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58화 (58/211)

“소환 마법. 혹은 이동 마법.”

그레이스가 문득 말했다. 마물들이 갑자기 늘어난 이유.

설명이 되었다.

4층의 신상과 제단은 다른 층보다 오래전에 만들어졌다. 의식을 오래하였고, 그만큼 많은 수의 마물들을 불러내거나 이동시킬 수 있었을 터였다.

의식이 진행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저층에서만.

의식이 꽤 진행된다면 중층에서도.

그리고 종국에는 심층의 존재를.

모두 가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무시할 수 없었다.

“서두르죠.”

천호가 말했고, 모두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 *

칼라카는 마탑의 함락 소식을 들었다.

솔직히 말해 조금 의외였다.

렉카로스는 그렇게까지 약한 놈이 아니었고, 천이나 되는 랫맨들이 마탑에 주둔하고 있었으니까.

‘산의 일족.’

존재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수가 많았다. 어림짐작이지만 못해도 2천 이상은 되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칼라카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그뿐, 마탑을 탈환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루카브론드와 같았다.

장소를 확보하고 제물을 바친 뒤에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다. 의식의 경과를 기다린다.

왕도에 거하던 인간 수만을 제물로 바쳤다. 당분간은 제물 때문에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왕도의 중심.

검은 하늘 아래 진녹의 기운이 요동쳤다. 심층의 기운이 만들어 낸 불꽃 속에서 몇이나 되는 존재들이 머리를 내밀었다.

이제 막 본거지에서 돌아온 도루마가 미간을 찌푸린 채 그것을 바라보았다.

도루마나 칼라카처럼 인간형인 것도 있었다.

루카브론드가 최후의 힘으로 소환했던 랫 키메라도 두 마리나 되었다.

하나같이 강맹한 중층의 존재들.

그리고 그들로 끝이 아니었다.

신상을 중심으로 피어오른 진녹의 기운은 더욱 크게 불타올랐다.

머지않은 미래에 심층의 존재를 불러내고자.

마침내 역병신의 힘을 강림시키고자.

랫 키메라가 터트린 포효 속에서 칼라카는 미소 지었다. 심층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 * *

마탑 옥상에서 중층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마주한 적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앞장서서 달리던 천호는 습관처럼 주변 환경을 읽어 냈고,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탑 곳곳에는 화재와 습격의 흔적이 역력했다. 곳곳이 불에 타 검게 변해 있었고, 벽과 바닥에 검붉은 핏자국들이 자리했다.

역설적이게도 생활감 역시 느껴졌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탑 곳곳을 돌아다녔을 마탑의 마법사들.

길을 안내하기 위해 천호와 거의 나란히 달리던 그레이스는 이를 악 문채 무표정을 고수했지만, 그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천호는 서툰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레이스가 어느 순간 외쳤다.

“도착했어요!”

마탑 중층에 숨겨진 장소는 굉장히 작고 비좁았다. 책장 뒤,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공간 위에 전송용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으니 말이다.

마법진을 통해 지하에 위치한 진짜 숨겨진 장소로 이동한다.

“용사님, 먼저 갈게요.”

작게 인사한 루시엘이 마법진 위에 올랐고, 이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미 설명을 들었고, 루시엘에 앞서 라구엘과 루카나 여왕이 이동한 상황이었지만, 천호는 새삼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대여?]

“아뇨, 그냥.”

다시 한 번 파이엔을 구하기 위해 떠나셨던 아버지와 어머니.

눈앞에서 사라진 루시엘의 모습에서 순간이지만 두 분의 모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

천호 자신이 미궁 세계로 이동한 건 알고 계실까.

[그대여, 괜찮은가?]

[혹시 전투 중에 마력을 너무 써서 몸이 안 좋은 거라든가…….]

미트라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천호는 순하고 착한 성검을 위해 씩 웃어 보인 뒤 황금색 보석을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미트라가 제 옆에 있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웬 엉뚱한 소리냐며 투덜거렸지만 묘하게 기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천호는 다시 한 번 웃은 뒤 마법진 위에 발을 올렸다.

눈을 한 번 깜박이자 완전히 다른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둡고 작은 방.

먼저 이동한 루시엘과 라구엘은 양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었다. 루카나 여왕도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아 예를 표했다.

세 사람의 정면에 자리한 것.

여덟 장의 날개를 가진 아름다운 여신.

치유의 신의 신상이 그곳에 있었다.

* * *

치유의 신은 영웅들을 지원하기 위해 직접 심층에 내려간 신들 가운데 하나였다.

