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66화 (66/211)

“부상자들도 치유의 신님의 기적 덕분에 모두 회복되었고.”

사스치엘이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당장 사스치엘 본인부터가 온몸에 큰 상처를 여럿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멀쩡했다. 더욱이 오늘 전투에서 입은 부상만 회복한 게 아니었다. 3층의 전투로 몸에 남은 여러 부상까지 한 번에 나은 덕분에 본신의 기량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저층에서 저층 최고 레벨에 도달하신 분을 보는 건 저희도 처음이라 확언 드릴 수는 없지만… 분명 상당한 보상이 있을 겁니다. 대미궁에서 ‘최초’는 무척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니까요.”

아우라엘이 감탄 섞인 얼굴로 그리 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전투 천사인 그녀로서는 천호의 뛰어난 전투 역량에 마음이 가는 모양이었다.

“5층에는 저층과 중층을 연결하는 특별한 통로들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다른 곳보다 중층이나 심층과의 연결이 자유로우니… 아마 그곳에 도달하면 치유의 신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라구엘이 일행의 설명 담당답게 단정한 얼굴로 설명했다.

[대강 다 정리가 된 것 같군.]

미트라의 말대로였다. 아직 의문점이 다 풀린 건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해결이 되었다.

“아, 역병신의 잔당 같은 건 없나요?”

“네, 왕도에 있던 역병신의 무리들은 문자 그대로 일소되었으니까요. 딱히 도망친 놈들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루카나 여왕의 설명에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3층에서 보았던 암살자.

왕도의 싸움에서도 천호 자신에게 죽어라 덤벼들던 놈.

[숙적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인가?]

미트라가 웃으며 묻자 천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숙적 같은 이미지는 거의 없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뭐랄까, 미트라를 위한 마검 공급책이라고 해야 할까.

‘나중에 왕도 한 번 잘 찾아봐야겠네.’

놈이 마검을 더 가지고 있었다면 왕도에 흘렸을 테니까.

“음, 그럼 용사님.”

“네, 루시엘.”

“이제 그만 쉬세요. 일어나시자마자 너무 무리하셨어요.”

정리해야 할 것들도 대강 다 정리가 되었으니까.

루시엘의 말을 듣고 나니 새삼 피로가 몰려오는 천호였다.

생각해 보면 역병신을 격퇴한 지 하루는커녕 겨우 몇 시간이 지난 상황이었다.

“배는 안 고프세요?”

“고프네요.”

용사의 검 흉내 내기에 그야말로 체력과 마력과 정신력과 아무튼 있는 건 죄다 소모해 버렸으니까.

루시엘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식사 준비해드릴게요. 항상 용사님한테 신세만 졌는데, 이번에는 제가 솜씨 좀 발휘해 볼게요.”

천사답게 웃은 루시엘은 므흐흐 웃는 에이젤과 나머지 일행을 방에서 몰아낸 뒤 다시 천호에게 생긋 웃었다. 쉬고 계시라는 말을 남긴 뒤 예쁘게 돌아섰다.

“아아…….”

[루시엘이 진짜 천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미트라도 이제 아는군요. 루시엘이 진짜 천사라는 사실을.”

[……그대 빼고 다 아는 것 같다만.]

“에이, 설마.”

미트라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은 천호는 방 한쪽에 자리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침대 위에는 루시엘이 미리 꺼내 둔 물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역병신의 암살자가 가지고 있던 마검과 이번에 보상으로 받은 성스러운 왕가의 검.

[플로렌 왕가에 내려오는 검은 아니라고 해서 안심했다.]

그렇잖아도 왕국이 사실상 망한 마당에 왕가의 비보까지 꿀꺽 하면 레티샤 왕녀에게 너무 미안했으니까.

천호도 같은 마음이었던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궁금하긴 하네요.”

[무엇이 말인가?]

“성검이랑 마검이랑 맛 차이가 나는지. 전에 그 암살자가 쓰던 검은 불량 식품 맛이 난다고 했죠?”

[맛이라기보다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그럼 성검은 어떨지 궁금하네요. 성검이랑 마검에 각각 깃든 능력도 궁금하고.”

과연 이번에는 어떤 능력이 새로 생길까.

그리고 미트라는 또 무슨 일을 할 수 있게 될까.

