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90화 (90/211)

‘사정 봐주지 말고 전력을 다해라. 상대가 실력을 내기 전에 처리하는 게 최선이다.’

레온의 검법을 사용하는 제국의 기사.

호승심이 일었다. 천호 자신의 검술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상대 역시 비슷한 생각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는 것이 있었다.

승리.

모두를 지켜 내는 것.

“오라!”

죽음의 기사가 거친 기파를 발했다. 새카만 기운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천호는 그것을 보았다.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전력을 다하였다.

어머니의 피.

깨어나기 시작한 신성.

신성 포식으로 흡수한 힘.

아버지께 배운 호세사천왕.

모든 것이 일시에 발휘되었다. 신성의 폭발이 통로 안을 뒤흔들었고, 각지에서 싸우던 이들이 순간적으로나마 모두 천호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천호의 눈동자가 황금으로 빛났다. 미트라의 검신이 그 어떤 때보다 밝은 빛을 발했다.

죽음의 기사는 천호의 정면에 서 있었다. 하지만 천호가 지면을 박차는 순간을 놓쳤다. 자신에게 미트라의 검격이 쏟아지는 그때야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필사적으로 들어 올린 검으로 미트라를 막았다. 하지만 잠깐뿐이었다. 죽음의 기사는 자신이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죽음의 기사가 천호를 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태양.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의 마력.

죽음의 기사의 검이 부러졌다. 미트라가 놈의 머리뿐만 아니라 전신을 양분하였다.

일수.

반으로 갈라진 죽음의 기사가 검은 연기로 화해 흩어졌다.

감정이 없는 언데드들조차 얼어붙고 말았다.

침묵이 전장을 지배했고, 어느 순간 터져 나온 함성이 통로를 뒤흔들었다.

“용사님!”

루시엘이 외쳤다. 에이젤이 폴짝거렸고, 빛의 창이 연속해서 떠올랐다.

그리고 천호는 움직였다.

아우라엘과 창을 나누던 죽음의 기사에게 돌진했다.

* * *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히든 퀘스트 ‘선봉대 격파’를 완수했습니다.]

[미궁 세계가 당신의 놀라운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히든 퀘스트 ‘선봉대 격파’를 완수했습니다.]

[미궁 세계가 당신의 놀라운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천호는 미트라를 늘어트린 채 멈춰 섰다. 전투의 여파로 부서진 방벽 위에 서서 뜨거운 숨을 토했다.

빛의 창이 연속해서 떠올랐다.

천호의 실직적인 강함에 비해 레벨은 아직 낮았고, 쓰러트린 적은 강맹했다. 덕분에 중층에 내려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레벨은 벌써 60대 후반에 도달해 있었다.

보상이 주어졌다.

천사들의 조력자 타이틀의 레벨이 올랐고, 구제국의 희망이라는 타이틀이 새로 생겼다.

이번 전투를 위한 작업 중 가장 간절히 바란 것이 마나 포션이라 그런지 히든 퀘스트 보상으로는 마나 포션 세트가 주어졌다.

천호는 눈을 감았다.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는 대신 그저 받아들였다.

두 번째 죽음의 기사를 쓰러트리던 순간.

놈의 창을 스치듯 피하며 돌진한 뒤 가슴을 베었다.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놈에게 연격을 퍼부어 넘어트린 뒤 가슴에 미트라를 꽂았다. 라이프 드레인으로 죽음의 기사의 정기를 흡수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엘리엘을 타고 날아올랐다. 공중에서 사스치엘 일행과 공방전을 펼치던 마지막 죽음의 기사를 향해 새매처럼 돌진했다.

죽음의 기사 셋을 연속해서 쓰러트렸다. 지상에 돌아온 뒤에는 대장을 잃어 우왕좌왕하는 언데드 군단을 차근차근 박살 냈다.

2만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실리피안 요새의 정병들과 함께했지만 그래도 숫자가 워낙 많아 자연 전투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아.”

숨을 토했다. 그리고 새삼 실감했다.

강해졌다.

루시엘이 늘 말하던 ‘격의 상승’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어찌 보면 급격한 변화였다. 저층에서 중층으로 넘어올 때 받은 각종 보상과 치유의 신이 나눠준 신력, 포식한 베르가프의 신성과 각성하기 시작한 어머니의 피 덕분에 몇 개나 되는 계단을 단숨에 뛰어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온전히 다룰 수 있었다.

4층에서 사용했던 것처럼 치유의 신에게 빌려 온 힘 같은 것이 아니었다.

천호 자신의 힘이었다.

“미트라.”

[그대는 더 강해질 것이다.]

천호의 부름에 미트라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미트라는 천호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잘 알았다.

천호는 용사이기 이전에 전사였으니까.

더 강해지고 싶다.

지금보다 나아지고 싶다.

자연스러운 욕구였다. 더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은 전사의 본능과도 같았다.

천호는 미트라의 황금색 보석을 쓰다듬었다.

새삼 눈을 떠 다시 한 번 주변을 보았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 진 하늘 아래 기둥과 방벽이 있었고, 언데드 군단이 바닥 가득 나자빠져 있었다. 하얀 눈과 함께 말이다.

