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69화 (69/211)

* * *

[다섯 명이 되었습니다.]

[1차 전송을 개시합니다.]

[1차 전송 인원 : 박천호, 미트라, 루시엘, 잔불이, 마목이]

천호는 눈을 깜박였다.

루시엘도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둘은 거의 동시에 몸을 움츠렸다.

“요, 용사님?!”

루시엘의 당혹 섞인 목소리는 너무나 작고 가냘팠다. 아니, 본래 그리 작은 소리가 아니었지만 주변 소리에 묻혀 그렇게 들렸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앞을 제대로 보기 힘들 만치 거센 눈보라였다.

얇은 옷을 입고 있던 루시엘은 갑자기 짓쳐 드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바닥에는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 전송된 지 이제 겨우 십 초 남짓이었지만 루시엘의 분홍색 머리 위에는 하얀 눈이 가득했다. 코와 뺨이 순식간에 빨개진 것이, 이대로 조금만 지체하면 어디 한 군데가 상할 것만 같았다.

“미트라!”

천호가 급히 미트라를 뽑아 들었다. 미트라는 강한 열풍을 일으켜 추위와 눈보라를 몰아냈지만 역부족이었다. 실외가 아닌 실내로 장소를 옮겨야만 했다.

[동굴이 있는 것 같다!]

미트라가 외친 그때 천호 역시 발견했다. 저만치 앞에 절벽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높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거대한 벽과 커다란 동굴 입구가 보였다.

“루시엘! 조금만 힘을 내요!”

“네!”

바로 옆에 있었지만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눠야만 했다. 천호는 비틀거리는 루시엘의 허리를 한 손으로 안은 뒤 눈보라를 뚫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허억.”

“하악.”

50여 미터를 나아간 끝에 겨우 동굴 안에 도달한 천호와 루시엘은 거의 동시에 숨을 토했다.

동굴 안이라 하여 갑자기 따뜻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눈보라를 맨몸으로 맞아야 했던 밖보다는 나았다.

“일단 벽을 세우죠.”

“아흐, 네.”

간신히 답한 루시엘이 인벤토리를 열어 책장을 꺼내기 시작했다. 천호는 잠시 동굴 안쪽을 돌아보았다.

동굴은 무척이나 컸다. 천장 높이는 10미터 남짓했고, 폭도 그쯤 되는 것 같았다.

저만치에 빛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단순한 일자 형태의 굴인 것 같았다.

[당장 보이는 마물은 없는 것 같다.]

일자 형태의 굴이고, 반대편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눈에 띌 정도로 대형 마물은 없는 것 같았다.

사실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추위를 피하는 게 급선무였다.

“용사님.”

양쪽에 두 개씩, 책장 네 개로 벽을 세운 루시엘이 책장 안쪽에서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

천호는 루시엘과 함께 3층에서 공수한 천막용 천을 꺼낸 뒤 책장 위를 덮었다. 2층 사막에서 천막을 만들었을 때와 같은 요령이었다.

“하아.”

루시엘이 이제야 좀 살겠다는 듯 어깨를 늘어트리며 숨을 토했다. 천으로 지붕을 만들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훨씬 나아진 기분이었다.

“잠시만요.”

천호는 천막 밖으로 나가 바람이 새지 않도록 마감 처리를 한 뒤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가 미트라를 들어 올렸다.

“미트라, 부탁해요.”

[알겠다.]

뜨거운 바람이 천막 안을 채웠다.

천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냄비를 꺼내 들었다.

“미트라, 부탁해요.”

[으음, 알겠다.]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 더욱이 요즘에는 천호를 돕는 데 꽤나 적극적이 된 미트라였다.

척하면 탁이라고, 미트라는 냄비를 보자마자 천호의 의도를 읽어 냈다. 목욕물보다 훨씬 더 뜨거운 물을 냄비 안에 채웠다.

천호는 거기다 플로렌 왕국에서 받은 초콜릿을 조각내어 넣었다. 물이 워낙 뜨거웠기 때문인지 슥슥 젓자 금방 물에 녹아들었다.

“자요, 속이 따뜻해질 거예요.”

“고마워요, 용사님. 미트라 님도 감사해요.”

꿀꺽 침을 삼키며 답한 루시엘은 천호가 내민 컵을 받아 들었다. 나무로 만든 컵이 따뜻했다.

“하아…….”

이제 정말 살 것 같았다.

딱딱해졌던 손가락도 다시 말랑말랑해졌고.

똑같이 초콜릿 녹인 물을 마셔 속을 따뜻하게 한 천호는 꽤나 늦은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죠?”

“어… 다섯 명이 되었다고 했죠? 분명.”

[그랬다, 분명 그런 빛의 창이 나타났었다.]

다섯 명이 모두 되었다.

