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53화 (53/211)

[그대여.]

무언가 각오를 한 목소리였다. 천호는 미트라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검집에서 뽑아 들었다. 천호의 갑작스런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나는 대미궁에 세계가 침식된 이후를 모른다. 때문에 어쩌면 내가 가진 정보들은 도움이 되지 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해야 했다. 천호는 집중했고, 미트라는 다시 목소리를 이었다.

[플로렌 왕국의 서쪽에는 무척이나 큰 산맥이 있다. 그리고 그 산맥에는 오랜 옛날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산의 일족이 있다.]

초대 용사 레온의 피를 이은 일족이었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였지만, 레온에게는 제국의 황가 외에도 수많은 후손들이 존재했다. 용사로서 모험을 하는 와중에 본 자식만 해도 수십에 달할 터였다.

하지만 이런 것까지 구태여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미트라는 헛기침을 한 번 토한 뒤 계속해서 말했다.

[산의 일족이 남아 있다면 반드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은 초대 용사 레온을 숭배하고 있으니, 나를 가진 그대 또한 환대할 것이다.]

오는 길에 보니 산맥 자체는 존재했다. 산의 일족이 여전히 대를 이어 가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천호는 미트라의 이야기를 모두에게 전달했다.

대부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라구엘이 손뼉을 쳤다.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플로렌 왕국과도 가끔씩이지만 교류를 하고 있고요.”

정보의 신빙성이 높아졌다.

사스치엘이 짐짓 기운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목적지가 정해졌으니 축 쳐져 있을 틈이 없었다. 모두의 얼굴에 조금이지만 생기가 돌아왔다.

그런 모두의 모습에 미트라는 안도의 숨을 토했다. 천호가 미트라의 황금빛 보석을 어루만졌다.

“고마워요, 미트라.”

[흠, 당연한 일이다. 나는 성검이고, 그대는 용사이지 않은가.]

맞는 말이었다. 미트라를 갈무리한 천호는 산맥이 있는 서쪽을 돌아보았다. 미트라가 그런 천호에게 다시 말을 붙였다.

[그리고 용사여.]

“네, 미트라.”

[산의 일족의 수장은 분명 아름다운 미녀일 거다.]

몸매도 좋고 성격도 좋은.

천호는 결국 웃고 말았다. 황금빛 보석을 어루만지며 아주 작게 항변했다.

“제가 그렇게까지 밝히지는 않거든요?”

[흐음, 글쎄. 어찌 되었든,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산의 일족의 수장은 정말 아름다운 미녀였다. 일행 가운데는 아우라엘과 제일 닮았던 것 같군.]

천호는 반사적으로 아우라엘을 돌아보았고, 저도 모르게 산의 일족의 수장을 상상해 보았다.

“음.”

[음.]

천호는 입을 꾹 다물었고, 미트라는 소리 내어 웃었다.

* * *

[히든 퀘스트 ‘왕족 구출’을 완수했습니다.]

[히든 퀘스트 보상 : 왕가의 목걸이]

[히든 퀘스트 보상 : 플로렌 왕가의 구원자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플로렌 왕가의 구원자 : 플로렌 왕가의 구성원들로부터 강한 호의를 받습니다.]

[엉큼한 Lv5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왕도에서 북서쪽에 있는 마탑을 향해 이동했던 일행은 다시 남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산맥 자체가 마탑보다 훨씬 서쪽에 자리한 덕분에 왕도와 거리를 벌리는 일도 수월했다.

4층에 도착한 이후 계속 전력으로 이동해 댄 터라 다들 지친 상황이었지만 누구 하나 군소리를 내지 않았다.

라구엘은 에이젤 대신 유그 왕자를 안았고, 아우라엘은 루시엘에게 레티샤 왕녀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다시 얼마나 이동했을까.

적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낮게 날아 이동하던 일행은 마침내 산맥의 시작 부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처음 4층에 도착했을 때보다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본 천호는 손목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해가 질 시간이었다.

