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55화 (55/211)

“배운 게 많으니까요.”

천호는 무공 구획을 살피며 답했다. 과연 다른 구획보다 발전이 더뎠다.

각각의 스킬들이 네모 칸으로 표시되었는데, 이미 습득한 스킬은 밝게 빛나고, 아직 익히지 못 한 스킬은 아무 색도 없이 어두운 식이었다.

그런데 무공 쪽은 빛나는 네모에 비해 그렇지 않은 네모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천마신공은 적어도 7성……그러니까 7레벨은 되어야 본격적인 기술들을 사용할 수 있구나.’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천마신공의 여섯 신기.

천마신공이 레벨 7이 되는 순간부터 옆으로 스킬트리가 뻗어 나갔는데, 그 숫자가 도합 여섯 개였다.

호세사천왕 쪽도 가볍게 살핀 천호는 미트라가 살피고 있는 구획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구획과 달리 활성화된 스킬이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구획 전체에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혈계전승.’

피를 통해 이어받은 능력.

[으음, 과연. 이것이 포레스트 드래곤이 말했던 고귀한 피라는 것인가.]

미트라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천호가 물려받은 또 하나의 힘. 하지만 아직 발동하고 있지 않은 힘.

[그대여, 그대의 어머니에 대해 진정 아는 것이 없나?]

미트라의 물음에 천호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호 자신도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보통 사람은 아닌 게 확실하네.’

그 정도야 이미 몇 번이나 입증이 되었지만.

[하아, 어쩔 수 없군. 아무튼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한숨을 한 번 내쉰 미트라는 혈계전승 바로 옆에 자리한 ‘용사의 힘’ 구획을 가리켰다.

[잘 봐라, 그대여. 그대는 지금 용사의 힘 가운데 오직 하나, 기초 중의 기초인 우레만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이다.]

미트라의 말대로였다. 스킬 트리의 최하단에 있는 상자에만 빛이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우레?번개는 오랜 옛날부터 하늘의 힘을 상징했으니, 그대가 용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힘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저 입증할 뿐이지. 그대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익혀야만 하는 힘이 있다.]

조곤조곤 설명한 미트라가 우레 바로 위에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그대가 우선적으로 깨워야 할 힘이다. 인간의 틀을 벗어나, 진정한 용사- 초인의 영역에 발을 들이기 위한 과정이며, 이 과정을 수행해야만 진정한 용사의 힘들을 다룰 수 있게 된다.]

미트라는 우레 위로 펼쳐진 상자들을 가리켰다. 여러 갈래로 갈라지긴 했지만, 종국에 가서는 하나의 상자로 귀결되었다.

“마지막 기술은 뭐죠?”

아마도 궁극기.

천호의 물음에 미트라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도리질을 하며 답했다.

[아직은 비밀이다.]

“비밀이요?”

[그래, 그대가 좀 더 강해지면… 아니, 정말 많이 강해지면 그때야 알려 줄 거다.]

미트라가 표정을 감추듯 천호를 등진 채 말했다.

기분 탓인지 묘하게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흠.”

[아무튼! 중요한 것은 우레 다음 기술인 용사지체를 습득하는 것이다.]

“뭐요?”

[용사지체. 인간과 용사는 다르다. 그대는 일단 육체 자체를 인간의 것에서 용사의 것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일종의 환골탈태.

미트라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에서 초월자로 나아가는 과정.

[본래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가야 하지만 이번에는 다소 억지를 부릴 생각이다. 레벨 시스템 덕분에 그대의 육체는 이미 조금이지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고 있다.]

[더욱이 그대의 체내에는 상당한 수준의 마력이 축적되어 있고 말이다.]

그것들을 모두 활용한다면 반쯤 억지로나마 용사지체를 개방시킬 수 있을 터였다.

“음, 마다할 이유가 없네요.”

그 힘들다는 환골탈태를 시켜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되죠?”

[간단하다. 최대한 몸에 힘을 빼고 편히 누워라.]

천호는 시킨 대로 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미트라가 그런 천호의 상체 위에 낑낑거리며 올라탔다.

졸라맨 상태라 그런지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눈을 감아라. 호흡을 편히 하고, 지금부터 가해지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라.]

“모든 것을요?”

[모든 것을.]

[?ㅅ?]

미트라의 표정 때문에 순간 웃음을 터트릴 뻔한 천호는 간신히 호흡을 진정시킨 뒤 눈을 감았다. 미트라가 그런 천호의 몸 구석구석에 손을 대며 말을 이었다.

[시술이 시작되면 조금 많이 아플 거다.]

“조금 많이요?”

[그래, 조금 많이.]

[^ㅅ^]

미트라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어린 것은 착각일까.

천호는 무어라 말을 이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상상을 초월한 고통이 천호의 전신을 엄습했다.

* * *

“커헉!”

상체를 벌떡 일으킴과 동시에 숨을 토했다. 아니, 그냥 숨만 토한 것 같지가 않았다.

“커헉, 컥. 큭.”

