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82화 (82/211)

“치, 치사해!”

시작부터 보스전이라니!

에이젤이 외친 그때 천사들이 날개를 펼쳤다. 신성을 발해 악신의 사기를 중화했다.

일행 중 가장 강력한 천사인 루시엘이 네 장의 날개를 활짝 펴며 치유의 신의 깃발을 바로 세웠다.

흰 바탕과 붉은 십자검으로 이루어진 깃발이 붉게 빛났고, 깃발 위로 치유의 신의 상반신이 나타났다.

아바타라가 아니었다. 직접 강림도 아니었다. 그저 물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치유의 신은 강대한 신이었고, 이 자리에는 그녀의 사도인 루시엘이 있었다.

“구제하라!”

치유의 신이 루시엘의 입을 통해 외쳤다. 그 순간 붉은 기운이 폭발하듯 일어나 요새 전체를 뒤덮었다. 그대로 솟구쳐 밀려오는 악신의 검은 사기와 충돌했다.

신성의 폭발이 일어났다.

노도처럼 밀려오던 검은 사기를 완전히 방어해 냈다.

“우오오!”

“맞서 싸워!”

“치유의 신이시여!”

이쪽도 신의 기적이었다. 요새를 뒤덮은 붉은 광채 속에서 병사들이 소리쳤다.

전투 천사들이 날아올랐다.

팬텀 스티드들의 포효와 함께 듀라한들이 돌진해 왔다.

하늘에서 밴시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고, 베르가프의 거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왔다.

천호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자신뿐이었다.

오직 자신과 미트라만이 베르가프와, 악신과 대적할 수 있었다.

미트라의 검신이 황금빛으로 달아올랐다. 천호는 베르가프를 노려보았고, 베르가프 역시 천호만을 보았다.

충돌했다.

사스치엘이 팬텀 스티드를 짓뭉개며 듀라한의 몸을 통으로 물었다. 아우라엘이 창을 크게 휘둘러 밴시들을 베었고, 엘리엘이 천호를 등에 태웠다. 천호와 함께 베르가프를 향해 돌진했다.

[온다!]

미트라가 외쳤다. 베르가프가 마도서를 허공에 놓고 왼손을 휘둘렀다. 다섯 개의 손가락 끝에서 각기 일어난 불길이 천호를 향해 돌진하더니 저들끼리 부딪쳐 폭발했다.

미트라에서 물길이 솟구쳐 올랐다. 아쿠아 소드로 방벽을 만들어 불길을 막아 낸 천호는 순간이지만 시야가 막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왼쪽 머리 위.

야성화의 감각이 알려 주었다.

다급히 미트라를 휘둘러 하늘에서부터 쏟아지는 검격을 막아 냈다.

쿵!

무거웠다.

천호를 태운 엘리엘이 힘을 견디지 못하고 밑으로 푹 꺼지듯 추락했다.

엘리엘이 비명을 삼키며 날개를 펼쳤다. 지상과 충돌하기 직전에 멈추는 데 성공하였고, 천호는 위를 보았다.

베르가프가 멈추지 않았다. 해골뿐인 얼굴로 기괴한 굉소를 터트렸다.

천호는 다시 한 번 직감했다.

놈이 무얼 하려는 것인지.

자신이 리치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용하려는 것인지.

시간이 없었다.

불과 몇 초.

천호는 다시 한 번 아쿠아 소드로 방벽을 만들었다. 마력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엘리엘은 천호가 무엇을 하는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때문에 비행을 유지하였고,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콰가강?!

엄청난 폭발이 지근거리에서 일어났다. 베르가프가 천호가 펼친 방벽 위에 왼손을 뻗더니 그대로 스스로를 폭발시켰다.

자폭이나 다름없는, 아니 그냥 자폭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공격이었다.

천호와 엘리엘이 바닥에 충돌했다.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비산한 뼛조각들은 어찌어찌 막아 냈지만 충격까지 어찌하지는 못했다.

엘리엘의 네 다리가 모두 부러졌다. 천호 또한 바닥을 나뒹굴었다.

피해는 두 사람에게 그치지 않았다.

바닥이 크게 파였고, 성벽이 뒤흔들렸다.

“커헉.”

천호는 검은 피를 토했다. 폭발과 함께 퍼진 저주 때문이었다.

