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물이 딱 좋게 달아올랐다.46화선임으로서의 위엄을 보인 미트라는 훌찍이며 천호의 허리춤으로 돌아왔다.
천호와 함께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온 유지는 잔불이가 잘해 줄 거예요.”아직 화력이 약하긴 했지만, 이미뜨겁게 덤혀진 물을 천천히 식게 할 능력 정도는 있었다.
축 늘어진 대답에 천호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더니 미트라의 황금색보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트라. 제가 도움이 될 조언 하나해 드릴게요.”[무엇인가.]
"기대를 하니까 실망을 하는 거래요.”
처음부터 잔불이를 부려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선임으로서 후임을 이끌어 줄 좋은 마음만 먹었다면.
천호의 이야기에 미트라는 멍한 목소리를 흘리더니 이내 무어라 악다구니를 쓰기 시작했다.
물론 성검답게 금방 그러다 말았지만.
[하아. 아무튼 그대여. 지금 어딜가는 것인가」
미트라의 물음에 천호는 저만치에 혼자 서서 옛 도시의 추억에 잠겨있는 오레놀을 가리켰다.
“무기고랑 보물고도 한번 가 봐야죠."
쿠르트 왕이 약속한 보상도 받을 겸.
[그대의 조언을 지금 돌려주겠다.
너무 기대하지 마라.]
“뭐, 챙겨 갈 수 있는 건 진즉에 챙겨갔을 테니 저도 큰 기대는 안 해요.”
그냥 미트라랑 잔불이 먹일 간식거리(?) 정도만 얻으면 만족이었다.
“오오, 용사님. 바로 모시겠습니다.”
“부탁할게요.”
천호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하자 오레놀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길 안내를 시작했다.
아이온 산맥 내부에 형성된 락 드워프들의 옛 도시는 개미굴처럼 수많은터널과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것이 락 골렘들이었고, 보물고는 두 번째로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기고는 의외로 입구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급할 때 꺼내 써야 하니까.
무기고의 무기들은 보물고의 보물들과는 그 성격 자체가 달랐다.
애당초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들이니, 꺼내 쓰기 편한 곳에 자리한 것이 당연했다.“다 왔습니다."
오레놀이 거대한 석문을 손수 열자 안으로 길게 이어진 공간이 드러났다.
[미약하지만 곳곳에서 마력이 느껴
진다
미트라의 말대로였다. 무기고의 벽면에 놓인 선반 대부분이 비었지만 군데군데 검이나 도끼, 망치 같은 것들이 굴러다다.“미처 챙기지 못 한 것들입니다. 대미궁에 침식된 그날은 워낙 경황이 없었으니까요…….”
이해했다. 오레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살고 있던 땅 전부가 갑자기 다른 곳으로 이동한 상황이었으니까. 더욱이 곳곳에서 마물들 역시 나타났을 터이니, 혼란이 극에 달했으리라.
천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선반 위의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미트라, 아무래도 마기에 오염된물건들 같죠?"
[그렇다. 적는 많는 다들 마기에 오염된 상태다. 잔불이한테 줬다가 배탈이 나는 건 아닐지 걱정이군.]
샤프니스 소드를 먹었을 때를 떠올린 미트라가 작게 말했다.
천호는 오레놀에게 물었다.
“오레놀, 잔불에게 먹일 마법 도구는 아무거나 괜찮은 건가요?"
“예, 괜찮습니다. 애당초 푸른 불꽃은 이브나일 님의 힘으로 모든 것을 불사르니까요. 마기는 어련히 정화될겁니다."
"음."
그럴싸한 이야기였지만, 푸른 불꽃과 잔불은 달랐다.
생각해 보면 애당초 마기에 오염되어 망령까지 된 잔불이 아닌가.
작은 것부터 조금씩 먹여 키우는 건 어떤가. 잔불이 자체가 강해지면 더강한 마기도 정화할 수 있을 거다]
제법 타당한 의견이었다. 덕분에 망설임을 버린 천호는 준비해 온 자루 안에 마법 도구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잔불이가 좋아하면 좋겠군.]
역시나 성검. 다정다감한 미트라의 말에 천호가 씩 웃으며 말했다.
“검은 여간하면 미트라 줄게요.”
으음, 뭔가 기쁘면서도 두렵군.
마기가 어린 물건을 먹는 것도 먹는 것이었지만, 먹었다가 어떤 기능이 추가될지, 그리하여 또 무슨 일을 하게 될지가 두려운 미트라였다,
“아, 그러고 보니."
한창 자루를 채우다 말고 천호가 고개를 들었다.
반대쪽을 살피던 오레놀은 눈치채지 못 했지만 미트라는 아니었다,
[그대여, 무슨 일인가.]
