
천호를 부른 것도 거의 동시였지만 어조가 달랐다.
깜짝 놀라 당혹스런 목소리를 토한 루시엘과 달리 미트라는 놀라긴 했어도 당황하진 않았다. 약간이지만 확인하는 투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반응 차이가 나타난 이유는 간단했다.
레온의 무덤에 방문하기로 했을 때부터 미트라는 어쩌면 지금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예상을 했기 때문이다.
‘후대를 위해 이것저것 준비해 두었어.’
해묵은 기억이었지만 미트라에게는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제국을 막 건국했을 당시의 이야기.
아무리 다섯 여신의 성소를 겸한다고는 해도, 아직 창창한 나이에 무덤부터 만든다고 무어라 했더니 저렇게 대답했었다.
오래 보아 왔기에 미트라는 알 수 있었다.
무언가 해 두었구나. 단순히 용사의 무구들만 남긴 것이 아니구나.
뭣보다 레온의 마법사인 질리언의 표정이 의미심장했으니까.
잠시 옛 추억을 더듬은 미트라는 쓰게 웃으며 천호를 보았다. 황금색 보석에 비친 광경 속에서 천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하지만 몸에 이상은 없었다. 호흡은 물론이고 맥박도 정상이었다.
미트라 자신의 정신세계에 접속할 때와 흡사한 상태였다.
[레온…….]
사실 조금 섭섭했다.
이왕 정신세계에서 만날 거라면 미트라 자신도 포함시켰다면 좋았을 텐데.
과거의 레온이었다.
연속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순간을 복제해 만들어 낸, 엄밀히 말해 진짜가 아닌 가짜였다.
하지만 그래도 레온이었다.
마왕군에 맞서 근 십 년의 세월 동안 함께 싸워 온 전우이자, 미트라 자신의 제자.
그런데 자신은 빼놓고 천호만 만나다니.
조금 야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미트라는 다시 한 번 천호를 살펴보았다. 새삼 과거의 레온과 천호를 비교해 보았다.
둘 다 훌륭한 용사였지만 다른 부분이 참 많았다.
외모나 덩치도 그랬지만 특히나 성격이.
미트라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천호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냥 웃음이 흘러나왔다. 왜 그런지는 미트라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미트라 님, 용사님이 정신세계에 들어간 건 아닐까요? 그, 초대 용사님의 안배라든가?”
루시엘이 자신 없다는 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선이 향하고 있는 방향으로 보았을 때, 미트라 자신에게 물은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미트라는 반사적으로 답했다.
[루시엘, 그대의 예상대로다.]
[천호는 지금 레온이 준비해 둔 안배에 따라 정신세계에 접속한 상태이다.]
차분히 설명하듯 답했지만 혹시가 역시나였다.
미트라의 목소리는 루시엘에게 닿지 않았다.
‘왜 이런 거지?’
분명 레온과 함께했을 때는 지금보다 힘이 약했을 때도 타인과 대화가 가능했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천호 외에는 누구와도 대화가 불가능했다.
처음에는 미트라 자신이 어딘가 망가진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나머지 기능은 모두 정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왜일까. 무슨 이유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진짜 망가진 거면 안 되는데…….’
만약 그런 것이라면 결정적인 순간에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었으니까.
미트라 자신보다는 천호가 걱정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분.
미트라가 참으로 미트라다운 걱정을 이어 갈 때였다.
“흠흠, 미트라 님. 용사님이 초대 용사님의 안배에 따라 정신세계에 접속한 것은 아닐까요?”
루시엘이 다시 물었다. 아까보다는 제법 정돈된 질문이었다.
헛기침을 하며 말하는 걸 보니, 루시엘 자신도 뭔가 좀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대로 들었는지 아닌지 모르는 상황에서 완전히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하는 셈이었으니까.
[으음, 그대의 예상대로다.]
미트라는 일단 반사적으로 답해 주었지만 이번에도 루시엘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몇 분.
입술을 움츠렸다 오므렸다 하던 루시엘이 자세를 낮추더니 얼굴을 미트라의 황금색 보석에 가까이했다.
“저기, 미트라 님…….”
그리고 반복.
이번에도 성실하게, 나름 최선을 다해 답변한 미트라는 루시엘의 반응을 살폈고, 루시엘이 네 번째로 같은 말을 반복하자 언제나와 같은 반응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으앙!]
빨리 좀 와라, 빨리 좀 오란 말이다!
미트라가 천호를 원망하는 가운데 미트라와 마찬가지로 울상이 된 루시엘이 천호를 올려다보았다.
루시엘 입장에서도 답답하긴 똑같았으니까. 미트라가 질문을 듣긴 들었는지, 대답을 하긴 한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물론 그냥 서로를 깔끔히 무시한다는 선택지가 있긴 했지만, 그런 짓을 하기엔 너무 착하고 성실한 천사와 성검이었다.
더욱이 미트라와 달리 루시엘에게는 천호가 정신세계에 접속했다는 확신이 없었다. 어쩌면 천호가 너무 걱정되어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미트라가 동의해 준다면 훨씬 더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테니까.
천사와 성검은 동시에 천호를 바라보았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말했다.
“빨리 오세요, 용사님.”
[빨리 와라, 그대여.]
소통은 불가능했지만, 생각만은 비슷한 두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