치유의 신의 신력을 사용했다.

몸을 치유함과 동시에 현자의 시간을 사용해 정신 오염을 막아 냈다.

천호는 미트라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엘리엘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눈앞에서 베르가프의 몸이 재구성되고 있었다.

리치.

생명의 정수만 무사하다면 몇 번이고 부활할 수 있는 불사의 존재.

자색 로브가 산산이 찢어져 새하얀 백골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키가 7미터는 됨직한 놈의 갈비뼈 사이로 보라색 광구가 보였다. 놈의 핵이라 할 수 있을 생명의 정수였다.

하지만 저게 전부가 아니었다.

어딘가에 놈의 진짜 정수가 숨겨져 있었다.

그 정수를 파괴하지 않는 한 놈은 계속해서 부활할 터였다.

불사의 몸을 이용한 자폭 공격.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도 저렇게 지독한 놈은 등장하지 않았었다.

어느새 재생을 마친 베르가프가 양손을 놀렸다. 놈의 주위로 눈보라를 부르는 검과 사령을 부리는 마도서가 천천히 맴돌았다.

[생명의 정수를 찾아야 한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게 분명하다.]

놈의 빠른 회복 속도가 그것을 증명했다.

미트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모범 답안이라 해도 좋았다.

하지만 무리였다.

요새가 이미 공격당하고 있었다. 정수를 찾기 위한 병력을 뺄 여유가 없었다.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리치를 쓰러트리기 위한 다른 방법을.

[온다!]

천호는 치유의 신의 힘이 담긴 붉은 기운을 엘리엘을 향해 던졌다. 베르가프의 관심은 온전히 천호 자신에게 쏠려 있으니, 전장을 옮기면 당장의 화는 피하게 할 수 있었다.

베르가프의 왼손에서부터 다시 불꽃이 솟구쳐 올랐다. 천호는 불꽃에 현혹되는 대신 짐승의 시간을 발동시켰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벽을 박차 올랐다.

불꽃이 터졌다. 연이어 눈보라가 천호를 추적하듯 밀려왔다. 천호는 강한 바람을 일으켜 눈보라를 밀어냄과 동시에 스스로를 상승시켰다.

베르가프가 그런 천호를 추적했다. 입을 크게 벌려 저주를 퍼붓는 동시에 수백 마리나 되는 딱정벌레들을 토해 냈다.

현자의 시간이 다시 천호의 정신을 지켜 주었다. 치유의 신의 신력이 저주에 저항했다. 급히 일으킨 연쇄 우레가 딱정벌레들을 불태웠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천호가 요새 성벽 위에 발을 디뎠다. 그대로 몸을 뒹굴 굴려 빠르게 바닥을 굴렀다.

베르가프도 성벽 위에 도달했다. 성벽 위에서 혼전을 펼치고 있는 인간들과 언데드들을 보며 웃었다. 자신을 찍어 누르기 위해 덮쳐 오는 치유의 신의 붉은 기운을 검은 사기로 밀어내며 천호를 보았다.

어리석구나.

피해를 더욱 늘리자는 것이냐?

치유의 신의 기운이라 한들 천사를 통해 발하는 것에 불과할지언정.

레온하르트는 너와 달랐다.

훨씬 더 현명하고 지혜로웠다.

베르가프가 천호를 향해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천호는 놈을 보지 않았다. 어차피 쫓아올 게 분명한 놈을 보는 대신 목표 지점을 보았다. 양손으로 깃발을 지탱하고 있던 루시엘이 천호를 보았다.

천호가 루시엘 앞에 도착했다.

베르가프가 그런 두 사람 머리 위에 자리했다. 더 이상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검은 사기를 폭발시켰다. 자폭으로 주변 모든 것을 휩쓸고자 하였다.

그 짧은 순간.

천호는 아쿠아 소드로 방벽을 펼치지 않았다.

왼손을 뻗어 치유의 신의 깃발을 잡았다.

미트라는 천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했다. 루시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천호와 눈이 마주친 그 때 루시엘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직감했다. 천호의 황금빛 눈동자가 그리하게 만들었다.

루시엘이 손을 놓았다. 치유의 신의 깃발이 온전히 천호의 손에 쥐어졌다.

