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59화 (59/211)

* * *

“제가… 가야 한다고요?”

“네, 왕녀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천호는 레티샤 왕녀를 속이지 않았다.

달콤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대신 담백한 사실을 고하였다.

이제 열 살이나 되었을지 모를 소녀에게는 가혹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왕녀의 힘이 필요한 이유. 왕녀가 해야만 하는 일. 왕녀가 가는 곳의 위험함.

거짓말로 안심시킬 수도 있었지만 안 될 말이었다.

직접 전장에 서야 하는 만큼 왕녀는 모든 것을 명확히 알아야 했다.

아버지였다면 무어라 하셨을까.

그것이 전장에 서는 이에 대한 예의라고 하셨을까.

사실 그렇게까지 딱 잘라 말할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행동이 옳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레티샤 왕녀는 입술을 움츠렸다. 숨을 거칠게 쉬었고, 초점 잃은 눈으로 천호와 루시엘을, 주변에 자리한 이들을 돌아보았다.

겨우 빠져나온 왕도로 돌아가야 한다.

왕궁에 숨어들어 의식을 거행해야 한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마물들만이 아니었다. 완전히 변해 버린 왕궁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 겁이 났다.

그곳에는 더 이상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가 없었다.

다정한 유모도, 유쾌한 호위 기사도, 자신을 보면 늘 밝게 웃어 주던 시녀들도.

루시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천호는 레티샤 왕녀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낮추었던 자세 그대로 기다렸다.

싫다고 답할 수도 있었다.

무서워서 가기 싫다고, 자기는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레티샤 왕녀는 치맛단을 꽉 움켜쥐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벌벌 떤 끝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갈게요.”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분명히 답했다. 울먹이긴 했지만 울음도 터트리지 않았다.

레티샤 자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글렌 경을 비롯해, 레티샤 자신을 지키다 죽은 이들의 죽음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되었으니까.

어리지만 왕녀였다.

플로렌 왕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감사합니다, 왕녀님.”

아버지였다면 좀 더 멋진 말들을 늘어놓으셨을 텐데. 반드시 지켜 주겠다고 약속도 해 주었을 터인데.

하지만 천호는 아직 미숙했다. 반드시 지켜 주겠다는 말 대신 끝까지 곁을 지키겠다 말하였다.

“왕녀님.”

루시엘이 눈시울을 붉혔다. 레티샤는 엉망이 된 얼굴로 억지웃음을 짓더니 아까보다 또렷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레티샤 왕녀는 천호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에이젤의 품에 안겨 잠든 유그 왕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그를 부탁드려요.”

유그만은 이 싸움에 말려들지 않기를. 유그만은 어떻게든 살아남기를.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샤 왕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약속했다.

“반드시 그럴게요. 유그 왕자님만은 꼭. 무슨 한이 있더라도.”

레티샤 왕녀도 루시엘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품 안에서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천호는 그런 레티샤 왕녀의 모습을 마음 깊이 새겨 두었다.

* * *

한바탕 운 뒤에는 웃음이었다.

레티샤 왕녀는 루시엘 옆에 꼭 붙어 앉아 웃음꽃을 피웠다.

축제까지는 아니었지만 흥겨운 저녁이었다.

오랜만에 전용 불판을 꺼낸 천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모습으로 랫 키메라 고기를 구웠다.

저층에서는 맛볼 수 없는, 오직 중층 이상에서만 맛보는 것이 가능한 특식이었다.

‘마력이 강할수록 고기도 맛있어.’

다양한 마물들로 요리를 해 본 결과 내린 결론이었다.

자이언트 랫 고기가 야생의 쥐고기와 달리 누린내가 거의 없었던 것도, 코카트리스 스켈레톤의 뼈가 단지 뼈만으로 깊은 맛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마물들의 피와 살과 뼈에 녹아들어 있는 마력 덕분이었다.

중층의 마물 고기는 저층의 마물 고기보다 맛있었다.

이미 마물식에 익숙해진 루시엘조차도 랫 키메라 고기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예 마물식을 먹어 본 적 없는 레티샤 왕녀는 그저 웃기만 했다. 너무 맛있어서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그래서 천호는 오랜만에 물어보았다.

“맛있어요?”

“네에♥”

루시엘이 방긋 웃으며 말하자 옆에 있던 에이젤이 녹아내리는 표정으로 똑같이 답했다. 평소에는 제법 딱딱한 아우라엘과 라구엘도 마찬가지였다.

“네♥”

“네♥”

“네♥”

천호는 흡족했다. 열과 성을 다해 고기를 구웠고, 랫 키메라의 뼈과 고기를 푹 삶아 맛 좋은 사골 국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잊히기 쉬운 이들까지 챙기는 수완을 발휘했다.

