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84화 (84/211)

“겨울왕도 똑같이 생각할까요?”

“적어도 미트라에 대해서는 비슷한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소. 더욱이 겨울왕은 검사이기도 하니까. 아마 미트라를 타락시켜 마검으로 만든 뒤 사용하고 싶어 할 거요.”

[으으음.]

정신세계 속의 미트라가 몸을 움츠리는 것 같은 침음이었다.

천호는 새삼 미트라를 손에 꽉 쥐며 말했다.

“제가 꼭 지켜 드릴게요.”

[고, 고맙다.]

어쩐지 모르게 미트라가 허둥거릴 때였다. 루카스가 베르가프에게 물었다.

“그 겨울왕이란 놈이 8층에도 올라오는 건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

거기까지 말한 베르가프는 돌연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남지 않았다.

“겨울왕을 조심하시오. 내 연구실에 가면 이것저것 쌓아 둔 것들이 많으니 죄다 챙기시고, 눈보라를 부르는 마검은 미트라에게 좋은 양식이 될 거요, 마도서는 분명 쓸모가 많을 터이니 쉬이 처분하지 마시고, 내가 양성한 언데드 군단도 분명 쓸 곳이 있을 거요. 루카스, 만나서 반가웠다. 늙은 네놈을 보았으니 이제 여한이 없다. 미트라, 이야기를 직접 나눌 수 없어 아쉽구나. 네 어여쁜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터인데. 잘 지내렴. 새로운 용사님의 앞날에 무운이 함께하기를.”

빠르게 할 말을 마친 베르가프는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렸다. 그대로 승천하듯 천천히 떠올랐다.

“치유의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천호가 말했고, 베르가프가 미소 지었다.

치유의 신의 신력을 지닌 천호 덕분인지 승천하는 베르가프의 영혼이 붉은빛에 휩싸였다.

[베르가프…….]

베르가프의 영혼이 흩어졌다. 붉은빛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

“썩을 녀석. 끝까지 말만 많구나.”

눈시울을 붉힌 루카스가 애달픈 미소를 흘렸다. 이런 식으로 이별하게 되어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수백 년 만에 다시 친우를 만나기도 하였고, 어둠에 휩싸여 있던 친우의 영혼이 해방 또한 되었으니까.

“용사님, 감사합니다. 용사님이 이 실리피안 요새와 베르가프 모두를 구하셨습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용사의 18번 대사를 하니 루카스가 더욱 기뻐했다.

“레온을 다시 만난 기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용사님.”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준 천호는 몸을 조금 늘어트렸다. 병사들의 헹가래를 받으며 기뻐하는 루시엘과 에이젤, 천사들이 보였다.

[천사들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

미트라의 말에 천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쪽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장병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고 있었다.

“가시죠, 용사님. 일단은 승리를 만끽하는 겁니다.”

루카스가 웃으며 천호의 등을 두드렸고, 때를 맞추듯 장병들이 모여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천호를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높이 집어 던졌다.

“용사님!”

멀리서 루시엘이 소리쳤다. 높이 치솟았던 그녀는 돌연 날개를 펼치더니 천호에게 날아갔고, 덕분에 그녀를 헹가래 치던 장병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잠깐 뿐이었다. 이내 환호성을 질러 댔다.

루시엘이 허공에서 천호를 와락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하아, 정말이지.]

미트라는 한숨과 함께 미소 지었고, 천호는 잠시나마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던 모든 것들을 잊어버렸다.

루시엘과 함께 승리를 만끽했다.

* * *

천호의 승리 소식은 천사 네트워크를 통해 빠르게 전파되었다.

슈퍼루키 박천호 악신을 잡다.

중층에 들어서자마자 맹활약하는 다크호스.

박천호의 용사 랭킹 수직 상승.

치유의 신의 총애를 받는 용사 탄생.

천사들 수준에서는 나름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이 천사 네트워크의 일면을 채웠고, 천사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모든 이들은, 천사들과 영웅들과 선신들은 저마다 정도는 다를지언정 천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사람.

