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00화 (100/211)

“이것도 레벨이 올랐는데 뭐 변화가 없을까요?”

[으음, 잘 모르겠다.]

애당초 좀 모호한 스킬이었으니까. 그냥 천호와 미트라의 관계가 깊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지판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스킬 계열 정리는 대강 끝난 것 같다.]

“네, 용사 포인트도 다 썼고요.”

마지막 야수와 같은 항렬에 있던 스킬들을 모두 습득하였다.

거의 대부분이 현재 가지고 있는 스킬들을 강화시켜 주는 스킬들이었다.

용사의 아우라와 우레의 범위를 넓히고, 용사지체의 성능 자체를 높이는 등등.

[음,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그대의 몸 점검을 하도록 하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미트라가 세상 진지하게 말하며 천호의 품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니 누워라.]

이전처럼 촉진할 터이니.

미트라가 말했고, 천호는 미심쩍다는 듯 미트라를 바라보다 자리에 누웠다.

미트라가 다시 헤헤 웃으며 그런 천호의 몸에 손을 올렸다.

[음음, 여전히 좋은 근육이구나. 참으로 단단하다.]

미트라가 그리 말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때였다.

빛의 창이 하나 떠올랐고, 천호와 미트라는 성검의 주인 Lv6이 야기한 변화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천호가 눈을 가늘게 떴고, 미트라의 얼굴이 확 하고 붉어졌다.

* * *

천호가 미트라와의 수련에 집중하고 있는 그때.

일행을 태운 치유의 신의 전차는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황무지를 달렸다.

8층에서 예상했던 대로 이미 겨울왕에 의해 정리된 9층이었던 터라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천호의 옆에 앉아 천사 네트워크로 내려받은 치유의 신의 성투법 교본을 살펴보던 루시엘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그건 다른 천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9층과 10층을 연결하는 기둥.

천사들은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기둥의 방향과 가까움을 알 수 있었다.

루시엘은 서둘러 창가로 향해 밖을 내다보았다.

10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눈앞에 있었다.

* * *

[성검 스킬 : 마검화 Lv1]

[성검의 누적된 어둠의 기운을 이끌어 내 일시적으로 마검으로 변신한다.]

[성검의 주인 Lv6]

[성검 : 엉큼한 Lv7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각 층을 연결하는 기둥은 대미궁 내에서 비교적 안전한 지역에 속했다.

기둥이 자체적으로 발산하는 강력한 마력의 파장 덕분에 주변의 마기가 흩어져 마물들이 접근을 꺼렸기 때문이다.

루시엘은 기둥이 잘 보이는 장소에서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어차피 황무지인 9층에서 몸을 숨기는 것은 어려웠으니, 비교적 안전한 기둥 근처에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물론 이쪽의 마법 사용이 막히면 안 되었기에 8층에서 장벽을 설치했을 때처럼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

전차들로 삼면을 막은 뒤 가운데에 천막을 설치한다.

손재주가 좋은 락 드워프들이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결과 이제는 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조립식 천막이었다.

천막 설치 뒤에는 천호가 깨어날 때까지 대기.

9층 기둥까지의 지리는 이미 파악해 둔 상황이었기에 도착 예정 시간을 계산하는 것도 가능했다.

때문에 천호는 애당초 정신세계로 떠나기 전에 돌아올 시간을 정해 두었다.

그리고 정말로 딱 시간을 맞추듯, 야영지 설치가 끝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천호가 눈을 떴다.

“완벽하네요.”

천호의 담백한 칭찬에 루시엘을 비롯한 일행이 씩 하고 미소를 지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천호와 여정을 함께한 시간만큼 작업에 익숙해진 일행이었다.

“그럼 바로 시작하죠.”

오후 늦은 시간.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좀 있긴 했지만, 10층에 내려가면 얼마 안 있어 해가 질 것이 분명했다.

겨울왕에 의해 초토화가 되었고, 요격대의 패잔병들 덕분에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난 9층과 달리 10층은 아직 위험 요소가 많은 땅이었다.

