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70화 (70/211)

* * *

[생각났다.]

미트라가 낮고 작게 말했다. 왜 이제야 떠올린 것일까. 왜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까.

당연했다. 이곳은 대미궁 안이었다.

플로렌 왕국의 왕도처럼 명확한 지명을 알 수 있는 장소도 아니었다.

바로 알아차리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트라는 죄책감을 느꼈다.

가슴이 옥죄는 고통을 느꼈다.

“미트라?”

미트라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천호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성검인 미트라가 용사인 천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듯이, 천호 역시 미트라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천호는 지도를 그리던 손을 멈추고 미트라를 들어 올렸다.

“미트라,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걱정스런 물음에 미트라는 긴 한숨을 토하더니 침울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기억이 났다. 예전에 이 근방을 지난 적이 있다.]

[세계가 대미궁에 편입되기 전에… 레온과 함께 마왕과 맞서던 시절에.]

가능한 일이었다.

4층의 플로렌 왕국도 비슷한 경우였으니까.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천호의 물음에 미트라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천호의 머릿속에 어찌할 바를 몰라 어색한 미소를 짓는 미트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대와는 레온과 함께 싸운 시절 이야기를 그다지 한 적이 없군.]

“미트라만 좋다면 들을 준비는 언제든 되어 있어요.”

천호가 짐짓 밝게 말하자 미트라가 작게 웃었다. 다시 긴 숨을 토한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레온의 싸움은 그대의 싸움과는 조금 형태가 달랐다. 세계가 이미 마왕에게 반쯤 지배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레온의 싸움은 모험이라기보다는 전쟁에 가까웠지.]

용사와 그 동료들이 마왕성에 난입해 마왕을 쓰러트린다?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전쟁 와중에 소수의 결사대가 적국 가장 깊은 곳에 침투해 왕을 죽인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으니까.

레온하르트는 전쟁을 했다.

왕이 되어 군대를 이끌었고, 마왕의 군대와 점령지를 하나하나 격파해 나갔다.

[마왕에게는 다섯 개의 군단이 있었다. 각각의 군단을 지휘하는 다섯 군단장이 우리의 당면한 적이었지.]

“아.”

[음? 왜 그러나?]

“아뇨, 별 건 아니고… 순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비슷하다니?]

“아버지 이야기요. 파이엔에 쳐들어온 마왕도 휘하에 다섯 개의 군단을 두고 있었거든요. 당연히 군단장도 다섯이었고.”

[우연치고는 신기한 이야기군.]

“그러게요.”

하지만 결국 우연일 터였다.

아버지께서 가셨던 파이엔과 미궁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였으니까.

더욱이 시간대도 맞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파이엔에 가셨던 것은 기껏해야 이십여 년 전이었지만, 용사 레온하르트가 미트라와 함께 마왕에 맞선 것은 벌써 수백 년 전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왜일까.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그건 미트라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여, 언젠가 그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나?]

“그럴게요. 오늘은 우선 미트라 이야기부터 듣고요.”

[그래.]

잠시 멈추었던 이야기가 재개되었다.

[레온은 본격적으로 마왕군과 전쟁을 하기 전에 일단 동료들을 모았다. 내가 레온과 만났을 때는 이미 여러 동료들과 함께하고 있을 때였지.]

인간도 있었고 수인도 있었다. 엘프 같은 요정도 있었고.

[레온은 왕이 되었다. 군대를 이끌었고… 전쟁인 만큼 당연히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레온의 동료들… 그러니까 아이테르 제국의 초대 장군들은 쉬이 목숨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인계에서 손에 꼽을 강자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절대란 존재하지 않았다.

레온의 동료들 가운데서도 목숨을 잃는 자가 나왔다.

[설원에서의 싸움이었다. 마왕 휘하 군단장들과 처음으로 직접 대결을 펼친 장소였지…….]

성기사 루그.

다섯 여신 가운데 하나인 전쟁의 여신 이브나일의 성기사였던 그는 레온의?아니, 모두의 방패였었다.

[군단장과의 첫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루그는 도주 중에 목숨을 잃었다. 군단장의 공격을 거의 혼자서 막아 낸 결과였다.

[당시의 우리에게는 시신을 제대로 수습할 여력조차 없었다. 설원에… 눈에 띄는 장소에 루그를 묻고 떠나야만 했다.]

미트라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그날의 심정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천호는 서툰 위로의 말을 꺼내는 대신 황금빛 보석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 손길을 느끼듯 미트라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왕을 물리치고… 전쟁이 다 끝난 뒤에 살아남은 동료들과 함께 다시 이곳을 찾아왔다. 아이테르 제국의 장인들이 제대로 된 루그의 무덤을 만들었지.]

당시에는 설원이기는 해도 이렇게 눈보라가 심한 곳은 아니었다.

겨울에는 조금 힘들어도, 봄이나 여름이면 제법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올 수 있는 장소였었다.

