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한다.]
전해 줄 필요는 없었다. 루시엘은 이해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정화의 신을 보았다.
“내가 진행? 아니, 도와주도록 하마.”
치유의 신을 닮은 얼굴로 미소 지은 그는 앞으로 나섰다. 치유의 신의 깃발을 세우고 날개를 펼치는 루시엘의 곁에 나란히 섰다.
미트라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천호는 미트라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정화의 신은 제도의 포탈 시스템을 재기동시켜야 했다. 그러니 마력으로 치환할 신성력을 보존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정화의 신도, 천호 일행 모두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만사를 합리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정화의 신은 온화하고 아름다우며 선량한 신이었다.
그가 양팔을 벌리며 신성력을 발했다. 루시엘이 치유의 신의 깃발을 꽉 붙잡은 채 기도문을 외웠다.
천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양손을 모아 쥐고 함께 기도했다.
루시엘과 정화의 신으로부터 분홍빛이 일었다. 거대한 파문이 되어 넓고 멀리 퍼져 나갔다.
눈보라가 멈추었다.
매섭게 휘몰아치는 대신 포근하게 지상을 감쌌다. 하늘하늘 쏟아지는 눈송이 속에서 영혼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눈에 이지가 깃들었다.
같은 동작을 그저 반복할 뿐이었던 영혼들에게 짧은 순간이나마 이성이 돌아왔다.
어린 아이가 엄마를 와락 끌어안았다.
함께 걷던 총각과 처녀가 서로를 보았고, 애달픈 미소를 지었다.
노인이 짐마차를 멈추었다. 병사들이 하늘을 보았다.
회색 하늘 대신 하얀 눈송이가 그들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아이테리움 곳곳에서 빛이 일었다. 수천, 수만의 빛들이 분홍색 파문을 따라 하늘로 향하였다.
밤하늘과 같았다. 무수히 많은 별빛들이 저마다의 빛을 내며 가야 할 곳으로 향했다.
가만히 바라보던 루카스는 실감했다.
실리피안 요새에만 머문 탓에 무뎌진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제국은 정말로 멸망했다.
이 세계는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루시엘이 입술을 멈추었다. 적막? 아니, 고요해진 아이테리움을 내려다보았다.
“수고들 했다. 모두들 가야 할 곳으로 갔을 것이다.”
정화의 신이 작게 말하며 천사들을 일으켜 세웠다. 누가 천사들 아니랄까 봐 다들 눈시울이 붉었다.
정화의 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쓰게 웃었지만 그의 눈시울 역시 붉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정화의 신이었다.
천호는 루시엘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억지로 기운을 북돋는 대신 그저 기다렸다.
“가요, 용사님.”
감정을 추스른 루시엘이 활짝 웃으며 말했고, 천호는 루시엘의 손을 잡아 주었다. 모두와 함께 성벽을 내려갔다.
* * *
[레온의 무덤은 다섯 여신들의 성소에 있다. 황궁의 최상층이지.]
“최상층이요?”
보통 이런 무덤은 지하나 1층에 있는 게 아니었나.
천호의 물음에 미트라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제도와 제국 전체를 잘 살피기 위함이다. 레온의 마지막 바람이었지.]
인적이 사라진 대로를 일행이 나아갔다. 미트라가 무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루카스는 포탈 시스템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포탈 시스템의 중추는 황궁 최하층에 위치하고 있네. 한 번뿐이지만 가 본 적이 있으니 내가 안내할 수 있다네.”
비록 중도에 이탈했다고는 하나 엄연히 용사의 동료였던 그는 레온의 다른 동료들과도 안면이 있었다.
포탈 시스템도 다른 누구도 아닌 질리언 본인에게서 안내를 받았었다.
“그럼 여기서 흩어지도록 하지.”
황궁 입구, 거대한 검과 방패로 무장한 채 나란히 선 기사의 석상 사이에서 정화의 신이 말했다.
관광 온 것이 아닌 만큼 여기저기 몰려다닐 여유가 없었다. 영혼들을 승천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모한 것도 사실이었고.
“그럼 루시엘 선배랑 용사님은 최상층에 가시고, 나머지 일행은 최하층으로 가면 되겠네요.”
