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80화 (80/211)

[그대여,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인가…….]

미트라라고 해서 천호의 머릿속을 완전히 꿰뚫어 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이 있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천호는 굳이 답하는 대신 숨을 한 번 길게 토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서도 비슷한 인물이 몇 명 등장했었다.

‘엘프 여기사도 있었지?’

사실 엘프 여기사라 기억하고 있는 거였지만.

아버지가 파이엔에서 맞이한 첫 이성 동료.

어머니 몰래 해 주신 이야기였지만, 사실 아버지의 첫사랑이기도 했던 여기사.

‘엄청난 철벽이라고 했지 분명.’

그래서 고백할 엄두도 못 냈었다고.

어찌 되었든 그 엘프 여기사 역시 중간부터는 전력이 안 된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파티에서 빠졌어야 했다.

‘우리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으려나.’

천호는 잠시 일행을 생각해 보았다. 다들 저층을 넘어 중층까지 오며 강해졌지만, 사실 천호 일행도 동료들 간의 전력 차가 꽤 나는 편이었다.

[그대여, 전투 중이다.]

미트라의 지적에 퍼뜩 정신을 차린 천호는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기본적으로 수성전인 데다가, 언데드들이 이렇다 할 공성 병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탓에 그렇게까지 위험한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투는 전투였다.

더욱이 언데드들의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성벽에 붙어 죽은 놈들의 시신만으로도 작은 언덕이 만들어질 지경이었다.

“불을 놓아라! 언덕을 무너트려!”

요새 수비군의 대응이 능숙했다. 오늘 같은 전투를 처음 겪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천호도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용사의 아우라로 수비군에 힘을 북돋아 주었고, 번개를 뿌려 시신의 언덕을 무너트렸다.

언데드들의 숫자는 분명 많았다. 하지만 성벽은 높았고, 놈들의 숫자에도 한계는 있었다.

개전으로부터 반나절 후.

실리피안 요새의 장병들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 * *

“이제야 겨우 대화할 짬이 생겼군.”

전투가 끝나고도 거의 한 시간여가 지난 뒤.

요새 안에 자리한 집무실에서 루카스는 천호를 독대하였다.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소개하자면… 실리피안 요새를 맡고 있는 루카스 브리타니아 백작일세.”

[여전하구나.]

미트라가 그립다는 듯이 말했지만 여전히 루카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때문에 천호가 미트라의 말을 대신 전해 주었다.

“미트라가 그립다고 하네요.”

“나도 그립군. 레온과 함께 실리피안 고원을 떠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수백 년이 지나고 말았어.”

[루카스…….]

미트라의 목소리에 금방 물기가 어렸다.

“미트라와 단 둘이라면 모를까, 그대까지 낀 상황에서 추억 이야기만 늘어놓을 수는 없겠지. 아쉬움은 잠시 미루고… 실무적인 이야기를 할까 한다네.”

거기까지 말한 루카스는 한차례 숨을 고르더니 어깨를 늘어트렸다. 성벽 위에서 거의 날아다니다시피 한 그였지만, 이렇게 어깨를 늘어트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평범한 노인처럼 보였다.

“일단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 천사님들도 저리 잔뜩 오신 것을 보면 범상한 일은 아니겠지.”

그 외에도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투였다.

천호는 일단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1층에서 우연히 미트라를 만난 일.

4층까지 내려오며 역병신과 대적한 이야기.

그리고 지금은 치유의 신의 밀명을 받아 10층을 목표로 이동 중이라는 것까지.

“과연. 역시 미트라의 주인답게 비범한 모험 중이었군.”

약간은 장난스럽게 말한 루카스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치유의 신님의 밀명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겠네. 다만… 어쩌면 이번 난리가 그 밀명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러고 보니 언데드들의 공격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대미궁에 들어온 뒤 실리피안 고원이, 제국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궁금하고.]

루카스에게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트라는 계속해서 말했다.

천호가 요약해서 전달해 주니 루카스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공격이 시작된 건 정확히 닷새 전부터네. 눈보라가 시작된 것도 그때쯤이고.”

본래 겨울이면 눈이 내리는 실리피안 고원이었지만, 이 정도로 폭설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

“북동쪽… 9층으로 통하는 기둥 근방에는 애당초 언데드들이 꽤 산재해 있었다네. 그런데 닷새 전부터 놈들이 돌연 군대를 이루어 진군을 개시했네. 실리피안 요새가 처음 공격을 받은 것은 이틀 전이었지.”