[그대가 그리고 있는 지도를 보고 생각이 났다. 지도 서쪽에 자리한 팔각형 모양의 바위 언덕… 그곳에 루그의 무덤이 있다.]

쉬이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지형이었다.

옛 동료의 무덤.

천호는 무어라 말을 꺼내기 앞서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마침 때를 맞추듯 루시엘이 목욕탕에서 걸어 나왔다.

“용사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그녀가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천호는 미트라의 보석을 어루만지며 답했다.

“미트라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미트라, 루시엘에게 이야기해도 될까요?”

[이야기해도 괜찮다.]

미트라가 작게 답하자 천호는 루시엘을 돌아보았고, 루시엘은 젖은 머리를 말리며 천호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대강의 이야기를 들은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이야기네요. 어쩌면 미트라 님이 계셔서 이곳에 오게 된 걸지도 몰라요.”

“미트라가 있어서요?”

“네, 저층과 중층을 연결하는 이곳은 라구엘 선배가 말했던 것처럼 좀 특별한 공간이거든요. 이 설원 자체에 오게 된 건 단순히 우연일지 몰라도… 루그 님의 무덤 근처로 오게 된 건 미트라 님의 영향일 가능성이 있어요.”

거기까지 말한 루시엘은 천호의 손에 들린 미트라를 돌아보았다.

“미트라 님, 루그 님께 인사드리러 가시지 않을래요?”

[루그에게?]

미트라의 목소리는 루시엘에게 닿지 않았다. 하지만 루시엘은 미트라의 대답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온 게 정말 완전한 우연이 아니라면… 그게 좋을 것 같아서요.”

사실은 미트라의 마음을 조금 더 강조하고 싶었지만, 괜한 참견이 될 수도 있어서 적당히 얼버무린 루시엘이었다.

미트라는 쉬이 답하지 못했고, 천호는 미트라의 보석을 가볍게 두드렸다.

“솔직히 가고 싶죠?”

[…가고는 싶다. 하지만 그럼 여정이 늦어지지 않겠나.]

“길어 봤자 하루인걸요.”

아무 이유 없이 시간을 지체하는 것이라면 천호도 반대였지만, 미트라를 위해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들렀다 가요. 루시엘, 미트라가 들렀다 가고 싶대요.”

“네, 용사님. 그럼 내일은 루그 님께 인사드리러 가요.”

[으음…….]

미트라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결국 긴 한숨 뒤 웃음 섞인 대답을 내놓았다.

[알겠다. 그대의 호의를 감사히 받겠다. 루시엘에게도 감사하다 전해다오.]

“별말씀을. 루시엘, 미트라가 정말 고맙대요.”

“저야말로 늘 감사해요, 미트라 님.”

생긋 웃은 루시엘이 조심스럽게 황금빛 보석을 어루만졌고, 잠시 침묵하던 미트라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여, 루시엘은 진짜 천사가 맞는 것 같다.]

“그렇죠?”

천호가 웃었고, 영문을 모르는 루시엘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 * *

달이 지고 해가 떠올랐다.

설원의 아침은 여전히 춥고 매서웠지만 그래도 밤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었다.

나뭇가지로 만든 설신을 신은 천호가 성큼성큼 앞장섰고, 루시엘이 천호가 지난 자리를 그대로 따라 이동했다.

옷을 두껍게 입고 그 위에 다시 천호가 만든 가죽 망토를 두른 터라 추위는 그렇게까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나아가다 보니 하얗고 거대한 곰처럼 생긴 마물이 천호와 루시엘 앞을 가로막았다.

설원에서만 발견되는 화이트 베어버그였다.

미트라가 설명했고, 루시엘이 뒤에서 설명했다. 우렁찬 포효를 터트리며 덤벼드는 놈을 천호는 무심한 듯 시크하게 베어 넘겼다.

가죽이 두꺼운 놈이었지만 샤프니스 소드에 천호의 검술이 더해지니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루시엘은 인벤토리를 열며 생각했다.

‘무슨 맛일까? 랫 키메라 고기는 정말 맛있었는데.’

루시엘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인벤토리에 베어버그를 밀어 넣으며 천호가 말했다.

“오늘은 전골을 해 드릴게요. 곰 전골.”

진짜 곰은 아니었지만 생긴 게 일단 곰에 가까웠으니까.

뜨거운 육수에 야채랑 버섯도 송송 썰어 넣어서.

“정말요?”

“네, 정말요. 맛있겠죠?”

“네♥”

“그리고 목욕탕도 준비해 드릴게요. 뜨거운 성수를 담아서.”

“용사님 너무 좋아요!”

“저도 좋아요, 루시엘.”

“어머, 용사님.”

“하하하.”

“호호호.”

“하하하하.”

“호호호호.”

“?하고 있지 않을까요.”

에이젤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위 틈바구니.

어제 머문 그곳은 아니었다. 눈 속에 발이 푹푹 파묻혀 가면서도 나름 열심히 이동했으니까.