에이젤이 방긋 웃으며 말하자 정화의 신은 잠시 루시엘과 천호를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의 천사는 용사와 함께하는 것이 맞으니까. 누님의 깃발만 넘겨다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가, 감사합니다.”
“그래, 감사하도록.”
장난치듯 짓궂게 웃은 정화의 신은 루시엘에게서 치유의 신의 깃발을 받아 들었다. 확실히 치유의 신의 동생답게 비슷한 부분이 많은 그였다.
“그럼 일 보고 내려오도록.”
쿨 하게 말한 정화의 신은 천사들을 이끌고 최하층으로 향했다. 에이젤은 잊지 않고 천호와 루시엘을 돌아본 뒤 엄지를 치켜세웠고, 루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괜히 에이젤을 흉내 냈다.
[자, 그럼 우리도 가도록 하자. 길은 내가 안내하겠다.]
짐짓 기운차게 말한 미트라가 천호와 루시엘을 재촉했다.
황궁은 7층까지 있었고, 레온의 무덤은 옥상에 자리했다.
사실 7층 정도면 천호는 물론이고 루시엘에게도 금방 당도할 높이였지만 황궁의 구조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매 층마다 계단의 위치가 달랐기에 천호와 루시엘은 황궁 곳곳을 누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약 삼십여 분.
마침내 옥상에 당도한 천호와 루시엘은 숨을 크게 삼켰다. 지금까지와는 공기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용사의 무덤.
악신으로 타락한 겨울왕조차도 손대지 못 했던 황가의 성역.
이곳만 공기가 달랐다. 마치 치유의 신의 깃발 아래 있는 것처럼 대미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특한 마기를 느낄 수 없었다.
[레온…….]
미트라가 아주 작게 말했다.
천호는 황금색 보석을 쓰다듬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실외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는 눈보라가 몰아치지 않았다. 무덤을 장식한 하얀 생화들 역시 생생하기만 하였다.
용사의 무덤은 단순하게 생겼다.
동그랗고 에메랄드빛인 돔형 지붕 아래 하얀 기둥과 벽들이 있었다.
벽들과 마찬가지로 하얀 입구는 천호가 다가서자 절로 열렸다.
품에 갈무리해 둔 황가의 열쇠 덕분인 것 같았다.
천호는 무덤 안에 들어섰다.
직경이 10미터쯤 되는 실내는 밖과 마찬가지로 단순했다. 가운데에 돌로 된 무척 큰 석관이 놓여 있었고, 벽에는 다섯 여신들의 석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생명과 열정, 태양의 여신 아이테르.
죽음과 어둠, 새벽의 여신 이오스.
투쟁과 사랑, 전쟁의 여신 이브나일.
대지와 바다, 하늘의 여신 테레시아.
그리고 마지막 하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섯 번째 여신.
태양의 여신 아이테르는 치유의 신을 닮았다. 그녀는 몸에 딱 달라붙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자신만만한 표정 덕분인지 무척이나 아름다운 드레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갑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새벽의 여신 이오스는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어깨에 차분히 내려앉은 긴 직모가 그녀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전쟁의 여신 이브나일은 딱 예상한 대로였다.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검과 방패를 든 아름다운 여기사.
하나로 묶어 늘어트린 긴 머리칼이 투구 밖에서 흩날리는 것이 정말로 말의 꼬리 같았다.
하늘의 여신 테레시아는 여신들 가운데서도 가장 온화한 느낌을 주었다. 풍만한 몸을 감싸는 치렁치렁하면서 풍성한 옷자락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다섯 번째 여신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도 후드를 눌러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본래라면 인상적이지 않아야 할 모습이었지만 홀로 다른 모습이라 그런지 더욱 눈에 띄었다. 더욱이 그녀는 다섯 여신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원형 구조의 방이었지만, 정면 입구와 정면으로 마주한 자리였기에 중심이란 느낌이 들었다.
루시엘이 양손을 모아 기도했다.
미트라 역시 기도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천호는 두 사람을 따라 기도하는 대신 다섯 여신들의 석상을, 특히 다섯 번째 여신의 석상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섯 번째 여신.
활동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만은 명확히 인지되는 그녀.