[뭐, 이번엔 크게 만족했으니까. 무슨 일이든 그대가 바란다면 열심히 도와주겠다.]

미트라가 제법 통 크게 나왔다.

성검다운 일을 실컷 해서 정말 만족한 모양이었다.

‘하긴, 악신을 격퇴했으니까.’

말하고 나니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치유의 신의 조력이 있었다고는 해도 천호 자신이 신을 물리친 것이었으니까.

[그대여, 왜 그렇게 실실 웃는가. 바보 같다.]

“좋아서 그래요, 좋아서.”

미트라에게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정말 바보처럼 실실 웃은 천호는 성검과 마검을 각기 들었다.

둘 모두 평범한 장검 형태였기에 드는 데 무리가 없었다.

“자, 미트라. 어느 것 먼저 드실래요?”

마검과 성검.

미트라가 고민 끝에 대답을 내놓았다.

* * *

“하아…….”

“흐응…….”

“아♥”

“후우…….”

깊은 밤.

왕궁의 커다란 목욕탕에 몸을 담근 루시엘과 천사 3인방은 잔뜩 풀린 얼굴로 연신 감탄을 토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목욕물이 정말로 특별했기 때문이다.

“너무 좋아…….”

“힘이 차오르는 것 같아…….”

“막 행복해져요.”

라구엘, 아우라엘, 에이젤.

루시엘은 세 사람의 말에 적극 동의했다. 그저 물속에 몸을 담그는 것만으로 피부가 고와지는 기분이었다.

미트라가 만들어 낸 목욕물.

그저 단순히 뜨겁기만 한 물이 아니었다.

도루마의 마검이었던 힐링 블레이드의 힘이 더해졌다.

성스러운 왕가의 검에 깃들어 있던 성령의 힘이 특별한 효과를 부여했다.

아쿠아 블레이드로 물을 만든다.

히트 대거로 물을 데운다.

힐링 블레이드로 치료의 힘을 더하고, 성스러운 왕가의 검으로 목욕물을 성수화시킨다.

간단해 보이지만 무려 네 가지 기술이 조합된 아름다운 결과물이었다.

‘용사님…….’

뜨거운 성수 속에 몸을 깊이 담그며 루시엘은 천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뺨이 절로 달아올랐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뜨거운 물 덕분에 빨개진 얼굴이었다.

“아닌데, 저거 목욕해서 빨개진 거랑 다른데.”

“흠.”

“모른 척해 주렴.”

에이젤, 라구엘, 아우라엘.

아우라엘 덕분에 에이젤의 놀림에서 벗어난 루시엘은, 아니, 애당초 놀림의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 한 그녀는 계속 천호 생각을 했다.

오늘 본 용사님의 모습.

늘 멋진 용사님이었지만 오늘은 특히 멋졌다.

“막 눈에 보이지 않아요? 멋진 분, 대단한 분, 굉장한 분~ 하는 게.”

“흠흠.”

“못 본 척해 주렴.”

다시 에이젤, 라구엘, 아우라엘.

‘용사님…….’

루시엘은 다시 천호 생각을 했다. 살짝 본 천호의 아버지 생각도 했다. 나중에 용사님도 그렇게 되시는 걸까? 근육도 더 커지고, 얼굴에 수염도 기르시고…….

생각을 잇던 루시엘은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천호의 근육 생각을 하다 보니 떠오른 게 있어서였다.

“앗,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다.”

“흠흠흠.”

“모른 척하렴, 모른 척.”

루시엘과 천사 3인방의 목욕 시간이 길어졌다.

* * *

[그대여, 슬슬 우리 쪽 용무를 보는 것이 어떤가.]

천호의 방.

책장 목욕탕 안에서 몸을 늘어트리고 있던 천호가 눈을 껌벅였다.

“우리 쪽 용무라뇨?”

[용사의 능력이 새로 개방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같이 살펴보기로 해 놓고는…….]

미트라가 섭섭하다는 듯 뒷말을 흐렸다. 천호는 여전히 귀여운 성검의 보석 부분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바로 하죠. 아, 이번에도 막 냄새나고 그런 거면 미리 말하고요.”

[아니다. 이번에는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지금 상태로 정신세계에 돌입해도 괜찮다.]