“키워야 할 게 미트라랑 잔불이 말고도 하나 더 있어서요."그렇게 답한 천호는 품을 뒤져 커다란 씨앗 하나를 꺼내 들었다. 1층에서 얻은 마목의 씨앗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목의 씨앗이 있었군」
“일단 화분에라도 심어 보려고요.”
사스치엘을 비롯해 힘깨나 쓰는 전투천사들이 잔득 있었으니, 꽤 크게 자라도 운반에는 문제가 없을 터였다.
좋은 생각이다. 마목은 피와 마력을 먹고 자란다. 주변에 천사들이 많으니, 자연스럽게 성스러운 나무로 자라날 것이다,
“오… 잘 자라면 막 세계수 같은게 된다거나?"
[그건 좀 힘들 것 같지만… 어찌 되었든 성스러운 나무가 된다면 앞으로의 여정에도 큰 도움이 될 거다.]
어찌 되었는 나블 것이 없었다. 더욱이 미트라 말마따나 주변에 천사가 가득한 상황이었으니, 비료나 양분을 걱정할 일도 없었다.“흠… 그럼 이름도 지어 줘야겠네요. 마목이는 어때요?"
[그대여,너무하지 않는가. 마목이라서 마목이라니. 그대는 내가 이름이 없었다면 성검이라고 불렀을 것 같다.]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도 충분히.
[그대여?]
“으음. 그럼 거꾸로 뒤집어서 목마는 어때요?"
[귀염성이 좀 부족한 것 같다. 그리고 성의 없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그럼 미트라가 지어 봐요. 타박만 하지 말고."
[으으음…….]
미트라의 고민이 깊어졌다. 천호에게 무어라 한 소리 하기도 했으니 제대로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 그런데 그 마목은 수나무인가 암나무인가.]
"잔불이도 남잔지 여잔지 모르잖아요."애당초 불꽃에 성별이 있는지조차 의문이었지만.
미트라의 고민이 더더욱 깊어졌다.
아무래도 금방 끝날 기세가 아니었기에 천호는 다시 마법 도구 회수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쿠르트 왕은 각자 하나씩 운운했지만 어차피 잡동사니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수량을 따지는 것도 우스운일이었다.
나름 감시역이라 할 수 있을 오레놀도 별말이 없었고. 아니, 오히려천호의 행동이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가 모아 온 것들까지 천호에게 넘겨주었다.
그렇게 약 30여분.
일을 마친 천호는 잔득 부푼 자루를 질어지고 락 골렘 수납고- 목욕탕이 설치된 장소에 돌아갔다.
“응응, 그래. 잔불아.”
“선배, 이것 봐요. 지금 잔불이가 아양 떠는 거 맞죠?"
“아양이라니… 그보다는 응석 부리기에 가깝지 않을까?"천사들이 하이톤의 목소리로 까르르 웃음보를 터트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루시엘의 손바닥 위에서 잔불이가 실룩실룩 몸을 흔들고 있었다.
“아, 용사님! 여기 잔불이 좀 보세요."
루시엘이 활짝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잔불이는 천호를 알아보기라도 했는지 불꽃을 조금 더 크게 키웠다.완전히 애완동물이네.
하긴, 외국에는 애완용 돌도 있다지 않은가. 애완용 불꽃 정도야 있을 수도 있지.
더욱이 루시엘이 좋아하지 않는가.
그렇다면야 애완용 불꽃이 아니라 애완용 물이라도 좋았다.
“마침 잘 됐네요. 먹이를 한번 먹여보도록 하죠.”
그리 말한 천호는 자루에서 작은귀걸이 하나를 꺼냈다. 미약한 보존마법이 걸린 마법 도구였다.
“루시엘이 줘 봐요.”
“네, 용사님."
생긋 웃은 루시엘은 잔불이에게 귀걸이를 어떻게 줘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적당히 가운데 부분에 귀걸이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그 순간이었다.
꾸이꾸이!잔불이에게서 기묘한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귀걸이가 금세 형태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금속 자체가 잔불이에게 흡수된 것인지 정말 흔적하나 남지 않았다.
그리고 잔불이의 불꽃이 아주 약간강해졌다. 잔불을 지키는 자인 천호만이 겨우 눈치첼 수 있는 차이였지만, 지켜보던 일행 모두가 환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잔불이가 무척 기쁜 듯 실룩실룩 몸을 흔들어 기때문이다.꾸이꾸이!
거기에 소리까지. 맛있다고 신나 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불꽃이 어떻게 하면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미스테리였지만 그런 것 따위 상관없는 일행이었다.
루시엘을 필두로 한 천사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귀여워!"
“까이”'귀엽구나."
루시엘과 에이젤은 대놓고, 아우라엘과 라구엘은 제법 점잖게 감정을 표현했다.