솔직히 미트라까지는 예상을 했다. 그런데 잔불이와 마목이라니.

“말이 되는 것 같기는 하군요.”

잔불이와 마목이는 루시엘의 인벤토리에 들어가지 못 했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했던 것처럼, 루시엘의 인벤토리에는 살아 있는 생물이 들어갈 수 없었다.

천호 덕분에 인벤토리 레벨이 꽤나 오른 지금도 용량이 늘어났을 뿐, 생물 반입에 대해서는 변한 것이 없었다.

덕분에 잔불이와 마목이는 항상 천호나 루시엘의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천호는 일단 허리춤에 매달린 가죽 주머니를 열어 잔불이를 꺼내 보았다.

주먹보다도 작은 불꽃인 잔불이가 잠이 막 깬 사람처럼 노곤노곤한 모습을 보였다.

꾸이꾸이.

졸리니까 깨우지 말라는 것 같았다.

천호는 그런 잔불이를 냄비 아래 둬서 뜨거운 물을 데우게 한 뒤 루시엘 쪽을 보았다.

루시엘 역시 허리에 매단 가죽 주머니에서 작은 화분을 꺼냈다.

“마목마목.”

어제 확인했을 때만 해도 그냥 새싹이었는데, 오늘 보니 제법 나무?아니, 나뭇가지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가느다란 줄기 끝에 달린 동그란 머리에는 입도 달려 있어서 작게나마 자기 이름을 말하기도 했다.

“다섯… 명이긴 한 거 같죠?”

“어… 네, 대미궁 기준에서는 마물이나 인간이나 정령이나… 그게 그거일 테니까요.”

굳이 따지자면 잔불이는 성령, 마목이는 마물이겠지만 루시엘이 말했듯이 대미궁에게 있어서는 그리 유의미한 차이가 아니었다.

“다른 일행이 걱정이네요.”

루시엘과 둘이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냥 생각일 뿐이었다.

[그래도 물자를 미리 좀 꺼내 놔서 다행이다.]

에이젤을 필두로 한 일행이 서로 천호와 가겠다고 옥신각신할 때 미리 인벤토리에서 물자를 꺼내 둔 루시엘이었다.

어차피 조별로 가져가야 하니 미리 꺼내 둔다는 느낌으로 꺼낸 것이었는데,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이 설원 지대… 클까요?”

천호의 물음에 루시엘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층에 가깝다고 했지만 결국엔 연결로니 그렇게 길지는 않을 거예요.”

“그나마 다행이군요.”

며칠 정도라면 나머지 일행도 어찌어찌 버티겠지.

물자도 있고.

여기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천호도 루시엘도 새삼 긴장이 풀렸다.

거의 동시에 몸을 늘어트렸고, 그런 서로를 보며 작게 웃었다.

특히 루시엘은 뺨까지 조금 붉혔다.

“저기, 용사님.”

“네, 루시엘.”

“오랜만이네요. 1층 생각도 나구.”

1층까지만 해도 단 둘이서 여행을 했으니까.

“그러게요.”

천호가 말했고, 루시엘은 새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뺨을 붉게 물들였다.

천호와 둘뿐이란 사실이 좋으면서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음.”

천호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생각했다.

‘귀, 귀여워.’

귀여웠다. 아니, 사랑스러웠다.

딱히 정화 마법도 쓰지 않았는데 루시엘의 몸 곳곳에서 분홍색 빛이 이는 것만 같았다.

[그대여.]

[나도 있다. 나도.]

[잔불이랑 마목이도 있고.]

[단 둘이 아니다, 단 둘이.]

어쩐지 딱딱해진 어조로 미트라가 말했고, 천호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거센 눈보라가 몰아쳤다.

매서운 추위가 사정없이 짓쳐 들었다.

어찌어찌 찾은, 동굴이라 하기도 민망한 바위 틈바구니.

에이젤은 쪼그려 앉은 채 퀭한 눈으로 작은 모닥불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옆에 바짝 붙어 앉은 라구엘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춥고 배고프고 졸렸다.

작게 피운 모닥불의 화력은 너무 약했고, 유일한 식량인 육포는 차갑게 굳어 거의 돌덩이나 다름없었다. 불에 어찌어찌 녹여도 씹기 어려웠고, 삼키기도 힘들었다.

“두 사람 다 정신 차려.”

그나마 체력이 있는 아우라엘이 에이젤과 라구엘을 돌봤다. 사실 두 사람 외에도 돌볼 사람이 둘이나 더 있었다. 락 드워프 사라와 듀디였다.

락 드워프인 둘은 그나마 추위에 강한 듯했지만, 퀭한 눈으로 웅크리고 있는 것은 똑같았다.