때문에 천호는 그냥 일찌감치 쉬고 아침에 내려가는 쪽을 선택했다.

“네, 용사님. 그럼 바로 시작할게요.”

“우린 주변 경계를 하겠다.”

루시엘이 답하자마자 사스치엘이 전투 천사들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려 보냈다.

치유의 신의 깃발을 사용하면 주변에 강력한 신호를 발산하게 되니, 혹여 다가오는 마물이 있나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음, 매끄럽군요.”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분업에 새삼 만족한 천호는 가볍게 숨을 고른 뒤 루시엘이 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치유의 신의 깃발을 대지에 곧게 세운 뒤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

아우라엘을 필두로 하는 천사 3인방과 실리키엘 역시 루시엘의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함께 기도한다.

단순히 천사 네트워크를 사용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처음 중층에 진입했을 때처럼 치유의 신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었다.

루시엘이 기도문을 외웠다. 제각각이던 천사들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하나가 되었고, 기분 좋은 조화 속에 마치 노래하듯 기도문이 이어졌다.

지켜보던 락 드워프들이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선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이계의 영웅들인 천호와 루실리아뿐이었다.

치유의 신의 깃발로부터 붉은 기운이 일었다.

점점 더 강해진 그것이 어느 순간 깃발 위에서 하나로 뭉쳤고, 루시엘의 전신을 뒤덮었다.

“아.”

루시엘이 목소리를 토했다. 기도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빙글 돌아서더니 잠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 저기 있군.”

작게 말한 그녀는 깃발 근처에 놓여 있던 의자 위에 털썩하고 앉았다.

루시엘의 목소리였지만 루시엘이 아니었다.

자신의 사도인 루시엘을 아바타라 삼아 의식의 일부를 강림시킨 치유의 신이었다.

천사들이 몸을 낮추고 머리를 조아려 예를 표했다. 치유의 신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그런 천사들을 일으켜 세운 뒤 천호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예의 시원한 미소가 그려졌다.

“솔직히 놀랐다. 기대 이상의 활약에 정말로 경탄했어.”

짝짝짝 박수까지 친 치유의 신은 다리를 꼬고 앉았다. 루시엘의 얼굴과 몸이었지만, 표정과 행동거지가 전혀 달라 도저히 루시엘로는 보이지 않았다.

치유의 신 특유의 자신만만함과 요염함, 호탕함이 몸짓과 시선 하나하나에 묻어나 루시엘의 청순한 얼굴을 여장부의 그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천호는 현자의 시간을 사용해 머리를 맑게 한 뒤 치유의 신을 마주했다. 루시엘의 푸른 눈동자 대신 치유의 신의 녹색 눈동자가 천호를 반겨 주었다.

“어떤 보상을 해 주어야 할지 고민이야. 자잘한 것들로는 제대로 된 보상이 되지 않을 테니까.”

겨울왕은 중층에 존재하는 악신들 가운데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였다.

그런 겨울왕을 쓰러트린 데다가 8층까지 지켜 냈으니 천호의 공이 실로 컸다.

“당장은 약속뿐이지만, 중앙에 오면 이제까지의 공에 어울리는 보상을 줄게. 기대해도 좋아.”

“기대하겠습니다.”

“그래, 난 약속은 꼭 지키니까. 소원권 쪽도 기대하고 있어.”

“어, 음, 예.”

천호가 헛기침을 토하며 머쓱해하자 치유의 신은 일부러 그랬다는 듯 까르르 웃었고, 미트라가 조금이지만 뚱한 목소리를 흘렸다.

“아무튼, 정말로 시간이 없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이 아이도 내가 오래 머무는 건 그리 좋지 않을 테고.”

거기까지 말한 치유의 신은 표정과 자세를 고쳤다. 마치 이웃집 누나 같던 친근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대신의 그것으로 변모하였다.

“그대가 겨울왕을 막아 준 덕분에 일이 꽤 진행되었다.”

말투까지 바뀐 치유의 신이 손가락을 놀리자 허공에 빛의 창들이 떠올랐다.