입에서 신물이 나왔다. 천호는 연신 숨을 헐떡였고, 이내 코를 틀어막았다. 끔찍한 냄새가 사방에서, 아니, 전신에서 나고 있었다.

목욕탕의 욕조 안.

진하고 끈적끈적한 녹색 액체가 바닥뿐만 아니라 천호의 몸에도 가득했다. 옷 사이로 삐져나온 그것을 본 천호는 무엇인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노폐물.’

환골탈태의 과정에서 배출된 이전 육체의 잔재들.

천호는 서둘러 옷을 벗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옷 사이에 낀 노폐물들의 느낌이 실로 참담했기 때문이다.

일단 상의부터 벗은 천호는 스스로의 몸을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조각처럼 잘 단련된 몸인 것은 그대로였지만, 피부가 훨씬 좋아져 있었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 더 하얗게 변했고 말이다.

“하아.”

다시 숨을 토한 천호는 가볍게 주먹을 쥐어 보았다. 신체 능력 자체는 크게 증가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확실히 변한 것이 있었다.

겨우 1레벨이 올랐을 뿐이지만, 그 차이는 확연했다.

‘아니, 스킬 레벨이 올라서만이 아니야.’

기본 바탕이 달라졌다. 기가?마력이 통하는 경로가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에서 깨끗하게 잘 닦인 고속도로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우레.’

가볍게 손끝을 튕기자 자연스럽게 푸른 번갯불이 튀었다. 단순히 방출만 할 뿐, 제대로 다룬다는 느낌이 없던 우레에 마치 조종간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대여, 새로운 육신은 어떠한가.]

바로 곁에서 미트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천호는 황금색 보석을 바라보다 말했다.

“끝내주긴 하는데, 미리 이야기하지 그랬어요. 옷이라도 벗고 시작할걸.”

과연 빤다고 냄새가 빠질지 의문이었다. 이거 이대로 태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

[으음… 빨래라면 최대한 협조해 보겠다.]

“건조도요?”

[으음, 그래.]

“다림질도죠?”

[흐흑, 그래.]

아쉽게도 황금색 보석에 표정이 떠오르진 않았다. 천호는 작게 웃은 뒤 미트라의 황금색 보석을 어루만졌다. 이전보다 미트라가 조금 더 친숙해진 기분이었다.

[일단 목욕부터 해라. 욕조가 이 모양이니 물을 받기 보다는 샤워를 하는 게 낫겠군.]

“음.”

[음이 아니다. 냄새가 심하니 어서 벗어라.]

미트라의 재촉에 바지에 손을 대었던 천호는 순간 멈칫하더니 미리 벗어 두었던 상의로 미트라의 황금색 보석을 가렸다.

[그대여?]

“아니, 뭔가 그냥…….”

[그대여, 이러면 대체 어떻게 씻을 생각인가? 빨리 벗기나 해라. 그대는 모르겠지만 그대와 내가 수행을 시작한 지 벌써 일곱 시간이 넘었다. 슬슬 해가 뜰 때란 말이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인 것은 단순한 착각일까.

“으음.”

망설임 끝에 천호는 옷을 벗었고, 미트라는 작은 웃음과 함께 뜨거운 물을 내주었다.

* * *

“잘 어울리는군.”

[내공운용 Lv4가 되었습니다.]

“잘 어울리는군.”

루카나 여왕의 말에 회의실 안에 있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왕의 호위병들과 산의 일족들, 입가를 가린 채 눈을 반짝이고 있는 라구엘과 얼굴을 발갛게 붉힌 채 활짝 웃고 있는 에이젤, 어설픈 미소를 짓고 있는 아우라엘, 껄껄 웃는 사스치엘을 필두로 한 전투 천사들과 자기들 기준에는 살짝 부족하지만 그래도 용사니 넘어가겠다는 락 드워프들.

“머, 멋져요. 용사님…….”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루시엘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애써 말했다. 이미 얼굴은 물론이고 귀와 목까지 빨갛게 변한 그녀였다. 사실 정말 멋지다고 생각해서 그리 말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위로차 한 말인지 분간도 가지 않았다.

“음.”

[잘 어울린다니 좋겠구나, 그대여.]

미트라가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천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왜 그러느냐. 칭찬한 것인데. 흠흠.]

목소리만으로도 열심히 딴청하는 것이 느껴졌다.

천호는 지금 산의 일족의 전통 복장- 그러니까 치부만 겨우 가리는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는데, 결국 냄새 빼기에 실패한 것이었다.

제국 사서의 옷은 잠자리 외에 다른 곳에서 입기에는 너무 거추장스러웠고.

그리고 사실 포기해야 했던 것은 교복만이 아니었다.

“욕조도 하나 날렸고…….”

[크흠. 흠.]

이리될 줄 알았다면 발가벗은 상태로 맨땅에 누웠을 터인데.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용사여, 그대를 보는 저들의 눈빛을 보라. 감탄과 찬사가 어려 있지 않은가?]

[모두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진정한 용사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말이다.]

“음.”

