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74화 (74/211)

“과연, 가능성은 있군. 이쪽도 좀 더 조사해 보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이쪽에서 감사할 일이지. 시간만 더 있다면 그대의 아버지 이야기도 듣고 싶거늘… 애석하게도 그럴 시간까지는 없을 것 같구나. 남은 두 가지 이야기도 해야 하고.”

정말 아쉬운지 어깨까지 한 번 늘어트린 치유의 신이었지만 잠깐뿐이었다. 이내 다시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를 악동처럼 빛내며 입을 열었다.

“두 가지 이야기 중에 한 가지는 보상 이야기이다. 역병신을 물리친 그대에게 내가 직접 보상을 내려야 하겠지.”

크로니클 퀘스트에 대한 보상.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었다. 메인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치유의 신의 소원권이 있었다.

“음… 이건 어떻게 써야 할지…….”

천호가 말끝을 흐리며 티켓처럼 생긴 하얀색 소원권을 내밀자 치유의 신이 까르르 웃었다.

“말 그대로 소원권이니, 내가 이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이뤄 주도록 하마. 단,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심층에서만이다. 내가 직접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심층에서뿐이니. 그리고… 흠, 그래. 그대라면 조금 야한 소원도 허락해 주지.”

마지막에 살짝 윙크하는 모습이 요망하기 짝이 없었다.

치유의 신이 아니라 유혹의 신이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대여, 치유의 신이 장난치는 거다.]

[너무 진지하게 듣지 마라.]

미트라가 어쩐지 모르게 다급한, 그리고 간절한 어조로 말했고, 천호는 헛기침을 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트라가 말하지 않아도 장난이란 것을 잘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대여.]

“흠흠.”

천호는 다시 헛기침을 토했고, 치유의 신은 까르르 웃었다. 루시엘은 얼굴이 발개진 상태로 아무 말도 못했다.

“자, 아무튼. 소원권과 별개로 크로니클 퀘스트의 보상을 주어야겠지. 지금까지 대화하며 느꼈겠지만 난 꽤나 화통한 성격이다. 쪼잔한 보상을 내릴 생각은 없다. 뭔가 쓸모가 없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막 있지도 않은 애매한 물건을 내릴 생각도 없고.”

다시 턱을 괴며 씩 웃은 치유의 신이 은근한 눈으로 천호와 루시엘, 그리고 천호의 허리춤에 자리한 미트라를 바라보았다.

“한 명씩 다가와라. 내 신력으로 그대들의 영육을 성장시켜 줄 터이니.”

가볍게 말했지만, 사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치유의 신이 자신의 신력 일부를 천호와 미트라, 루시엘에게 양도하겠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천사부터 이리 오거라.”

치유의 신의 부름에 움찔한 루시엘이 천호를 돌아보았다. 기쁨과 걱정과 긴장이 뒤섞인 그 표정에 천호는 괜찮다는 듯 웃어 주었고, 루시엘은 용기를 내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치유의 신에게 다가섰다.

“귀엽구나. 조금 더 가까이 오려무나.”

은근한 부름에 루시엘은 목각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딱딱하게 움직였다. 겨우겨우 치유의 신과 무릎이 닿을 만치 다가서자 치유의 신이 불쑥 손을 뻗어 루시엘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루시엘은 너무 놀라 무어라 소리를 내지도 못 했다.

치유의 신은 그런 루시엘의 모습에 호탕하게 웃더니 한 팔로 루시엘의 허리를 안았다. 다른 한 손으로는 루시엘의 턱을 치켜들었다.

“얌전히 있거라.”

신의 명령이었다. 루시엘은 잔뜩 언 채로 꼼짝도 못 했고, 치유의 신이 그런 루시엘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천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루시엘은 눈을 꽉 감았고, 치유의 신은 다시 씩 웃더니 루시엘의 입술이 아닌 뺨에 입맞춤을 주었다.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붉은색 빛이 루시엘의 전신을 휘감았고, 그 빛은 이내 다시 분홍색 빛이 되었다.

루시엘을 완전히 뒤덮어 아예 보이지 않게 하더니, 그대로 강하게 빛나 천막 안을 분홍빛으로 가득 채웠다.

연속해서 빛의 창이 떠올랐다. 루시엘은 빨개진 얼굴로 숨을 헐떡였고, 치유의 신은 루시엘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들겨 일어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천호는 루시엘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날개의 개수.

밤마다 항상 천호와 루시엘을 덮어 주던 그것이 두 장에서 네 장이 되었다.

루시엘의 머리 위에 있던 빛의 고리도 이전보다 조금 더 크고 화려하게 변했다.

“아?”

루시엘이 멍한 목소리를 흘렸다.

치유의 신이 다시 한 번 턱을 괴며 말했다.

“이제부터 5급 천사다. 동시에 내 사도이기도 하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 루시엘.”

치유의 신의 말에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던 루시엘은 이내 그렇잖아도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5급 천사. 치유의 신의 사도.