“무럭무럭 자라렴.”

꾸이꾸이.

잔불이에게 렉카로스의 활을 먹였다. 천호 자신이 쓰기에는 너무 컸고, 이미 마도로프의 활이 있었으니까.

잔불이는 귀여운 소리를 내며 야금야금 잘도 먹었다.

“너도.”

작은 화분에 랫 키메라의 고기 국물을 부었다. 그러자 이제 막 새싹이 돋은 마목이가 반응을 보였다.

움찔움찔 새싹을 떨었는데, 꽤나 기뻐하는 느낌이었다.

“하, 너무 아쉽네요.”

[응? 뭐가 말이냐?]

“미트라만 먹을 게 없잖아요.”

미트라 배도 부르게 해 주고 싶은데. 맛있다며 하트 뿅뿅 띄우는 걸 보고 싶은데.

천호의 말에 미트라는 참으로 그녀다운 말을 하였다.

[나는 괜찮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배가 부른 기분이다.]

순하고 착하고 다정한 성검.

천호는 문득 씩 웃더니 미트라의 황금색 보석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미트라.”

[왜 그러느냐.]

“미안해요.”

[응?]

“3층에서요.”

[무슨… 말이냐?]

천호는 바로 답하는 대신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대로 헛기침을 몇 번 터트리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것저것 필요하긴 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미트라를 괴롭힌 것 같아서요.”

미트라 덕분에 모두가 쾌적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뭐랄까, 3층에서는 조금 지나치게 미트라를 몰아붙인 경향이 있었다.

“미트라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좀 지나치게 행동한 것 같아요.”

목욕물 데우기나 세탁기까지는 그렇다 쳐도, 솔직히 다림질까지 필요하지는 않았으니까.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천호의 솔직한 고백에 미트라는 침묵했다. 그리고 십여 초. 천호가 슬슬 조바심을 느낄 즈음하여 말문을 열었다.

[그대여, 일단 한 가지만 명확히 하겠다.]

“네, 미트라.”

[나는 귀엽지 않다.]

“풉!”

저도 모르게 뿜고 말았다. 그리고 그 같은 반응에 미트라가 격렬히 반응했다.

[웃지 마라! 웃지 말란 말이다!]

“하, 하지만.”

무리였다.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천호가 배를 잡고 낄낄거리자 미트라는 씩씩거렸고, 그게 또 천호를 자극했다. 새삼 이전에 보았던 이모티콘 표정이 떠오른 탓이었다.

[흥이다.]

“루시엘도 아니고 흥이 뭐예요.”

[그대여, 내게 사과하고 있던 것을 잊었나?]

“그러고 보니 그렇네. 미안해요, 미트라.”

천호가 급히 표정을 진지하게 하며 말하자 미트라는 웃음 섞인 한숨을 토했다.

[후우, 뭐… 아무튼 괜찮다. 모두를 위해서이기도 했고, 이렇게 사과도 했으니 말이다.]

[나도 정말 싫었다면 그대가 아무리 부탁해도 협조하지 않았을 거다. 너무 마음에 두지 않아도 된다.]

“정말요?”

[그래, 나는 괜찮다. 앞으로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해라. 가능한 협력할 터이니.]

역시 미트라였다.

천호는 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바로 작업을 시작해 볼까요?”

[으, 응? 버, 벌써 말이냐?]

“목욕물 데워야죠.”

식사 뒤에는 목욕. 이제는 당연하다고 해도 좋을 일상.

[일단은 여행 중인데 말이지.]

그것도 대미궁 안을.

[좋다, 용사여. 오늘은 특히 좋은 목욕물을 만들어 보자꾸나.]

미트라가 힘차게 답하자 천호는 오히려 실망한 듯 어깨를 조금 늘어트렸다.

[그대여?]

“아니, 으앙을 기대했는데. 오랜만에 으앙 한 번 해 주면 안 돼요?”

[그대여.]

“으앙.”

[그대여.]

“으앙.”

미트라는 결국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 으앙?]

“풉!”

[그대여?!]

배신감까지 섞인 부름에 천호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황금색 보석을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 * *

밤이 깊었다.

식사와 목욕까지 마친 일행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의 일정은 이미 모두 세워 두었다.

마탑에 신상과 함께 보관 중이던 문서를 통해 의식의 방법과 필요한 시간을 확인하였고, 레티샤 왕녀로부터 비밀 통로의 위치를 전해 들었다.

모두가 왕궁에 숨어들 수는 없었다.

때문에 인원을 둘로 나누었다.

왕궁에 숨어들 소수의 작전조와 밖에서 왕도를 공격하여 마물들의 시선을 끌 유인조.

양쪽 모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용사님.”

