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용사님!”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물기 어린 루시엘의 목소리였다.
눈물 젖은 파란 눈동자에 천호는 미소 지었고, 루시엘은 누워 있던 천호의 가슴을 와락 끌어안았다.
“오오!”
“용사님이 눈을 뜨셨어!”
“용사님이 깨어나셨다!”
“우오오오오!”
아무래도 실내가 아니라 실외인 것 같았다. 여럿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아예 커다한 함성 소리까지 들렸다.
“으앙! 용사님!”
아예 울기 시작한 루시엘을 마주 안으며 천호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보이는 것을 보니 야외가 맞는 것 같았다.
태양을 가린 검은 구름 대신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천호의 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빛의 창이 이어졌다.
의식을 잃은 사이에 진행된 일인지 전부 과거형이었다.
천호는 루시엘의 분홍색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왕도 중심에 자리한 광장 부근 같았고, 산의 일족과 락 드워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루카나 여왕이 환희에 찬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쿠르트 왕이 껄껄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고, 레티샤 왕녀와 유그 왕자를 보호하고 있던 천사 삼인방?그중에서 특히 에이젤이 므흐흐 웃음을 흘려 댔다.
“음.”
루시엘과의 포옹은 언제나 환영이었지만 지금은 일단 일어나야 할 때였다.
천호는 루시엘을 안은 채 허리 힘만으로 상체를 일으켜 세운 뒤 자초지종을 물었다.
“용사님이 역병신을 물리치신 다음에 왕도 전체가 밝은 빛에 휩싸였어요. 빛이 사라진 뒤에 치유의 신님께서 제게 계시를 내리셨고요.”
“계시?”
“네, 용사님이 왕도 광장에 누워 계실 거라는 거랑, 역병신이 심층으로 쫓겨났으니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였어요.”
아직 눈가가 눈물로 촉촉했지만 루시엘은 방긋방긋 웃었다. 역시 루시엘은 우는 얼굴보다 웃는 얼굴이 예쁘다는 생각을 하며?이제 슬슬 우리 차례라는 얼굴로 다가오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다들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았다.
사실 천호도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크로니클 퀘스트 보상을 치유의 신에게 받으라 했는데 치유의 신은 어떻게 만나는지.
저층 최하층에 도달하면 최고 레벨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 했는데 그건 또 무엇인지.
치유의 신이 그 외에 뭔가 말을 남긴 것은 없는지.
일행 중에 다치거나 죽은 이는 없는지.
그리고 지금까지의 의문들과는 다소 동떨어진, 하지만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물건에 대한 궁금증.
[그건 나도 궁금하다.]
미트라가 말했고, 루시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왕도에서 펼쳐진 천호의 싸움을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보았던 전투 천사들 역시 비슷한 반응들이었다.
하늘에서 갑자기 내려온 캐리어.
그나마 개봉 순간에 함께 있었던 루시엘과 미트라는 어렴풋이 짐작이라도 했지만, 나머지 일행에게는 정말로 알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었으니까.
“일단 이쪽부터 확인해 보죠.”
“네, 용사님.”
바로 답한 루시엘이 인벤토리를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캐리어에 집중되었다.
[크로니클 퀘스트 ‘역병신의 대적자 #4’를 완수했습니다.]
[미궁 세계가 안전해졌습니다.]
[미궁 세계가 당신의 빛나는 업적을 기억합니다.]
[크로니클 퀘스트 ‘역병신의 대적자’를 모두 완수했습니다.]
[미궁 세계가 당신의 빛나는 업적을 기억합니다.]
[당신의 격이 상승합니다.]
[견습 용사에서 용사가 되었습니다.]
[저층에서 가능한 최고 레벨(45)에 도달했습니다.]
[최고 레벨 달성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은 저층의 마지막 층(5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메인 퀘스트 ‘치유의 신의 의식을 완수하라’를 완수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역병신의 의식을 저지하라’를 완수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보상 : 치유의 신의 소원권 한 장]
[메인 퀘스트 보상 : 엘릭서 한 병]
[메인 퀘스트 보상 : 성스러운 왕가의 검]
[메인 퀘스트 보상 : 치유의 지팡이]
[크로니클 퀘스트 보상 : ???]
[크로니클 퀘스트 최종 보상은 치유의 신이 직접 선사할 것입니다.]
['신을 추방한 자'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왕가의 구원자'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용사의 전설을 계승하는 자'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천사들의 조력자 Lv3이 되었습니다.]