“애당초 그대에게 의뢰했던 것은 10층에 존재할 것이라 예상되는 태초의 대장간의 수색.”

하지만 수색에 나선 것은 천호만이 아니었다. 다른 영웅들 역시 각기 다른 곳에서 출발해 수색지로 향했었다.

겨울왕을 상대하느라 8층에서 발이 묶인 천호였지만, 결국 10층까지 내려온 것은 다른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수색지로 향하기 위함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태초의 대장간을 찾아냈다.”

천호가 겨울왕의 군대와 싸우는 동안 꾸준히 수색지로 나아간 수색조 가운데 하나가 태초의 대장간을 찾아냈다.

바로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하지만 천호는 기뻐하는 대신 치유의 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태초의 대장간을 찾아 모든 일이 잘 풀렸다면 치유의 신이 지금과 같은 표정과 눈빛을 유지할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대의 예상대로다. 문제가 발생했다. 태초의 대장간을 지키는 수호자에게 발이 묶여 대장간 내부로 들어가지 못 하고 있다.”

치유의 신이 작게 한숨을 토하자 루실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저기, 치유의 신님아. 대장간의 수호자면 우리 편 아니야?”

언제나와 같은 말투에 실리키엘이 움찔했지만 다행히 눈앞에 있는 것은 여느 고지식한 신들과 달리 호탕하기 그지없는 치유의 신이었다.

그녀는 루실리아가 귀엽다는 듯 빙긋이 미소 짓더니 이내 다시 씁쓸한 표정이 되어 설명했다.

“대장간의 수호자는 태초의 대장장이가 대장간을 지키기 위해 만든 골렘이다. 때문에 녀석에게 중요한 것은 상대의 선악 같은 게 아니다. 태초의 대장장이에게 허가증을 받았는지 여부이지.”

태초의 대장장이는 항마전쟁 와중에 목숨을 잃었다. 때문에 새로운 허가증을 발부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강행 돌파 외에 답이 없다는 이야기 같군.]

전쟁의 여신 이브나일의 잃어버린 신기를 찾기 위해서는 태초의 대장간의 모루를 사용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태초의 대장간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대라면 대장간의 수호자를 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그대여, 새로이 부탁하겠다. 대장간의 수호자를 쓰러트려 줄 수 있겠는가?”

이전에도 그랬지만 명령이 아닌 부탁을 하는 치유의 신이었다.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흔쾌히 청을 받아 주어 감사하다. 그대의 노고에 어울리는 보상을 반드시 준비하겠다.”

치유의 신은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다시 친근한 이웃집 누나의 분위기로 돌아갔다. 다리를 반대로 꼬며 말했다.

“너희가 이용할 10층 기둥에서부터 대장간 사이에는 꽤나 거리가 있어. 하지만 거리를 단축시킬 방법이 없지는 않아. 아이테리움에 들를 거라 했었지?”

초대 용사 레온의 무덤에 들르기 위해.

천호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치유의 신이 말을 이었다.

“아이테리움에는 제국 각지로 이동하기 위한 포탈이 설치되어 있다. 다른 층으로 이동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같은 층에 있는 대장간 인근으로는 이동이 가능할 거다.”

대장간의 위치가 확정되었고, 아이테리움을 차지하고 있던 겨울왕이 사라졌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음, 하지만 막대한 마력이 필요할 거다. 제국이 멸망… 멸망한 지금, 제도의 포탈 시스템 역시 기능을 정지했을 터이니 말이다.]

[재기동하려면 엄청난 마력이 필요하다고 질리언이 그랬었다.]

베르가프가 레온의 첫 번째 마법사였다면 질리언은 마지막 마법사였다.

제도의 각종 마법 시스템을 모두 설계한 대마법사를 추억하며 미트라가 말하자, 치유의 신이 미소를 지었다.

천호와 마찬가지로 미트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녀였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그대와 천사들의 힘이면 재기동이 가능하긴 할 거다. 하지만 그래서야 대장간의 수호자와 바로 싸울 수 없겠지. 그래서 마력을 공급할 자를 따로 준비해 두었다.”