“뭔가 초현실적이군요.”

[그래도 승리한 전장이라 그런지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실제로 방벽과 전장 곳곳에서 승리의 함성을 올리는 병사들을 보니 천호도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만들길 잘했죠?”

[고생은 했다만, 만들길 잘한 것 같다.]

햇수로 나흘. 실질적으로는 사흘.

방벽을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병사들과 함께 뼈대를 세운 뒤 눈을 덮고 물을 뿌리고 얼린 뒤에 다시 눈을 뿌리고?

방벽의 규모가 규모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마력 소모도 엄청났고.’

어머니가 보내 주신 캐리어 안에 있던 마나 포션을 깨끗이 비우고 말았다.

미트라의 자체 마력만으로는 부족해서 천호 자신의 마력까지 쭉쭉 퍼 줘야 했으니까.

하지만 보람이 있었다.

방벽 덕분에 2만에 달하는 대군과 정면충돌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 없이 승리할 수 있었으니까.

[5천쯤 도망친 것 같지만 문제없다. 우리의 대승이다.]

[나는 그대가 자랑스럽다.]

“저도 미트라가 자랑스러워요.”

[그럼 상을 주지 않겠나?]

“뭐요, 팔베개요?”

[고민해 보겠다.]

“그럼 저도 고민해 볼게요.”

[뭘 말인가?]

“미트라한테 받을 상이요. 미트라도 제가 자랑스럽다면서요.”

[흠, 알겠다. 함께 고민해 보자꾸나.]

미트라에게 받을 수 있는 상이 뭐가 있을까.

잠깐 생각해 본 천호는 이내 피식 웃었다.

[왜 웃는가?]

“그냥요.”

미트라가 무슨 상을 요구할지도 궁금하고.

성검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천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루시엘을 필두로 한 천사들이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천호 자신도 자신이었지만, 루시엘 역시 몰라볼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1층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재능이 있긴 해도 그냥 평범한 9급 천사였었는데.

지금은 무려 치유의 신의 사도인 5급 천사였다.

[에이젤이 그러더군. 대박을 뽑은 덕분이라고.]

“제 입장에서도 대박이죠.”

루시엘에 이어 미트라까지. 연타석 대박이라 해도 좋았다.

그런데 문득 말하고 보니 에이젤이 무얼 하고 있나 궁금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살피니 병사들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은발의 소녀 천사가 보였다.

“그러니까 대강 이런 거예요.”

“오… 확실히 그림으로 보니 이해하기가 한결 쉽군.”

삼삼오오 모여든 장병들이 에이젤이 마력으로 그린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장병들 가운데 반수가량이 대미궁에서 태어났을 정도로 제법 긴 시간이 지났지만, 워낙 변방에만 있다 보니 대미궁의 상황 자체에는 무지한 이들이 많았다.

애당초 본격적인 대미궁 공략이 개시된 지는 아직 10년도 되지 않았고 말이다.

“그러니까? 최하층에 최대한 빨리 도달하기 위해 중앙 돌파를 택하셨다 이거구만?”

“네, 대미궁이 워낙 넓다 보니 한 층, 한 층 완전 공략하며 내려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거든요. 처음에는 대미궁이 몇 층까지 있는지도 몰랐고요.”

현재 예상으로는 30층 남짓이었지만, 처음에는 그 정도로 깊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아래층으로 통하는 기둥들이 중앙에 모여 있기도 했고요.”

사실 에이젤도 대미궁 중앙에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으니, 지부에서 배웠던 내용들을 그대로 읊는 것뿐이었다.

“중앙은 한마디로 보급선이란 거군. 그래서 천사님들이나 영웅 분들이 다 같이 심층에 가는 대신 중층에도 남아 계신 거고.”

“네, 식량이나 각종 물자뿐만 아니라 지원 병력도 중앙을 통해 공급되고 있어요.”

외부 세계에서 소환된 영웅들은 저마다 강약이 달랐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바로 심층에 투입하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 영웅들을 저층과 중층에서 충분히 레벨 업 시킨 뒤 심층 공략대에 보내는 것이 기본적인 골자였다.

“과연, 이런 구조였구나.”

“중층에 남아 계신 분들이 보급선도 지키시는 셈이군.”

“네, 다들 이해력이 좋으시네요.”

에이젤이 예쁘게 웃으며 말하자 장병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그야 워낙 설명을 잘해 주니까.”

“으음, 착해, 예뻐.”

에이젤은 말 그대로 천사였으니까. 남자들밖에 없는 군대에 천사 소녀가 강림했으니 인기가 좋은 것은 당연했다.

“에헤헤.”

에이젤이 더 칭찬해 달라는 듯 배시시 웃을 때였다.

“과연, 역병신이 저층에서 그 난리를 친 것도 선신들의 보급선을 끊기 위해서였군요.”

거리가 상당했지만 이미 초인의 경지에 오른 천호인 터라 에이젤의 그림은 물론이고 목소리까지 충분이 인지할 수 있었다.

[이미 알고 있던 바이긴 하지만… 그림으로 보니 새삼 문제가 있어 보이긴 하는군.]