[치유의 신의 가호 Lv5가 되었습니다.]
[용감한 Lv5가 되었습니다.]
[고결한 Lv1을 획득했습니다.]
[용사의 아우라 Lv3이 되었습니다.]
[우레 Lv5가 되었습니다.]
[연쇄 우레 Lv3이 되었습니다.]
[보이는 손 Lv3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보이는 손을 동시에 두 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검의 주인 Lv3이 되었습니다.]
[용사의 검 흉내 내기 Lv1을 획득했습니다.]
[치유의 신이 당신의 천사를 축복했습니다.]
[천사의 격이 높아졌습니다.]
[당신의 천사가 7급 천사가 되었습니다.]
[치유의 신이 당신의 천사를 눈여겨보았습니다.]
[당신의 천사에게 치유의 신의 가호가 쏟아졌습니다.]
플로렌 왕궁 안쪽에 자리한 방.
전투의 여파가 그나마 덜 미친 그곳에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천호와 루시엘과 미트라, 여기에 천호의 일행인 전투 천사들, 락 드워프 5인방, 천사 3인방이 추가되었고, 다시 루카나 여왕과 쿠르트 왕, 두 사람의 측근들, 레티샤 왕녀와 유그 왕자가 포함된 결과였다.
본래 광장에서 캐리어를 개봉하려 한 천호였지만, 아무래도 광장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캐리어에 보이면 안 될 것이라도 들어 있나?]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좀 그렇잖아요?”
수천 명 앞에서 집에서 온 택배(?)를 뜯으라니.
[기분 문제라는 거군.]
“기분 문제인 거죠.”
적당히 답한 천호는 왕궁으로 이동했고, 수천 명 까지는 아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캐리어를 개봉하게 되었다.
“음… 일단 정리부터 하도록 하죠.”
이왕 공개 개봉을 하게 되었으니, 어느 정도 설명을 하고 시작할 생각이었다.
모두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천호는 헛기침을 한 번 토한 뒤 입을 열었다.
“이건 캐리어라고 하는 겁니다. 튼튼한 여행용 가방이죠.”
“오오.”
“과연, 튼튼하게 생겼군.”
주변에서 나름 반응들을 보이자 천호는 문득 지구에서 본 여러 소설들과 만화들을 떠올렸다.
‘아아, 이 맛이었구나.’
이 맛에 이것은 XX라는 것이다?라고 설명들을 하는 거였구나.
천호가 작게 감동한 그때 모두의 시선은 캐리어에 붙은 라벨 쪽으로 향했다. 척 봐도 글자인 건 알겠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는 얼굴들이었다.
“음? 못 읽어요?”
루시엘과 미트라는 바로 읽었었는데.
천호가 저도 모르게 묻자 루시엘이 생긋 웃으며 설명했다.
“저는 다른 천사들과 달리 용사님이랑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용사님이 이쪽 언어나 문자를 무리 없이 이해하시는 건 그 반대의 경우고요.”
[나도 그대와 연결되어 있다.]
한 명은 천호의 천사였고, 다른 한 명은 천호의 성검이었으니까.
“과연.”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다. 만능 통역 마법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고, 현지인과의 링크를 통해 언어나 문자 문제를 해결하는 모양이었다.
“흠흠, 아무튼 그래서 무슨 뜻인가?”
쿠르트 왕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그러자 다들 참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거나 추임새를 넣었다.
“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모두들 몸을 앞으로 내밀며 대답을 촉구했다. 하지만 천호는 쉬이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아들 힘내! 같은 걸 읽는 것은 민망했으니까.
하지만 이 분위기상 대답을 안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천호는 그나마 무난한 쪽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아들 탐사용이라고 쓰여 있어요.”
“아들 탐사용?”
“헉, 그럼 용사님 부모님들께서 보내신 거예요?”
에이젤이 눈치 빠르게 물었고,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저희 부모님이 보내신 물건 같아요.”
천호의 대답에 쿠르트 왕과 루카나 여왕은 감탄사를 토했지만 천사들 쪽은 아니었다. 특히 라구엘이 당황했다.
“자, 잠깐만요. 용사님 부모님이면 다른 세계의 분들이실 텐데 미궁 세계에, 대미궁에 물건을 보내셨다고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세계로 물건을 보내는 일이었다. 절대로 쉽지 않은- 아니, 그냥 대놓고 어려운 일이었다.
“라구엘,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아우라엘이 묻자 라구엘은 기가 찬다는 얼굴로 아우라엘을 돌아보더니 빠른 어조로 설명했다.