4층에서 얻은 모포는 바위틈을 막는 데 모두 쓴 터라 딱히 덮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그저 서로 바짝 붙어 앉아 체온을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설원 지대에 들어서고 하루.

단 하루 만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일행이었다.

“루시엘…….”

에이젤이 문득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시엘 선배는… 잘 먹고 잘 자고… 아무튼 잘 살고 있겠…죠?”

예전에는 루시엘 걱정을 잔뜩 하던 일행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진실을 알아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진실의 단맛을 체감해 버렸으니까.

“목욕…….”

라구엘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밖에서는 눈보라가 몰아치지만 이 와중에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있겠지. 어쩌면 노천탕을 만들어서 풍류를 즐기고 있을지도.

“따뜻한 요리…….”

사라도 작게 말했다.

모닥불에 딱딱한 육포 구워 먹는 게 아니라 뭔가 제대로 된 요리를 해 먹겠지. 어쩌면 코스 요리를 즐기고 있을지도.

“잠자리…….”

에이젤이 다시 중얼거렸다.

이런 바위틈에 낑겨 자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천막을 만들겠지. 난방도 완벽한.

넓은 공간에 편히 누워서.

어쩌면 용사님이랑?

마지막에 가서 므흐흐 웃은 에이젤이었지만 이내 다시 퀭하고 살벌한 눈이 되었다.

“치사해…….”

엄밀히 말하면 치사한 게 아니었지만.

루시엘은 정말 착하고 좋은 선배였지만.

아우라엘이 긴 숨을 토했다.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잘 지내겠지만… 우리 걱정을 하고 있을 거야. 우리 걱정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할걸?”

“정말요?”

“아…마도?”

“아우라엘.”

“응, 라구엘.”

“만나면 그냥 몇 대 때려 주자.”

“저는 꼬집을 거예요.”

“그, 그래.”

사라와 듀디는 천사들의 대화를 들으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도 비슷한 심정이었으니까.

‘루시엘…….’

아우라엘은 루시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 분명 에이젤의 말처럼 이래저래 편히 지내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루시엘은 정말 착한 아이였으니까. 지금쯤 다른 일행들 걱정도 많이 하고 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지, 루시엘?’

아우라엘은 따뜻한 눈으로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 * *

“꺼억.”

저도 모르게 트림을 한 루시엘은 급히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다행히 혼자뿐이었다.

그리 높지 않은, 동네 뒷산이라 해도 좋을 작은 산의 정상.

책장 목욕탕을 가득 채운 뜨거운 성수에 몸을 담근 채 루시엘은 멀리 바라보았다. 천막에 작게 뚫어 놓은 환기용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적절한 온도.

물속은 따뜻했고, 물 밖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과 수증기가 섞여 딱 적절한 온도가 되었다.

잔불이 덕분에 수온은 계속 따뜻한 상태였고.

루시엘은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쟁반 위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천호가 만든 특제 우동이 가득했던 그릇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쫄깃한 면발과 달짝지근하면서고 깊은 맛을 내는 국물.

목욕탕 밖의 서늘함이 우동의 맛을 한층 더 배가시킨 기분이었다.

배부르고 따뜻하니 노곤노곤 잠이 왔다.

루시엘은 책장 목욕탕 안에 설치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슬쩍 배와 허벅지를 만져 보았다.

아주 약간이지만 살이 찐 것 같았다.

이렇게 호강해도 되는 걸까.

‘아우라엘 언니…….’

에이젤, 라구엘 선배, 그리고 모두들.

다들 잘하고 있죠?

모두를 믿어요.

힘내세요.

다섯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해맑게 기도한 루시엘은 본능에 따라 눈을 감았다.

온기에 취하듯 조용히 잠들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목욕탕용 가림막 너머.

천호는 바닥에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로뿐만 아니라 산 정상에서 관찰한 것들을 토대로 만든 앞으로 나아갈 경로까지 포함한 지도였다.

천사인 루시엘은 계단을 찾아낼 때와 마찬가지로 출구?그러니까 반대쪽 전송진이 있는 방향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의 경로상에 이렇다 할 큰 장애물은 없었으니, 이대로 직진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천막 안을 따뜻한 온기로 채우던 미트라가 낮은 침음을 흘렸다.

천호가 그리고 있는 지도가 어쩐지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본 것일까.

아니, 언제 이 근방을 지난 것일까.

대미궁 안에는 침식당한 미궁 세계가 조각난 상태로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초대 용사 레온하르트와 함께 전국을 돌아다닌 미트라이니 낯익은 지형이 나타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순히 낯익은 지형이라서가 아니었다.

그 이상의 무언가.

미트라는 기억을 더듬었다.

지도뿐만 아니라 요 하루 동안 설원 지대를 지나며 보고 느낀 것들을 되새겼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치 각성하듯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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