천호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9급 천사에 불과했던 루시엘이었으니, 실로 엄청난 신분 상승이었다.

그래서 루시엘은 저도 모르게 말하고 말았다.

“저, 정말요?”

치유의 신이 다시 웃었다. 어쩜 이렇게 귀엽냐며 루시엘의 엉덩이를 찰싹 두드린 뒤 말했다.

“그래, 네 날개가 그 증거이다.”

루시엘은 그제야 자신의 등 뒤를 돌아보았고, 네 장의 날개를 파닥여 보았다.

“용사님.”

“네, 루시엘.”

천호의 대답에 루시엘은 다시 움찔했다. 천호의 대답 때문이라기보다는, 뭔가를 하려다 말았기 때문이다.

그 뭔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눈치챈 치유의 신은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루시엘은 바로 반응했다. 네 장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천호에게 안겨들었다.

“용사님!”

“축하해요.”

천호와 루시엘이 서로를 꽉 끌어안았고, 치유의 신은 에이젤처럼 므흐흐 웃음을 흘렸다.

“보기 좋다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구나. 용사여, 성검과 함께 오거라. 성검에게도 축복을 내려야 할 터이니.”

새삼 다시 마른침을 삼킨 천호는 허리춤에서 미트라를 뽑아 들었다.

미트라 역시 약간 긴장한 느낌이었다.

“다시 보게 되어 반갑구나, 미트라.”

[저도 반갑습니다. 치유의 신이시여.]

미트라의 목소리는 치유의 신에게도 닿았다. 치유의 신은 천호에게 받아 든 미트라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더니 황금색 보석에 살며시 입술을 맞추었다.

루시엘 때와 마찬가지로 붉은색 기운이 미트라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 빛은 이내 다시 황금빛이 되었다.

이번에도 빛의 창이 떠올랐다.

성장이란 말에 천호는 미트라의 정신세계를 떠올렸다. 미트라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지 궁금했다.

“이제 그대의 차례이다.”

치유의 신이 미트라를 돌려주며 말했다.

천호는 조심스럽게 미트라를 갈무리했고, 미트라는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무 흥분하지 마라. 현자의 시간을 사용하는 것을 추천한다.]

천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치유의 신에게 다가섰다. 치유의 신은 자기보다 덩치가 큰 천호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 꽤나 장신인 치유의 신이었지만 천호의 키가 워낙 큰 터라 그래도 여전히 치유의 신이 올려다봐야 하는 자세였다.

“흐음.”

치유의 신이 천호를 올려다보며 악동 같이 웃었다. 마치 곧 맛있는 것을 먹는다는 듯 입술까지 살짝 핥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천호는 나름 열심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지만 치유의 신은 그 정도는 간파할 수 있다는 듯 요망하게 웃더니 천호의 팔을 잡아당겼다. 상체를 숙이게 하더니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붉은색 빛이 일어났다.

미트라가 아주 작게 끙 소리를 냈고, 루시엘이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치유의 신이 눈을 부릅떴다.

입술이 닿은 순간 느낀 것.

치유의 신 자신의 신력에 반응한 무언가.

붉은색 빛은 천호의 전신을 휘감지 못 했다. 천호의 전신에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미트라도 이변을 감지했다. 루시엘이 눈을 크게 떴다.

용사의 피.

그리고 거기에 더해진 어머니의 피.

폭발하듯 일어난 황금빛 섬광이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 * *

[엉큼한 Lv6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엉큼한 Lv6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당신의 천사의 격이 높아졌습니다.]

[당신의 천사가 치유의 신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치유의 신이 당신의 천사를 총애합니다.]

[당신의 성검이 성장했습니다.]

[성검 스킬이 개방됩니다.]

[엉큼한 Lv6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엉큼한 Lv6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엉큼한 Lv6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번뇌력 Lv4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였다.

아직 아버지께서 용사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 하지만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 때.

어린 천호는 아버지께 물었다.

“아빠랑 엄마 중에 누가 더 세?”

질문의 이유는 단순했다. 본래 남자는 어리든 다 자랐든 늙었든 VS놀이에 환장하기 마련이었다.

사자와 호랑이를 보면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검이랑 창 중에 뭐가 더 강할까.

그냥 궁금한 거였다. 더욱이 어린 천호는 어린애였다. 무릇 어린애는 호기심이 왕성할 뿐만 아니라 궁금한 건 일단 묻고 보는 법이었다. 그것도 주로 엄마나 아빠에게.

그래서 천호는 아무 생각 없이 물었고, 이 아무 생각 없이 건넨 질문에 아버지께서는 무척이나 진지하게 고민하셨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린 천호가 기다리다 지쳐 괜히 물어봤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마침내 결론을 내리신 아버지께서는 수련장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계신 어머니 눈치를 살피시는가 싶더니 어린 천호에게 바짝 접근하셨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씀하셨다.

“낮에는 아빠가 네 엄마한테 지는데, 밤에는 이긴…….”

“애한테 뭔 개소리야!”

“악!”

