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밖에.]
힘을 다른 곳으로 보냈으니까.
네 오른팔을 잠시 붙잡을 힘만을 남겼으니까.
뒷말은 생략되었다. 하지만 치유의 신의 눈을 본 순간 역병신은 무언가를 직감했다.
다급히 시선을 내려 치유의 신의 아바타라 밑에서 신음하고 있을 나약한 존재들을 바라보았다.
천사들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산의 일족 전사들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없었다.
용사가.
그 찢어 죽일 천사년이!
“도망치게 한 것이냐?!”
자신의 목표가 그 용사와 천사라는 것을 알고?
그래서 그 둘만을 피신시킨 것이냐? 날 끝까지 방해하기 위해?!
치유의 신의 아바타라는 웃었다.
희미해져,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모습으로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날 알잖니.]
우리는 서로의 대적자니까.
내가 어떤 년인지, 네가 어떤 놈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니.
역병신이 고개를 돌렸다.
치유의 신의 호전성을, 그녀가 얼마나 지독한 년인지 알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궁이 아닌 다른 곳.
정확히는 본궁 옆에 자리한 첨탑의 꼭대기.
치유의 신을 닮은 천사가 서 있었다.
두 눈을 감은 채 치유의 신의 힘을 다루고 있었다.
자신 앞에 버티고 선 자에게 치유의 신의 힘을 집중시켰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어리석은 짓이었다.
힘의 총량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힘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손실이 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치유의 신의 아바타라가 모든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나았다.
그쪽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라면.
[용사가 있어. 성검이 있어. 나의 가호를 받는 천사까지 있지.]
[대체 무엇을 망설여야 하는 걸까.]
초대 용사 레온하르트와 같았다.
진정한 용사의 영혼을 가진 자였다.
성검 미트라의 주인으로서, 그녀의 모든 힘을 온전히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자였다.
역병신이 노성과 함께 오른팔을 휘둘렀다. 치유의 신의 아바타라가 미소와 함께 흩어졌다. 진녹에 파고들어 역병신의 힘을 조금이나마 약화시켰다.
그리고 천호가 지면을 박찼다. 도약하며 포효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미트라!”
성검.
초대 용사와 함께 마왕을 물리쳐 세계를 구한 구세의 검.
미트라가 응답했다.
용사의 검으로서, 용사의 부름에 전력으로 부응했다.
치유의 신의 힘을 담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증폭시켰다. 순백의 칼날이 황금으로 빛났다.
역병신이 천호를 보았다. 용사와 용사의 검을 보았다.
비명처럼 외치며 오른팔을 휘둘렀다.
천호가 마주했다. 역병신의 붉은 눈을 노려보며 미트라를 크게 휘둘렀다.
왕도의 하늘 아래.
두 신의 힘이 충돌했다.
용사의 검이 울부짖었다.
* * *
[엉큼한 Lv5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시간이 정지했다.
적어도 천호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영원처럼 변한 순간 속에서 천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애당초 이리될 것을 미트라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정말로 시간이 정지한 것이 아니었다.
더 없이 가속화된 사고 덕분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이었다.
치유의 신의 신력.
미궁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성검들의 정점인 미트라는 분명 그 힘을 증폭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증폭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무리 왕도에 누적된 마력에 힘입어 치유의 신의 아바타라를 소환했다 한들, 상대는 오른팔 하나라고는 하나 역병신의 본체였다.
통상적으로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때문에 치유의 신은 도박을 하였다.
성검 미트라와 그녀의 새로운 주인에게 판돈을 걸었다.
미트라는 과거의 힘을 잃었다.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정점이 아니었다.
용사는 미숙했다. 존재의 격이 낮아 이제 막 인간을 벗어난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치유의 신은 특별함을 느꼈다.
성검의 새로운 주인에게.
성검과 용사의 관계에서.
치유의 신의 신력이 미트라를 통해 전개되었다. 순백의 칼날이 황금빛이 되었고, 다시 그 눈부신 빛이 왕도 전체를 뒤덮을 기세로 뻗어 나갔다.
정지한 시간 속에서 모두가 성검과 용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용사는, 천호는 노성을 토하며 손을 뻗는 역병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보았다.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았다.
천호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클 것 같았고, 일단 몸이 두꺼웠다. 놀라울 만치 단련된 몸은 무쇠와도 같았다.
그는 거대한 검을 들고 있었다.
손잡이와 검신을 연결하는 부분에 황금색 보석이 박힌 아름다운 검이었다.
거대한 검.
미트라의 또 다른 모습.
