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
도루마였다.
양손에 장검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꼬리에도 단검이 하나 들려 있었다.
헤이스트 소드에 힘입어 속도를 높인 놈은 정말 빨랐다.
놈이 양손에 쥔 검을 동시에 휘둘렀다. 강렬한 기파가 천호에게 쇄도했고, 놈은 그런 기파를 바짝 쫓아 질주했다.
천호가 미트라를 휘둘러 기파를 깨트렸다.
놈은 그 순간을 노렸다는 듯 바닥을 기듯 기동했고, 천호의 왼쪽 측면을 파고들었다. 보고도 피하기 힘든 참격을 날렸다.
캉!
그 일격이 막혔다.
미트라가 아니었다. 천호의 왼쪽 손목에서부터 비롯된 빛의 방패였다.
반투명한 푸른 방패에 도루마가 눈을 크게 떴다. 천호가 도루마를 보았고, 이건 방패라며 친절하게 설명하는 대신 왼팔을 휘둘렀다. 도루마를 밀어냄과 동시에 미트라를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강렬한 내려찍기는 도루마에게 닿지 못 했다. 하지만 천호는 개의치 않았다. 애당초 진짜로 노린 것은 다음의 일격이었다.
보이는 손이 움직였다.
내려찍기를 피하느라 이미 회피 자세를 취한, 그래서 반대로 몸이 경직된 도루마를 향해 나이프를 던졌다.
“큭?!”
가슴팍에 박혔다. 놈이 이를 악물며 고통을 삼켰고, 천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미트라를 당김과 동시에 몸을 당겼다. 퍼뜩 눈동자를 굴리는 도루마의 가슴팍을 향해 강렬한 밀어 차기를 선사했다.
호세사천왕.
드리타라슈트라의 장.
태산 밀치기.
쾅!
굉음과 함께 도루마가 뒤로 크게 밀려났다.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한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흘릴 지경이었다.
“루시엘!”
천호는 십여 미터 이상을 날아가 나뒹구는 도루마를 보는 대신 소리쳤다.
그때까지 충격에 빠져 있던 루시엘이 헉하며 천호를 돌아보았고, 다시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녀는 천호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이내 이해했다. 비상하고자 날개를 크게 펼쳤다.
천호는 빠르게 움직였다. 미트라를 허리에 갈무리한 직후 도루마가 흘린 검을 챙겼고, 나머지 한 손으로 캐리어를 잡았다.
“가요!”
루시엘이 날았다. 천호가 지면을 박찼다. 등 뒤에서 도루마가 무어라 소리치는 게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여전히 나자빠져 있는 랫맨들을 박차며 정면을 보았다. 경로를 계산했고, 실행에 옮겼다.
벽을 박찼다. 정확히는 벽 곳곳에 나와 있는 것들을 박차 몸을 상승시켰다.
테라스, 창문의 턱, 벽의 장식.
더욱이 빨랐다. 루시엘이 옥상에 당도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옥상으로 치솟았다.
옥상에도 랫맨이 많았다. 의식의 제단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천호는 일단 캐리어를 던졌다. 인간을 초월한 괴력에 힘입어 캐리어는 투척 병기가 되었고, 랫맨 대여섯 마리를 쓰러트렸다.
랫맨들이 천호를 돌아보았다. 천호는 미트라를 뽑아 들었고, 빽빽이 뭉친 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단까지의 길을 열었다.
“용사!”
“오오, 용사님!”
제단에서 싸우던 이들이 천호를 보고 저마다 소리쳤다. 마침내 제단까지의 길을 온전히 뚫은 천호는 돌아섰고, 루시엘이 바닥을 짚었다. 천호가 사용하고 던졌던 마도로프의 활을 회수함과 동시에 인벤토리에서 화살을 하나 꺼냈다.
루시엘의 행동을 포착한 천호는 미소 지었다. 루시엘은 역시 유능하다 생각하며 가죽 통의 뚜껑을 열었다. 루시엘이 내민 화살에 스크롤을 묶었고, 잔불이로 불을 붙였다.
“모두 엎드려!”
소리쳤지만 반응한 건 루시엘뿐이었다. 하지만 기다리거나 다시 소리칠 시간이 없었다. 천호는 도약했다. 허공에서 시위를 당겼다.
