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54화 (54/211)

“역병신의 기운이 강하니… 그 역인 치유의 신님의 기운을 퍼트리면 힘을 상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역병신의 제단을 파괴할 때마다 꼬박꼬박 얼굴을 비추는 치유의 신이었다. 2층에서는 역병신의 일격을 막아 주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신상과 제단이…….”

“만들면 되죠.”

역병신의 신상도 별거 없었다. 1층의 신상은 별로 크지도 않았고.

없으면 만든다.

참으로 천호다운 대답에 사스치엘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못 할 이유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실, 굳이 새로 만들 필요도 없었다.

“아니, 이미 존재한다.”

루카나 여왕이었다. 그녀는 다시 레티샤 왕녀에 시선을 두며 말을 이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플로렌 왕가에는 치유의 신님의 피가 흐른다.”

처음 듣는 사실이었지만 바로 납득이 되었다.

4층을 구하기 위해서는 왕가의 피가 필요하다.

히든 퀘스트에 나와 있던 문구였다.

“우리 산의 일족과 플로렌 왕가, 마탑은 오랜 옛날부터 비밀스런 관계를 유지해 왔다.”

전면에 드러난 것은 플로렌 왕가와 마탑의 관계뿐이었지만, 산의 일족 역시 플로렌 왕가와 몇 번이고 피를 섞었을 만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치유의 신께서는 우리 산의 일족과 플로렌 왕가, 마탑에 각각 당신의 힘을 남기셨다.”

플로렌 왕가에는 힘을 일깨울 수 있는 피를.

산의 일족에게는 신물을.

마탑에는 신상과 의식의 주문을.

“플로렌 왕가의 피는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신물은 우리 산의 일족이 보관 중이지. 그리고 마탑의 신상과 의식의 주문은… 마탑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 비록 마탑이 함락되었다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제법 가능성이 있었다. 사스치엘이 물었다.

“역병신의 무리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은 있나?”

“아마 모를 겁니다. 저희도 모르던 사실이니까요.”

라구엘이 유그 왕자를 고쳐 안으며 말했다. 천사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은 사항이니 적대 세력인 역병신의 무리들이 알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해도 좋았다.

“희망이 보이는군.”

아직 역병신의 군대를 상대할 방법은 마련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돌파구가 하나 생긴 셈이었다.

“용사님.”

루시엘이 환히 웃으며 천호의 손을 잡았다. 역시 우리 용사님이라는 눈빛이었다.

천호는 헛기침을 한 번 토한 뒤 다시 모두에게 말했다.

“그럼 문제가 되는 것은 마탑이군요. 루카나 여왕님, 마탑에 숨겨진 신상의 위치를 알고 계시나요?”

“대강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일단 마탑에 잠입하는 것이 문제일 거다. 그대들도 이미 보고 왔겠지만 역병신의 무리들이 마탑을 점령하고 있으니 말이다.”

놈들은 마탑을 불태우는 데 그치지 않았다. 마탑에도 역병신의 신상과 제단을 설치하고 있었다. 붙잡은 마법사들을 제물로 바칠 셈이 분명했다.

“분명 다급한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대들은 많이 지쳤으니 오늘 하루는 푹 쉬도록 해라. 밤과 새벽을 틈타 산의 전사들이 마탑의 상황을 살피고 올 터이니.”

휴식과 정보가 필요했다.

휴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고, 사스치엘과 전투 천사들 역시 납득했다. 에이젤은 쉴 수 있어 다행이라는 듯 어깨를 늘어트렸다.

“크나큰 위기가 닥쳐왔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성검과 용사가 있으니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루카나 여왕이 천호를 보며 활짝 미소 지었다. 밤이 낮으로 바뀔 것처럼 아름다운 미소였다.

천호도 마주 미소 지었고, 루시엘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식사부터 하도록 하지.”

씩 웃은 루카나 여왕이 손가락을 튕기자 음식을 잔뜩 든 산의 전사들이 원탁에 모여들었다.

* * *

천호 일행은 배불리 먹고 씻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

늘 그랬듯이 일행 중 마지막으로 목욕을 마친 천호는 목욕탕에서 잔불이를 꺼낸 뒤 미트라를 허리에 찼다.

손목시계를 보니 현재 시각은 오후 10시 남짓.

지구에서라면 그렇게까지 늦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이곳 미궁 세계에서는 모두가 잠들고도 남을 늦은 시간이었다.

‘빨리 가야겠네.’

천호 자신이 오기 전에는 어떻게든 잠을 참고 버티는 루시엘이었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그대여.]

미트라가 돌연 말을 붙였다. 그런데 어조가 어째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말 그대로 성검다운, 낮고 진지하면서도 사려 깊은 목소리였다.