지상에 안착한 일행은 딱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천호를 바라보았다.

일단 산맥에 도착하긴 했지만, 산의 일족과 조우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 근처에서 일단 야숙할 만한 곳을 찾아볼 것인가.

아니면 조금 더 이동해 볼 것인가.

천호는 루시엘과 에이젤 쪽을 돌아보았다. 둘 다 나름 꿋꿋하게 버티고 있지만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특히 에이젤은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전투 천사들도 대부분 사람 하나씩은 업고 다닌 터라 내색을 안 할 뿐 지친 건 매한가지였다.

밤의 숲은 위험했고, 밤의 산은 더 위험했다.

천호는 무리해서 더 이동하는 대신 근처에 몸을 숨길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스치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투 천사 거의 전원이 같은 곳을 바라보았고, 천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발소리.

수풀을 헤치며 난 소리.

카지엘이 루시엘과 에이젤의 앞을 가리고 섰다. 천호는 순간 떠오른 것이 있어 나이프를 쥐는 대신 미트라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약간의 고민 끝에 말했다.

“이것은 성검 미트라입니다.”

황금색 보석이 잘 보이게 든 뒤 말하자 정면을 보던 천사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천호에게 쏠렸다.

미트라가 헛기침을 토하며 말했다.

[흠흠, 그대여.]

의도는 알겠지만 표현이 좀 그랬다. 이것은 성검 미트라라니.

하지만 참으로 명확한 설명이기도 하였다.

“성검 미트라!”

“용사의 검!”

“이야기와 똑같아!”

타탁 하는 소리와 목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렸다.

수풀 속에 숨어 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감탄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팔다리가 길고 근육질인 구릿빛 피부의 남자들.

다들 키도 커서 제일 작은 이도 2미터는 족히 될 것 같았다.

가죽 옷으로 치부만 겨우 가린 그들의 등장에 루시엘이 얼굴을 확 붉혔고, 에이젤이 인상을 구겼으며, 라구엘은 표정을 감추듯 살짝 헛기침을 토했다.

하지만 천호는 미소 지었다. 방금 반응만으로도 저들의 정체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했으니까.

초대 용사 레온을 숭배하는 산의 일족.

그들이 분명했다.

* * *

산맥에 들어서자마자 산의 일족과 조우한 이유는 간단했다.

“산 아래에서 난리가 났으니까요.”

그랬다. 거리가 상당했지만, 고도 차이 역시 상당했기에 서쪽 산맥에서는 플로렌 왕국의 왕도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멀쩡하던 왕도가 하루아침에 함락되었으니 사람을 보내 상황을 살피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그렇게 내려온 무리들 가운데 하나와 바로 조우한 것은 역시 운이 좋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위기가 오자 용사가 왔다. 이야기와 똑같다.”

“용사와 용사의 검. 여왕님이 좋아하실 거다.”

산의 일족 전사들은 다들 말이 짧았다. 하지만 천호는 그 짧은 말들 중에서도 중요한 정보를 놓치지 않았다.

“여왕님이요?”

“우리 산의 일족의 왕.”

“무척이나 아름다우신 분.”

“산맥에서 가장 아름답다.”

천호의 물음에 산의 일족 전사들이 입을 모아 답했다.

“음.”

설마하니 정말 미녀 여왕이란 말인가.

정말로?

[그대여, 그러게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미트라가 젠체하며 말했다. 그러자 괜히 의심이 생긴 천호가 바로 곁에 있던 산의 일족 전사에게 소리 죽여 물었다.

“그쪽이 보기에 루시엘… 그러니까 분홍 머리 천사는 어때요?”

“엄청 예쁘다.”

“오케이.”

심미안에 문제는 없었다. 미의식도 비슷한 것 같았고.

천호가 산의 일족 전사와 나누는 문답을 들은 미트라는 어이가 없다는 한숨을 토했다.