“우리가 영웅님들을 부르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야. 그런데 저건 더 어려워. 왜냐면 특정했으니까. 우리가 영웅님들 부를 때는 기본적으로 랜덤 소환인 거 알지? 특정 영웅님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그런데 저 캐리어는 핀 포인트 사격하듯이 딱 천호가 있는 세상을 찾아서 날아왔다.
물론 천호 자체가 좌표 역할을 했을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범상치 않은 일임에는 분명했다.
애당초 천사들의 영웅 소환도 다섯 여신과 미궁 세계의 힘을 빌려서 행하는 일이지, 일개 개인의 힘으로 하는 일이 아니었다.
“잠시만요. 그… 조금 달라요. 이게 42번째니까.”
“…네?”
라구엘이 더욱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천호가 빠르게 설명했다.
“아무래도 제가 어디 있는지 찾기 위해 이런 물건을 여러 세상에 뿌리고 계신 것 같아요. 여기엔 42번째 캐리어라고 쓰여 있으니… 최소 40개는 넘게 뿌린 거죠.”
그러니까 핀 포인트 사격은 아니다.
천호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계신 게 아니다.
천호 나름대로는 진정하라고 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라구엘의 얼굴은 경악 그 자체가 되었고, 나머지 일행들 역시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42?! 저런 게 40개가 넘는다고요?!”
이건 다른 의미로 놀라웠다.
그도 그럴 것이 40개가 넘는 세상에 물건을 보냈다는 뜻이었으니까. 핀 포인트 사격이 정밀함으로 놀랍다면, 이건 양적으로 놀라웠다.
그리고 세상 간 발송만이 다가 아니었다.
“자, 잠깐만요. 용사님. 그럼 다른 가방에도 다 그런 스크롤들이 들어 있는 거예요?”
루시엘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었고, 일행 사이로 두 번째 파문이 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대부분은 천호가 펼친?정확히는 스크롤로부터 발생한 마법을 보았기 때문이다.
라구엘은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세상 간 이동에 대해 잘 모르는 아우라엘도 이번에는 아연실색했다.
42.
가방당 두 개씩만 쳐도 여든 네 개의 스크롤.
스크롤 하나하나의 위력이 범상치 않았다. 그런데 그런 스크롤을 여든 개가 넘게 만들고, 그걸 또 저런 식으로 아낌없이 뿌린다?
그런 게 가능한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용사의 부모님이다?
“음.”
천호를 제외한 모두가 패닉에 빠졌다. 쿠르트 왕이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요, 용사여. 그대 혹시 왕족이었는가? 아니, 황족?”
쿠르트 왕의 가설에 모두가 반응했다. 에이젤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용사님은 왕자님? 아, 아니. 황태자님?”
미궁 세계의 상식상 적어도 일국의 왕 정도는 되어야 이런 일이 가능할 것 같았으니까.
아니, 쿠르트 왕과 에이젤이 지적했듯이 왕 정도로는 부족했다. 황제 정도는 되어야 했다.
“역시 전설의 용사!”
루카나 여왕이 뜻 모를 감탄을 하는 그때 일행 사이로 빠른 오해가 번졌다. 다들 천호가 황제의 자식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용사에 황태자라니, 반칙이야.”
라구엘이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얼굴을 붉혔고, 천호를 바라보는 에이젤의 눈동자에는 아예 하트 무늬가 떠올랐다.
그러자 루시엘은 두 사람으로부터 천호를 지키듯 천호의 팔을 끌어안았다. 의식해서 한 게 아니라, 반사적으로 한 행동 같았다.
그리고 이 모든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천호는 헛기침을 토한 뒤 입을 열었다.
뭔가 즐거운 오해였지만, 오해는 오해였으니까.
“일단, 저는 황족 같은 게 아닙…….”
거기까지였다. 천호는 말하다 말고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 보니 황족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날이 정체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 가는 어머니.
포레스트 드래곤도 인정한 고귀한 피.
‘진짜 황족 아냐? 못해도 왕족이라든가.’
가능성이 있었다.
애당초 처음 생각한 어머니의 정체는 마법 나라의 공주님 정도였으니까.
“용사님?”
루시엘이 눈을 깜박이며 묻자 천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황족…일지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일단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황제나 왕이 아니세요.”
애매한 시작에 다들 의구심을 보였지만 일단 입을 다물었다. 황족인지 아닌지보다는 그다음이 궁금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