그가 검을 당겼다. 검을 움켜쥔 두 팔의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고, 전신에서 순백의 기운이 폭풍처럼 솟구쳐 올랐다.
용사 레온하르트.
그가 미트라를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내려치기 따위가 아니었다.
일검이 하늘을 갈랐다.
거대한 순백의 기파가 천지를 요동케 하며 나아갔다.
실로 압도적인 힘이었다.
하지만 천호에게는 맞지 않았다. 천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일검으로 세상을 가른 남자가 뒤돌아서서 천호를 보았다. 빛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 웃고 있었다.
다시 빛이 일었다. 남자의 모습이 사라지고 처음 보는 여자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뒷모습뿐이었지만 절로 숨이 멎을 만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도 미트라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레온처럼 검이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검이 아니었다.
가늘고 길었다. 2미터는 족히 됨직한 검신을 길게 늘어트린 여인은 표표히 서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뒷모습뿐이었다.
길고 검푸른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고, 가냘프지만 잘 짜인 육신이 움직임을 보였다.
그것은 아름다웠다.
새하얀 상의와 검은 하의에 감싸인, 여체가 그려 낼 수 있는 곡선의 극치라 해도 좋을 육신의 실루엣 때문만이 아니었다.
검을 다루는 솜씨가, 그 검이 그려 내는 궤적이.
검을 쥐고 있기에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가 미트라를 휘둘렀다.
아침의 영광과도 같은 태양의 황금빛이 미트라의 검신에 머물렀다.
똑같은 내려치기.
하지만 레온의 것과 달랐다.
똑같이 하늘과 땅을 갈라놓았지만, 레온의 것처럼 거칠지 않았다.
예리하고 날렵하며 고고했다.
그리고 천호는 직감했다.
바로 저것이었다.
저것이야말로 천호 자신이 도달해야 할 경지였다.
검을 내려친 여인이 천호를 돌아보았다. 고결한 황금빛 눈동자가 천호를 비추었다.
시간이 흘렀다.
여인의 모습이 사라졌다.
천호의 눈앞에 있는 것은 격노한 역병신이었다. 그의 팔이 천호를 향해 뻗어 오고 있었다.
천호는 그것을 보았다. 치유의 신의 힘에 의해 여전히 가속화된 의식 속에서 미트라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레온이 보여 주었다.
이름 모를 여인이 알려 주었다.
허공이었지만 천호는 자세를 잡을 수 있었다. 미트라를 단단히 움켜쥔 채 정면을 주시했다. 레온이 그러했던 것처럼 포효하지 않았다. 여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고요하게, 하지만 힘을 발하는 순간만은 격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일합.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용사의 검.
미트라가 아름다운 궤적을 그렸다. 여인의 것에는 미치지 못 했지만 근접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세상에 드러났다.
미트라가 하늘과 땅을 갈랐다.
그 끝에서 뻗어 나간 것은 더 이상 치유의 신의 힘이 아니었다.
용사의 검.
세계를 지키는 자의 의지.
역병신이 손을 뻗었다.
아름다운 궤적과 함께 일어난 황금빛 힘에 맞서듯 진녹의 기운을 거칠게 발산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용사의 검이 진녹의 기운을 갈랐다. 역병신의 손바닥을 갈랐다. 신의 본체에, 심층에 머무는 강대한 악신의 육신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역병신이 비명을 질렀다.
신의 울부짖음이었다.
주변 일대뿐만 아니라 4층 전체가 요동칠 것만 같았다.
네놈?!
네놈 따위가?!
역병신이 고통 속에서 절규했다. 천호를 노려보며 증오를 불태웠다. 빛의 궤적에 이미 반쯤 갈라진 팔에서 피 대신 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역병신의 육체를 붙들고 있던 치유의 신의 힘이 그런 역병신을 집어삼켰다. 그를 다시 심층으로 밀어내며 크게 웃었다.
꺼져라 생쥐!
이번엔 네 패배다!
호쾌하기까지 한 치유의 신의 외침 너머로 역병신의 마지막 절규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세상이 빛났다.
역병신의 오른팔을 가른 황금의 궤적이 작렬했고, 왕도 전체를 뒤덮고 있던 순백의 마법진으로부터 강한 빛이 일어났다.
“용사님!”
작렬하는 빛 속에서 루시엘이 소리쳤다.
용사의 검을 펼치는 데 전력을 다한 천호는 그런 루시엘에게 답하지 못했다.
빛의 창이 연달아 이어졌다.
하지만 천호는 그조차도 볼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을 감았다.