목표로 한 곳은 왕궁 옥상의 끝 부분.
정밀한 조준은 필요하지 않았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천호가 노린 곳 부근으로 날아갔고, 지상에 안착한 천호는 몸을 웅크렸다.
콰가가가가가?!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대기가 울부짖었다. 응축된 푸른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고, 옥상의 끝 부분이 소멸했다. 빛의 범위 내에 있던 랫맨들이 엄청난 폭발에 휩쓸려 세상에서 지워졌다.
산의 일족 전사들이 후폭풍을 맞고 바닥에 나자빠졌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사스치엘과 엘리엘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고, 아우라엘은 엉덩방아를 찧었다.
스크롤 두 장을 소모했다.
하지만 효과는 충분했다. 옥상을 뒤덮고 있던 랫맨들의 7할 이상이 방금 공격으로 소멸했다.
그리고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칼라카가 멀리서 숨을 헐떡였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빛의 기둥만으로도 이미 환장할 지경이었거늘, 불꽃의 비는 무엇이란 말인가. 옥상에서의 저 폭발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가라! 가라!”
신경질적으로 외친 칼라카는 아예 몸소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표는 옥상이 아니었다.
역병신의 제단을 향해 질주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와 달리 앙헬은 오히려 발걸음을 멈추었다.
왕도에 들어서는 대신 그 앞에 멈춰 서서 하늘을 보았다.
새하얀 빛의 기둥.
그 앞에서 피어오르는 진녹의 기운.
본능은 도망치라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강한 역병신의 명령이 그녀를 지배했다.
막아라.
어떻게든 저들을 저지해라.
앙헬은 욕지거리를 토했다. 일만의 무리와 함께 왕도에 진입했다.
도루마가 고개를 들었다. 왈칵 피를 토한 뒤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헤이스트 소드를 회수하고 대검을 두 손에 거머쥐었다.
루카브론드의 이름을 읊조리며 지면을 박찼다.
칼라카가 제단에 도착했다. 심층의 존재를 부르던 의식을 중지하고 그 힘으로 다른 것을 행했다.
천호도 일어섰다. 순간이지만 시원하게 뻥 뚫린 정면을 보았다.
아직 많았다.
진녹의 기운은 여전히 왕도를 지배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다시 한 번 랫맨의 해일이 밀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자세를 편히 하고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생각났다!]
[그때 그 마법! 1층의 탑에서!]
레온이 새로 만들어 준 몸을, 제국 수호검을 부러트린 그 마법!
그것과 같았다. 그것과 같은 파장이었다.
“사정이 있었어요.”
[사정?]
“네, 사정. 끝나고 이야기해 드릴게요.”
천호는 모른 척하는 대신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착하고 순한 성검이니 사정을 들으면 이해해 주리라. 정말 피치못할 사정이기도 했고.
[으음.]
[알겠다.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역시 미트라.
천호는 미트라의 황금색 보석을 기분 좋게 쓰다듬은 뒤 다시 정면을 보았다.
정말로 새카맣게 몰려들고 있었다.
더욱이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왕도의 중앙.
왕도 북쪽에 자리한 왕궁에서 내려다보이는 장소.
그곳에서 진녹의 기운이 하나로 응축되고 있었다. 멀리서도 느낄 수 있을 만치 엄청난 힘이었다.
역병신의 신상.
그 아래에 선 칼라카가 주문을 완성했다.
도루마와 앙헬이 각자 걸음을 멈추고 중앙을 돌아보았고, 하늘에 자리한 사스치엘과 엘리엘의 눈빛이 변했다.
역병신의 힘.
놈들은 심층의 존재를 소환하는 대신 그 힘으로 치유의 신의 제단을 직접 파괴할 생각이었다.
저 거대한 힘이 왕궁을 향해 몰아칠 것이 분명했다.
“위대한 역병의 힘이여!”
칼라카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나 되어 단검의 형태를 갖춘 진녹의 기운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대기가 크게 떨었고, 왕도 곳곳에서 펼쳐지던 싸움이 순간 정지했다.
모두가 하나같이 고개를 들어 역병신의 검을 보았다.
도루마는 경이감을 느꼈다.