어쩌면 미궁 세계의 모든 영웅들 중에서 천호에게 가장 관심이 많을지 모를 한 사람이 대미궁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파이엔 출신의 영웅 크리스 폰 크리사오르.

그녀의 역주행에는 태초의 대장간 수색이라는 대의명분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명분들이 그러하듯이 그저 명분에 불과했다.

‘근데 만나서 뭘 어쩌지?’

그 사람의 아들이 맞으면 그 다음엔?

“아, 몰라. 아무튼 만나고 보지 뭐. 만나서 뭐 할지는 그때 생각해, 그때.”

크리스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깊이 생각하다가 짝사랑하던 그 사람을 눈앞에서 놓친 바가 이미 있었으니까.

만나 보고 싶으니까 만난다. 일단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13층에서 12층으로.

크리스 폰 크리사오르는 대미궁을 거슬러 올랐다.

* * *

[히든 퀘스트 ‘요새 수비’를 완수했습니다.]

[히든 퀘스트 ‘악신 격퇴’를 완수했습니다.]

[미궁 세계가 당신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천사 네트워크에 당신의 이야기가 기록됩니다.]

[히든 퀘스트 보상 : 새로운 용사의 전설 - 구 제국민들 사이에 새로운 용사의 전설이 퍼집니다. 당신의 명성이 드높아집니다.]

[히든 퀘스트 보상 : 천사 네트워크의 계정 레벨이 2올랐습니다. 이제 천사 네트워크에서 더 많은 것들을 하실 수 있습니다.]

[히든 퀘스트 보상 : 천사 네트워크를 통해 현상금이 지급되었습니다.]

[히든 퀘스트 보상 : ‘악신 격퇴자 Lv1’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악신 격퇴자 : 천사들이 당신에게 호감을 보입니다. 악신과의 전투에서 당신의 힘이 조금 강해집니다. 악신과의 전투에서 당신의 저항력이 조금 강해집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겨울왕이 움직이고 있다.

치유의 신은 옥좌에 앉아 턱을 괴었다.

겨울왕.

10층 동부에 자리한 악신.

그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자신의 영역에 웅크리고 앉아 움직이지 않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움직이고 있다. 병력을 움직이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일까.

역병신의 사주?

그저 우연?

‘나쁘진 않아.’

겨울왕이 10층을 떠났다.

이유를 불문한다면 좋은 소식이었다.

10층 동부의 강자인 겨울왕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곧 10층 동부가 침투하기 쉬운 땅으로 변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치유의 신은 눈동자를 굴렸다. 빛의 창에 떠오른 라구엘의 보고서를 새삼 다시 읽었다.

한 줄로 요약하면 지원을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거절하지 않는다.

지원을 보내 준다.

천호 일행에게 힘을 실어 준다.

하지만 전력을 쏟아붓지는 않는다.

지원할 무리들 가운데 일부를, 정말 강한 이들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겨울왕이 떠난 10층에 침투시킨다.

간단한 논리였다.

태초의 대장간을 발견하는 것이 반드시 천호일 필요는 없었다.

치유의 신 입장에서는 누가 되었든 태초의 대장간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래서 윗대가리 노릇은 싫다니까.”

옛날에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냥 순수하게, 언제나 전력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었는데.

치유의 신은 눈을 감았다. 머리를 긁적였고, 한 번 쓸어 넘긴 뒤 옥좌에 몸을 묻었다.

괴로운 일이었다.

미궁 세계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워 주고 있는 이계의 영웅들을 숫자로 바라봐야만 하는 일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자신이 혐오스러웠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어머니.’

태양의 여신 아이테르.

대미궁의 침식을 막기 위해 마신과 대립 중인 다섯 여신들.

치유의 신은 빛의 창을 거두었다. 생각한 바를 실행하기 위해 심층의 천사들을 소집했다.

* * *

같은 시각.

크리스가 열심히 1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고 치유의 신이 심층의 천사들과 대면하고 있을 때.