제도의 포탈 시스템을 혼자서 재기동시킬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마력을 가진 자.

천호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자.

[아앗, 아아앗!]

미트라가 순간 외쳤고, 천호 또한 속으로나마 동조했다.

겨울왕과의 싸움 이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미 출발시켜 두었으니 오늘 내로 도착할 거다.”

치유의 신이 루시엘의 얼굴로 호탕하게 웃었다. 다리를 반대로 꼬며 느긋이 턱을 괴는 모습이 묘하게 짓궂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동식 배터리? 아니, 정화의 신이 도착했다.

* * *

정화의 신은 치유의 신의 동생답게 미남이었다.

아니, 겉모습만 보면 그냥 미소녀라 해도 좋을 정도로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결국 소년? 남자였고, 때문에 천호에게는 그냥 신2 정도로만 기억되는 존재였다.

8층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정화의 신과의 인사를 적당히 넘긴 천호는 다음 날 아침 바로 10층으로 향하였다.

“으으, 또 설원이네요.”

에이젤이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사실 이미 10층에 대한 정보가 상당한 터라 설원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시 온통 하얀 눈밭을 보니 새삼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눈덩이 만드는 건 재미있었어요. 눈으로 성벽 만드는 거랑요.”

루시엘이 해맑게 웃으며 말하자 다른 천사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작업을 즐기게 된 그들이었다.

“훈훈하네요.”

[그, 그래.]

미트라가 마지못해 대답했을 때였다. 정화의 신이 우수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태양의 여신이신 어머님의 이름을 딴 도시가 오직 겨울뿐인 이 땅에 있다니. 참으로 애달픈 일이로다.”

정화의 신의 호위격인 전투 천사 둘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고, 천호는 천사 네트워크에서 내려받은 지도를 펼쳤다.

“저쪽이군요.”

“전차 꺼낼게요, 용사님.”

“자자, 오늘도 힘내서 가자고요!”

“힘낼게! 밥도 많이 먹고! 오늘은 세 그릇 먹을 거야!”

루시엘이 전차를 꺼내자 에이젤이 폴짝폴짝 뛰며 말했고, 루실리아도 따라서 같이 폴짝폴짝 뛰었다.

“음.”

어쩐지 뭔가 또 무시? 아니, 소외되는 기분이었지만 정화의 신은 갈 길이 바쁘니 어쩔 수 없다며 애써 좋게 생각하였다. 치유의 신의 막내 동생답게 성격이 좋은 그였다.

그리고 다시 반나절.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초조해하던 미트라가 몸을 살짝 떨었다. 부르르 떨리기 시작한 성검의 손잡이를 꽉 움켜쥔 천호는 황금색 보석을 쓰다듬었다.

미트라가 느꼈기에 천호도 느낄 수 있었다.

아이테리움에 거의 당도했다. 창밖을 내다보면 아이테리움이 보일 터였다.

제도 아이테리움.

아이테르 제국의 심장.

초대 용사 레온의 무덤이 있는 곳.

‘레온하르트.’

수백 년 전, 미트라와 함께 세계를 구한 최초의 용사.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버지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강했을까.

이야기 속의 그는 아버지와 같았다. 용감하고 현명하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근성의 소유자. 세계를 사랑하고, 세계에게 사랑받는 진정한 용사.

천호는 미트라를 고쳐 쥐고 창밖을 보았다.

미트라가 숨죽인 목소리를 흘렸다.

[아이테리움.]

휘몰아치는 눈보라 너머, 멸망한 제국의 수도가 펼쳐져 있었다.

* * *

천호가 아이테리움에 느낀 첫 감상은 거대함이었다.

플로렌 왕국의 수도나 실리피안 요새 정도로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높이가 못 해도 30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성벽들이 멀리서도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만치 길게 이어졌다.

아이테리움의 웅장함은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욱 여실히 느껴졌다.