검은 사기가 덮쳐 왔다. 천호는 그것을 몸으로 견뎌 냈다. 보이는 손과 함께 치유의 신의 깃발을 크게 휘둘렀다. 몸을 폭발시키기 일보 직전인 베르가프를 향해 찌르기를 펼쳤다.

제국창법.

정확했다. 깃발의 끝이 놈의 갈비뼈 사이를 지나 생명의 정수를 찔렀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베르가프가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천호가 소리쳤다.

“치유의 신이시여!”

붉은 기운이 폭발했다.

생명의 정수를 시작으로 하여 베르가프의 전신을 뒤덮었다.

베르가프는 하얗게 웃었다. 천호를 비웃었다.

무엇을 하나 했더니 겨우 이것이었나.

치유의 신의 신력으로 자신의 정수를 해하면 뭐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 것인가.

변하지 않았다.

외부에 숨겨 둔 정수가 있는 한 자신은 몇 번이고 되살아날 터이니.

이대로 폭발해 네 모든 바람을 깨트려 주마!

“할 수 있다면.”

천호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방아쇠가 되었다. 베르가프는 폭발하지 않았다. 천호의 말이 언령이 되어 베르가프의 의지를 조종한 것이 아니었다.

베르가프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천호가 노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단절되었다.

치유의 신의 깃발이 생명의 정수에 꽂힌 순간.

생명이 없는, 무정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베르가프의 육신 자체를 치유의 신의 영토로 삼은 순간.

외부에 숨겨 둔 생명의 정수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베르가프 자신의 연결이 끊어졌다.

치유의 신의 힘이 연결을 방해하였다.

지금 폭발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치유의 신의 깃발이 파괴되어 다시 연결이 재개될 것인가? 그리하여 부활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만약 연결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치유의 신의 깃발이 여전히 자신과 정수 사이의 연결을 차단한다면.

베르가프가 포효했다. 눈보라를 부르는 마검이 천호를 향해 쇄도했다. 왼손으로 치유의 신의 깃발을 뽑아내고자 하였다.

천호의 예상대로였다.

아버지의 가르침대로였다.

부활을 못 하게 된 지금, 놈의 최우선 사항은 천호의 죽음에서 ‘부활 상태를 회복한다’로 바뀌었다.

천호를 공격하기보다는 치유의 신의 깃발을 어찌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마검은 천호를 꿰뚫지 못했다.

천호는 미련 없이 치유의 신의 깃발을 놓았다. 자신을 향해 내리꽂히는 마검을 지나침과 동시에 지면을 박차 올랐다.

치유의 신의 깃발을 붙잡은 놈의 손이 불타올랐다. 천호는 그것을 보지 않았다. 그저 한 가지 일에만 집중했다.

왼손으로 놈의 갈비뼈를 붙잡았다. 오른손에 쥔 미트라를 갈비뼈 사이로 찔러 넣었다.

미트라가 보랏빛 생명의 정수에 깊이 박혔다.

천호는 우레를 일으키지 않았다. 푸른 번개로 놈의 정수를 파하는 대신 놈이 상상도 하지 못 한 일을 행하였다.

생명 흡수.

미트라의 검신이 칠흑으로 빛났다.

치유의 신에 의해 고립된 베르가프의 정수를 고갈시켰다.

[히든 퀘스트 : 영웅 해방]

[악신에게 사로잡힌 영웅 베르가프 라이제강의 영혼을 해방하십시오.]

[라이프 드레인 Lv4]

언데드의 생명력을 흡수한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 같은 소리였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단지 상상하기 어려울 뿐.

미친! 미친! 이 무슨!

베르가프가 경악성을 토했다. 생명의 정수에 모여 있던 생명력이 쭉쭉 빠져나가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외부에서 물이 더 들어오지 못 하도록 저수지의 수문을 막는다.

그 상태로 물을 빨아들여 저수지를 고갈시킨다.

베르가프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었다.

언데드는 무적이 아니었다.

죽은 자의 몸을 생명력 혹은 마력으로 움직이는 것에 불과했다.

생명력의 고갈은 곧 리치의, 언데드의 완전한 죽음을 의미했다.

[커헉! 컥! 큿!]

미트라에게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사악하기 그지없는, 탁하고 검은 생명력을 흡수하게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더욱이 생명력을 흡수하는 속도도 빨랐다. 사람으로 치면 입을 강제로 벌리게 한 뒤 독한 술을 쏟아붓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트라는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베르가프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견뎌 내야만 했다.

