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이야기도 대강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그만 미트라의 바람대로 팔베개나 하죠.”
[바란 적 없다.]
“그래요, 그렇다고 치죠 뭐.”
[흥.]
흥흥거린 미트라였지만 천호의 품을 빠져나가지는 않았다.
그대로 꼼지락거리더니 이내 최적의 자세를 취한 뒤 천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내일도 많이 바쁠 거다. 베르가프의 연구실에도 가야 하고.]
“그러게요. 동부 정찰도 해야 하고.”
[그래, 그러니 이만 자도록 하자. 잘 자라, 그대여.]
“잘 자요, 미트라.”
미트라는 눈을 감았고, 천호 역시 그러했다.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고지식한 Lv3]
[성실한 Lv7]
[충직한 Lv8]
[용사의 검 Lv 10]
[용사의 눈 Lv1]
[지구력 강화 Lv1]
[근력 강화 Lv1]
[회복 마법 Lv1]
[연쇄 우레 확장 : 연쇄 우레의 최대 포착 가능 적수를 두 배로 늘린다.]
제9장?제국의 검
남자와 여자는 각기 다른 곳에 있었다.
파이엔.
남자에게 있어서는 검과 마법의 세계. 제2의 고향이라 해도 좋을 곳.
남자는 파이엔에서 10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
해맑은 열일곱 살 청소년이 닳고 닳은 서른 살 아저? 아니, 청년이 될 때까지.
결코 짧지 않은 그 시간 내내 여행을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많은 곳에 방문하였고, 많은 이들을 만났다. 쌓아 올린 인연은 산과 같았다.
남자는 성왕국이라 불리는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남자 본인에 의해 대륙 최강대국으로 우뚝 서게 된 나라였다.
성왕국의 성왕은 남자를 형님으로 모셨고, 성왕의 의형인 남자에게는 대공이란 신분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잘 있으려나.’
성왕국의 입구라 할 수 있을 블루 게이트를 바라보던 남자는 문득 한 여자를 떠올렸다.
파이엔에 막 왔을 당시.
아무것도 모르던 자신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여자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존재하지 않았을 터였다.
불로장생하는 엘프였으니 겉모습은 그대로일 터였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변하지 않았을까.
‘잘 지내면 좋겠는데.’
남자 자신의 첫사랑이자 첫 스승이자 첫 동료였던 요정 아가씨.
그녀와 처음 만났던 블루 게이트를 지나며 남자는 잠시나마 추억에 빠져들었다.
* * *
남자가 옛 추억을 더듬으며 왕도로 나아갈 때 여자는 자신이 나고 자란 장소? 남자가 곧잘 친정이라 말하는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지평선과 함께하는 탑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대륙에서 가장 높은 탑.
가장 위대한 마탑.
세워진 이래 그 누구도 정복하지 못했던 저 탑을 남자는 정복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흠흠.”
옅게나마 얼굴을 붉힌 여자는 잠시 멈춰 서서 헛기침을 했다. 마탑의 주민들에게 지금 같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들에게 있어 여자 자신은 신과 같은 존재였으니까.
여자는 감추어 두었던 뿔을 다시 꺼냈다. 갈무리하고 있던 힘을 개방해 스스로의 존재를 오롯이 하였다.
태양과도 같은 황금빛 아우라가 여자로부터 방출되었고, 강렬한 힘에 주변 일대 전체가 일변하였다.
가볍게 숨을 고른 여자는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런 여자를 환영하듯, 저 먼 곳에서부터 수많은 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탑의 저층에 거주하는 나약한 마물들부터 시작하여 상층에 거주하는 강대한 존재들까지.
모두가 여자의 가신들이었다.
* * *
천호는 눈을 떴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용사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바로 곁에서 들려온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루시엘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천호 자신의 곁에 누운 그녀가 생긋 미소 짓자 세상이 다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어…….”
천호는 일단 눈부터 한 번 깜박였다. 생각해 보니 어제 목욕탕에서 눈을 감지 않았던가.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목욕탕에서 주무셔서 침대로 옮겨 드렸어요.”
“그렇? 네?”
목욕탕에 있는 걸 침대로 옮겼다고?