말이 빨라지는 것을 보니 정신세계에 들어가는 순간을 꽤나 기대한 모양이었다.

‘능력 개방이 되니 흥분한 건가?’

의외로 전투력 상승 쪽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미트라였으니까.

“좋아요, 그럼 바로 들어가죠.”

목욕물이야 아직 많이 뜨거웠으니까.

[좋다, 눈을 감고 몸을 편히 해라.]

“네, 미트라.”

눈을 감고 몸을 늘어트린 천호는 그대로 미트라의 유도에 따랐다.

이미 한 번 해 본 일이라 그런지 지난번보다 훨씬 부드럽게 정신세계에서 눈을 뜰 수 있었다.

푸른 하늘과 기분 좋은 바람, 바라만 봐도 싱그러운 마음이 드는 초록색 들판.

그리고 그 사이에 서 있는 미트라.

“미…트라?”

천호가 눈을 깜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자리한 것은 낯익은 졸라맨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다른 무언가.

완전히 변한 모습.

미트라가 어깨를 살짝 펴며 젠체했고, 천호가 경악 속에 목소리를 높였다.

* * *

[마력이 부족합니다.]

[마력이 부족합니다.]

“미트라! 진화했어요!”

[응?]

진화라는 말에 깜짝 놀란 미트라가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천호의 말대로였다. 진화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모습이 변해 있었다.

일단 어깨를 펼 수 있었다.

즉, 어깨가 생겼다.

팔과 다리, 몸통에도 무려 두께라는 것이 생겼다.

여전히 평면이었지만, 이전의 미트라가 세 살짜리 아기의 낙서였다면, 지금은 다섯 살짜리 아이의 낙서였다.

“축하해요, 미트라.”

천호가 짝짝 박수를 쳤고, 미트라는 여전한 이모티콘 표정으로 응답했다.

[?_?]

귀여웠다. 그래서 천호는 더 크게 웃었고, 미트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무려 색이 더해진 것이었다.

“와, 진짜 진화네요.”

[흥이다.]

[?ㅁ?!]

미트라가 휙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천호는 생각했다.

‘그래도 꽤 달라지긴 했네.’

졸라맨 시절에 비해 그래도 형태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다. 나름 손도 생겼고, 머리에 달린 것도 머리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엉덩이에 닿을 정도로, 어린아이 몸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무척이나 긴 장발.

얼굴이 붉어지긴 했지만 그 외에는 아직 색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미트라를 성장시키면 곧 머리칼 색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성검이랑 힐링 블레이드 먹은 보람이 있네요. 그래서 변한 거죠?”

천호가 토라진 미트라에게 다가서며 묻자 미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다. 그래도 이것보단 좀 더 많이 변할 줄 알았는데.]

후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어깨를 늘어트렸다. 정신세계에서 보는 걸 재촉한 이유 중에는 성장해서 변한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던 모양이다.

“금방 성장하겠죠. 앞으로도 열심히 마법검 찾아 드릴게요. 성검은 맛있었죠?”

[음… 그대가 맛있다고 하니 맛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힐링 블레이드는?”

[그건 여전히 좀 불량 식품 같았고. 그래도…….]

“그래도?”

[제법 맛이 나기는 했다.]

기억을 더듬듯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고, 천호는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억눌렀다.

“본래 불량 식품이 그래요. 자극적이죠.”

[흠.]

“앞으로도 맛있는 거 많이 준비해 볼게요. 아예 마우스 블레이스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마우스 블레이드?]

“미트라한테 입이 생기면 그냥 음식도 먹을 수 있지 않을까요?”

손잡이나 검신 부분에 입이 생기면 어떨까. 좀 그로테스크하긴 했지만 의외로 게임 같은 곳에서는 자주 나오는 디자인이었는데.

[으음, 그대의 음식이 먹어 보고 싶긴 하지만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오, 제 요리에 마음이 있긴 했군요?”

[흐흥, 당연하지 않은가. 루시엘이 항상 그렇게 맛있게 먹는데. 그리고 요리를 돕는 건 늘 나이고.]

몸이 생긴 덕분인지 꼼지락거리며 답변하는데, 그게 또 귀여웠다.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귀여운 성검이었다.

천호는 무심코 황금색 보석 대신 미트라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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