“보급선이 너무 길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전략적으로 썩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더욱이 천사들의 말에 따르면 심층 23층에서 발이 묶인 지 벌써 반년 이상이 지난 모양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한 층, 한 층 내려갈수록 전진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치유의 신이 왜 그대에게 기대를 거는지도 알 것 같군.]

심층 공략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정체된 상황을 단번에 진행시킬 슈퍼 루키.

천호는 쓰게 웃은 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우라엘이 이쪽을 향해 다급히 날아왔기 때문이다.

“용사님!”

그렇지 않아도 하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천호가 퍼뜩 놀라 되물었다.

“설마 라구엘이 타락을?!”

“아, 아뇨! 라구엘은 아직은 멀쩡해요.”

[아직은?!]

미트라가 홀로 불안해하는 와중에 천호 앞까지 당도한 아우라엘은 치유의 신의 깃발이 세워진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천사 네트워크로 승전 보고를 하던 중에 도착한 정보입니다!”

거기까지면 충분했다. 아우라엘의 얼굴과 목소리만 보아도 다음 내용을 알 수 있었다.

9층에서 겨울왕을 쓰러트릴 예정이었던 요격대.

아우라엘의 입에서 예정된 답이 흘러나왔다.

* * *

요격대는 패배했다.

그것도 그냥 패배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대패였다.

“완전히 농락당했군.”

심층 23층.

최전선에 자리한 치유의 신이 신음을 삼켰다.

요격대의 총 병력 수는 4만에 달했다.

겨울왕의 부대인 3만에 비해 1만이나 많았다.

물론 회전에서 1만 차이는 절대적인 우위를 보장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숫자였다. 지휘관의 전술 역량에 따라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는 숫자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치유의 신은 요격대의 승리를 기대했다. 중앙을 지키기 위해 남은 영웅들과 천사들 가운데서도 강맹한 이들이 요격대를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총 지휘를 맡은 것은 전쟁의 여신 이브나일의 하위 신인 파발의 신이었다.

하지만 패배했다.

패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 겨울왕이 병력을 숨기고 있었다.

애당초 8층에 병력을 나눠 보낸 것 자체가 기만책이었다는 듯, 요격대와의 회전이 시작되자 자그마치 2만이나 되는 추가 병력이 전장에 나타났다.

멀리서부터 진군해 온 것이 아니었다. 땅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병력들이었다.

이미 죽은 자들로 이루어진 언데드 군단이기에 가능한 일.

너무나 당연하게도 추가 병력은 요격대의 배후에서 나타났고, 요격대는 앞뒤로 포위당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두 번째 패인은 더욱 뼈아팠다.

겨울왕이 강했다.

파발의 신은 겨울왕에게 죽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천사들과 영웅들이 겨울왕의 검 앞에 쓰러졌다.

치유의 신이 알고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가까스로 전장을 빠져나온 패잔병들이 천사 네트워크에 전한 소식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찌 될 것인가.

겨울왕은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가.

그리고 그런 겨울왕을 어찌 막아 낼 것인가.

치유의 신이 다시 눈을 떴다. 작은 알람 소리에 빛의 창을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패전보에 이은, 예상 밖의 승전보가 치유의 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겨울왕은 세 기사들의 패배를 직감했다.

일곱 기사들은 겨울왕 자신의 충복을 넘어 손과 발 같은 존재들이었으니까.

세 기사들 모두가 사라졌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패전뿐이었다.

과연 미트라. 과연 성검의 주인.

그 누구도 뽑지 못했던, 도도하기 짝이 없는 성검을 부리는 자.

겨울왕이 투구 속에서 공허한 웃음을 흘렸다.

파발의 신의 신성을 포식한 소울 이터가 합을 맞추듯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어서 빨리 성검이 먹고 싶다며 겨울왕을 보채었다.

겨울왕은 그런 소울 이터를 달래듯, 검은 마검을 쇠사슬에 묶인 천사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날개 네 장이 달린 이름 모를 5급 천사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고, 소울 이터는 그 비명조차 기껍다는 듯 게걸스레 천사의 영육을 탐하였다.

겨울왕의 곁에 네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지금은 비록 영락했다고는 하나 위대한 전쟁 군주였던, 아니, 지금도 위대하고 강대한 존재인 겨울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치유의 신은 이제 어찌할 것인가.

심층 최전선에서 연일 격전을 벌이고 있는 그녀가 직접 중층에 올라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중앙을 지키든, 겨울왕 자신을 요격하든 그녀는 다시 한 번 중층의 전력을 모아야 했다.

그리고 그 일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겨울왕은 중앙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을 향해 나아가지 않았다. 중앙을 공격할 마음 따위 조금도 품지 않았다.

미트라.

제국을 지키는 검.

허나 제국을 지키지 아니한 검.

겨울왕의 귓가에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겨울왕은 늘 그러했던 것처럼 목소리를 무시했다.

말라비틀어진 천사로부터 소울이터를 뽑아 든 뒤 명령했다.

겨울왕의 바람.

네 기사들이 복종하였다.

겨울왕의 군대가 진군을 개시했다.

8층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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