앙헬은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다.
칼라카는 크게 웃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왕궁을 향해 역병의 검을 내쏘았다.
아우라엘이 그것을 보았다.
라구엘이 앉은 채로 숨을 헐떡였다.
산의 일족 전사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진녹의 검을 마주했다.
루시엘이 천호에게 다가섰다. 천호는 그런 루시엘에게 시원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루시엘도 그랬다.
두려워하기는커녕 활짝 웃어 주었다.
천호와 루시엘이 정면을 보았다.
마지막 획이 그어졌다.
왕도의 외곽에 빛의 고리가 완성되었다.
빛의 기둥에서 울려 퍼지던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절정에 달했다.
역병의 검이 왕궁에 당도했다.
치유의 신의 힘이 강림했다.
* * *
[전방을 향해 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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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나 여왕은 눈을 크게 떴다.
유그 왕자를 안고 있던 에이젤은 영창하던 주문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루시엘을 닮은 신상에서 솟구쳐 오르던 빛의 기둥이 약해지고 있었다.
신물의 힘이 다해서가 아니었다.
치유의 신이 에이젤이나 유그 왕자에게 노한 것 역시 아니었다.
4층에 쏟아지고 있던 치유의 신의 힘이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젤은 천사였다. 루시엘이 말했던 것처럼, 격이 낮다고는 하나 신의 말석에 들 수 있는 존재였다.
때문에 에이젤은 느낄 수 있었다.
치유의 신의 힘의 흐름을.
그 힘이 하나로 집결되고 있는 장소를.
아니, 사실 에이젤 외에도 모두 알 수 있었다. 산맥에 가려 왕도가 바로 보이지 않는 장소였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보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저 너머에서 솟구쳐 오른 크고 아름다운 빛의 기둥.
에이젤이 유그 왕자를 꼭 끌어안았다. 에이젤의 품 안에서 유그 왕자가 버둥거렸고, 조막만 한 손을 멀리 쭉 뻗었다.
그리고 루카나 여왕이 말했다.
“보러 가야겠다.”
더 이상 얌전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말에 산의 일족이 호응했고, 에이젤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날개를 활짝 펼쳤다.
유그 왕자가 에이젤의 가슴에 뺨을 비볐다. 에이젤은 간지럽다 웃으며 날아올랐다.
“가자.”
루카나 여왕을 선두로 산의 일족이 진군을 개시했다.
* * *
왕도의 모두는 다르지 않았다.
눈이 있는 자들은 모두 보았고, 귀가 있는 자들은 모두 들었다.
앙헬은 뒷걸음질 쳤다.
도루마는 양손으로 움켜쥔 검을 늘어트렸고, 칼라카는 눈을 부릅떴다.
세상 모든 것을 파괴할 것처럼 나아가던 진녹의 단검.
역병신의 힘이 하나로 응집된 그것이 왕궁의 하늘에 고정되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 했다.
빛의 기둥으로부터 비롯된, 거대한 여신의 흉상이 손을 뻗고 있었다. 가늘고 긴 팔이 왕궁 위를 가로질렀고, 하얗고 모양 좋은 손가락들이 활짝 펴졌다. 보이지 않는 힘이 여신의 상체만 한 역병의 단검을 붙들고 있었다.
치유의 신.
플로렌 왕궁의 왕도에 집적된 수백 년 치의 마력을 통해 구현된, 저층에 강림한 그녀의 아바타라.
아름다웠다.
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황금빛 머리칼이 바람을 따라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것은 여신의 하얀 등을 모두 덮을 만치 길었다.
여신의 눈동자는 녹색이었다. 봄의 영롱함이 담긴, 생명이 움트는 초원과 같은 색이었다.
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속이 비칠 것처럼 맑고 얇은 그것은 몸을 옥죄지 않았다. 상앗빛 어깨를 훤히 드러낸 채로 그저 자연스럽게 여신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치유의 신은 결코 유약하지 않았다.
그녀의 미소는 분명 아름다웠지만, 꽃과 같은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약동하는 생명의 아름다움이었다.
천사들이 무릎 꿇었다. 양손을 모아 쥐고 기도했다.
