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99화 (99/211)

“용사님의 여정에 무운이 함께하기를!”

“함께하기를!”

경례를 마친 장병들이 손을 흔들었다. 크게 환호했고, 전투 마차에 타고 있던 에이젤과 루실리아는 꺅꺅거리며 좋아했다.

나머지 천사들도 모두 즐겁게 미소를 그렸다.

[그대가 지킨 사람들이다.]

[그대와 함께 싸운 사람들이다.]

미트라가 말했다. 그녀는 포레스트 엘프들의 왕국과 락 드워프들의 도시, 플로엔 왕국의 왕도를 떠올렸다.

천호도 그때를 기억했다. 환한 미소를 짓는 루시엘의 손을 꽉 마주 쥔 채 실리피안 요새의 장병들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천호는 루시엘과 함께 장병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장병들과 요새에 남은 천사들이 호응해 주었다.

그리고 한 시간 여.

실리피안 요새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나아갔을 때였다.

[그런데 그대여.]

“네, 미트라.”

[뭔가 잊은 것 같지 않나?]

“잊은 거요?”

[음, 뭔가 그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음.”

잊은 거라.

잊은 게 뭐가 있을까.

“뭐, 중요한 건 아니겠죠.”

[으음, 그래.]

중요한 것이라면 바로 생각이 났을 터이니까.

[그대여, 오늘 밤에도 정신세계에 와라. 이것저것 확인할 게 많으니 말이다.]

“확인할 거요?”

[용사 스킬과 성검 스킬이 개방되었다지 않나. 이번에 포식한 신성도 있고, 그대가 새로 익힌 검도 있고. 앞으로 한동안은 매일같이 정신세계에 와야 할 거다. 음, 그런 거다.]

미트라가 애써 태연한 척 말을 이어 갔지만, 천호와 매일 정신세계에서 만날 거란 사실에 기뻐하는 티가 역력했다.

“귀여우셔라.”

[응? 뭐, 뭐가 말이냐. 나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천호는 그저 작게 웃은 뒤 미트라의 황금색 보석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실리피안 요새, 천호와 미트라가 잊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자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졸도할 정도로 마법진에 신력을 쏟아부은 탓에 정말로 졸도하고 말았던 정화의 신이었다.

“그냥 갔다고?”

“어, 예. 그냥 갔습니다.”

정화의 신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남신, 그것도 소년 신에게는 참으로 무정한 천호였다.

사실 그냥 존재 자체를 망각한 것이었지만.

“음.”

뭐, 바쁘니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는 거겠지.

큰 공도 세웠고, 누님께서도 아끼시는 자이고, 누님께서 내리신 임무도 있으니까.

애써 좋게 생각하는 정화의 신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천호 일행이 9층에 도착했다.

태초의 대장간을 수색하기 위해 동부 변방으로 떠난 수색대가 최초 목표로 세웠던 수색지에 도달했다.

그리고 한 사람.

파이엔 출신의 엘프 여기사 크리스 폰 크리사오르가 10층에 올라섰다.

[용사의 피 Lv 6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용사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새로운 성검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성검의 주인 Lv5가 되었습니다.]

[미궁 세계가 당신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제11장?용사의 무덤

용사 레온하르트.

실리피안 고원 출생.

16세가 되는 해에 전쟁의 여신 이브나일의 계시를 받아 성검 미트라를 손에 넣음.

같은 해, 같은 달. 궁수 루카스 브리타니아와 마법사 베르가프와 함께 마왕군을 쓰러트리기 위한 여정에 나섬.

19세가 되는 해에 용사로 이름을 떨침.

20세가 되는 해에 마왕군에 억류되어 있던 요정 여왕 도리안을 구출.

21세가 되는 해에 용사로서 인간 저항군의 총수 자리에 오름.

같은 해 봄, 요정들과 동맹을 체결.

같은 해 여름, 마왕군 군단장 발파레아를 격퇴.

22세가 되는 해에 드워프들과 동맹을 체결.

24세가 되는 해에 아이테르 제국의 시작이 되는 아이테르 왕국 건국.

25세가 되는 해에 간드레드 대평원에서 마왕군과 결전, 대승을 거둠.

같은 해 겨울, 17인의 동료들과 함께 마왕과 격돌, 격전 끝에 이계에서 온 마왕을 완전히 격퇴함.

26세가 되는 해, 아이테르 제국 건국.

같은 해 봄, 여섯 살 연하였던 카이로스 가문의 여인 카틀레아와 결혼.

황비 카틀레아와 일곱 명의 후궁들 사이에서 아홉 명의 아들과 열한 명의 딸들을 낳음.

87세가 되는 해에 퇴위, 장남의 둘째 딸 레오나에게 황위를 물려줌.

황위에서 물러난 뒤 홀로 전국을 주유, 공식적으로 다섯 명의 아들과 여덟 명의 딸을 낳음. 비공식적으로는 추산 불가.

107세가 되는 해에 황실로 귀환.

110세가 되는 해에 황가의 모든 이들과 제도의 백성들, 성검 미트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노환으로 사망.

전쟁의 여신 이브나일이 천사들을 내려 보내 위대한 용사의 영혼을 거두어 감.