좀비와 스켈레톤들로 구성된 언데드 군단의 진군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더욱이 하루가 지날 때마다 언데드들의 숫자가 무섭게 증가하고 있었다.

[닷새 전이라면… 정말 우리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역병신이 다시 한 번 수작을 부린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확증은 없었다.

천호 일행이 중앙으로 가는 대신 동부로 갔다는 사실을 역병신이 알 방도 역시 분명하지 않았고 말이다.

“9층으로 통하는 기둥은 하나뿐인가요?”

“이 근방에는 하나뿐이라네.”

거기까지 말한 루카스는 다시 미트라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미 내려오며 보았겠지만 우리 세계는 대미궁에 침식되어 조각나고 말았어. 실리피안 고원과 그 인근 일대는 8층에 자리하게 되었지. 부르크 백작과 올란도 백작이 지원군을 약속했어. 실리피안 요새가 뚫리면 다음은 자신들이니까. 이틀 뒤에는 지원군이 도착할 거야.”

제국이 무너진 지금, 각지의 영주들은 작은 나라의 왕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들이 실리피안 요새를 돕는 것은 제국 전체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황가는… 황가의 핏줄은 완전히 끊어진 것인가?]

제국은 이미 무너졌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황가는.

레온의 후손들은.

천호가 미트라의 물음을 전하자 루카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미트라의 황금빛 보석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미안하다, 미트라. 마지막 황제는 대미궁의 침식에 저항하다 죽었고… 레온의 직계는 끊어졌다. 더 이상 황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1층에서 루시엘이 해 준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트라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 * *

루시엘을 필두로 한 천사들이 부상자들을 돌봤다.

라구엘은 천사 네트워크를 통해 치유의 신 측에 상황을 전달하였고, 지원군을 약속받았다.

피난민들이 성안에 가득인 데다 연일 공격까지 받은 마당이었지만 요새의 분위기는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다.

천사들도 천사들이었지만, 용사와 성검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건국 황제인 레온하르트는 초대 용사였다.

그의 검 미트라는 성검이란 명칭보다 제국 수호검이라는 이명으로 더 유명하였다.

제국 수호검.

제국을 지키는 검.

제국인들에게 있어 용사와 성검은 전설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제국이 무너진 지금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성검을 다루는 용사가 함께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내일에 대한 불안을 잊을 수 있었다.

밤이 깊었다.

모두가 잠자리에 든 그때 천호 역시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평범한 잠자리는 아니었다.

높고 푸른 하늘과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초원.

천호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항상 보던 눈앞의 광경은 실리피안 고원의 풍경이었다.

[그대여, 굳이 무슨 일인가.]

오도카니 선 미트라가 어깨를 늘어트린 채 물었다.

오늘 전투를 하긴 했지만 용사 포인트를 쌓거나 격을 높일 정도의 수확은 없었으니까.

대화라면 평소에도 얼마든지 가능했으니 정신세계에서 굳이 만날 이유가 없는 천호와 미트라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트라의 생각일 뿐이었다.

천호는 미트라를 지나쳐 커다란 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앉더니 그대로 손짓했다.

“이리 와 봐요.”

[영문을 모르겠군.]

터벅터벅 다가온 미트라가 천호 앞에 섰다. 여전히 어린아이 모습인 터라 앉아 있는 천호와 눈높이 차이가 그리 나지 않았다.

천호는 자기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렸다.

“무릎베개 해 드릴게요.”

[응?]

“그냥 좀 누워 봐요.”

천호는 손을 쭉 뻗어 미트라의 팔을 잡아당겼다. 엉거주춤하는 그녀를 자리에 눕혔다.

“어때요?”

[머리가 너무 높다. 그대의 허벅지는 너무 단단하고.]

미트라가 툴툴거리며 말했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천호는 작게 웃더니 미트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미트라랑 같이 자려고요.”

[어차피 늘 같이 자지 않았나.]

“그래도 평소랑은 좀 다르지 않아요?”

[흠.]

다르긴 달랐다. 정신세계가 아니라면 이렇게 무릎베개를 할 수도 없었을 터이고.

때문에 미트라는 약간의 고민 끝에 말했다.

[그대여.]

“네, 미트라.”

[이왕할 거 팔베개가 좋겠다.]

“바라는 게 많군요.”

천호는 키득 웃더니 자세를 고쳤다. 나무 아래 한쪽 팔을 벌리고 누웠다.

“자요.”

[으음.]

막상 누우려니 새삼 부끄러워진 미트라였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천호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살짝 용기를 내서 천호의 품에 몸을 기대 보았다.

