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루시엘이 읽어 낸 대로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상황이었다.
실리키엘과 루시엘라가 이끄는 무리들과, 천호에게 패배한 선봉대의 잔병 무리.
양쪽 모두 우연히 마주친 상황이었지만, 일단 마주친 만큼 전투는 피할 수 없었다.
객관적인 형세만 보아서는 실리키엘 측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겨우 삼백에 불과한 실리키엘 측과 달리 잔병 무리 쪽은 거의 칠백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왔어! 모두 힘을 내는 거야!”
실리키엘이 자기 키보다 훨씬 큰 창을 높이 들며 소리치자 칸토 지방 출신의 장병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며칠째 굶어 지칠 대로 지친 일행이었지만, 그래도 투혼이 살아 있었다. 딱 한 명만 빼고 말이다.
“배고파서 힘이 안 나…….”
루실리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양팔을 늘어트리자 겨우 살아나던 기세도 다시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겨우 다섯 살짜리, 그것도 며칠이나 쫄쫄 굶은 다섯 살짜리에게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으으으, 그래도 힘내! 거의 다 왔다고! 기둥만 올라가면 치킨 용사가 치킨 줄 거야!”
어느새 요리도 잘하는 슈퍼 루키에서 치킨 용사가 된 천호였다.
한편 이러는 와중에도 서서히 거리를 좁혀 오는 잔병 무리였다. 언데드다 보니 똑같이 패잔병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이쪽처럼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모두 힘을 내는 거야! 거의 다 왔어!”
다시 소리친 실리키엘은 창을 꼭 움켜쥐었다. 루실리아의 상태가 안 좋으니, 실리키엘 자신이 더 힘을 내야 했다.
설사 실리키엘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루실리아만은 지켜 내야 했으니 말이다.
‘나는 루실리아의 천사니까!’
이를 꽉 하고 악문 실리키엘은 특기인 번개 마법을 준비했다. 그녀의 긴 창에 녹색 번개가 어리기 시작했다.
“가자! 이브나일 님을 위하여!”
“제국의 이름으로!”
실리키엘에 이어 장병들이 외쳤다. 강병들로 유명한 칸토 지방 출신들답게 어려운 상황임에도 패기를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무언가가 쏟아졌다.
너무나 작고 빨라 전장에 선 이들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놓쳤지만, 실리키엘은 달랐다.
그녀는 5급 전투 천사답게 예민한 감각과 뛰어난 시력을 갖추고 있었다.
‘단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전장에 푸른 번개가, 번개의 폭풍이 요동쳤다. 언데드 무리 한가운데서 폭발해 이백에 가까운 무리들을 집어삼켰다.
어마어마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광경에 루실리아가 분노했다.
“힘없다더니! 먹을 거 숨겨놨구나! 혼자만 먹고!”
“야!”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설명할 여력도, 겨를도 없었다. 실리키엘은 옆에서 투닥투닥 자신을 때리는 루실리아를 애써 무시한 채 정면을 노려보았다.
하늘에서 전투 천사들이 강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한가운데서 작렬하는 이가 있었다. 순백의 성검 위에서 벼락과 함께 강림하는 이가 있었다.
슈퍼 루키.
번개의 용사.
“치킨 왔다.”
“응?”
루실리아가 눈을 깜박였고, 실리키엘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푸른 번개가 지상을 강타한 그때 창을 움켜쥐며 함성을 질렀다. 전군 돌진을 명령했다.
* * *
“꺼억.”
[메인 퀘스트 ‘9층에 도달하라’를 완수하셨습니다.]
[메인 퀘스트 : 10층에 도달하라.]
[격이 상승했습니다. 당신의 직업이 ‘용사’에서 ‘비범한 용사’로 변경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꺼억.”
으로부터 약 한 시간하고 20여 분 전.
전투가 끝났다. 적의 숫자는 이쪽의 배가 넘었지만 그런 건 이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당백이라 해도 좋을 전투 천사들의 숫자만 해도 여럿인 마당에 일당천? 아니, 만부부당이라 해도 좋을 용사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루실리아와 실리키엘 일행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다. 뭔가 해 보기도 전에 언데드 무리가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갔기 때문이다.
“치유의 검이여!”
“부정한 자들이여 돌아가라!”
“정화의 빛이여!”
“내 말에 복종하라! 내 앞에 무릎 꿇어라! 사령을 부리는 자가 명하노니! 컨트롤 언데드! 폭발사산!”
마지막에 이상한 게 하나 끼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언데드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여 준 천호 일행이었다.
“와, 노가다 한 보람이 있네요.”
정화의 빛을 언데드들에게 퍼부으며 에이젤이 말했다.
기본적으로 언데드들에게 강한 천사들이었지만, 천호 일행은 특히 강한 편에 속했다. 다들 언데드 퇴치 관련 타이틀들을 적어도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리피안 요새에서 수만에 달하는 언데드들을 열 명 남짓한 인원으로 모조리 정화시킨 결과였다.