“쏟아 내요!”

하지만 천호는 달랐다. 미트라에게 해법을 제시했다. 미트라를 움켜쥔 채 강하게 염원했고, 미트라는 천호의 뜻을 이해했다.

크아아아아아아!

베르가프가 돌연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언데드가 된 이후 처음 겪는, 자신이 당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한 고통 때문이었다.

천호는 미트라로 베르가프의 생명력을 갈취했다. 동시에 미트라로 정화된 생명력을, 성스러운 힘을 베르가프의 정수에 직접 때려 박았다.

베르가프 입장에서는 미트라에 의해 정화된 생명력은 독이나 다름없었다.

저수지에서 물을 퍼냄과 동시에 휘발유를 붓는 격이었다.

악랄한! 이 악마 같은 놈!

이미 절규였다. 천호는 아랑곳 않고 미트라를 비틀었다. 생명의 정수에 더욱 깊이 박아 넣으며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행했다.

생명력을 흡수하고 쏟아 낸다.

베르가프의 정수를 고갈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망가트려 버린다!

안 돼! 안 돼!

베르가프는 더 이상 앞뒤 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왼손으로 치유의 신의 깃발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신성의 덩어리인 치유의 신의 깃발이었다. 더욱이 신성의 격으로만 따지면 베르가프 따위는 치유의 신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평상시라면 모를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치유의 신의 깃발을 어찌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으아아!

베르가프의 왼손이 불타올랐다. 신성한 하얀 불꽃이 베르가프의 왼팔을 잡아먹는 것만 같았다.

죽어!

베르가프가 그나마 성한 오른팔을 움직였다. 땅에 박혀 있던, 눈보라를 부르는 마검을 뽑아 들더니 그대로 자신을 찔렀다.

천호를 꿰뚫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마법사의 칼질 따위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놈이 눈보라를 부르는 마검을 뽑아낸 순간 이미 의도를 읽은 천호였다. 등 뒤에 눈이 없지만 야성화의 초감각으로 인지했다.

놈이 검을 스스로에게 꽂는 그때 갈비뼈를 움켜쥐고 있던 왼손을 놓았다. 미트라를 잡은 손을 회전축 삼아 몸을 180도 회전시켰다.

크아!

눈보라를 부르는 마검이 베르가프를 관통했다. 몇 개나 되는 뼈를 부수며 무식하게 나아간 마검은 뼈에 얽혀 고정되었고, 천호는 그런 마검의 검신 위에 올라탔다.

“발판 땡큐!”

으아아!

전투 중에 도발은 필수였다.

천호는 다른 한 손으로 치유의 신의 깃발을 잡았다.

미트라로 생명의 정수를 망가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치유의 신의 깃발로 놈의 영육까지 부수기 시작했다.

베르가프의 몸 곳곳에 균열이 일었다.

하얀 뼛조각이 바람을 따라 흩어지기 시작했다.

베르가프에게는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 정말로 앞뒤 구분할 때가 아니었다.

번개여! 불꽃이여! 바람이여!

베르가프가 스스로를 향해 마법을 쏟아부었다.

강력한 공격 마법들이 천호와 베르가프를 동시에 덮쳤다.

[그대여!]

미트라가 급히 외친 그때 천호는 이를 악물었다. 놈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았다. 지금은 견디는 것이 최선이었다.

순간순간 사용하던 짐승의 시간을 완전 발동시켰다. 천호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방어력도 같이 강해졌다.

번개가 천호를 때렸다.

불꽃이 등을 불태웠고, 바람이 온몸을 난도질했다.

[안 돼! 안 돼!]

미트라가 울부짖었다. 생명의 정수를 망가트리느라 본인이 고통스러워 할 때보다 훨씬 더 괴로워하였다.

미트라는 흡수한 생명력을 천호에게 주었다. 천호의 몸을 전력을 다해 치유했다.

죽어! 죽어! 죽어!

수많은 마법들이 베르가프와 천호를 뒤덮었다.

끔찍한 저주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지구력 싸움이었다.

누가 더 오래 버티는가.

상대방이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버텨 내는 것은 누구인가.

