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큭?!”
렉카로스가 급히 검을 휘둘러 성검을 쳐 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미 천호는 지면을 박차 두 번째 비상을 하고 있었다.
[그대여!]
미트라가 천호를 불렀다. 하지만 원망 따위 섞이지 않았다. 오히려 환희가 어려 있었다.
허공.
천호는 몸을 뒤틀었다. 엘리엘의 비행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응축하고 있던 힘을 개방하였다.
호세사천왕.
위루파크샤의 장.
축기.
우레를 모았다. 남은 내공 거의 전부를 쏟아부었다.
그 모든 것이 응축된 장소는 오른쪽 다리였다.
렉카로스가 고개를 쳐들어 천호를 보았다. 천호는 그런 놈의 머리 대신 허공을 내리찍었다. 우레를 내쏘았다!?
호세사천왕.
드리타라슈트라의 장.
벼락 떨구기.
본래는 적의 머리를 강타하는 빠르고 무거운 내려찍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정으로 벼락을 떨구었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낙뢰를 쏟아 냈다!
콰가강!
푸른 번개가 렉카로스의 머리를 강타했다.
강력한 번개였다. 더욱이 렉카로스는 지금 평범한 상황이 아니었다.
“크아아악!”
피부가 물에 젖어 전기 저항이 극도로 낮아져 있던 렉카로스였다. 푸른 번개가 진녹의 기운을 뚫고 렉카로스의 전신을 관통했다.
렉카로스가 무너져 내렸다. 일격을 견디지 못 해 무릎을 꿇었고, 이내 제자리에 쓰러졌다.
“우와아아!”
“용사여!”
“푸른 번개여!”
개방된 옥상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전장의 모두가 푸른 번개를 보았다. 산의 일족이 전장 전체가 뒤흔들 만치 엄청난 환호성을 토해 냈다.
빛의 창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빛의 창을 빠르게 확인한 천호가 다시 정면을 보았다. 멍해 있던 랫맨들이 혼비백산해 도망쳤고, 천호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미트라를 주워 들었다.
장난스럽게 물었다.
“이번엔 만족했죠?”
[흥. 이번에도 마지막이 안 좋았다.]
미트라가 새침하게 말했지만 누가 봐도 진심이 아니었다.
그녀는 몇 번인가 더 흥흥거리더니 이내 생글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그대여, 마지막 번개는 용사답고 좋았다.]
“마지막이 안 좋았다면서요.”
[마지막의 마지막은 좋았다.]
천호는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미트라의 황금색 보석을 마구 쓰다듬어 준 뒤 렉카로스의 정수를 회수했다.
“오오…….”
루카브론드의 정수를 흡수했을 때와 비슷한 정도의 힘이 텅텅 빈 단전을 채워 주었다. 조금이지만 단전의 용량 역시 늘어났다.
“후우.”
긴 숨을 내쉰 천호는 옥상 가로 이동해 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렉카로스의 죽음을 목격한 랫맨들은 도망치기 바빴고, 싸움은 이미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천호는 양팔을 크게 벌렸다.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다.
“용사님!”
날개를 활짝 펴고 저만치서 날아오는 루시엘.
[그대는 너무 엉큼하다.]
천호는 미트라의 말을 부정하는 대신 와락 안겨 드는 루시엘을 꽉 끌어안았다. 살아 있음을, 이번에도 승리했음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우와아아!”
“오오오!”
다시 함성이 터졌다. 저만치 멀리서 에이젤이 꺅꺅거리며 폴짝폴짝거렸다. 아우라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마탑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용사의 전설.
천호는 눈을 감았다.
이 순간을 만끽했다.
* * *
[엉큼한 Lv5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용사의 아우라 Lv1]
[레벨이 올랐습니다.]
[우레 Lv3이 되었습니다.]
[호세사천왕 Lv2가 되었습니다.]
[용감한 Lv4가 되었습니다.]
[현명한 Lv1을 획득했습니다.]
[렉카로스의 정수를 획득했습니다.]
[산의 일족이 새로운 용사의 전설을 기억합니다.]
[‘푸른 번개의 용사’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푸른 번개의 용사 : 산의 일족이 당신을 찬양합니다.]
[미궁 세계가 당신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당신의 격이 아주 조금 상승했습니다.]
[엉큼한 Lv5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군.]
“흠흠.”
헛기침을 토한 천호는 일단 안고 있던 루시엘을 품에서 풀어 주었다. 승리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루시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애당초 곧장 날아온 것은 단순히 천호와 포옹을 나누기 위해서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서, 선배가 와요. 여왕님도.”
루시엘이 새삼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산의 일족 전통 의상을 입은 천호가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어서였다.
두 사람은 서로 헛기침을 토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과연 저만치서 라구엘이 날아오고 있었고, 루카나 여왕 또한 사스치엘의 등에 올라 곧장 옥상으로 향했다.
“부상자를 수습해라!”
“조별로 집결! 너무 깊이 쫓지 마라!”
곳곳에서 몸에 화려한 문신을 한 전사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겨울나무 숲의 마탑은 분명 왕도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오가는 데 며칠씩 걸리는 거리가 아니었다.