때문에 천호는 자리에 멈춰선 뒤 미트라를 뽑아 들었다. 눈을 맞추듯 손잡이와 검신을 잇는 부위에 자리한 황금색 보석을 바라보았다.

[그대여.]

[3층에서 그대의 격이 상승한 이후부터 생각해 온 일이다. 그리고 오늘 회의의 진행을 보며 마침내 결심하였다.]

“미트라?”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2층에서 그대는 진정한 의미로 용사가 되었다. 3층에서 격이 상승해, 조금이지만 인간의 틀을 벗어나게 되었다. 마치 레온처럼 말이다.]

초대 용사 레온하르트.

이계에서 온 마왕에 맞서 인류를 지켜 낸 미궁 세계의 대영웅.

[아직은 이르다. 아직은 그대도, 나도 더 성장해야만 한다. 하지만 4층의 상황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 치유의 신의 신물 덕분에 마기를 중화하는 힘을 가진 이 산맥에조차 역병신의 마기가 적잖게 스며들고 있는 판국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조금 서두르기로 하였다.]

미트라가 말하고자 하는 것.

천호도 이제는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지금 같은 상황을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었다.

[그대에게 진정한 용사의 힘을 일부나마 전수하겠다.]

[인간의 틀을 벗어나기 시작한 그대에게는 그에 어울리는 힘이 필요하다.]

천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짐작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기분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는 거죠?”

[말로는 가르쳐 줄 수 없다. 일단 루시엘을 재운 뒤 조용한 곳에 홀로 자리를 잡고 누워라.]

전에 없이 진지한 미트라의 말에 천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꾸벅꾸벅 졸면서도 어찌어찌 정신을 이어 가던 루시엘에게 미트라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먼저 자라 말한 뒤 일행의 숙소를 나섰다.

낯선 곳에서 괜히 헤매는 대신 물을 뺀 목욕탕 위에 몸을 눕혔다.

[음.]

장소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묘한 소리를 내는 미트라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시작하도록 하지. 눈을 감고 잡념을 지워라. 내가 그대를 드넓은 정신의 세계로 인도할 것이니.]

‘헛, 설마?’

여기까지 오니 다시 한 번 짐작이 갔다.

정신 세계에서의 수련.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서도 곧잘 나오던 그것.

하지만 천호가 흥분한 이유는 단순히 수련에 대한 기대감 때문만이 아니었다.

정신 세계 속의 미트라.

어떤 모습일까.

설마 그냥 검의 모습 그대로일까? 아니면 아버지의 이야기에서처럼 사람의 모습일까?

[그대여, 잡념을 지워라.]

바로 지척에 있었지만 미트라의 목소리가 어쩐지 멀게 느껴졌다.

천호는 현자의 시간으로 머릿속을 맑게 한 뒤 의식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몇 분인지, 아니면 몇 시간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천호는 어느 순간 부유감을 느꼈고,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맑고 아름다웠다.

푸른 하늘과 드넓은 초원. 시원하게 부는 바람.

그리고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자.

“미트라?!”

[그대여.]

나직한 부름에 천호가 눈을 크게 떴다. 순간이지만 말을 잇지 못 했다.

* * *

[엉큼한 Lv5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엉큼한 Lv5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현자의 시간 Lv2]

천호는 일단 현자의 시간부터 발동시켰다. 그렇게 해야 할 정도로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미, 미트라?”

[후후후, 그대여. 그렇게 놀랐는가?]

여유뿐만 아니라 기쁨까지 섞인 대답이었다.

현자의 시간이 발동 중임에도 불구하고 마른침을 꿀꺽 삼킨 천호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어 물었다.

“그게… 미트라의 진짜 모습이에요?”

[후훗, 그런 셈이다. 그대여, 예전에 나를 보고 혹시 천사 아니냐고 물었던 일이 생각나는가?]

“네? 아… 네. 기억나요. 그랬던 적이 있었죠.”

분명 불침번 대신 서 준다고 했을 때 천사 아니냐고 물었었다.

[그때는 아니라고 답했지만 사실 비슷하다. 지금 이것이 내 영혼의 모습. 나의 진정한 모습일지니.]

자부심 가득한 대답에 천호는 다시 한 번 마른침을 삼켰다. 숨을 한 번 고른 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미트라, 정말요? 그게 진짜 미트라의 진정한 모습이에요?”

[그…런데?]

“진짜요? 정말로 진짜?”

[자, 잠깐. 그대여. 대체 왜… 꺅?!]

계속된 물음에 당황한 미트라가 스스로를 돌아보았고, 말을 채 맺기도 전에 비명을 질렀다.