성벽에는 아름다운 문장과 다섯 여신을 상징하는 기호들이 새겨져 있었고, 성벽을 따라 깊게 파인 해자는 어찌나 깊은지 절벽을 연상시켰다.

그 모든 것을 하얀 눈이 뒤덮고 있었다.

아이테리움의 성벽을 더욱 더 차갑고 무섭게 만들었다.

전차는 정문 앞에서 멈추었다.

한 번에 수십 명이 넘는 인원들이 지날 수 있는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그 틈이 얼어붙지 않았다. 천호는 저 문을 개방하고 출진했을 겨울왕과 그 군대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미트라는 성벽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침묵을 지켰다. 루카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성벽을 올려다보던 루시엘이 말했다.

“언데드들의 기운이 느껴져요.”

루시엘의 표정이 어두웠다. 성벽 너머에서 느껴지는 언데드들의 사기가 실로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경이 말했던, 겨울왕이 아이테리움에 남겨 놓은 병력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라구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임시라고는 해도 사령술사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전투는 없을 거예요.”

안타까움까지 섞인 목소리로 말한 그녀는 날개를 펼쳤다. 성문이 막혀 있으니 날아서 성벽을 넘는 수밖에 없었다.

라구엘이 먼저 날아오르자 아우라엘이 급히 따라서 날개를 펼쳤다. 라구엘이 허튼 소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천호도 얼른 사스치엘의 등에 올라 성벽 위로 올랐다. 그리고 천호와 천사들은 라구엘이 왜 전투가 없을 거라 했는지 이해했다.

성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아이테리움은 아름다웠다.

곳곳이 부서지고 파괴되었지만 그것만으로 훼손되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게 설계된 아이테리움이었다.

곧게 뻗은 길과 구획마다 빼곡히 들어선 집들.

플로렌 왕국의 수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이테리움 역시 도시 자체가 거대한 마법진으로 설계되었다. 높은 성벽에서 멀리 내다보니 그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성.

아이테리움의 중심에 위치한 황궁과 황궁을 에워싼 다섯 여신의 신전들.

그 사이사이를 수많은 언데드들이 오가고 있었다.

아니, 언데드들이 아니었다. 마기에 현혹된 마물이 아닌 인간의 영혼들이었다.

아이들이 길거리를 뛰어다녔다.

젊은 총각과 처녀가 나란히 걸었고, 노인이 짐을 가득 실은 짐마차를 몰았다.

병사들이 성벽 사이사이를 누볐다. 인사를 건네는 아이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부서진 도시였다.

저들 모두가 이미 죽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마치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루시엘이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저도 모르게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겨울왕이 모은 영혼들이었다.

그는 제국의 멸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여실히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서 놓아 보내지 못 하는 것이었다.

저들 모두는 겨울왕에 의해 언데드가 되었었다. 죽음의 기사들과 그 장병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지만 이제 겨울왕이, 겨울왕을 지배하던 악신 소울 이터가 사라졌다.

8층의 전장에 섰던 겨울왕과 죽음의 기사들, 휘하의 장병들은 모두가 정화되어 승천하였다. 치유의 신의 인도에 따라 대미궁을 헤매는 대신 대미궁 밖으로, 위대한 영혼의 흐름인 아스트랄 라인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악신의 주술이 풀려 해방되었지만, 그들은 길을 알지 못했다.

1층에서 만났던 탑의 지박령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자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 역시 느꼈다.

이들은 달랐다. 그러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언데드로 지냈다. 중층의 마기는 저층, 그것도 1층의 마기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시간을 도려냈다.

올바른 표현이었다.

저들은 과거의 한때를 재현하고 있었다. 의지를 가지고 추억을 더듬는 것이 아닌, 그저 단순한 반복일 뿐이었다.

멸망한 도시와 그 멸망을 부정하듯 평화로운 삶을 재현하는 수많은 영혼들.

루시엘이 얼굴을 덮고 있던 양손을 내렸다. 루카스를 보았고, 미트라를 보았다. 마치 허락을 구하는 것 같은 그 시선에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트라 역시 들리지 않을 대답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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