[하아, 그대여. 너무 밝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냥 혹시나 해서.”

딱히 여왕이 미녀라 해서 달라질 건 없었지만, 아무튼 이런 식으로 당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냥 그래서 그런 것뿐이었다. 그냥.

“오옷, 마중 나온 것 같다.”

옆에서 걷던 전사가 손을 들어 저만치를 가리켰다. 헐벗은 산의 일족 전사들이 횃불을 들고 좌우로 도열해 있었다.

“음.”

천호가 아니라 라구엘이었다. 그녀는 어쩐 일인지 손을 들어 다시 입을 가렸고, 루시엘은 눈을 어디 둘지 몰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찌 되었든 일행을 환영하는 게 눈에 보였다. 산의 일족 전사들 모두가 환히 웃고 있었으니 말이다.

밤이었지만 전사들이 든 횃불 외에도 조명이 많아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은은한 빛을 내는 반딧불이 수십 마리가 곳곳에서 날아다녔고, 스스로 빛을 발하는 커다란 돌?월광석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산지 중간에 자리한 평지. 광장이라 불러도 좋을 공간.

“이쪽이다.”

“저기 계신 분이 여왕님이시다.”

천호의 좌우에 서서 여기까지 안내하던 전사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저만치 먼 곳을 가리켰다.

그 시선 끝에 자리한 것.

돌로 만들어진 커다란 벽 앞에 마찬가지로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옥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옥좌 위에 아름다운 여인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천호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일행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거리가 멀었지만, 그럼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여왕의 미모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머리칼과 건강하면서도 색기 넘치는 갈색 피부. 다른 산의 일족과 마찬가지로 헐벗었다 해도 좋을 의상 덕분에 완벽에 가까운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킨 천호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대여, 발걸음이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천호는 애써 침묵을 유지한 채 걸음 속도를 유지했다.

여왕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제는 이목구비가 또렷이 보였다. 과연 여왕. 도도한 위엄이 얼굴뿐만 아니라 전신에서 흘러넘치고 있었다. 위에 서는 자 특유의 분위기였다.

천호의 바로 뒤에서 따라붙은 루시엘도 여왕의 미모에 놀랐는지 연신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다시 몇 걸음.

여왕이 이제는 정말 가까워졌다.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몸매가 참으로 고혹적이었다.

천호는 다른 곳이 아닌 얼굴을 보기 위해 무진 애를 썼고, 여왕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천호의 시선이 높은 곳으로 향했다.

‘응?’

높은 곳?

발걸음을 멈추었을 때, 천호는 고개를 꽤나 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왕의 얼굴이 자리한 곳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대략 3미터 남짓.

완벽한 미모와 몸매와 비율을 가진 여왕의 키였다.

그리고 큰 것은 여왕만이 아니었다. 옥좌도 크고 벽도 컸다. 여왕을 보느라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호위병들도 무척 커서 3미터는 족히 되는 것 같았다.

인종이 다른 걸까?

거인족의 피라도 섞인 걸까?

“미트라?”

[그대여, 기대를 하니까 실망을 하는 거다.]

미트라가 태연하게 말했지만 애써 웃음을 참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리고 정말 아름다운 미녀이지 않은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거짓말은.

잠시 멍해 있던 천호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후우, 미트라. 혹시 비데라고 알아요?”

[응? 비데? 그게 대체 무엇인가. 그, 그대여?]

미트라가 불안한 목소리로 묻자 천호는 일부러 대답을 회피한 뒤 옆을 돌아보았다. 천호처럼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루시엘이 서 있었다.

“루시엘.”

“네, 용사님.”

“역시 루시엘이 최고예요.”

“어… 네?”

사담은 여기까지였다. 여왕 앞임을 되새긴 천호는 아버지께 배운 대로 예를 표했다.

영국 귀족을 연상시키는 인사에 여왕은 재미있다는 듯 씩 웃었다.