마탑의 함락 소식이 전해지면 왕도에서 적의 추가 병력이 파견될 수도 있으니 용무만 보고 빠르게 퇴각하는 쪽이 옳았다.
‘방어에 그리 좋은 장소도 아니니까.’
요새나 성곽이었다면 주둔한다는 선택지도 있었겠지만 마탑은 그냥 평지 위에 탑 하나가 달랑 세워져 있는 형태였다.
애당초 이번 공격이 이렇게나 수월하게 진행된 것 역시 그래서였으니 말이다.
“용사여.”
“용사님.”
라구엘과 루카나 여왕이 옥상에 도착했다. 두 사람 모두 꽤나 상기된 얼굴이었다.
특히 루카나 여왕은 대흥분 상태였다.
“푸른 번개의 용사여. 살아서 전설의 재현을 직접 목격하였으니, 이보다 기쁜 일이 없습니다. 오늘의 일을, 앞으로 이어 나가실 전설을 이 눈에 깊이 새겨 전승토록 하겠습니다.”
루카나 여왕의 말투가 변하였다. 천호는 굳이 지적하는 대신 빙긋 웃은 뒤 두 사람, 그리고 어느새 다가온 사스치엘과 엘리엘에게 말했다.
“서두르죠. 탑 안에 아직 놈들이 숨어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고요. 루시엘?”
“네, 용사님.”
마지막 부름에 루시엘은 즉각 반응했다. 인벤토리 안에서 초혼의 지팡이를 꺼내 천호에게 내밀었다.
“마탑주가 죽은 장소는 특정 지을 수 없지만… 이제 겨우 이틀째입니다. 옥상에서 마탑주의 이름을 부르며 사용하면 그녀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엇, 그녀요?”
“예, 그레이스가 그녀의 이름입니다.”
루카나 여왕이 쓸쓸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마탑주 그레이스와는 그냥 일면식만 있는 사이가 아닌 모양이었다.
한편 천호는 저도 모르게 미트라를 돌아보았다.
‘진짜 여자였구나.’
[흠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미트라가 젠체하며 말했지만 당황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천호는 가타부타 말을 잇는 대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시작하죠.”
초혼의 지팡이의 사용법이라면 마탑까지 오는 와중에 몇 번이나 배워 둔 상태였다. 렉카로스의 정수를 흡수해 마력도 다시 채운 상태이니 문제될 것이 없었다.
옥상 한 가운데 선 천호는 초혼의 지팡이로 땅을 찍은 뒤 주문을 외웠다. 마법과는 담을 쌓은 천호였지만 초혼의 주문은 결국 지팡이의 힘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트리거에 불과했기에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레이스.”
낮게 부르자 지팡이 끝에 빛이 모였다.
밝고 찬란한 빛이 아닌, 따스하지만 작고 여린 빛들이었다.
잔불이를 연상시키는 푸른빛들이 점점이 모여들어 큰 불꽃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내 사람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칼을 길게 기른 고혹적인 미녀.
붉고 긴 로브 역시 몸에 찰싹 달라붙어 아름다운 몸의 윤곽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와.”
진짜 미녀일 줄이야.
천호가 감탄하자 미트라는 젠체하는 대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여, 상대는 유령이다.]
천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미녀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녀는 바로 어제 목숨을 잃었으니까.
“그레이스, 날 알아보겠니?”
루카나 여왕이 앞으로 나서며 마탑주의 이름을 불렀다. 몸을 축 늘어트린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마탑주의 영혼은 그대로 루카나 여왕을 바라보더니 이내 눈의 총기를 되찾았다.
“루카나.”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허망한 웃음을 흘리더니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그렇군. 그리된 거군. 대강 알겠다. 나는 어제 죽었구나. 초혼의 지팡이로 내 사념을 불러낸 거고. 이제 대강 기억이 나.”
명색이 마탑주였다. 더욱이 그녀는 루카나 여왕과 오랜 세월 친교를 나눈 친우였다. 초혼의 지팡이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여전히 이해가 빠르구나. 소개하겠다. 당대의 용사님이신 박천호 님과 천사님들이시다.”
“용사?”
루카나의 소개에 그레이스가 깜짝 놀란 얼굴로 천호를 돌아보았다. 유령 상태였지만, 저도 모르게 천호를 위아래로 살펴본 그녀의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산의 일족 복장이 원인인 모양이었다.
“흠흠,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탑주였던 그레이스 엘림도어입니다.”
“용사 박천호입니다.”
어색한 인사말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루시엘과 라구엘을 시작으로 천사들 역시 스스로를 밝혔다.
대강의 통성명이 끝나자 루카나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레이스, 미안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다.”
“그래, 초혼의 지팡이에도 시간제한이 있으니까. 그리고 굳이 날 불러낸 이유는… 그렇구나. 치유의 신의 힘이구나. 하긴, 역병신의 기운이 이리 강해졌으니 치유의 신의 힘이 유일한 타개책이겠지. 왕가 쪽은… 살아남은 분은 계시고?”