실리피안 요새에서는 성스러운 의식이 한창이었다.

“정화의 빛이여!”

“승천하라!”

“빛이 함께할지니!”

루시엘을 필두로 한 천사들이 치유의 신의 깃발 아래 모여 끝없이 기도하고 영창했다.

베르가프가 이끌고 온 언데드 군단을 승천시키기 위함이었다.

사령을 부리는 마도서로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여전히 성벽 밖에는 수만에 달하는 언데드들이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지간히 신경 줄이 굵은 사람이라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겨울왕은 언데드 군주였다. 그가 9층에 머물지 않고 8층에 올라온다면, 그리하여 실리피안 요새까지 쳐들어온다면 베르가프의 언데드 군단이 그대로 겨울왕의 통제하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 전에 제거한다.

대미궁의 마기에 속박되어 마물이 되고 만 제국의 백성들을 해방시킨다.

‘쭉쭉 오르네, 아주 쭉쭉.’

하나하나만 놓고 보자면 대단할 것이 없었지만 그 수가 수만이나 되었다. 더욱이 듀라한 같은 고급 병종도 끼어 있다 보니 경험치 벌이가 쏠쏠한 수준을 넘어 그냥 대단했다.

천호는 요새의 병력들을 동원해 무방비 상태인 언데드 군단을 쓸어버리는 대신 지금과 같은 방식을 주장했다.

“한때는 제국의 백성들이었습니다. 제대로 해방시켜 주고 싶습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칼로 무참히 학살하는 것보다는 치유의 신의 힘을 통해 영혼을 정화하는 쪽이 보기도 좋고 결과도 좋았으니까.

하지만 천호가 가장 바란 것은 경험치가 쭉쭉 들어오는 작금의 상황이었다.

천호는 푸근한 눈으로 천사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땀을 뻘뻘 흘려 가며 열심히 의식을 펼치고 있었다. 한둘도 아니고 수만 명이나 되는 언데드들을 정화해야 하는 판국이니 다들 젖 먹던 힘까지 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특히 천사들 가운데서도 체력이 약한 에이젤은 숨까지 헐떡이고 있었다.

하지만 성과가 분명했다.

천호 자신과 파티인 덕에 레벨이 꽤 높은 편인 루시엘조차도 레벨이 쑥쑥 오르고 있었다.

천사들 가운데 가장 레벨이 낮은 에이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으음, 뭔가 적응이 안 되는군.]

이런 식으로 강해진다니. 사기라도 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법이죠.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미트라는 먹기만 해도 강해지잖아요. 말하고 보니 이거 완전 사기네.”

[으으음.]

뭔가 먹보로 매도당하는 기분이었지만, 맞는 말이라 항변하기도 어려웠다.

천호는 미트라의 황금빛 보석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무튼 제국의 백성들도 해방되고, 실리피안 요새 사람들의 걱정도 사라지고, 천사들의 레벨도 높아지고, 일석삼조네요.”

[음.]

확실히 나쁜 건 하나도 없었다. 전부 좋은 일일뿐.

[그런데 그대여, 베르가프의 마도서는 어떻게 할 셈인가?]

이제까지 여행하면서 얻은 마도구들은 종류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되었다.

마법검은 미트라가 먹는다.

마법검이 아닌 마도구 중에 중요한 것은 루시엘이 보관한다.

별로 안 중요한 것들이나 쓸 수 없는 것들은 잔불이가 먹는다.

마도서는 천호가 쓸 수 없는 물건에 해당했다.

상당한 마법적 지식을 요하는 데다, 결국엔 죽은 자를 부리는 사악한 물건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잔불이에게 먹이기에는 또 아까웠다.

“그렇지 않아도 그걸로 고민했었는데… 라구엘 주려고요.”

[음? 라구엘 말인가?]

“네, 우리 중에서는 제일 마법에 능하니까요. 겨울왕은 언데드 군단을 부린다고 하니 우리 쪽에도 사령술사가 하나 있으면 이래저래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으음, 그렇긴 하다만.]