어머니의 등짝 스매싱에 아버지께서 격침당하셨다.

무너지는 아버지를 보며 어린 천호는 하늘을 보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낮에는 정말 엄마가 더 세구나.’

어린 천호가 어린애답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간신히 차분함을 되찾은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천호야.”

“응, 엄마.”

“너희 아빠는 바보에 멍청이에 아무튼 평상시 모습만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양반이지만 정말 강하단다. 할 때는 하는 양반이기도 하고.”

“으응.”

어머니의 엉덩이에 깔려 신음하고 계신 아버지를 슬쩍 내려다본 어린 천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께서는 계속 말씀하셨다.

“하지만 천호야. 너는 네 아빠보다 더 강해질 거란다.”

“정말로? 아빠보다 더?”

“그래, 넌 엄마랑 아빠 자식이니까.”

강한 확신.

그리고 그 확신에는 분명한 근거가 존재했다.

* * *

천막 안을 가득 채웠던 황금빛이 사그라들었다.

미트라는 숨을 헐떡였고, 루시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치유의 신은 눈을 부릅뜬 채 천호를 바라보았다.

루시엘처럼 외양에 큰 변화가 생기진 않았다.

치유의 신의 입맞춤을 받기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양에 불과했다. 아니, 치유의 신은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었다. 황금빛 섬광이 일어났을 때, 그 빛이 모두의 시선으로부터 천호를 감추었을 때.

천호의 외양에 변화가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천호는 지금과 다른 모습이 되었었다.

치유의 신은 숨을 골랐다. 다시 한 번 천호의 전신을 눈에 담았다. 그 순간 루시엘이 소리쳤다.

“용사님! 눈이!”

어째서 바로 눈치채지 못 했을까.

치유의 신이 천호의 눈을 보았다. 미트라도 보았다.

천호의 눈동자 색이 변하였다. 평범한 갈색에서 선명한 황금빛으로.

[그대여…….]

미트라가 약간이지만 당혹스런 목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이 모든 혼란 속에서 천호는 이유 모를 고양감을 느꼈다.

어째서일까.

치유의 신의 입맞춤 덕분에 천호 자신이 강해진 것일까? 그래서 가슴 벅찬, 포만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역병신의 사도들의 정수로부터 마기를 흡수했을 때와는 달랐다.

훨씬 더 자극이 강했고, 만족도 또한 높았다.

치유의 신은 직감했다.

‘먹어 치웠어.’

입맞춤으로 전달해 준 신력을.

흡수가 아니었다. 포식이었다.

천호가 치유의 신 자신의 신력을 강탈하듯 먹어 치워 버렸다.

애당초 천호에게 줄 생각으로 불어넣은 신력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분명히 다른 상황이었다.

불어넣어 준 신력을 받아들이는 것과 직접 먹어 치우는 것.

결과는 비슷했지만 과정이 달랐다.

‘어떻게.’

미궁 세계에 소환된 많은 영웅들을 보았다.

개중에 천호 같은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력을 포식하는 자라니.

어떤 기술 같은 것이 아니었다. 입술을 맞춘 순간 느낄 수 있었다.

타고난 것이었다. 천호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힘이었다.

‘악마?’

가장 먼저 떠오른 가능성이었지만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기에는 천호의 영육이 너무나 맑고 깨끗했다. 지금까지의 행적만 보아도 올곧은 성품의 소유자였고.

‘초월종.’

태어난 그 순간 선을 넘는, 이미 초월자로 태어난 존재들.

치유의 신 자신 역시 초월종이었다. 천호 또한 초월종인 것이, 적어도 초월종의 피를 이은 것이 분명했다.

[그대여, 괜찮은가?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미트라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많이 걱정한 모양이었다.

천호는 황금빛 보석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괜찮아요. 오히려… 힘이 넘쳐요.”

전신에 힘이 넘쳤다.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 보니 거의 모든 능력치에 추가 보정치가 붙었다.

대략 하여 1.2배.

수치상의 증폭은 저 정도였지만, 시너지 효과까지 고려한다면 1.5배 이상 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머니.’

치유의 신이 당황하고 있었다. 루시엘이나 미트라 때와는 달랐다.

그리고 원인은 역시 하나뿐이었다.

천호 자신의 몸에 흐르는 어머니의 피.

“그대여, 솔직히 말하라. 그대의 아버지는 용사라 하였지. 인간이었나?”

치유의 신이 무척이나 진지한 눈으로 천호를 보며 물었다. 악동 같은 장난기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미궁 세계의 여러 생명들을 책임지고 있는 대신에 어울리는 위압감이 그녀와 함께했다.

“예, 아마도.”

“아마도?”

“일단 아버지께서는 본인께서 인간이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그게…….”

“그게?”

“그…….”

“그?”

“저도 잘 모릅…….”

“뭐라고? 모른다고? 왜?”

“말씀을 안 해 주셔서…….”

뭔가 한심한 대답이었지만 사실이었으니까.

치유의 신은 멍한 얼굴로 천호를 보았고, 이내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헛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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