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81화 (81/211)

‘그냥 앞으로 좀 더 잘해 주자.’

이것저것 신경도 좀 더 써 주고.

적당히 생각을 정리한 천호는 미트라와 함께 요새 곳곳을 산책하듯 둘러보았다.

커다란 요새였다.

성벽은 높고 두터웠고, 지키는 병사들의 수준 또한 높았다.

[병사들도 대미궁의 영향을 받아 강해진 것 같다.]

이곳은 저층이 아닌 중층이었으니까.

더욱이 레벨 업은 영웅들만의 특권이 아니었다. 대미궁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시스템의 영향을 받았다.

가볍게 한 바퀴를 돈 뒤 방에 돌아오자 루시엘이 반쯤 잠든 상태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천호는 루시엘에게도 세숫물을 만들어 준 뒤 일행을 모아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막 식사가 끝났을 때였다.

“요새장님께서 용사님을 찾으십니다.”

젊은 장교 하나가 천호에게 공손히 예를 표하며 말했다.

요새장이라면 루카스였으니 딱히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만,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어제 이미 이야기를 꽤나 나누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어서 가 보자꾸나.]

[루카스는 실없이 사람을 오라 가라 할 사람이 아니다.]

고개를 끄덕인 천호는 루카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미트라만큼이나 하이텐션인 루카스가 천호를, 정확히는 미트라를 환영하였다.

“줄 게 있어서 불렀네.”

역시 루카스는 좋은 사람이었다.

용사의 첫 동료가 될 만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미트라가 아직 힘을 회복하지 못한 것 같아 어제 급히 준비했다네.”

사람 좋게 웃으며 말한 루카스는 집무실 탁자 위에 올려 둔 보따리를 풀었다.

길이로 보아 검이 분명했다.

“저주받은 마검 블랙로터스. 사용자에게 막강한 힘을 주지만 그 대가로 생명력을 빼앗는 마검일세. 이 녀석을 쓰다가 목숨을 잃은 자가 적어도 수십 명은 된다고 들었네.”

그야말로 저주받은 마검이었다.

성스러운 문장이 새겨진 검집으로 봉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은 사기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부수기는 아까워 요새 내의 교회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역시 잘한 결정이었군. 이렇게 사용할 날이 왔으니 말이네.”

성구로 추정되는 장갑을 낀 루카스는 조심스럽게 검집과 검을 분리했다.

시커먼 사기로 뒤덮인 롱소드였는데, 척 봐도 저주받은 물건이란 티가 났다.

“어… 먹어도 되는 거겠죠?”

역병신의 암살자?도루마가 사용하던 마검을 이미 세 자루나 먹어 치운 미트라였지만 눈앞의 마검은 경우가 달랐다.

앞의 세 자루가 그냥 마검이라면, 이 녀석은 강력한 저주의 힘을 품고 있었으니 말이다.

[으음, 나도 좀 내키지 않지만 괜찮을 거다.]

[레온과 함께 모험할 때는 더 심한 것도 흡수한 적이 있다.]

“미트라는 우리 세계 최강의 성검이네. 이 정도 저주쯤은 상대도 되지 않을 걸세.”

미트라와 루카스가 각기 말했다.

당사자 본인과 경험자가 저리 말하니 큰 탈은 없을 터였다.

“좋아요, 그럼 먹도록 하죠.”

천호는 미트라의 검신이 블랙 로터스의 검신에 가로 놓이도록 손을 움직였다.

검은 사기에 닿는 순간 미트라가 작게 신음을 토했지만 잠깐뿐이었다. 이내 황금빛 섬광을 발해 검은 사기를 압도했다.

[아아, 아아아!]

미트라가 돌연 소리를 높였다. 천호 또한 가볍게 몸을 떨었다.

루그의 성검 에르나사가를 흡수했을 때처럼 미트라의 성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라이프 드레인. 이름 그대로 생명력을 갈취하는 마법이었다.