[오오, 다행히 잘 먹는구나.]
마기 때문에 걱정했는데, 오히려 양념 삼아 잘 먹은 모양이었다.
미트라가 한시름 놓았다는 듯 안도의 숨을 토하자 천호는 루시엘에게손을 뻔었다.
“루시엘, 잔불이 좀 건네주실래요?"
“네? 아, 네. 용사님.”
루시엘이 잔불이를 넘겨주자 천호는 미트라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대여?]
“잔불이랑 인사 좀 하세요.”
씩 웃은 천호는 미트라의 황금빛보석 위에 잔불이를 올려놓았다.
꾸이꾸이.
다시 귀엽게 소리를 낸 잔불이가 황금빛 보석 근처에 불꽃을 비벼 냈다.
그러자 천호가 기대한 목소리가 을러나왔다.
[으… 으음…….]
부끄러움을 겨우 억누른 미트라의 목소리였다. 꽤나 기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앗? 자, 잔불이! 나는 먹는 게 아니다! 아니란 말이다!
몸을 왜 비비나 했더니 먹고 싶어서였나.
미트라가 패나 크게 당황한 터라덩달아 당황한 천호는 얼른 잔불이를 떼어 루시엘에게 돌려주었다.
“잔불이도 미트라가 좋은가 봐요.”
“그, 그러게요.”
그저 응석을 부렸다고만 생각한 루시엘이 환히 웃었고, 에이젤과 아우라엘, 라구엘도 흐못한 눈으로 잔불이를 보았다.
[으음…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이.]
미트라 홀로 고민하는 가운데 천호는 오레놀을 돌아보았다.
“오레놀, 잔불이 자라면 마법 도구나 무기를 제조하는 데 사용할 수 있겠죠?"
"물론입니다. 푸른 불꽃에 벼리면 평범한 금속조차도 마력을 띄기 마련입니다. 지금은 작고 미약하지만, 언젠가 크게 자란다면 용사님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음. 그렇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무기 제조법이라면 아버지께 이것 저것 배운 바가 있는 천호였다.
물론 천호 자신이 직접 제조하지 않고 남을 시킨다는 방법도 있었고 말이다.
"아무튼 이제 정말 기다리는 일뿐이군요. 사스치엘이 돌아올 때까지 각자 휴식을 취하도록 하죠.”
“네, 용사님."
“그리하겠습니다."
락 골렘들을 손에 넣었지만, 이대로 락 드워프들의 도시로 합류하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락 골렘들은 숨겨진 수.'
역병신의 무리들은 락 골렘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 알고 있었다면 지금까지 방치해 두었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때문에 락 골렘들은 역병신의 무리들과의 싸움에 있어 가장 강력한 변수가 될 수 있었다.
쿠르트 왕이 이끄는 락 드워프 군대가 정면에서 역병신의 무리를 공격하고, 천호가 락 골렘들을 이끌고 적들이 예상치 못한 방면을 공격한다.
협공 형태로 몰아치는 것도 좋았고, 싸우러 나가 비어 버린 적의 본거지를 치는 것도 좋았다, 역병신의 무리들이 쿠르트 왕의 군대에 어떤 식으로 대응하느냐에 따라 방법이 갈릴 터였다.마검을 가진 암살자.'
이번 전투에서 마주하게 될 상대.
천호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암살자와의 싸움을 그려 보았다, 다음 날 아침.
쿠르트 왕의 군대가 역병신의 무리들이 자리한 옛 거주지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군대의 숫자는 약 이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싸울 수 있는 드워프 전사 모두를 총동원한 결과였다.
군대의 이동은 곧 루카브론드의 귀에도 들어갔다.
“역시 드워프들은 단순하군."
한 대 맞았으니 똑같이 한 대 때려준다.
물론 겨우 그 정도 발상만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으리라. 사막화가 더진행되기 전에 최후의 발악을 해 보자는 것에 가깝겠지.
"어찌할 거지?"
“수성전을 한다."
적들이 찾아온다는데 구태여 나가 싸워 줄 이유가 없었다.
놈들이 쌓아 올린 성벽으로 놈들을 유린한다면 그것 또한 통쾌할 터이고.
“용사가 을 거다."
루카브론드의 말에 도루마는 열은미소를 그렸다. 아이스 대거와 플레임 소드, 잃어버린 샤프니스 소드에 이은 네 번째 마검인 아쿠아 블레이 드를 어루만지며 답했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낼 것이다. 역병신님의 제단에 놈과 천사들의 목을 바치도록 하지."
“기대하겠다.”
첫 만남은 그리 매끄럽지 못 했지만 어느새 기묘한 우정이 싼 도루마와 루카브론드였다.
역병신의 두 사도들은 성벽 위에 나란히 서서 남서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