[이,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깜짝 놀란 미트라가 허둥거리며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천호는 그런 미트라를 이해했다.

미트라가 말한 진정한 모습이 어떤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천호 앞에 서 있는 것은 어린애 낙서 같은 무언가였으니까.

‘졸라맨 맞지?’

동그라미 머리에 작대기로 된 몸과 팔다리.

아버지가 학교 다니시던 시절에 유행했다는 캐릭터.

물론 아주 그냥 졸라맨은 아니었다. 머리 뒤로 작대기 몇 개가 더 그려져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미트라의 진짜 모습은 상당한 장발인 모양이었다.

[배경은 이렇게 착실히 묘사가 되었는데 왜 나만!]

확실히 배경은 정말 진짜 같았다. 하늘도 땅도, 그 사이에서 부는 바람도.

“진정해요, 미트라. 말만 통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이이! 아니다!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이게 다 그대 때문이다!]

미트라의 동그라미 얼굴에 표정이 생겼다.

[>_

나름 화를 내려는 것 같은데, 몹시도 귀여웠기에 천호는 결국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푸흡!”

[우, 웃지 마라! 웃지 말란 말이다!]

[ㅠㅁㅠ]

그렇지 않아도 귀여웠는데, 이젠 거의 반칙 수준의 귀여움이었다. 천호가 계속 배를 잡고 웃어 대니 미트라가 훌쩍이며 말했다.

[그대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힘이 더 있었다면 진짜 내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을 텐데!]

[ㅠ_ㅠ]

이래서 서둘지 않았던 건데.

가능한 힘을 키운 다음에 진행하려고 한 건데!

물론 정말로 이것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이유 중에 하나이기는 했다.

“괜찮아요, 미트라. 지금도 충분히 귀여운 걸… 푸흡.”

[으앙!]

[ㅠㅁㅠ]

졸라맨 미트라가 폴짝폴짝 뛰며 울상을 지었다.

평소에 으앙 할 때 저런 표정이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흐아, 허. 후. 미, 미트라. 그만. 일단 저 숨 좀 고르고요.”

[현자의 시간을 써라! 현자의 시간을!]

[?ㅁ?!]

맞는 말이었다. 현자의 시간으로 겨우 웃음을 멈춘 천호는 늘 그랬듯이 분석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런데 미트라. 키가 작네요. 이것도 힘이 부족해서인가요?”

졸라맨 미트라는 머리 높이가 천호의 허리에 겨우 닿을 정도로 작았다. 미트라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답했다.

[그것도 있지만… 아마 내가 성장기라 그럴 거다. 아직 마검을 그리 많이 섭취하지는 못 했으니.]

[ㅇㅅㅇ]

눈이 참 초롱초롱했다. 그 초롱초롱한 눈을 마주하며 천호는 생각했다.

‘그럼 졸라맨이 아니라 어린아이 모습일수도 있었다는 건가?’

그것도 꽤 귀여웠을지도.

[그대여,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인다만, 아무튼 슬슬 본론을 진행하도록 하지.]

“어, 미트라 본모습 보여 주는 게 본론 아니었어요?”

[아니다! 아니란 말이다 이 악- 아니, 용사야!]

[=ㅁ=!]

졸라맨 미트라가 천호의 허벅지를 투닥투닥 때렸다. 정말 선 하나로 된 가느다란 팔이라 하나도 아프지 않았지만 말이다.

“좋아요, 미트라에게 진정한 용사의 힘을 배우기 위해 이번 일을 진행한 거죠. 전 준비되었어요.”

[하아, 그럼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양팔을 축 늘어트린 미트라는 등- 그러니까 선 하나를 보인 채 허공을 응시했다.

[잘 봐라, 용사여.]

미트라가 손을 놀리자 허공에 커다란 빛의 도형이 나타났다. 팔각형이었는데, 가운데 점을 중심으로 구획이 나누어져 있었다.

[그대가 가진 힘을 시각화한 것이다.]

“오.”

가까이서 보니 각 구획마다 이름표도 붙어 있었다.

장병기, 단병기, 투사 병기, 제조술 등등.

각각의 구획 안에는 다시 네모 칸 몇 개와 선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천호에게는 꽤나 익숙한 모양이었다.

‘스킬 테크 트리네.’

예를 들어 투사 병기 항목은 이런 식이었다.

활 장비 → 연속 사격 → 속사 → 두 발 동시 사격 → 세 발 동시 사격

[으음, 그대는 구획이 정말 많군.]

미트라가 새삼 놀랍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초대 용사 레온조차도 구획의 숫자는 다섯 개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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