.

..

...

그리고?

* * *

겨울왕이 용사에게 패배했다.

한 줄의 소식이 가진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천사들은 미궁 세계가 인정한 새로운 용사의 탄생에 열광했고, 심층에 자리한 마신의 수하들은 당혹을 금치 못했다.

중층의 악신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겨울왕은 마신의 수하라 하기 애매한 자였다. 차라리 독립적인 군벌이라 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는 악신이었고, 중층에서 선신들의 세력을 압박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사라졌다.

새로이 나타난 용사에게 패배했다.

더욱이 그 용사는 악신들에게 낯선 자도 아니었다.

저층에서 역병신을 추방한 자.

악신들의 용사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

겨울왕 따위, 심층의 악신들에 비하면 미약한 존재에 불과했지만, 그건 역병신처럼 정말 강대한 힘을 가진 대신들이나 마왕군을 이끄는 군단장들에 비했을 때 이야기였다.

대미궁 전체로 보면 겨울왕은 결코 약한 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겨울왕을 꺾었다. 여러 가지 도움과 우연, 역병신의 실책이 더해진 결과였지만 역병신을 추방하였다.

마신이 부재중인 지금, 마신의 수하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직위에 있는 자는 마왕이었다.

하지만 아직이었다.

마왕이 직접 명을 내릴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악신들은 아직 천호의 신성 포식을 몰랐다. 그렇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용사에 대한 증오는 역병신이 가장 컸지만, 그는 약해진 상태였다. 중층에 이렇다 할 수하들을 두고 있지도 않았다.

때문에 다른 악신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층 동부에 시선을 주었다.

* * *

남자와 여자는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어려 있었고, 남자의 얼굴에는 특기라 해도 좋을 포커페이스가 유지되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안 기뻐? 응?”

“아니, 기쁘긴 한데.”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여자가 묻자 남자는 작게 답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들 때문이었다.

여자의 수하들인 탑의 주민들과, 남자를 돕기 위해 온 성왕국의 성기사들과 대사제들.

여자의 수하들은 언제나 남자를 원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에게 있어 여자는 여신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때문에 그런 여신을 독점하는 남자를 언제나 원망하고 미워했다.

더욱이 남자는 여자를 데리고 다른 세상에 살림을 차리기까지 했다. 여자의 수하들로서는 좋아할래야 좋아할 구석이 없었다.

성왕국의 사람들은 남자를 좋아했다. 여자의 수하들처럼 숭배하진 않았지만, 구세의 용사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남자를 보는 그들의 눈에는 언제나 존경과 사랑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여자의 수하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원망 어린 시선이었다.

남자의 사적인 용무를 위해 성왕국의 왕실 보물고를 탕진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가 늘 말하는 것처럼 남자 덕분에 몇 번이나 위기를 극복한 세계였고, 남자에게는 성왕국에 이 정도 손실을 요구할 자격이 있었지만, 그래도 손실의 규모가 너무 컸다.

세계 최강대국인 성왕국의 왕실 보물고에 누적된 자산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작은 소국을 몇 개나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데 그 보물고가 남자에 의해, 겨우 몇 달 만에 탕진되었다.

아무리 남자가 용사라지만, 원망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이 당연했다.

남자는 강했다.

비록 밤 한정이었지만 여자보다도 강했다. 여자보다 강하다는 것은 파이엔에서 그보다 강한 존재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래도 남자는 여자처럼 뻔뻔하지 못했다. 아니, 뻔뻔하긴 했지만 그 뻔뻔함의 종류가 달랐다.

여자는 남자가 무엇에 불편함을 느끼는지 알았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뭐야, 불만들 있어?”

여자가 말했고, 여자의 수하들은 그 순간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아름다우신 분의 뜻은 언제나 옳습니다.”

“탑주께서 하시는 일에 불만이라니, 있을 수 없습니다. 혹여 그런 뜻을 품은 자가 있다면 말살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성왕국의 사람들 쪽을 돌아보았다.

여자도 같은 곳을 보았고, 성왕국의 사람들은 바짝 긴장한 채로 어설픈 미소를 그렸다.

“저희도 불만 없습니다.”

여자는 남자와 달랐으니까.

그녀는 언제든 파괴의 화신으로 돌변할 수 있었으니까. 알아서 기는 것이 정답이었다.

“좋아.”

여자가 화사하게 웃었고, 그 순간 남자를 제외한 모두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여자의 미소가 아름다웠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여자의 강한 지배력 때문이었다.

“음, 아무튼 저번보다 업그레이드 되었다는 거지?”

“범위를 좁혔으니까.”

여자가 활짝 웃었고, 남자는 마음속으로 성왕국의 모두에게 사죄했다.

남자도 물론 아들을 찾고 싶었고,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지원을 해 주고 싶었지만, 여자는 늘 그랬듯이 스케일이 너무 컸다.

남자와 여자 앞에 놓여 있는 열두 개의 캐리어.

여자가 범위를 좁혔다고 하니 저 중에 하나는 아들에게 도달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머지 열한 개는 그냥 버려지겠지.