정면 입구와 마주 보는 위치에 선 그녀는 석관 역시 정면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석관의 머리 부분이 정면 입구 쪽을 향하고 있으니, 다섯 번째 여신과 석관은 서로 눈을 마주하는 셈이었다.
조금 의아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태양의 여신 아이테르의 이름 따 지어진 도시 아이테리움이었으니까.
더욱이 레온과 가장 연이 깊은 것은 레온에게 용사의 계시와 성검 미트라를 내린 전쟁의 여신 이브나일이었다.
다섯 번째 여신과 관련된 이야기는 천사 네트워크 어디에서도 찾아보지 못 했었다.
그런데 왜 그녀가 중심에 자리하는 것일까.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천호는 습관처럼 미트라의 황금색 보석을 어루만지기 위해 손을 내렸다. 그리고 순간 멈칫했다.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서 몇 번이나 나왔던 장면이 지금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안녕.”
방금까지 레온의 무덤이었던 장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루시엘과 미트라가 없었다.
미트라의 정신세계처럼 푸른 하늘과 녹색 초원이 보였다. 아니, 그냥 미트라의 정신세계처럼 실리피안 고원이 맞았다.
때문에 천호는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이 순간 이 장소에 나타날 자는 정해져 있다시피 했지만 말이다.
“용사 레온하르트.”
천호가 말했고, 초원 위에 서 있던 거한은 히죽 웃었다.
2미터는 됨 직한? 아니, 어쩌면 넘을지도 모를 거한인 데다 근육도 엄청났지만 무섭다기보다는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천호에게 다가섰다. 솥뚜껑 같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반갑다, 후배.”
최초의 용사.
그가 천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천호는 키가 컸다.
180 중반. 아니, 용사지체 덕분에 키가 좀 더 자랐으니 이제 180 후반은 족히 될 터였다.
그런데 그런 천호 자신보다 월등히 컸다. 머리 하나 정도는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몸이 컸다. 단순히 키만 큰 게 아니라, 덩치 자체가 엄청났다.
팔 근육은 어찌나 두꺼운지 천호 자신의 허벅지보다 두꺼울 것 같았고, 넓은 어깨와 가슴은 마치 벽을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여기서 더 커진다고?’
야성화나 마지막 야수를 사용하면 덩치가 불기 마련이었으니까.
천호는 저도 모르게 붙잡힌 손을 보았다. 키가 큰 만큼 손도 큰 천호였지만 레온과 맞잡고 있자니 참으로 작고 여려 보였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레온의 손은 맨손이 아니라 건틀릿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취소, 아버지랑 닮았다는 거 취소.’
아버지도 장신에 훌륭한 체구의 소유자셨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잘 생겼네.’
저렇게 엄청난 근육의 소유자인데도 괴물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실전을 통해 단련된 것 같은 근육에서는 기능미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얼굴.
선이 굵었다. 천호 자신이 어머니를 닮아 미인상 느낌이 드는 얼굴이라면 레온은 아버지처럼 남자다운 얼굴이었다.
사자.
그래, 정말로 사자.
레온이 다시 히죽 웃었다. 남들이 지었으면 바보 같은 미소였을 터인데, 레온이 지으니 또 제법 모양이 나왔다.
“흠, 여러모로 놀란 모양이군.”
맞잡은 천호의 손을 가볍게 흔든 레온은 껄껄 웃더니 천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말했다.
“이미 아는 것 같지만 다시 한 번 소개하지. 내 이름은 레온하르트. 나중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 시기에는 레온하르트 칸 쿠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친한 사람들은 그냥 레온이라 불렀고.”
“박천호입니다.”
천호도 자신을 소개하자 레온은 쓰게 웃었다.
“음, 역시. 보자마자 느끼긴 했지만 내 후손은 아닌 모양이군.”
레온 자신과는 인종은 물론이고 작명 방식까지 달랐으니까.
“네, 전 다른 세계에서 온 용…사입니다.”
분명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입 밖에 내자니 뭔가 기분이 묘해지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런 천호의 설명에 레온은 눈을 껌벅였다.
“응? 다른 세계? 다른 세계에서 온 용사라고? 그럼 다른 세계 사람이라는 건가? 마왕처럼?”