아주 없는 말 같지는 않았다. 천사 일행은 둘째 치고, 산의 일족의 시선에는 확실히 경의와 경탄이 묻어나고 있었다.

애당초 초대 용사를 숭배하는 그들이었다. 비록 피가 이어져 있진 않지만, 초대 용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성검 미트라를 다루는 천호는 그들에게 있어 무척이나 특별한 존재였다.

“감사합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산의 일족에게는 전통 의상이었으니까.

루카나 여왕에게 예를 표한 천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여왕님, 하루가 지났습니다. 밖의 상황은 어떠하지요?”

천호의 물음에 각기 웃음을 머금고 있던 이들이 표정을 고쳤다. 루카나 여왕의 아름다운 얼굴에도 조금이지만 시름이 어렸다.

“검은 구름이 태양을 가려 밤이 계속되고 있다. 왕도로부터 시작된 사특한 기운이 너무 강해 그 근처로는 접근하는 것조차 무리이다.”

왕도가 함락된 것은 바로 어제의 일이었으니, 의식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이제 겨우 한나절이었다. 그런데 벌써 3층 이상으로 역병신의 영향력이 강해진 것이었다.

[그동안 응축한 힘을 한 번에 방출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수많은 이들을 제물로… 희생한 결과일 터이고…….]

플로렌 왕국의 왕도에는 만 명도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2층이나 3층에서 제물로 희생된 이들과는 단위 수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일이 이대로 계속 진행된다면 뭔가 해 보기도 전에 이 주변 일대가 역병신의 영역으로 변모할 터였다.

‘왕가의 피.’

지금 당장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치유의 신의 힘뿐이었다. 천호는 회의실에 오기 전에 보았던, 유그 왕자를 품에 안은 채 깊은 잠에 빠진 레티샤 왕녀를 떠올렸다.

하루아침에 가족과 삶의 터전, 그 모든 것들을 잃었다. 아직 작고 어린 그들에게는 세계가 붕괴한 것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용사님.”

루시엘이 작게 말하며 천호의 손을 잡았다. 천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에 가슴 아파하는지 모두 알고 있는 그녀였다.

“여왕이여, 마탑 쪽은 어떠한가.”

사스치엘의 물음에 루카나 여왕이 여전히 어두운 목소리로 답했다.

“왕도보다는 상황이 낫다. 아직 사특한 기운 또한 약하고. 하지만 적잖은 수의… 적어도 천 마리 이상의 랫맨들이 마탑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거기까지 말한 루카나 여왕은 곁에 있던 측근에게 눈짓을 주었고, 측근은 곧 회의실 원탁 위에 지팡이 하나를 올려놓았다.

“초혼의 지팡이다. 초대 용사께서 남기신 보물들 가운데 하나이지. 이 지팡이를 사용하면 죽은 이의 사념을 불러낼 수 있으니, 마탑에서 사용하면 마탑의 마법사를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마탑의 숨겨진 비밀 장소를 마법사의 사념을 통해 알아낸다.

[아… 저게 아직 남아 있었다니…….]

미트라가 추억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다시 루카나 여왕을 보았다.

“루카나 여왕님,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때문에 제안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한 것.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되는 것.

“절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러하겠다, 용사의 후예여. 바라는 것을 말해 보라.”

모두의 시선이 천호에게 모였고, 천호는 루시엘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루카나 여왕을 똑바로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 * *

랫노블 렉카로스는 검게 물든 하늘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병신의 기운이 사방에 퍼지고 있었다. 아직 이 주변 일대에는 미약한 편이었지만, 왕도 부근은 달랐다. 그 땅에는 심층의 기운까지 일고 있었다.

심층.

저층의 존재인 그는 경험해 보지 못한 장소였다.

하지만 렉카로스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근원이 심층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심층의 기운을 쐬면 쐴수록 자신이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렉카로스는 숨을 깊이 삼켰다. 평범한 랫맨보다 훨씬 체구가 좋아 여간한 인간 전사 이상의 덩치를 가진 그는 어젯밤 큰 공훈을 세웠다.

겨울나무 숲의 마탑.

함락시키기 위해 많은 수고를 들여야 했다. 거느리고 있던 병력의 자그마치 8할가량을 잃었고, 렉카로스 자신도 왼팔을 제대로 다루기 힘들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만족스러웠다.

결국 마탑을 불태울 수 있었다. 가증스런 마탑주를 비롯해 마법사 놈들을 불태워 역병신의 제단에 바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

왕도를 점령한 역병신의 사도 칼라카로부터 전령이 도착했다.

‘용사가 올 것이다.’

짤막한 내용이었지만 충분했다. 렉카로스 역시도 3층에서 도망쳐 온 도루마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렉카로스는 새삼 다시 미소를 지었다.

용사가 마탑을 노리는 이유는 뻔했다.

마탑에 숨겨진 힘.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까지는 고문당하던 마법사 놈이 다 밝히기도 전에 죽어 버려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 신비한 힘이 숨겨져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렉카로스는 적절한 준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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