참고로 저 캐리어 하나에 들어간 돈이면?

“그렇지 않아.”

여자가 작게 말했다. 요염하게 웃으며 남자의 팔을 끌어안았고, 등 뒤에서 여자의 수하들이 이를 악물었으며, 성왕국의 사람들이 부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밤이 아닌 낮이었기에 남자는 살짝 긴장한 얼굴로 여자를 보았다.

“그렇지 않다니?”

“버려지지 않아.”

나머지 열한 개도.

무슨 말일까.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안으며 묻자 여자는 까르르 웃으며 설명했고, 그 설명에 남자는 흥분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캐리어들을 바라보았다.

“미궁 세계.”

여자가 말했다. 씩 웃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마치 먹이를 바라보는 맹수와도 같았다.

‘아들아, 그냥 캐리어 번호를 부르지 그랬니.’

아니, 그랬으면 더 난리가 났으려나.

“아무튼 이제 보낼 거야.”

남자의 가슴에 입술을 맞춘 여자는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가 캐리어들 앞으로 나아갔다.

마법사들이라면 보기만 해도 현기증을 느낄 복잡하고 장대한 마법진 앞에서 태양의 마력을 방출하였다.

빛이 일었다.

열두 개의 캐리어들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 * *

[헤헤헤, 헤헤.]

정신세계.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천호의 위에 올라탄 미트라는 헤실헤실 미소를 흘렸다.

천호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지금의 자세가 좋아서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는 빛의 창이 펼쳐져 있었다.

천호가 강해지고 있었다.

레온 때의 몇 배라고 해도 좋을 속도였다.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용사의 궁극기도 익힐 수 있을 것 같았다.

[헤헤헤.]

미트라가 다시 미소를 흘렸다.

천호가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쁜 그녀였다.

“그렇게 좋아요?”

[그대가 강해지는데 어찌 좋지 않겠는가. 너무너무 좋다.]

“음.”

게임 캐릭터 키울 때랑 비슷한 감각인 걸까.

아니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제자가 쑥쑥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스승의 마음에 가까울 터였다.

‘그것도 아닌가.’

조금 다른 것을 떠올려 본 천호는 이내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면 천호 자신도 미트라에게 마법검을 먹일 때마다 만만찮게 좋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당장 지금도 그러했다.

“미트라도 성검 스킬이 개방되었네요.”

[으음, 그건 좋다만 좀 불안한 스킬이다.]

천호가 새로 익힌 용사 스킬은 용사지체 계열의 스킬인 초근성이었다.

쌈박한 이름답게 성능도 쌈박했는데, 근성으로 기절, 졸도 등을 이겨 내는 스킬이었다.

‘게임으로 치면 체력이 다 닳아도 안 죽고 좀 버틴다는 거군.’

불사는 아닌 만큼 그 사이에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적에게 일격사할 가능성이 낮아지는 스킬인 만큼 무척이나 유용했다.

패시브이기도 했고 말이다.

반면 미트라가 익힌 성검 스킬은 액티브였다.

“소위 말하는 흑화네요.”

[으으음…….]

성검에서 마검으로 변신이라니.

천호는 잠시 시선을 내려 미트라를 보았다. 자세 때문에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어떻게 변하려나.’

사실 궁금한 건 밖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정신세계에서의 변화였다.

‘성격도 좀 변하려나?’

순둥이 성검에서 요염한 마검으로라든지.

[그대여, 무슨 망상을 하는 건가. 엉큼한 경험치가 오르고 있다.]

미트라가 눈을 가늘게 떴고, 천호는 헛기침을 토했다.

“흠흠, 아무튼 나중에 한번 시험해 보긴 하죠. 뭔가 전투력 강화가 있을 것 같긴 하니.”

[으음, 아무래도 마검 계열 스킬들이 강화되는 것 같다.]

미트라가 새로 빛의 창을 띄우자 마검 계열 스킬들이 좌르륵 정렬되었다.

사실상 힐링 블레이드 외에는 전부 마검 스킬이라 해도 좋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스킬이 두 개 있었으니 라이프 드레인과 소울 드레인이었다.

이미 신성을 강탈했기 때문인지 소울 이터를 먹었음에도 미트라의 외양 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소울 이터의 고유기였던 소울 드레인은 획득할 수 있었다.

“생명력과 영혼을 착취하는 성검이라니… 괜히 마검화가 나온 게 아닌 것 같네요.”

[으으.]

미트라가 상상만 해도 싫다는 듯 몸을 움츠렸다.

그런 미트라를 보며 천호는 새삼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을 떠올렸다.

미트라의 본래 모습.

못해도 170cm는 될 것 같은 훤칠한 키에 몸매까지 우월한 여신 같은 존재.

도도하고 고귀해 보이는 그 모습에 평소 미트라의 행동과 말투를 결합시켜 보았다.

으앙 하고 울 때라든지, 헤실헤실 거릴 때라든지, 소심하게 굴 때라든지.

[그대여,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엉큼한 경험치가 계속 오르고 있다.]

“흠흠.”

현자의 시간을 사용해 머릿속을 진정시킨 천호는 새로 빛의 창을 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