“오오… 전투적인 스킬이 생겼어요.”

지금까지 익힌 것들과 달리, 정말로 공격적인 스킬이었다.

[지금까지 익힌 것들도 대부분 공격적인 스킬이다만.]

사용하기를 이상하게 사용해서 그렇지.

히트 대거의 열, 샤프니스 소드의 날카로움 등등.

[하지만 그래도 특별하긴 하군.]

[흡수한 생명력으로 그대를 회복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뭔가… 굉장히 마검 같네요.”

[으음.]

[그래도 말이다, 그대여. 스킬 말고도 내게 변화가 생겼다.]

미트라는 돌연 우후후 웃더니 다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한 단계 정도 성장을 한 것 같다. 더 단단해지고, 더 성력이 강해졌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다. 정신세계에서 보면 내 모습이 꽤 변해 있을 거다.]

천호에게 얼른 보여 주고 싶어 안달이 난 목소리였다.

‘색이라도 생긴 거려나?’

아니면 어린애에서 조금 자란 모습이 되었다거나.

순간 용사의 검을 사용할 때 보았던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을 떠올린 천호는 한차례 숨을 삼켰다.

조금이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트라의 모습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미트라가 정말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인 것일까.

“음, 그래서 어떤가. 미트라의 반응은?”

바로 그때 홀로 소외되고 있던 루카스가 말했다.

천호는 헛기침을 토한 뒤 말했다.

“힘이 강해졌다고 무척 좋아하네요.”

“다행이군. 하지만 그래도 아직 목소리는 전하지 못하는 건가…….”

레온 때는 꽤나 금방 목소리를 밖으로 전할 수 있었는데.

혹여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음, 한번쯤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신세계에서 말이다.]

나름 중요하고 진지한 이야기였지만, 어쩐지 앞의 내용은 핑계인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변했길래 저러지?’

이렇게까지 안달이 난 미트라는 처음이었으니까.

천호도 얼른 정신세계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루카스 백작님, 조력에 감사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물러가서 미트라의 상태를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음, 알겠네. 혹여 문제가 있다면 알려 주고.”

“그리하겠습니다.”

[다음에 보자, 루카스.]

[마검을 준비해 줘서 정말 고맙다.]

목소리가 닿지 않음에도 성실하게 인사한 미트라는 다시 천호를 재촉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커다란 종소리가 들려왔다.

탕! 탕! 탕!

맑고 고운 소리가 아닌, 난타로 인한 굉음이었다.

연이어 병사들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습이다!”

“적습이다!”

“적의 공격이다!”

[하흣! 왜 하필 지금!]

순간 분통을 터트린 미트라였지만 잠깐 뿐이었다. 이내 천호에게 소리쳤다.

[그대여, 서두르자!]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루카스에게 소리친 천호는 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성벽 위로 올라가니 사스치엘을 필두로 한 전투 천사들이 보였다.

“용사님!”

루시엘이 날개를 펄럭이며 다가왔다. 천호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 성벽 가장자리로 가 멀리 보았다. 어제와 달리 눈보라가 치지 않아 시야가 환했지만, 그랬기에 더욱 명확히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하얀 설원을 뒤덮는 검은 물결.

수만에 달할 언데드 무리들이 요새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어제와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주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달라진 것이 있었다.

천사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천호와 미트라는 직감하였다.

밀려오는 검은 물결의 중심부, 언데드들의 무리 사이로.

신성을 가진 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 * *

대미궁 안에는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다섯 여신을 필두로 한 미궁 세계의 선신들.

본래부터 대미궁에 존재하고 있던 마신 휘하의 악신들.

하지만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대미궁 안에는 새로이 태어난 신들 또한 존재하고 있었다.

격이 높아져 하급신을 자처할 수 있게 된 천사들.

준신의 영역에 올라선 이계의 영웅들.

대미궁의 존재들도 그러했다.