[다들 정말 강해졌군.]
타이틀도 타이틀이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본 역량이 강화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 대미궁에 들어올 때만 해도 태반이 9급 천사였고, 그나마도 전투를 경험해 본 이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일행 가운데 가장 급수가 낮은 에이젤조차 6급을 목전에 둔 7급이었다.
특히 루시엘의 성장세가 굉장했다.
언데드 한정이지만, 싸우는 모습만 보면 도저히 이제 막 5급이 된 천사로 보이지 않았다. 대언데드 전투력만은 여간한 4급 천사 이상이었다.
천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핏빛의 붉은 검 수십 자루로 폭격을 퍼부어 대는 루시엘을 보면 누구든 미트라의 말에 동의할 터였다.
그리고 약 20분 후.
전투가 모두 끝난 뒤.
“전쟁의 여신 이브나일 님을 모시는 5급 전투 천사 실리키엘입니다.”
“루실리아야. 지금은 배가 고파서 인사하기가 힘들어.”
민트색 머리를 가진, 평균보다 조금 작은 천사와 붉은 피부의 백금발 소녀가 각자 자신을 소개했다.
평소라면 바로 응답했을 일행이었지만,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루실리아의 외양 때문이었다.
붉은 피부와 머리에 난 두 개의 뿔, 여기에 끝이 삼각형인 가느다란 꼬리까지 있으니 전형적인 악마의 모습이었다.
“루실리아는 이계에서 온 영웅입니다. 착한 애? 아니, 무척 선량한 영웅입니다.”
이미 여러 번 겪은 일인지 실리키엘이 빠르게 설명했다.
루실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 착한 애야. 그리고 배고파. 실리키엘이 먹을 거 숨겨 놓고 혼자만 먹었어.”
“야! 아니라니까? 응?!”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순간 조성되었던 긴장이 해소되었다.
‘하긴, 여러 세상에서 부르면 별의별 외양을 가진 사람이 다 있겠구나.’
지구에서 즐겨 보았던 SF미드에서도 온갖 외계인들이 다 나왔으니까.
루실리아 정도면 양반일지도 몰랐다.
일단 예쁘기도 하고.
“음.”
새삼 납득한 천호는 실리키엘에게 말했다.
“아무튼 일단 이동하죠. 기둥을 통해 8층으로 올라가야 하니.”
“으음, 추태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맞아, 혼자만 먹는 건 너무 추해!”
“아, 진짜! 아니라고!”
“어, 음. 루실리아 님, 일단 이거라도 좀 드세요.”
“응?”
루시엘이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것은 천호가 만든 육포였다.
루실리아의 입에서 순식간에 침이 질질 흘렀고, 실리키엘도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고마워! 너무 착해!”
루실리아가 얼른 육포를 받아 들더니 거의 손바닥만 한 육포를 입안에 쑤셔 넣었다. 아니, 쑤셔 넣기 직전에 멈추었다.
“반으로 쪼개야지.”
하나는 내 꺼. 다른 하나는 실리키엘 꺼.
하지만 반으로 쪼개고 나니 다시 고민이 되는 루실리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등 뒤에는 마찬가지로 쫄쫄 굶은 삼백여 장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으으으.”
루실리아는 다시 육포를 쪼개기 시작했다. 한 번씩 쪼갤 때마다 육포 크기가 눈에 띄게 작아지자 커다란 눈망울에 금방 물기가 번졌다.
“흑흑.”
그래도 육포 쪼개기를 멈추지 않는 루실리아였다.
실리키엘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 음. 애가 겉모습보다 좀 많이 어립니다.”
“그래도 정말 착하네요.”
“그렇긴 하죠.”
실리키엘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천호 쪽 천사들도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흠, 기둥까지 거리가 가깝다고는 해도 10킬로미터 남짓이나 되니… 일단 여기서 식사를 하는 게 좋겠네요.”
겨울왕의 본대가 진군해 오는 상황인 만큼 1분 1초라도 빨리 8층으로 올라가는 것이 좋았지만 서두르기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8층으로 올라감에 따라 받게 될 등반 충격까지 고려하면 장병들의 배를 채워 기력을 회복시켜야 했다.
“혹시 모르니 주변 경계를 하고 있겠다.”
사스치엘이 전투 천사들과 각기 방향을 정해 날아갔다.
천호는 한차례 숨을 고른 뒤 루실리아 쪽을 돌아보았다. 울면서 육포를 쪼개던 루실리아는 루시엘이 새 육포 하나를 내밀자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울상을 지었다. 삼백 조각내면 작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귀엽네요. 살짝 미트라 닮은 것도 같고.”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천호는 그저 작게 웃은 뒤 미트라의 황금색 보석을 쓰다듬었다.
“아무튼 작업을 시작하죠.”
그리고 한 시간 뒤.
“행보케…….”
루실리아가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헤실헤실 미소를 흘렸다.
실리키엘도 마찬가지였고, 삼백여 장병들도 그러했다.