[그대여.]
미트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모를 안도감 속에 천호는 의식을 잃었다.
* * *
따뜻했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처럼 편안했다.
그래서 눈을 떴다는 사실도 뒤늦게 인지할 수 있었다.
아직 흐릿한 시야 너머로 아름다운 것이 보였다.
한 쌍의 황금빛 눈동자.
태양과도 같지만 결코 두렵지 않은, 무척이나 따스하고 부드러운 그것.
아름다운 것은 두 눈만이 아니었다.
고결함이 어린 단정한 얼굴은 어머니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만 같았다.
천호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다시 눈을 감았고,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여!]
[그대여! 정신 차려라! 그대여!]
미트라의 목소리였다. 퍼뜩 정신이 든 천호는 얼른 눈을 떴다.
미트라가 보였다.
아름다운 한 쌍의 황금빛 눈동자 대신 걱정 가득한 이모티콘이 눈앞에 있었다.
[그대여! 정신이 드는가?]
[ㅠㅁㅠ!]
“풉!”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 웃음에 미트라가 격렬히 반응했다.
[그대여!]
가느다란, 정말로 가느다란 두 팔이 천호의 어깨를 마구 때렸다. 그래 봐야 결국 토닥토닥 수준에 불과했지만.
“미트라?”
[그래, 나다.]
[이곳은 내 정신세계이고.]
[용사의 검을 무리하게 사용한 반동으로 그대의 정신이 육신과 분리된 것 같다.]
미트라의 설명에 눈을 깜박이던 천호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분리되었다고요?”
[일시적이다. 여기서 정신을 차린 것을 보니, 돌아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ㅁ^]
미트라가 활짝 웃더니 천호의 등을 탁탁 두드렸다.
[그대여, 정말 잘했다. 대단한 활약을 했다.]
[비록 치유의 신의 힘을 빌렸다고는 하나, 그대가 역병신을 4층에서 심층으로 추방한 것이다.]
[실로 대단한 업적이다!]
자기다 다 뿌듯하다는 듯 미트라가 연신 미소를 지었다.
천호는 그런 미트라의 머리를 무의식중에 쓰다듬은 뒤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보았다. 아까 확인 못 한 빛의 창 이십여 개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여기서 천호는 잠시 시선을 멈추었다.
용사의 검 흉내 내기라는 말에 작게 웃었다.
확실히 아직은 흉내 내기에 불과했다. 레온이나 이름 모를 여인의 검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남자는 레온이었다 치고, 여자는 누구일까.
레온 이후에는 제대로 된 용사가 미트라와 함께 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레온과 함께 여행한 동료들 가운데 하나일까?
‘아니면 설마?’
[그대여, 그대여. 정말 굉장하다. 용사 쪽 능력도 새로 개방할 것들이 이것저것 생겼다.]
[^ㅁ^]
무척 신이 나는지 미트라가 활짝 웃으며 말했고, 천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음.”
[그대여? 왜 그러는가? 혹시 어디 아픈가?]
미트라가 걱정스런 얼굴로?그래 봐야 이모티콘이었지만?천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천호는 대답하는 대신 다시 한 번 미트라를 바라보았다.
“음.”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그대여?]
“아뇨, 뭐. 나중에 알게 되겠죠.”
[무엇이 말인가?]
“좋은 거요.”
되는 대로 답한 천호는 고개를 갸웃갸웃거리는 미트라에게 다시 물었다.
“그보다 미트라, 용사 쪽 능력 개방은 일전에 했던 것처럼 나중에 할 수도 있는 거죠?”
[그렇다. 그래, 일단은 모두에게 건강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우선이다. 루시엘이 많이 걱정하고 있다. 다른 천사들도 그렇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 미트라는 양손으로 천호를 밀쳐 다시 바닥에 쓰러트렸다.
[자, 그때와 같은 요령이다. 눈을 감고 몸을 편안히 해라.]
미트라의 재촉에 천호는 얼른 눈을 감았다.
미트라가 그런 천호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은 정말 잘했다, 그대여.]
“미트라도요.”
[나는 늘 잘 한다.]
미트라가 나름 농담으로 받아치자 천호는 결국 다시 눈을 뜨고 말았다.
한 쌍의 황금빛 눈동자.
[조금 이따가 보자, 그대여.]
환영이었는지, 여전히 이모티콘 얼굴인 미트라가 말했고, 천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미트라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들 듯 본래의 육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몇 초.
홀로 남은 미트라는 새삼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생긋 웃었다. 천호를 따라가기 위해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