완전히 금시초문이란 얼굴이었다.
천호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생각했다.
‘역시, 그건가.’
레온이 자신을 소개할 때 사용한 말.
나중은 모르겠지만 이 시기에는 이런 이름을 사용했다?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도 이런 장면이 한 번 나왔었다. 아마 그때와 비슷한 경우일 터였다.
그래서 천호는 고민했다.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돌려 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레온하르트.”
“응?”
“본인이… 아닌 거죠?”
레온하르트 본인이 아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가 아주 아닌 것은 아니다.
레온하르트의 한때를 재현해 놓은 존재.
레온하르트처럼 생각하고, 본인을 레온하르트라 인식하지만 엄밀히 말해 레온하르트가 아닌, 레온하르트의 복제품 혹은 분신이라 불러야 할 존재.
“예리하군.”
레온은 쓰게 웃더니 석관 쪽으로 걸어가 털썩하고 걸터앉았다.
“그대의 말대로다. 나는 레온하르트가 맞지만, 레온하르트 그 자체라 하기는 어렵다. 레온하르트가 후대를 위해 남겨 놓은 복제 인격이지. 하지만 난 스스로를 레온하르트라 생각한다. 그러니 그대도 그렇게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사실 말해 놓고 조금 후회가 되기도 하는 천호였다.
구태여 확인할 필요 없이 그냥 속으로만 생각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레온이 다시 껄껄 웃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복제의 우울이니, 자의식의 혼동이니 질리언이 뭔가 어려운 말을 잔뜩 했지만 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니까. 나는 레온하르트가 언젠가 자신의 후대와 이야기하기 위해 남긴 분신이다.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나.”
호쾌하고 호탕했다. 치유의 신의 호쾌함과는 조금 종류가 달랐지만, 시원시원한 것은 똑같았다.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톡 까놓고 말하자면 지금의 난 제국을 건국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모습이다. 마왕을 막 쓰러트린 후라 여기저기 망가진 몸을 수습하던 때이지. 근육도 좀 빠지고… 이래저래 약해져 있을 때다.”
‘그게요?’
다행히 이번에는 속으로만 말했다.
하지만 눈빛을 읽었는지 레온이 다시 히죽 웃었다.
“이래 봬도 마왕과 싸울 때는 훨씬 더 전투적인 근육의 소유자였으니까. 용사의 궁극기도 문제없었지.”
순간 천호의 눈빛이 바뀌었다.
용사의 궁극기.
미트라는 늘 나중에 알려 주겠다며 뒤로 미루던 그것.
지금 레온에게 물으면 알려 주지 않을까?
‘음.’
알려 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굳이 물을 마음이 들진 않았다.
언젠가 미트라에게 직접 듣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흠, 얼굴을 보니 미트라가 용사의 궁극기를 알려 주지 않은 모양이군. 어때, 내가 알려 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나중에 미트라에게 듣겠습니다. 말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마음에 드는군.”
조금 엉뚱하게 답한 레온은 다시 한 번 천호를 지그시 바라보다 물었다.
“미트라는 잘 지내나?”
눈앞의 레온은 제국을 건국한 직후의, 아직 미트라와 함께하던 시절의 레온이었다.
수백 년 후의 미트라.
레온 자신이 사라진 후의 미트라.
“잘 지냅니다.”
한참이나 말을 골랐지만 결국 내놓은 것은 단순한 말이었다.
사실 천호도 묻고 싶었다. 레온과 함께하던 시절의 미트라는 어땠는지. 지금처럼 귀엽고 엉큼한 성검이었는지.
“그럼 잠시 기억을 교환하는 게 어떤가?”
“기억을요?”
“질리언이 내게 심어 준 능력이다. 후손이 왔을 때 구구절절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테니까. 그냥 기억을 교환해서 시간을 단축시키자는 거지. 아, 물론 막 보이기 싫은 기억까지 보이고 그런 건 아니니 걱정 말게. 보여 줘도 된다고 생각하는 수준의 기억들만 교환이 되니.”
“음.”
이야기대로면 나쁠 것이 없었다.
무척 효율적이기도 했고.
‘설마 레온이 사기 치지는 않겠지.’
마음을 다잡은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