다섯 여신 가운데 하나인 생명과 열정, 태양의 여신 아이테르의 딸인 그녀는 다섯 여신들을 제한 나머지 모든 신들 가운데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신이었다.

평범한 성인 크기의 신상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아니, 단순히 아름다운 데 그친 것이 아니었다.

성스러움.

기품.

우아함.

치유의 신 본인이 아닌, 그저 모습을 본떠 만든 신상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좋은 말을 다 붙여도 좋을 것 같았다.

천호는 루시엘과 라구엘을 이해했다. 미궁 세계의 신들과 크게 연관이 없는 천호임에도 불구하고 절로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이 세계의 천사들인 그녀들이라면 지금처럼 공손히 기도를 올리는 게 당연했다.

가장 늦게 도착한 그레이스 역시 짧게나마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치유의 신의 신상입니다. 저 신상과 왕가의 피, 산의 일족에 전해져 내려온 신물의 힘… 그리고 왕도의 제단이 더해지면 치유의 신의 힘을 강림시키는 의식을 거행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레이스의 설명에 천호는 눈을 깜박였다. 그도 그럴 것이, 루카나 여왕의 이야기와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도의 제단이요?”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묻자 루카나 여왕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루시엘과 라구엘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는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레이스 역시 조금 놀란 얼굴이 되어 되물었다.

“치유의 신의 힘으로 역병신의 무리들을 몰아내려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역병신의 상극인 치유의 신의 힘으로 역병신의 무리들을 분쇄한다.

얼핏 같지만 다른 이야기였다.

“우린 치유의 신의 힘으로 역병신의 기운을 약화시킬 생각이었습니다.”

라구엘이 다시 설명하자 그레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강 이해가 가는군요. 루카나와 산의 일족은 신물을 지킨 것이지 의식을 지켜 온 것이 아니니까요.”

“의식에 왕도의 제단이 반드시 필요한 겁니까?”

라구엘의 물음에 그레이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양쪽 다입니다. 평범한 의식을 거행한다면 신상과 신물, 왕가의 피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작금의 사태를 해결할 수 없을 겁니다.”

근방 일대의 낮이 사라지고 밤이 계속될 정도로 역병신의 힘이 강해진 상황이었다.

아무리 신물의 힘을 빌린다 할지라도 수만이 넘는 생명을 제물로 바쳐 이끌어 낸 역병신의 기운을 밀어낼 수는 없었다.

“플로렌 왕국의 왕도는 평범한 도시가 아닙니다. 도시 자체가 거대한 마법진으로 설계되어 있죠. 수백 년에 걸쳐 왕도 주민들의 마력을 조금씩 흡수했기에, 그 축적된 힘은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라구엘이 눈을 크게 떴다. 그레이스가 계속 설명했다.

“왕도에는 숨겨진 의식의 방이 있습니다. 그곳에 신상과 신물을 세우고, 왕가의 피를 가진 자가 의식을 거행하면 치유의 신의 힘 그 자체를 강림시킬 수 있을 겁니다. 왕도가 축적해 온 힘을 단번에 해방하면 역병신의 기운을 몰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역병신의 무리들에게도 막대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겁니다.”

“분명 엄청난 힘일 겁니다.”

라구엘이 말을 보탰다. 그도 그럴 것이, 자그마치 수백 년 동안 수만 명에게서 모아 온 힘이었다. 아주 조금씩이었다 해도 그 축적된 양이 무시무시할 터였다.

하지만 실행에는 난관이 있었다.

“의식의 방은 어디에 있지?”

“왕궁 지하에 있어.”

루카나의 물음에 그레이스가 답했고, 라구엘과 루시엘이 경악으로 눈을 크게 떴다.

말인즉, 역병신의 무리들에게 점령된 왕도에 침투해 의식을 거행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레티샤 왕녀나 유그 왕자를 동반한 채로.

루카나 여왕은 이를 악물었다. 평소였다면 왕도의 제단을 사용하지 않는 의식 정도로 만족하자고 하든가, 아예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말했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역병신의 무리들이 꾸미고 있는 것.

그들이 만약 정말로 역병신이나 심층의 존재를 강림시키려 하는 것이라면.

애당초 천호 일행만으로 이번 사태에 대처해야 했던 것은 이곳이 대미궁의 변방이었기 때문이다.

중앙에 주둔 중인 천사들의 군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으리라.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정확한 제한 시간조차 알 수 없었다.

“용사님.”

루시엘이 천호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허공을 향했고, 그러기는 천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짤막하게 떠오른 빛의 창이 모든 것을 설명했다.