애당초 천호가 자신을 보고 놀랄 걸 알고 있던?아니, 기대하던 눈치였다.

“용사 박천호입니다.”

“반갑다, 용사여. 나는 산의 일족을 이끄는 여왕 루카나다. 그대와 그대의 일행을 열렬히 환영하는 바이다.”

말을 마친 여왕?루카나는 호탕하게 웃었고, 그녀의 환영 인사에 마음이 놓인 천사들은 저마다 안도의 숨을 토했다.

오직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대여, 비데가 무엇인가? 그대여?]

* * *

“있어요. 좋은 거. 아버지께서 무척 좋아하시는 거고요.”

[더더욱 모르겠다.]

뭔가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막 좋은 것 같지도 않고.

천호는 작게 웃었다. 미트라에게 비데 일을 시킬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반응이 귀여우니 가끔씩 언급할 요량이었다.

“흠흠.”

어찌 되었든 지금은 미트라와의 대화가 아니라 여왕과의 대화에 집중할 때였다.

웃고 떠들 만한 상황 역시 아니었고 말이다.

“그런가. 마탑 역시 함락된 상태인가.”

돌로 만들어진 동그란 원탁으로 일행을 인도한 여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애당초 산의 일족은 여왕처럼 키가 큰 거인족 혼혈들과 천호가 마주했던 정찰병들처럼 비교적 작은 평범한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덕분에 원탁 역시도 천호 일행이 자리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루카나 여왕이여, 왕도의 상태를 알고 싶다.”

사스치엘의 요구에 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까지 모은 정보에 따르면… 공격이 시작된 건 오늘 아침이다. 갑자기 하늘이 검게 물들었고, 엄청나게 많은 수의 마물들이 땅에서 솟구쳐 올라 플로렌 왕국의 왕도를 공격했다. 우리가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판도가 기운 후였지.”

산맥에서 플로렌 왕국의 왕도를 내려다보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렇다고 거리가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추후 파견한 전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왕도의 사람들은 거의 다 희생된 것 같다. 놈들은 포로조차 잡지 않고… 왕도 중앙에 세운 제단에 살아남은 이들 대부분을 제물로 바친 것 같다.”

여왕의 시선이 아우라엘이 안고 있는 레티샤 왕녀와 라구엘이 안고 있는 유그 왕자에게 향했다. 안타까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이대로라면 이 산맥도 곧 놈들의 손에 떨어질 거다. 플로렌 왕국의 왕도를 함락시켰으니 3층에서처럼 사막화를 진행시킬 수도 있고.”

이번 한 번의 기습을 위해 힘을 숨겨 왔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기습이 성공했으니, 더 이상 힘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겨우 한 층 차이지만 3층보다 심층에 가깝고… 뭣보다 힘을 오래 모아 왔기 때문인지 마기의 강도가 3층보다 훨씬 강합니다. 마물들 역시 강화될 게 분명해요.”

심층에 가까울수록, 대미궁의 마기가 풍부할수록 강해지는 마물들이었다. 당장 4층에서 마주한 랫맨들은 3층의 랫맨들보다 다들 덩치가 크고 힘이 강했다.

곤란한 상황이었다.

적은 많고 강한데, 이쪽에는 쓸 수 있는 카드가 별로 없었다.

루시엘은 천호를 돌아보았고, 천호는 잠시 그런 루시엘을 마주하더니 이내 모두를 돌아보며 물었다.

“한 가지, 가능할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사스치엘이 바로 되물었다. 기대 섞인 눈빛에 숨을 한 번 고른 천호는 2층에서부터 생각했던 것을 입에 담았다.

“우리도 신상과 제단을 사용할 순 없을까요?”

“우리도?”

“네, 치유의 신님의 신상과 제단을요.”

역병신의 대적자.

크로니클 퀘스트가 가리키는 것은 천호만이 아니었다. 역병의 신의 진정한 맞수인 치유의 신 역시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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