천사가 사령술사라니.

그래도 되는 것인지 소박한 의문이 드는 미트라였다.

“괜찮아요, 미트라. 라구엘은 금발 미녀니까 검은 옷도 잘 어울릴 거예요.”

[아니, 옷이 어울리느냐 마느냐 문제가 아닌 것 같다만.]

하지만 천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언데드 군단과 전투가 벌어진다면 이쪽에도 사령술사가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냥 처분하기에는 베르가프의 마도서가 아까운 물건이기도 하였고.

[으음, 뭐… 그대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그럴 거예요.”

아직 라구엘의 의견은 묻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납득하는 미트라와 천호였다.

“아무튼 계속하죠.”

[그래.]

천호는 미트라를 높이 든 뒤 치유의 신의 신력을 발했다.

* * *

“허어… 헉… 죽겠…어요…….”

철야 끝에 언데드 군단 전부를 승천시킨 천사 일행은 요새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에이젤을 필두로 하여 줄줄이 쓰러져 나갔다.

게임과 달리 레벨 업을 해도 체력이나 마력이 회복되지 않는 대미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벨 하나는 정말 기똥차게들 올랐다.

특히 에이젤의 경우에는 계속된 레벨 업의 결과 아예 격까지 같이 올라 7급 천사가 되었다.

“신성력 제어 레벨도 많이 올랐네…….”

아우라엘이 멍한 얼굴로 말했다. 하루 온종일 신성력을 써 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자자, 아무튼 목욕물들 준비해 드릴 테니 씻고들 주무세요!”

“네에…….”

루시엘이 평소와 달리 생기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정말정말 좋아하는 목욕이었지만, 오늘은 그냥 쓰러져 잠들고 싶었으니까.

천호는 그런 루시엘의 머리를 저도 모르게 몇 번 쓰다듬은 뒤 요새 목욕탕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대는 아직도 멀쩡하군. 힘들지 않나?]

“베르가프의 신성을 먹어 치워서 그런가…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닌데, 그렇다고 죽겠는 건 또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좀 편해진 것도 있었다. 어쩌면 하루 종일 신성력을 발산한 덕분에 신성력 자체에 익숙해진 걸지도 몰랐다.

[그대는 뭐든 정말 빨리 배우는 것 같군.]

“음, 어릴 때부터 그러긴 했죠.”

그렇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가르침을 절반도 못 받아들였을 터이니.

“내일은 베르가프 연구실을 찾으러 가죠. 쓸 만한 게 있다고 했으니 이것저것 챙기면 도움이 될 거예요.”

[으음, 맞는 말이지만 뭔가 도굴꾼이 된 기분이다.]

“본인이 가져가라고 했으니 괜찮아요.”

천호는 목욕탕의 큰 욕조를 향해 미트라를 뻗었고, 미트라는 아주 자연스럽게 뜨거운 성수를 배출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일말의 거부감도 들지 않는 미트라였다.

“눈보라를 부르는 마검은 이따 자기 전에 먹죠.”

[그래.]

야식이 아니라 마검이었지만 아무튼 먹는 건 먹는 거였으니까.

짧게 답한 미트라는 그대로 잠시 시간을 끌다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저기, 그대여. 그럼 말이다. 그대가 그리 피곤하지 않다면, 마검 먹고 정신세계에 가지 않겠나?]

묘하게 기대 어린 목소리였다. 성검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두근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함께 들릴 것만 같았다.

때문에 천호는 작게 웃더니 미트라의 황금색 보석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미트라.”

[응, 그대여.]

“그렇게 변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요?”

루카스가 준 저주받은 마검을 먹자마자 정신세계에서의 모습이 변했을 거라며 흥분하던 미트라였으니까.

눈보라를 부르는 마검까지 먹고 나면 조금이라도 더 변할 게 분명했다.

천호의 날카로운 지적에 미트라는 허둥거리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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