* * *

지금까지의 수순과 같았다.

어느 정도 상황과 정보를 파악하고 나면 해당 사건과 관계된 퀘스트 창이 나타나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제시한다.

역병신의 무리들은 역병신 강림을 꾀하고 있었다.

역병신 강림까지 남은 시간은 80시간 남짓.

하지만 2차였다. 빛의 창을 노려보던 라구엘이 말했다.

“심층의 존재 강림까지 32시간이 남았다는 것 같군요.”

중층의 존재까지는 어떻게든 맞상대할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심층의 존재는 무리였다. 어떻게든 심층의 존재가 강림하기 전에 의식을 저지해야만 했다.

[왕궁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을 거다.]

[반드시 그럴 거다.]

왕가뿐만 아니라 제법 규모 있는 귀족 가문만 해도 자택에 비밀 통로를 만들어 두기 마련이었다.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는 미트라와 정반대였지만,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아들아, 왕궁에 방문하면 왕궁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 정도는 파악해 두거라.’

‘왜요?’

‘공주님 만나러 갈 때 필요하거든. 가끔은 여왕님이나.’

천호는 작게 웃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미소였지만, 그래도 굳이 표정을 고치지 않았다.

분명 어려운 상황이었다.

마물들로 가득한 왕도에 숨어들어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왕녀를 지켜 내야만 했다.

천호는 다시 한 번 웃었다.

말로 구체화시켜 놓고 보니 어려운 수준이 아니라 그냥 불가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내야 했다. 그리고 해낸다면 일발역전이 가능했다.

천호는 고개를 들어 빛의 창을 보았다. 지금도 퀘스트 유지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망설이고 한탄할 시간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아들아, 용사는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와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법이다.’

‘왜요?’

‘용사니까.’

호탕하게 웃으시며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하시던 아버지.

용사는 앞서 이끄는 자였다. 용사가 포기하면 뒤따르던 이들까지 모두 길을 잃고 말았다.

천호는 숨을 깊이 삼켰다.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 앞에서 힘 있는 미소를 머금었다.

“한번 해 보죠. 이번 작업을.”

천호의 말에 라구엘이 눈을 깜박였고, 루시엘은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나 여왕은 멍하니 천호를 바라보았다.

그레이스가 웃었다. 돌연 다가서더니 천호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용감한 용사님께 무운이 함께하기를.”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루카나 여왕이 퍼뜩 고개를 들어 그레이스를 바라보았고, 그레이스는 미소와 함께 눈을 감았다. 그녀의 영체가 곧 빛이 되어 흩어졌다.

“돌아가죠.”

치유의 신의 신상을 가지고.

루시엘이 서둘러 신상에 다가섰다.

* * *

레티샤 왕녀는 유그 왕자를 끌어안은 채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았다.

천호의 부탁을 받아 산의 일족 본거지에 남은 락 드워프들이 각자의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오레놀과 랄프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돌을 깎아 치유의 신의 신상을 만들고 있었고, 사라는 제국 사서복을 고쳐 천호의 새 옷을 만들고 있었다.

반쯤 만들어진, 루시엘을 닮은 여신상을 바라보며 레티샤는 시선을 돌렸다. 왕도가 있는 방향이었다.

불꽃처럼 피어오른 진녹의 기운에 가려 왕도가 잘 보이지 않았다.

레티샤는 눈을 감았다. 유그를 꼭 끌어안은 채 기도했다.

그냥 잘 되게 해 주세요. 그냥, 그냥 잘 되게 해 주세요.

무어라 기도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어린아이다운 막연한 기도였다.

하지만 레티샤는 간절했다.

기도하다 떠올린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유그 왕자가 따라서 울었고, 울음소리에 깜짝 놀란 락 드워프들이 서둘러 레티샤에게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반쯤 만들어진 신상을 통해 자애로움과 안타까움이 섞인 시선을 보내던 그녀는 조금 더 시선을 멀리하였다.

진녹의 기운에 뒤덮인 왕도를 노려보았다.

* * *

천호 일행은 산의 일족과 함께 급히 산맥으로 돌아갔다.

도루마는 다섯 자루의 마검 가운데 새로이 가져온 마검인 힐링 블레이드를 점검하였다.

칼라카는 심층의 기운을 마음껏 만끽했다. 그녀의 머리 위로 새로운 뿔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같은 시간.

전혀 다른 장소.

오랜만에 돌아온 자들이 있었다.

남자는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도어 락 앞에서 끙끙거렸고, 뒤에서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여자가 손가락을 놀리자 잠긴 문이 절로 열렸다.