마물이 성장의 성장을 거듭하여 급기야 신성을 얻는 경우가 있었다.

미궁 세계의 존재가 대미궁의 힘을 받아들인 끝에 악신으로 거듭나는 경우 또한 존재했다.

그렇게 태어난 새로운 신들은 대개 중층에 머물렀다.

언데드 무리 사이에 그러한 존재가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인지한 천호 일행에게 인사하듯 언데드 무리 사이에서 보랏빛 사기의 소용돌이가 치솟았다.

그리고 거대한 존재가 나타났다.

검정에 가까운 자색 로브를 걸친 언데드.

후드 속에 감춰진 머리에는 얼굴이 존재하지 않았다. 새하얀 해골과 눈이 있어야 할 곳에서 빛나는 붉은 귀화뿐이었다.

한 손에는 눈보라를 일으키는 검을 들고 있었다.

다른 한 손에는 사령을 부리는 마도서를 들고 있었다.

리치.

죽음을 두려워한 마법사가 죽음 그 자체와 하나가 된 존재.

하지만 단순한 리치가 아니었다.

놈에게는 신성이 존재했다.

스켈레톤 수십 마리가 서로 몸을 겹쳐 거대한 옥좌를 만들었다.

유령마 팬텀 스티드에 탄 듀라한들이 옥좌 주위에 도열하였고, 귀곡성을 토하는 밴시들이 옥좌 주위를 맴돌았다.

신성을 가진 자가 옥좌 위에 자리했다.

그러자 세상이 일변했다.

4층에서 치유의 신과 역병신이 강림했을 때와 정도가 다를 뿐, 마찬가지의 현상이 일어났다.

대지를 뒤덮고 있던 눈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젖어 진탕이 된 땅이 말라비틀어졌고, 하늘이 어둡게 변하였다.

신성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성벽에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 했다. 하지만 눈앞의 이적만으로도 병사들은 두려움에 빠졌다.

“베르가프… 역시 네놈이었나.”

뒤늦게 도착한 루카스가 쥐어짜 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미트라가 경악을 토했다.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베르가프 라이제강.

그는 레온의 두 번째 동료였다.

[당신의 성검이 라이프 드레인 Lv1을 획득했습니다.]

[라이프 드레인 Lv4가 되었습니다.]

레온에게는 수많은 동료들이 있었다.

실리피안 고원에서 처음 몸을 일으킨 이후 마왕을 물리치고 제국을 건국할 때까지.

어린 목동은 청년이 되었고, 청년은 다시 장년의 사내가 되었다.

레온은 마왕을 쓰러트리기 위한 여정 속에서 수많은 이들과 인연을 나누었다.

레온과 함께 싸운 이들의 숫자는 수천, 수만을 헤아렸고, 동료라 부를 수 있는 자들의 숫자만 해도 서른 명이 훌쩍 넘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다 하여 누구 하나 허투루 여길 수 없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레온은 계속 나아갈 수 있었고, 끝내 마왕조차 물리칠 수 있었다.

미트라는 그들 하나하나를 전부 기억했다.

첫 번째 동료였던 루카스를 포함하여 모두를 소중한 동료로 생각했다.

베르가프 라이제강.

그는 실리피안 고원 바로 옆에 자리한 이름 없는 평원에 살던 젊은 마법사였다.

비 오는 날 술집에서의 우연한 만남으로 레온과 동료가 된 그는, 술집에서 만난 마법사답게 주당이었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좋아하는 쾌활한 성격이었다.

그 또한 루카스처럼 끝까지 함께하지는 못 했다.

하지만 레온은 그를 잊지 않았고, 제국이 건국된 후에는 루카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작위를 내렸다.

베르가프는 늙어서도 유쾌한 자였다.

자신이 한때는 용사의 마법사였다는 것을 자랑하며 노년을 보냈고, 자신의 고향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베르가프는 이미 죽었다. 레온과 함께 그의 장례식에도 참석했었다.]