“어, 그, 루…시엘이요?”
“아뇨, 오레놀 씨랑 락 드워프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루시엘이 다시 해맑게 웃었다.
“음.”
뭐라고 해야 할까.
이 묘하게 아쉬우면서도 다행이란 기분은.
“요새는 푹 주무셔서 다행이에요.”
루시엘이 천호를 덮고 있던 날개를 펼치며 말했다.
5급 천사가 되며 힘이 강해진 것도 있지만, 그와 별개로 성스러운 아우라가 팍팍 느껴졌다.
‘역시 천사.’
어쩜 이렇게 착하고 예쁘고 순수할 수가 있을까.
[흠흠. 잘 잤는가, 그대여.]
바로 그때 미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착하고 예쁜 것까지는 똑같지만, 순수하지는 못 한 성검이었다.
[아니, 뭐가 말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죠.”
아주 작게 답한 천호는 침대에서 완전히 일어섰다.
루시엘 말대로 푹 잔 덕분인지 개운한 기분이었다.
“늘 고마워요, 루시엘.”
“전 용사님의 천사인걸요. 뭐든 말씀하세요.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게요.”
앙증맞은 주먹까지 꽉 쥐며 말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그대여, 나도 그대의 성검이다.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말해라. 최선을 다해 도와줄 터이니.]
미트라가 급히 말했다.
하지만 표절이라 그런지 루시엘만큼 사랑스럽지는 않았다. 귀엽기는 했지만.
“그럼 일단 앞으로 목욕할 때는 보석을 가리도록 하죠.”
[뭐, 뭐 때문에 말인가.]
“이번에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죠.”
[칫, 치사하기는.]
“이제 대놓고 엉큼하군요.”
[아, 아니다. 나는 엉큼하지 않다. 보석을 가리고 싶으면 얼마든지 가려라.]
미트라가 허둥거리며 말했다.
역시 빛의 창은 옳았다.
엉큼하고 귀여우면서 호구인 성검이었다.
“어… 용사님?”
“아, 그냥 미트라가 말을 걸어서요. 잠시 이야기하느라.”
“아, 네.”
그런데 왜 엉큼한 운운한 것일까.
루시엘은 고개를 갸웃갸웃했지만 딱히 더 묻지는 않았다.
“아무튼 슬슬 일어나죠. 오늘은 아침부터 꽤 바쁠 것 같으니.”
“네, 용사님.”
언제나처럼 예쁘게 답한 루시엘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 * *
뜨거운 성수로 세면을 마친 천호는 일단 식당으로 향했다.
커다란 요새답게 식당도 여럿인 실리피안 요새였는데, 식당 안에는 일행과 루카스가 모여 있었다.
“용사님, 좋은 아침이에요!”
“네, 에이젤. 안녕히 주무셨어요?”
“네, 용사님! 용사님은요?”
“저도요.”
천호가 웃으며 답하자 옆에 서 있던 루시엘이 추가로 덧붙였다.
“오늘도 푹 주무셨어.”
평소 천호가 잘 못 자는 것 때문에 걱정이 많던 루시엘인 터라 천호의 숙면에 무척 기뻐하는 눈치였지만 에이젤은 달랐다.
“그, 어제도 그냥 푹? 아무 일도 없이 푹?”
“응응, 미동도 없이 푹 주무셨어.”
루시엘이 해맑게 웃자 에이젤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더니 천호를 올려다보며 작게 말했다.
“정말 대단하세요.”
여러 가지 의미로.
존경심이 생길 정도로.
“음.”
천호는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했고, 어쩐 일인지 미트라는 작게 웃었다.
“아무튼 식사를 하도록 하지.”
상석에 앉아 있던 루카스가 말하자 천사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침부터 진수성찬이군.]
어젯밤 내내 잔치를 벌인 덕인지 식단이 꽤나 화려했다.
루카스는 구운 뒤 잘게 찢은 닭고기를 먹으며 말했다.
“오늘 오후쯤에 부르크 백작과 올란도 백작의 지원군이 도착할 예정이네. 당장 베르가프의 언데드 군단은 물리쳤지만… 겨울왕이 8층으로 침공해 올 가능성이 있으니 일단은 실리피안 요새에 붙잡아 둘 생각일세.”