천호는 자신의 머리 위에 구현된 거대한 여신의 흉상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아래였던 터라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천호에게는 충분했다.
[그대여?!]
미트라가 경악?아니, 힐난했고, 천호는 변명하는 대신 헛기침을 토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치유의 신은 역병의 검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움켜쥔 주먹을 뿌리치듯 휘둘렀다. 그러자 역병의 검이 더 이상 버티지 못 했다.
역병신의 음산한 진녹과는 다른, 자애로운 녹색의 빛이 역병의 검을 파고들었다. 역병의 검 곳곳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더니 그 안에서 하얀 빛이 쏟아졌고, 하늘과 땅이 동시에 진감했다.
츠화아?!
역병의 검이 산산이 조각났다. 순백의 빛이 왕도 전체를 밝혔고, 치유의 신이 다른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기세를 몰아치듯 길게 내뻗으며 힘을 발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문자 그대로 기적.
신이 일으키신 역사.
빛의 기둥을 따라 나타난 천사들의 환영들이 소리 높여 노래했다.
왕도에 그려진 순백의 마법진으로부터 크고 강한 빛이 일었다.
역병신의 무리들이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입에 거품을 물며 발광했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왕도를 벗어나고자 몸을 돌렸다.
하지만 너무 늦어 있었다. 이미 마법진은 발동했고, 순백의 빛은 그대로 빛의 방벽이 되었다.
타올라라.
여신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 목소리를 들었다.
방벽 가까이에 있던 역병신의 무리들이 순백의 빛에 휩싸여 불타올랐다. 짙은 안개처럼 깔려 있던 진녹의 기운이 흩어졌고, 태양을 가려 밤을 이끌었던 검은 구름들 사이로 균열이 일었다.
앙헬이 비명을 질러 댔다.
이래서 오고 싶지 않았다. 이리될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락 드워프들이 양손을 번쩍 들고 환호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적에 고취되어 함성을 질러 댔다.
도루마는 숨을 헐떡였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뒷걸음질 쳤다.
칼라카는 피를 토했다. 역병신의 힘을 다루던 그녀에게 역병의 단검이 파괴된 여파가 미친 탓이었다.
“커헉. 컥.”
피를 한 바가지나 토해 낸 그녀는 비틀거렸다. 아직 건재한 역병신의 신상에 등을 기대며 왕도 위에 강림한 치유의 신의 아바타라를 노려보았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 와중에도 역병신의 무리들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왕도를 가득 채웠던 진녹의 기운이 줄어들고 있었다.
[방법은 없다. 의식은 실패했다. 너 역시 마찬가지이다.]
차갑고 음산한 목소리가 칼라카의 머릿속에 울렸다. 칼라카는 힉 숨을 삼키며 바닥에 엎드렸다. 역병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들어라. 너의 실패는 그저 참담한 결말만을 내지 않을 것이다.]
[지금 강림한 것은 치유의 신이 아니다. 그년의 힘뿐이다. 그나마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강림하지 못 한 것은 역병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있던 진녹의 기운도 벌써 반 가까이 소멸했다.
[마지막 제물을 바쳐라.]
[너의 최후에 마지막 공적을 더해라.]
엎드린 채 벌벌 떨던 칼라카가 고개를 들었다. 역병신의 말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제물.
최후의 공적.
비명을 질렀다. 싫다고 외쳤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역병신은 이미 그녀의 육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아아, 아아악!”
칼라카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몸이 진녹의 불꽃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것은 칼라카만이 아니었다.
왕도 곳곳에서 역병신의 무리들을 불태우던 순백의 불꽃에 진녹의 불꽃이 더해졌다.
서로 경쟁하듯 역병신의 무리들을 불태웠다.
환호하던 드워프들은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도루마는 멍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고, 앙헬은 칼라카처럼 비명을 질러 댔다.
“싫어어어!”
이럴 거면 차라리 불러내지 말 것이지! 그냥 중층에 머물게 둘 것이지!
차마 역병신을 원망하지는 못 했다. 그러기에는 너무 강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때문에 앙헬은 칼라카를 원망했다. 그녀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불타올랐다.
진녹의 기운이 크게 피어올랐다. 수만에 달하는 역병신의 무리를 불태우며 솟구쳐 오른 진녹의 연기가 왕도의 중앙으로 집결했다.