잠시 쉬어 가기 위해 멈춘 곳에서 에이젤은 자신의 상상을 늘어놓았고, 라구엘은 똑같이 다 죽어 가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기력이 있는 아우라엘만이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런 식으로 웃진… 않겠지.”

안타깝게도 내용에 대해서는 그리 부정할 수 없었다.

“흑흑, 용사님… 보고 싶어요… 꺼억 하고 싶어요…….”

에이젤이 훌쩍이는 그때였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라가 돌연 눈을 크게 뜨더니 듀디의 뺨을 마구 때렸다.

“듀디! 야! 듀디! 정신 차려!”

듀디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깜짝 놀란 에이젤이 얼른 듀디를 끌어안았고, 라구엘도 똑같이 했다. 체온으로나마 꽁꽁 언 듀디의 몸을 녹이기 위함이었다.

“선배!”

에이젤의 재촉에 아우라엘 역시 듀디를 꼭 끌어안았고, 세 천사들의 품에 안긴 듀디는 멍한 목소리를 흘렸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

“죽지 마요!”

다급히 외친 에이젤은 얼른 회복 마법을 시전했다. 아우라엘은 다급히 바위 틈 밖을 보았다. 지금 있는 장소는 너무 협소해 불조차 제대로 피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쉴 만한 장소가 없을까.

불을 피우고 몸을 녹일 만한 장소가 없을까.

“저쪽! 저쪽에 동굴이!”

사라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과연 동굴 비슷한 것이 있었다. 하얀 눈으로 입구가 반 이상 막혀 있었지만, 오히려 환영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눈이 벽 역할을 해 줄 터이니 말이다.

“조금만 힘내요!”

양손으로 듀디를 꽉 잡은 아우라엘이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눈보라가 심해 제대로 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전력을 다해 동굴 쪽으로 저공비행을 했고, 에이젤과 라구엘, 사라가 그런 아우라엘을 따라 열심히 달렸다. 발이 눈에 푹푹 빠져 허우적대는 모양새였지만 그럭저럭 속도는 나왔다.

아우라엘은 급히 동굴 안으로 들어간 뒤 조명 마법으로 어둠을 걷어 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였다.

“어?”

이제 보니 제대로 된 동굴이 아니었다. 동굴은 동굴이었는데, 양쪽 통로 사이가 10미터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은 장소였다.

하지만 바람이 통하지 않았다. 동굴 입구 양쪽에 눈으로 된 벽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눈 벽.

자연적이지 않았다. 눈을 네모나게 자른 뒤 쌓은 게 분명했다.

바닥에는 불을 피운 흔적이 선명했다.

동굴 천장에는 수증기라도 잔뜩 올라왔는지 물기가 있었고.

“허억, 헉.”

뒤늦게 동굴 안에 들어온 에이젤이 바닥에 나자빠지며 가쁜 숨을 토했고, 아우라엘과 똑같이 인위적인 흔적을 발견한 라구엘은 눈을 크게 떴다.

“왜요? 왜 다들… 헉?!”

에이젤도 마침내 눈치챘다. 세 천사들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했다.

“용사님!”

천호와 루시엘이 분명했다. 네모반듯하게 세워진 눈 벽을 보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우, 우리보다 앞선 거예요.”

출발 지점은 달랐지만, 어찌 되었든 다들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으니 동선이 겹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에이젤은 서둘러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먹다 남긴 음식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흑흑.”

에이젤이 왜 우는지 짐작한 라구엘은 에이젤의 명예를 위해 침묵했고, 아우라엘은 일단 불을 피운 뒤 모포로 동굴 입구를 거의 다 막았다. 불을 피웠으니 환기를 위해서라도 약간의 구멍은 필요했다.

“어찌 되었든 이제 용사님과 동선이 겹쳤어.”

라구엘이 말했고, 아우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젤이 다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럼 합류할 수도 있겠네요?”

열심히 서둘러 쫓아간다면.

하지만 기동 속도를 고려하면 절대로 무리였다. 어떤 방법을 쓰고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천호라면 이 설원 속에서도 빠르게 이동하고 있을 것 같았으니까.

기대한 만큼 실망도 컸는지 에이젤의 몸이 축 늘어졌다.

하지만 라구엘은 조금 달랐다. 지적인 그녀는 새삼 동굴 안을 돌아보았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대신에 이 동선을 따라가면 지금처럼 용사님의 쉼터를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지금처럼 눈으로 벽을 세운 동굴이라든지, 이글루라든지, 아무튼 제대로 쉴 만한 장소가.

“아아, 아아아!”

에이젤의 눈이 다시 희망으로 불타올랐다.

제대로 된 쉼터가 있으면 지금처럼 불을 크게 피울 수도, 바닥에 드러누울 수도 있었으니까!

세 천사들은 거의 동시에 같은 방향을 돌아보았다.

북쪽.

연결로의 전송진이 자리한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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