인원이 인원이다 보니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들기 어려웠던 터라 천호는 간편식을 선택했다.
스튜와 고기.
애당초 패잔병들을 수습할 생각을 하고 있던 천호였던 터라 솥과 그릇 등은 넉넉히 준비해 둔 상태였다.
요리 방법은 간단했다.
솥에 미트라 특제 뜨거운 성수를 채운다.
고기와 야채 등을 넉넉히 넣는다.
소금으로 간을 한다.
단순하기 짝이 없었지만, 어느덧 요리 레벨이 7에 도달한 천호였다.
더욱이 미트라의 성수가 더해진 터라 그 맛이 실로 일품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요리의 신이었다.
중층에 거하는 신이라 했으니, 어쩌면 천사 네트워크를 통해 일행의 이야기를 접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화려해?’
그냥 물이랑 고기랑 야채인데?
아니었다.
요리의 신 말마따나 정말 화려한 재료들이 투입된 스튜였다.
일단 고기는 중층에 거하는 강력한 마수인 화이트 버그베어들의 것이었고, 야채는 정말 평범했지만 스튜를 끓인 물이 특별했다.
미궁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성검들 가운데 정점에 군림하는 성검 미트라가 만들어 낸 성수였으니까.
더욱이 힐링 블레이드의 효과로 회복 능력까지 갖춘 성수였다.
미트라의 성수로 목욕도 하고 세수도 하고 목도 축이고 세탁도 하고 별의별 짓을 다하는 천호다 보니 간과하는 것일 뿐, 사실상 최고급 성수로 매일 같이 축복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음.”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치킨의 용사 너무 좋아… 헤헤헤.”
먹은 건 치킨이 아니었지만 사소한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루실리아였다.
그런 루실리아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실리키엘은 천호 쪽을 돌아보았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게 막 좋네.’
물론 힘들 때 도와준 데다가 밥도 줬으니 좋은 게 당연했지만, 그 이상으로 뭔가 호감이 생겼다. 그냥 막 보기만 해도 좋다고 할까?
‘잘생겨서 그런가?’
물론 잘생기긴 했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훨씬 더 단순한 이유였다.
벌써 레벨이 6이나 되었다.
효과가 단순한 만큼 효율도 좋았다.
천사 한정 페로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식사하시자마자 죄송하지만 이제 슬슬 이동하죠.”
황무지 한복판인 데다가 아직 멀기는 해도 겨울왕의 본대가 다가오는 마당이었다. 언제까지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알겠어! 배불러서 이제 힘이 나!”
펄쩍 뛰어오른 루실리아가 실리키엘을 벌떡 일으켜 세우더니 장병들 쪽으로도 달려갔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기둥 앞에 선 일행은 그간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마주하였다.
“높네요.”
“엄청 높아요.”
“몇 개나 될까.”
위로 올라가는 계단.
보통 한 층 내려갈 때 내려가는 데만 짧게는 30분, 길게는 한 시간가량을 소모해야 했던 일행이었다.
그렇다면 올라갈 때는 어떨까?
장병들의 얼굴에 어둠이 번졌고, 루실리아가 울먹울먹하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싫어.”
천호 일행과 달리 이미 몇 번이나 상층 등반을 해 본 그녀였으니까.
“음.”
까마득하게 높은 계단을 올려다본 천호는 마음을 다잡았다. 첫 번째 계단 위에 발을 올렸다.
* * *
8층에 올라선 순간 장병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중간중간 비행을 감행한 천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힘든 것도 힘든 것이었지만, 처음 겪는 등반 충격 때문이었다.
“우웩!”
일행 가운데 가장 체력이 약한 에이젤은 바닥에 엎드려 연신 구토를 해 댔다.
전투 천사들도 안색이 썩 좋지는 않았고, 라구엘은 빈혈기를 느끼듯 비틀거렸다.
의외로 루시엘은 계단 때문에 지치기는 했지만 등반 충격 자체는 대수롭지 않게 넘긴 느낌이었다.
[확실히 격에 따라 등반 충격을 다르게 느끼는 모양이군.]
실제로 루시엘과 일단 동급이라 할 수 있을 실리키엘 역시 등반 충격을 거의 느끼지 않은 모습이었다.
“흑흑. 나만 힘들? 우웩!”
에이젤이 우는 소리를 하다 말고 다시 구토를 해 댔다.
삼백 장병들 가운데서도 구토자가 속출하니 그 광경이 실로 참혹했다.
“하층에서 상층을 공략한다는 게… 확실히 보통 일이 아니네요.”
올라오는 길 자체가 힘든데 등반 충격까지 겪어야 했으니까.
[적이 언데드들만 아니었다면 좋았을 터인데.]
미트라의 말대로였다.
기본적으로 지치지 않는 언데드가 아닌- 고블린이나 오크, 랫맨 부류의 마물이었다면 상층 등반의 피로와 등반 효과를 회피할 방도가 없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