치유의 신의 아바타라가 그것을 보았다.
왕도를 에워싼 빛의 방벽을 제거하고, 그 힘을 다시 오른손에 모았다. 빛의 활과 화살을 만들어 시위를 당겼다.
역병의 신!
치유의 신이 일갈하며 시위를 놓았다. 거대한 빛의 화살이 왕도 중앙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것을 붙잡았다.
하나로 집결한 진녹의 기운으로부터 솟구쳐 오른 것이.
새카만 털로 뒤덮인 거대하고 흉측한 손이.
왕도 전체가 뒤흔들렸다. 빛의 화살을 움켜쥔 손이 힘을 주자 빛의 화살이 분쇄되었다.
치유의 신의 아바타라가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왕도뿐만 아니라 주변 일대가, 아니, 4층의 변경 전체가 진동했다. 마치 두려움에 떠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역병신의 오른팔.
아바타라 따위가 아닌, 역병신의 진정한 오른팔.
역병신은 저층에 강림하는 것을 포기했다.
왕도에 모여 있던 무리들 역시 포기했다.
심층의 존재를 저층에 올려 보내겠다는 계획에도 더 이상 집착하지 않았다.
그저 갈망했다.
그저 소망했다.
이 모든 일을 초래한 자를 제거한다.
1층에서부터 자신을 방해한, 저 찢어죽일 천사와 용사를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린다.
불완전한 강림이었다.
오른팔 하나만을 강림시킨 것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충분했다.
그것은 신의 일부였으니까.
심층 하나를 지배하고 있는 강대한 악신의 힘이었으니까!
진녹의 기운으로부터 거대한 오른팔이 어깨까지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연기가 나머지 부분을 대신했다.
신의 오른팔을 지닌 진녹의 거인이 왕도의 중앙에 우뚝 섰다.
그것은 역병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일곱 개의 뿔이 돋아나 있었고, 두 눈은 붉게 타올랐다.
그것이 포효했다. 거칠게 오른팔을 휘두르자 왕도를 에워싸고 있던 빛의 방벽이 일제히 요동쳤다. 힘을 이겨 내지 못 하고 산산이 조각났다.
락 드워프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 했다.
역병신은 그런 락 드워프들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붉은 두 눈으로 왕궁의 옥상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신의 시선이었다. 천사들이 견디지 못 했다. 사스치엘과 엘리엘을 비롯한 전투 천사들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옥상으로 추락했고, 산의 일족은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치유의 신의 아바타라가 급히 힘을 발해 모두를 보호했다.
그리고 그 틈을 노리듯 역병신이 왕궁을 향해 돌진했다.
치유의 신의 아바타라가 노성을 토했다.
역병신이 마주 고함을 질렀다.
두 신의 거체가.
신의 오른팔을 지닌 진녹의 거인과 신의 아바타라가 격돌했다.
서로 엉겨 붙는 싸움이 아니었다.
뚫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싸움이었다.
역병신이 왕궁 앞에 펼쳐진 보이지 않는 벽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치유의 신의 아바타라가 이를 악물며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양쪽 모두 무지막지한 힘을 소진시키고 있었다. 양쪽 모두 오래 버티지 못 할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단 몇 초라도 치유의 신의 아바타라가 먼저 소실된다면.
역병신의 오른팔이 저층에 더 긴 시간을 머물게 된다면.
역병신의 오른팔이 다시 빛의 방벽을 강타했다. 치유의 신의 아바타라가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세 번째 주먹이 휘둘러졌을 때.
빛의 방벽이 부서졌다.
역병신의 오른팔이 마침내 치유의 신의 아바타라의 힘을 분쇄했다. 그대로 멈추지 않고 돌진해 치유의 신의 아바타라의 가슴을 꿰뚫었다.
치유의 신의 아바타라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역병신이 오른손을 움켜쥐었고, 치유의 신이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런 역병신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역병신이 웃었다.
치유의 신의 아바타라를?아니, 치유의 신을 비웃었다.
힘이 약해지고 있구나.
이미 거의 다 소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구나.
치유의 신은 부정하지 않았다. 역병신의 오른팔을 꽉 붙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아름다운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