베르가프는 리치였다. 애당초 마법에 대한 방어력이 우수했다. 하지만 미트라와 치유의 신의 깃발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천호는 끔찍한 고통 속에 이를 악물었다. 몸이 부서지고 바로 다시 재생되는 고통은 천호의 상상을 초월했다.

피 보라가 일었다. 모두 천호에게서 쏟아져 나온 피였다. 시야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죽어라! 용사!

베르가프가 쥐어짜 낸 힘을 폭발시켰다.

검은 마력의 덩어리가 천호를 집어삼켰다. 그대로 침식해 소멸시키고자 하였다.

치유의 신의 깃발도 천호를 지켜 줄 수 없었다.

미트라의 목소리도 더 이상 천호에게 닿지 않았다.

하지만 천호에게는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그 힘이 천호의 죽음을 용납하지 않았다.

용사지체가 반응했다.

위기의 순간일수록 더 큰 힘을 내는 용사의 힘이, 용사의 피가 그것의 발현을 촉진시켰다.

“우오오오오오오오!”

천호가 포효했다. 두 눈이 선명한 황금빛으로 빛났다. 베르가프의 어둠 속에서 마치 태양과 같이 작렬하였다.

고귀한 피.

어머니의 피.

미궁 세계의 시스템조차 명확히 정의하지 못 한 그 힘!

깨어났다. 눈을 떴다. 용사의 피와 함께 발동하였다. 베르가프의 강력한 마법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잠들어 있던 힘을 일깨우고 말았다.

베르가프의 어둠이 깨졌다. 산산이 조각나 부서졌다.

그리고 천호의 모습이 드러났다.

양쪽에 하나씩, 귀 위에 돋아난 두 개의 큰 뿔.

황색의 그것으로부터 무시무시한 힘이 발산되었다. 천호가 짐승 같은 포효를 토하며 입을 크게 벌렸다.

신성포식.

생명력을 갈취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베르가프의 신성을 탐했다. 그것을 먹어 치웠다.

무슨, 이 무슨?!

베르가프는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졌다.

신성이 잡아먹히고 있다는, 존재 자체가 상실되는 것 같은 충격 때문만이 아니었다.

천호에게서 느껴지는 힘.

자신에게 달라붙어 게걸스레 신성을 탐하는 괴물이 발하는 힘.

차라리 이쪽에 가까웠다.

마신에 가까운 힘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베르가프는 돌연 몸에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외부에 숨겨 둔 생명의 정수로부터 다시 힘이 공급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것일까.

놈이 폭주하는 와중에 치유의 신의 깃발을 어찌하고 만 것일까?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연이어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에 베르가프는 끔찍한 공포를 느꼈다.

악랄한!

천호가 치유의 신의 깃발을 뽑았다. 저수지의 수문을 다시 개방하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먹어 치우기 위해.

외부에 저장된 힘조차 모조리 잡아먹기 위하여.

베르가프는 자폭하지 못 했다.

생명력과 마력뿐만 아니라 신성까지 잡아먹히고 있는 와중이었다. 이미 그럴 정신이 없었다.

빛의 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천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여전히 황금빛 안광을 빛내며 베르가프의 모든 것을 탐하였다.

신성을 잃은 베르가프의 육신이 무너져 내렸다. 완전히 소멸해 가루조차 남지 않았다.

천호가 지면에 안착했다. 마치 짐승처럼 거친 숨을 토했다.

[그대여! 정신 차려라! 그대여!]

미트라가 애타게 외쳤다.

하지만 천호가 응답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폭주할 것만 같은 위험한 모습이었다.

“용사님!”

바로 그때 루시엘이 천호를 끌어안았다. 천호와 베르가프의 힘겨루기 동안 호화롭고 현란한 마법의 향연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그녀였다.

하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천호의 머리에 뿔이 돋아나 있건, 흉악한 기운을 내뿜고 있건 신경 쓰지 않았다.

천호였으니까.

루시엘 자신의 용사님이었으니까.

루시엘은 천호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양손으로 천호의 허리와 등을 꽉 끌어안았다.

천호가 그런 루시엘을 마주 안았다. 루시엘을 으스러트리기라도 할 것처럼 양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몇 초.

천호의 양팔에 들어간 힘이 약해졌다. 고통을 참아 내던 루시엘은 고개를 들어 천호를 보았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