어쩐지 모르게 루시엘이 된 기분이었다.

“좀 나아요?”

[음, 머리 높이가 딱 좋은 것 같다.]

머리 높이만이 아니었다. 천호의 체온을 보다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이었다.

이렇게 누워서 누군가의 체온을 느껴 보는 것은.

생각보다 더 따뜻했고, 더 포근했다.

“미트라.”

[왜 그러느냐.]

“미트라의 잘못이 아니에요.”

제국이 멸망한 것도, 황가의 피가 끊어진 것도.

미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천호는 굳이 더 말하지 않았다. 아직 아버지처럼 달변을 늘어놓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그저 체온을 나눠 주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신에게 해 주셨던 것처럼.

“잘 자요, 미트라.”

천호는 눈을 감았다. 피곤했기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미트라는 누운 채로 그런 천호를 올려다보았다.

한참이나 그러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자라, 그대여.]

미트라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루시엘이 아닌 천호의 기분을 체감하였다.

이상할 정도로 잠이 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미트라는 천호의 품에 몸을 묻었다.

생애 처음으로 느끼는 타인의?아니, 천호의 온기를 만끽하였다.

* * *

다음 날 아침.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천호는 기분 좋게 눈을 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여, 잘 잤는가?]

[좋은 아침이다.]

[오늘은 어쩐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다.]

밝고 활기찬 목소리는 결코 꾸며 낸 게 아니었다.

잠에서 막 깬 터라 다소 멍해 있던 천호는 왼손으로 침대를 더듬어 미트라를 들어 올렸다.

시선을 옆으로 돌려 보니 루시엘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제의 분투 덕분에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좋은 아침이에요, 미트라.”

[응응, 좋은 아침이다.]

눈에 띄게 하이텐션인 미트라였다.

천호는 잠시 미트라가 왜 이러나 생각했고, 곧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팔베개가 그렇게 좋았나?’

확실히.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은근히 많은 미트라였으니까.

외로움도 많이 타고.

평소라면 여기서 다시 한 번 짓궂게 놀렸을 천호였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미트라의 황금빛 보석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앞으로도 자주 해 드릴게요.”

[으응? 뭘 말이냐. 나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시치미 뚝 떼고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결국 다시 웃고만 천호는 약간의 갈등 끝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다시는 팔베개를 안 해 주겠다-며 놀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이제야 겨우 다시 밝아진 미트라였으니까.

‘놀리는 것도 다 때가 있는 법이란다. 너무 밀어도, 너무 당겨도 안 되는 밀당과도 같이 말이다.’

오랜만에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린 천호는 그저 씩 웃으며 미트라의 황금빛 보석을 어루만졌다.

어쩐지 모르게 고양이나 강아지를 쓰다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정말 고양이나 강아지라도 된 것처럼 미트라가 활기차게 말했다.

[그대여, 일어났으면 어서 씻도록 하자. 내가 도와주겠다.]

“네, 미트라. 부탁할게요.”

침대에서 일어난 천호는 작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세숫대야 쪽으로 걸어갔다.

[너무 뜨거우면 말해라.]

미트라의 검신 끝에서 뜨거운 성수가 졸졸 나와 세숫대야를 채웠다.

아침마다 뜨거운 물, 그것도 성수로 세면을 하는 사치를 누리는 자는 아마 미궁 세계에도 몇 없을 터였다.

‘그렇게 좋았나?’

미트라가 좋아하니 천호도 좋긴 했지만, 고작 팔베개 한 번에 이렇게 좋아하는 미트라를 보니 조금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미트라.”

[왜 그러느냐, 혹시 너무 뜨거운가?]

“아뇨, 딱 좋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다. 어서 씻어라. 오늘은 물이 특히 좋은 것 같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성수로 세수뿐만 아니라 머리 감기까지 끝마친 천호는 일단 방 밖으로 나왔다.

미트라가 온풍으로 데워 둔 방과 달리, 복도의 공기는 무척이나 차가워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걱정 마라, 그대여.]

바로 그 순간 미트라의 검신에서 따뜻한 바람이 일어 천호를 감쌌다.

서비스가 이쯤 되니 슬슬 부담되기 시작한 천호였다.

“미트라.”

[왜 그러느냐, 뭔가 더 필요한 거라도 있나?]

“음… 아뇨, 딱 좋네요.”

[그대가 좋다니 나도 좋구나.]

헤실헤실 웃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방긋 웃는 미트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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