혼자서 빠르게 말을 잇던 그레이스가 마지막에 가서는 어두운 얼굴이 되어 물었다. 마탑이 무너지던 당시 왕도 또한 공격을 받았으니, 단순히 치유의 신의 힘을 발휘하는 일을 떠나 왕족들의 안위가 걱정된 탓이었다.
“레티샤 왕녀와 유그 왕자라면 무사하다.”
루카나 여왕의 대답이 무엇을 내포하는지는 명확했다. 그레이스는 잠시 표정을 잃었지만 이내 억지로나마 미소를 머금었다.
“다행이야.”
“그래, 다행이지.”
짧은 교환을 마친 그레이스는 다시 한 번 표정을 고쳤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말했다.
“치유의 신의 신상과 의식의 비술이 숨겨진 장소는 중간층에 있습니다. 그리 넓지 않은 장소라 모두가 함께하긴 어려울 겁니다.”
“그럼 우린 주변 경계로 돌아가지. 이후의 일을 잘 부탁한다.”
그레이스의 말뜻을 바로 이해한 사스치엘이 엘리엘과 함께 옥상을 떠났다.
그레이스가 살포시 웃었다.
“그럼 내려가면서 상황을 듣도록 하죠. 이미 죽은 몸이지만… 제법 도움이 될 겁니다.”
일부러 발랄한 척하는 게 분명했다. 루카나 여왕은 그레이스의 그런 태도가 안타깝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서로가 몇 번이나 말했듯이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애당초 이를 위해 합류했다는 듯 라구엘이 내려가며 상황을 설명했고, 그레이스가 미간을 좁혔다.
“과연. 왕도에도 그렇게까지… 그리고 1층에서 4층까지 모두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면…….”
“그레이스?”
루카나 여왕의 부름에 그레이스는 쓰게 웃더니 다시 천호와 라구엘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상하다니? 무엇이 말이야?”
루카나 여왕이 재차 묻자 그레이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놈들의 목적은 무엇인 걸까.”
“그레이스?”
“대미궁의 심층에서부터 저층으로까지… 놈들은 차근차근 이 세계를 침식하고 있어.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천사님들의 말씀대로라면 대미궁의 변방인 이곳에 힘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일까. 왕도와 마탑을 단숨에 쓸어 버릴 정도로 많은 마물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곳은 대미궁 안이었다. 마신에게 점령당한 공간이었고, 미궁 세계의 원주민들은 물론이고 천사들조차도 대미궁의 구조에 대해서는 온전하게 파악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1층이나 2층에서처럼 수십, 수백 마리 정도의 규모라면 모를까.
3층에서처럼 수천 마리가 넘는, 4층인 이곳에서라면 1만을 훌쩍 넘어 2만, 어쩌면 3만에 달할지도 모를 마물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수만이야. 아무리 병력을 쪼갠다 할지라도 그 정도 숫자의 마물들이 모여들면 눈치채지 못 할 수가 없어.”
하지만 왕도와 마탑, 산의 일족 모두 이번 공격에 대해 예상조차 하지 못 했다. 수만에 달하는 마물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목적. 1층에서 4층까지 모두 일관적이야. 제단을 만들고 신상을 세워 제물을 바친다. 그로 말미암아 역병신의 기운을 퍼트린다. 의식을 거행한다. 그리고 의식을 거행하는 동안은 공격보다 수비에 치중한다.”
그리하여 얻는 것이 무엇일까.
물론 저층 변방에 기지를 만들어 조금씩 중앙으로 치고 나가겠다는 원대한 계획일 수도 있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고 말이다.
대미궁의 마물들이 미궁 세계의 원주민들을 공격하는 것은 해가 동쪽에서 뜨는 일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지금까지의 공방 속에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스의 말을 듣고 나니 미묘한 위화감이 자꾸만 느껴졌다.
라구엘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설명했다.
“기운이라면… 역병신의 기운과 심층의 기운은 그 자체로 마물들의 힘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마물들이 살기 적합한 환경이라고 해야 할까요. 애당초 심층의 마물들이 중층이나 저층에 올라가지 못 하는 것은 심층에서 멀어질수록 심층의 기운이 약해지기…….”
거기까지였다. 라구엘은 순간 입을 다물었고, 그레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 아니, 그녀들뿐만 아니라 천호와 루시엘, 루카나 여왕까지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비약이 심했다.
명확한 근거가 부족했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루시엘이 긴장 때문에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역병신의 강림.”
단순히 힘을 보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본체 혹은 아바타를 강림시킨다. 그게 무리라면 심층에서밖에 살 수 없는 강대한 마물들을 저층으로 보낸다.
저층에서라면 9급 천사의 격만 되어도 자유로이 층을 오갈 수 있었다.
중층에서도 어느 수준 이상의 천사들이나 영웅들이라면 층을 오가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심층은 달랐다.
심층에 내려간 천사들과 영웅들은 자유로이 중층이나 저층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막대한 손실을 각오해야만 했다.
정말로 역병신이 저층에 강림하면 어찌 될 것인가.
심층의 마물이 저층에 나타나면 어찌 될 것인가.
“막을 수 없어.”
저층의 힘으로는.
무슨 짓을 한다 할지라도.
라구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