미트라가 혼란스런 목소리를 토했다.

루카스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미트라가 어떤 상황일지 이해했다. 정면을 노려보며 빠르게 말했다.

“대미궁의 마기로 인해 대량의 마물들이 자연 발생했다. 이미 죽은 지 수백 년은 되었건만 베르가프 역시 언데드 몬스터로 부활했다.”

처음에는 그저 악령에 불과했다.

스스로가 베르가프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 하는 저급한 망령.

하지만 한때는 용사의 마법사였던 남자였다.

비록 이지를 잃었다 하나 그 혼의 강함까지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었다.

베르가프는 다른 악령들을 집어삼키며 점점 더 강해졌고, 급기야 중층을 배회하던 하급 악신과 결합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베르가프가 아니다. 베르가프를 기초로 하여 태어난 괴물에 불과하다.”

타락 같은 것이 아니었다.

눈앞의 괴물에게 베르가프의 의지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미궁의 악신이 베르가프의 기억과 영육을 휘두르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미트라는 숨을 헐떡였다.

괴로움을 씹어 삼켰다.

베르가프와 싸워야 한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새삼 제국이 멸망했다는 것이, 이 세계가 대미궁에 편입되었다는 현실이 뼈저리게 와 닿은 탓이었다.

하늘과 땅이 있었다. 비록 조각났다고는 하나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결국 대미궁 안이었다.

결코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니었다.

빛의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의 내용이 미트라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 주었다.

순간 에이젤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 그런데!”

모두의 시선이 에이젤에게 모였다. 에이젤은 어깨를 살짝 움츠리더니 루카스에게 빠르게 물었다.

“어,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하급이라고는 하나 분명 신성을 가진 존재였다.

수만이 넘는 언데드들을 부릴 수 있는 것은 단순한 리치가 아닌, 신성을 가진 악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존재 자체는 몇 년 전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9층으로 통하는 기둥보다 북쪽을 배회하고 있어 부딪칠 일이 없었을 뿐.”

어째서 갑자기 남하를 개시했는지에 대해서는 루카스 역시 의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놈이 남하한 이유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온다.”

아우라엘이 낮게 말했다. 모두는 정면을 보았다. 거리가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해골 옥좌 위에 앉은 리치- 베르가프와 눈이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천호도 놈과 눈이 마주쳤다.

베르가프의 붉은 귀화가 천호의 황금빛 눈동자를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

천호의 손에 들린 성검 미트라를 마치 보석처럼 바라보았다.

놈이 옥좌에서 일어섰다. 눈보라를 부르는 검을 휘둘렀고, 사령을 부리는 마도서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귀곡성이 전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언데드 무리의 대부분을 이루는 좀비들과 스켈레톤들이 앞다퉈 달려 나갔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베르가프는 마법사답게 효율성을 생각했다. 이렇다 할 공성 병기조차 없는 언데드들을 무조건 돌격시키는 대신 휘하의 무리들을 움직였다.

“키아아!”

팬텀 스티드들이 포효했다. 듀라한들이 하늘을 달려 좀비들과 스켈레톤들을 추월했다. 그대로 성벽 위를 향해 돌진했다.

밴시들이 허공에서 날아들었다. 스켈레톤 나이트들을 태운 좀비 와이번들이 날갯짓을 시작했다.

고급 병종으로 성문을 연다.

성벽을 무너트린다.

베르가프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후방에서 구경하기는커녕 검은 질풍과 함께 날아올라 요새로 돌진하였다.

언데드 무리에서 가장 강한 것은 베르가프 자신이었으니까.

불사의 몸을 가진 리치이기도 하였으니까.

구경할 이유가 없었다.

선두에 서서 적을 찢어발기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다.

신의 진격이었다.

듀라한들이 돌격해 오는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멍하니 얼어붙었다.

베르가프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짓눌려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