베르가프를 물리친 이야기는 이미 진군 중인 지원군들에게 도착한 상황이었지만, 양측 모두 군대를 돌리지 않았다.
실리피안 요새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겨울왕이 정말 8층까지 진군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알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 후에 부대원들과 함께 동부 정찰에 나서기로 했다. 엘리엘은 그대를 돕기 위해 남기로 하였고.”
커다란 사슴 통구이를 먹으며 사스치엘이 말했다.
빠른 기동성을 살려 가능하면 기둥 근처까지 정찰을 하고 올 요량이었다.
“치유의 신님께서도 지원군을 보다 강화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층의 영웅분들과 천사들이 실리피안 요새로 모여들 겁니다.”
라구엘이 언제나처럼 차분하게 말했다.
천호는 새삼 그녀를 살피며 물었다.
“마도서 쪽은 좀 어떤가요.”
“아직 제대로 살펴보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다룰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짓는 미소가 살짝 힘겨웠다.
역시 천사의 몸으로 사령술을 쓴다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무리한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아뇨, 용사님의 노고에 비하면 정말 별거 아닌 걸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너무 심려치 마세요.”
라구엘이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루시엘도 그렇지만, 라구엘 역시 참으로 천사다운 천사였다.
[그대는 다른 세계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계를 위해 싸워 주고 있으니까. 나 역시 그대에게 감사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다른 세계에서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자신들을 위해 싸워 달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보통 소설이나 만화 속에 나오는 소환자들은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다는 듯이 뻔뻔하게들 굴었지만 미궁 세계의 천사들은 달랐다.
생각해 보면 치유의 신도 그랬다.
미궁 세계의 신들 가운데서도 손에 꼽는 대신인 그녀였지만 천호에게 단 한 번도 명령하지 않았다.
직접 만났을 때도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먼저 하였고, 태초의 대장간과 신기 탐색을 이야기할 때 역시 명령하지 않고 부탁하였다.
‘개념 차구나.’
이러니 도와줄 마음이 들 수밖에.
“그런데 미트라, 오늘따라 표절이 많군요.”
[음.]
작게 웃은 천호는 미트라의 황금색 보석을 쓰다듬은 뒤 루카스에게 말했다.
“그럼 전 식사 후에 베르가프의 연구실을 찾으러 가 보겠습니다.”
“베르가프의 연구실은 꽤나 북쪽에 있소. 근방이 황폐화된 터라 찾기가 쉽지는 않을 거요.”
[괜찮다. 베르가프가 오랜 시간 다룬 마법검을 내가 흡수하였으니. 근처에만 가면 베르가프의 마법적 자취를 추적할 수 있을 거다.]
미트라의 말을 그대로 전하니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략적인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 주겠네.”
지도상으로 보면 근처에 제법 큰 마을이 몇 개 있었다.
보통 마법사들의 연구실은 인적이 드문 곳에 있기 마련이었지만, 사람과 술을 좋아한 베르가프인 터라 마을 근처에 연구실을 세웠다는 게 루카스의 설명이었다.
“연구실까지는 저도 동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법사의 연구실을 조사하러 가는 것이니 일행의 마법사라 할 수 있을 라구엘이 합류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 전 호위를 위해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전 그냥 따라갈게요!”
아우라엘에 이어 에이젤이 해맑게 말했다.
천호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연구실에는 저, 미트라, 루시엘, 엘리엘, 라구엘, 아우라엘, 에이젤 이렇게 일곱이서 가도록 하죠.”
사스치엘을 필두로 한 전투 천사들은 동부 정찰을 나서기로 했으니, 집 지키기는 락 드워프들의 몫이었다.
“음, 알겠네. 지원군을 이끌고 온 자들도 소개할 겸 저녁에는 만찬을 준비할 터이니 늦지 않게들 돌아오시게.”
“그리하겠습니다.”
이야기가 대강 정리되었으니 남은 일은 식사뿐이었다.
배를 든든히 채운 일행은 실리피안 요새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