아직 한낮이었다.

때문에 집에 아무도 없을 것이 당연했지만, 인기척 하나 없는 휑한 집안 공기에 남자는 어깨를 살짝 늘어트렸다.

여자가 그런 남자를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평소 뭘 하든 남자의 뒤에서 천천히 뒤따르기를 좋아하는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남자 이상으로 날카로운 그녀의 감이 무언가 이상이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여보?”

신발까지 신은 채 거실에 들어서는 여자를 보며 남자가 당혹스런 목소리를 토했고, 여자는 우뚝 멈춰 섰다. 남자의 부름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

본래 있어야 하는데 사라지고 없는 것.

“식탁이 없어졌어.”

여자가 말했고,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옷장은?”

두 사람의 시선이 안방으로 향했다.

[메인 퀘스트 : 역병신의 강림 저지]

[역병신의 의식을 중단시켜 역병신의 강림을 저지해야만 합니다.]

[1차 퀘스트 유지 시간 : 32시간 12분]

[2차 퀘스트 유지 시간 : 79시간 47분]

[퀘스트 유지 시간 : 32시간 10분]

제5장?용사의 검

다섯 여신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것은 넷이었다.

아이테르, 이오스, 이브나일, 테레시아.

다섯 번째 여신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무명의 여신.

하지만 존재하는 것만은 분명한, 나머지 네 여신들과 함께 미궁 세계를 수호하고 지탱하는 다섯 번째 여신.

어째서 그녀에게는 이름이 없는 것일까.

어째서 그녀의 이름만이 잊힌 것일까.

네 여신은 그 이유를 알았다.

모두가 다섯 번째 여신의 이름을 잊은 지금, 오직 그녀들만이 다섯 번째 여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 * *

하늘은 여전히 검고 어두웠다.

왕도를 뒤덮은 진녹의 기운 역시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산의 일족이 자리한 산맥에는 활기가 넘쳐흘렀다.

승리했다.

그것도 보통 승리가 아닌 대승이었다.

플로렌 왕국 일대가 대미궁에 편입된 이후 이 정도 규모의 전투를 치른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상 수십 년만의 대규모 전투였고, 그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분하고 남을 일이었거늘, 여기에 전설의 용사가 추가되었다.

앞장서서 모두를 이끄는 용사.

푸른 번개로 적을 멸하는 용사.

전설의 재현인 동시에 새로운 전설의 시작이었다.

전투에 참가했던 이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들을 끊임없이 되풀이했고,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이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전투에 참가한 이들을 부러워하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이 이제 막 이야기꾼으로 전직한 전사들의 마음에 불을 놓았다.

곳곳에서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산의 일족의 얼굴에는 기쁨과 흥분, 미래로의 희망이 가득했다.

이길 수 있다.

암울하고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길 수 있다.

용사가 함께하고 있으니까.

새로운 용사의 전설이 시작되었으니까.

변방에도 간혹 들려오던, 천사들이 소환한 영웅들과는 달랐다.

성검 미트라의 주인.

초대 용사 레온하르트의 진전을 이은 진정한 의미의 용사.

산의 일족은 당장이라도 축제를 시작할 기세였다.

루카나 여왕은 그런 일족을 잘 통솔해 가볍게 즐기는 선에 그치게 하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전시 중인 만큼 승리에 너무 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왕님, 이제 우리가 이길 겁니다.”

“그래.”

“여왕님 만세! 용사님 만세! 성검 만세!”

나이 든 장로들까지 어린아이처럼 뺨을 붉히며 분위기에 취했다.

루카나 여왕은 그런 모두에게 조금씩 맞춰 주며 미소를 머금었다. 결코 마음속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밖으로 흘리지 않았다.

‘용사…….’

루카나 여왕 자신보다 훨씬 작았지만 믿음직했다.

모두가 아연실색하며 두려워하던 그때에도 미소 지으며 앞장서던 그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더욱이 용기를 내야 할 것은 용사만이 아니었다.

루카나 여왕은 시선을 멀리하였다.

용사와 그 일행이 머물고 있는 오두막.

그 오두막에서 오늘 하루 내내 용사 일행의 귀환만을 기다린 플로렌 왕국의 어린 왕녀.

하루아침에 가족과 친지는 물론이고 알고 있던 이들 거의 전부를 잃어버린 가엾은 소녀.

‘다섯 여신이시여, 치유의 신이시여…….’

돌로 만든 옥좌에 앉아 있던 루카나 여왕은 잠시 눈을 감고 기도했다.

용사의 용기가 어린 왕녀에게도 전해지기를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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