바로 곁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처럼 천호의 옆에 웅크리고 누워 있던 루시엘이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루시엘의 눈을 볼 수 있었다.

파랗고 맑은 눈.

루시엘은 거짓말을 할 줄 몰랐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언제나 솔직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루시엘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대미궁에 들어온 이후 여러 위기를 겪어 왔지만, 지금 이상의 위기는 없었다.

실패할 경우 일어날 일 또한 감당하기 어려울 만치 컸다.

천호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루시엘의 어깨를 안았다. 순간 움찔한 그녀였지만 이내 천호의 품에 머리를 묻었다. 천호는 그런 루시엘을 보듬으며 말했다.

“틀림없이 잘 될 거예요.”

어머니의 말버릇.

아버지가 무언가를 하실 때마다 격려하듯, 응원하듯 입에 담으시던 말.

루시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네, 용사님. 틀림없이 잘 될 거예요.”

그저 막연한 말이었지만 기운이 났다. 다시 한 번 밝게 웃은 루시엘은 천호를 꼭 끌어안았다.

“안녕히 주무세요, 용사님.”

“네, 루시엘.”

천호는 애써 침착하게 답했고, 루시엘은 어리광을 부리듯 천호의 품에 조금 더 파고들었다. 단단한 천호의 가슴에 온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겨우 십여 초.

루시엘은 방금까지의 불안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곤히 잠들었다. 하지만 천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대여,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내일을 위해 충분히 자두어야 한다.]

‘…노력해 보죠.’

루시엘과 닿은 왼팔의 감각을 애써 마비시키며 천호는 현자의 시간을 발동시켰다. 새삼 열심히 천마신공을 연마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 * *

[퀘스트 유지 시간 : 23시간 41분]

[현자의 시간 Lv3이 되었습니다.]

[천마신공 Lv3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인내심 Lv4가 되었습니다.]

[인내심 Lv5가 되었습니다.]

[번뇌력 Lv2가 되었습니다.]

[퀘스트 유지 시간 : 15시간 52분]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낮과 밤의 경계가 허물어졌으니, 아침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산의 일족은 태양을 대신하듯 곳곳에 불을 밝혔다. 횃불의 숫자가 워낙 많고, 하나하나가 밝아 얼핏 보면 산 전체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당연히 왕도에서도 이런 산의 변화가 잘 보일 터였다.

루카나 여왕은 산중 깊은 곳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커다란 제단을 쌓아 올린 뒤 루시엘을 닮은 치유의 신의 신상을 세웠다. 오레놀이 하룻밤 사이 열심히 만든 물건이었다.

유그 왕자를 품에 안은 에이젤이 그런 신상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어린 유그 왕자는 비교적 얌전했지만, 그래도 자꾸만 바둥거리며 고개를 돌려 댔다. 누나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에이젤은 그런 유그 왕자를 보듬었다. 아직 어리고 견습이라 하나 천사였다. 유그 왕자는 금방 에이젤에게 집중했고, 헤실헤실 아기답게 웃었다.

루카나 여왕은 손수 산의 일족의 신물을 신상 앞에 세웠다. 치유의 신이 용사의 후예인 산의 일족에게 하사한 물건이었다.

손바닥에 들어오는 작은 은색 상자.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제단과 신상 주위에 모여든 산의 일족이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루카나 여왕이 에이젤에게 눈짓했고, 에이젤은 숨을 깊이 삼켰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그 왕자에게 작게 사과한 뒤 바늘로 손가락 끝을 찔렀다.

“?!”

너무 깜짝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 한 유그 왕자가 눈을 껌벅였다. 커다란 눈망울은 이내 배신감으로 물들었고, 왕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미안, 미안.”

에이젤이 사과하며 손가락 끝에 흘러나온 피를 신물에 흘려보냈다.

겨우 몇 방울이었지만 효과는 충분했다.

“의식을 시작한다.”

루카나 여왕이 말했다. 산의 일족이 북을 울렸고, 에이젤이 의식의 주문을 읊조렸다.

신물이 빛나기 시작했다. 제단 위에 자리한 신상이 새하얀 빛을 발했다.

엉엉 울던 유그 왕자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고, 에이젤이 그런 유그 왕자를 고쳐 안았다. 신상이 잘 보이게 한 뒤 다시 한 번 힘주어 주문을 읊조렸다.

치유의 신의 힘을 빌리는 의식.

산의 일족의 기도가 하나가 되었다. 치유의 신의 신상으로부터 빛이 솟구쳐 올라 검은 하늘을 찔렀다. 빛의 기둥이 형성되었다. 조금이지만 검은 기운을 흩어 하늘의 빛을 되찾았다.

루카나 여왕이 마른침을 삼켰다.

에이젤이 더욱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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