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38화 (38/211)

< 제3장 - 3층 #7 (수정) >

&

미트라만 빼고 모두가 행복한 식사 시간이 끝났다.

천호는 천사들에게 디저트로 과일을 대접한 뒤 다시 환풍구를 열고 모닥불을 피웠다. 환기도 환기였지만, 잠잘 때 깔 돌들을 데우기 위함이었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역시 괜히 날개와 천사의 고리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과일을 다 먹자 에이젤이 제일 먼저 나섰고, 아우라엘과 라구엘 역시 소매를 걷고 동참했다.

‘다들 진짜 천사 같아.’

[누누이 말하지만 다들 진짜 천사다.]

덕분에 설거지에서 해방된 천호는 일찌감치 잘 준비를 하기로 했다. 천호 자신이야 수련이니 뭐니 밤에 할 일들이 좀 있었지만, 오늘 구조된 아우라엘과 라구엘, 에이젤은 아니었다.

목욕하고 밥 먹고 했으니 이제 남은 건 편히 자는 일뿐이었다.

‘침대는 무리겠군.’

차지하는 공간이 넓은 것도 문제였지만, 깔개로 쓸 가죽이 그리 많은 상황이 아니었다.

렛맨들의 옷을 세탁한 뒤 하나로 기워 큰 천을 만드는 작업은 은근히 쉬웠고, 엘리와 레나 자매는 물론이고 루시엘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두질은 이야기가 달랐다.

손도 훨씬 많이 갔고, 제대로 된 가죽으로 가공하는데 필요한 시간도 길었다.

‘결국 재료만 잔뜩 쌓였구나.’

언제 날 잡고 무두질을 해야 할 텐데.

어찌되었든 당장 가지고 있는 깔개용 가죽이 몇 장 없으니, 침대 같은 호사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일단 돌을 묻고.’

모래를 적당히 파낸 뒤 모닥불에 데운 돌들을 묻었다. 너무 깊게 묻으면 열이 차단되었고, 너무 얕게 묻으면 등이 배겼으니 딱 좋은 깊이를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딱 좋아.’

모래 위에 손을 올려 온기를 느낀 천호는 평탄화 작업을 한 뒤 가죽을 깔았다.

옆으로 나란히, 네 사람이 누워도 충분할 정도로 깐 뒤 담요를 덮어 마무리를 지었다.

‘시간나면 베개도 만들어야겠다.’

데저트 크로우의 깃털을 뽑았으니까. 약간 가공하면 깃털 베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용사님, 설거지 다했어요.”

때마침 루시엘이 다가와 말했다.

아우라엘 일행과 조우한 덕분인지, 평소보다 훨씬 더 표정이 밝아진 그녀였다.

천호는 마주 웃은 뒤 잠자리를 가리켰다.

“먼저들 주무세요. 저는 주변도 둘러보고, 수련도 좀 해야 하니.”

부드럽게 말한 천호는 그대로 슥하고 천막을 나섰다.

천호 자신이 계속 있으면 아무래도 잠자리에 들기 힘들어 할 것 같아서였다.

‘아버지는 말씀하셨지, 작은 배려가 큰 차이를 만든다고.’

한창 난방 중인 미트라도 두고 나온 터라 혼자 고개를 끄덕인 천호는 추위도 쫓을 겸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세사천왕.

비루다카의 장.

신속의 스칸다.

정말로 속도를 내지는 않았다.

신속의 스칸다의 진퇴로를 따라 발을 놀릴 뿐이었다.

‘연습할 때는 속도보다 정확도에 신경을 써라. 앞으로 달릴 길을 닦는 거다.’

검술 수련법 중에 완검緩劍이란 것이 있었다.

빠르게 휘둘러 베는 것이 아니라, 아주 천천히, 마치 영화 속의 슬로우 모션처럼 무척이나 천천히 베기 동작을 취하는 것이었다.

‘최적의 동선을 찾아내라.’

‘검을 휘두를 때 네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느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지- 그 모든 것을 이해해라.’

단순히 베기에만 통하는 수련법이 아니었다.

몸을 사용하는 모든 기예에 적용할 수 있었다.

기술을 이해한다.

기술을 몸에 새긴다.

그리하여 필요한 순간 빠르고 정확하게 기술을 구사한다.

진퇴로의 복습이 끝났다.

다음으로 드리타라슈트라의 장을 수련했다.

밀어옆차기인 태산 밀치기와 공중에서 회전하며 내려찍는 벼락 떨구기.

가장 직관적인 기술이기에 지구에서도 많이 수련하였고, 완성도 역시 높았다.

바이슈라바나의 장에 속하는 관철과 참철.

본질만을 파고든다면 찌르기와 베기.

아주 약간이지만 내공을 운용했다. 몸의 운용과 내공의 운용을 동시에 이해했다.

“후우-.”

천호는 자세를 바로 한 뒤 긴 숨을 토했다.

영하의 온도임에도 불구하고 이마를 따라 땀이 흘렀다.

“용사님.”

반사적으로 돌아서니 천막 입구에 쪼그려 앉아있는 루시엘이 보였다.

그녀는 빙긋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건을 내밀었다.

천호 자신이 처음 만난 날 그녀에게 준 손수건이었다.

“주무시지 않고.”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말하자 루시엘이 다시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그래요.”

용사님이 안 주무시는데.

‘큽.’

천호는 필사적으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당장이라도 가슴을 움켜쥐고 싶을 만큼 감동받았지만, 결코 티를 내지 않았다.

“춥지 않아요?”

“괜찮아요. 날개가 있는 걸요. 담요도 덮었고.”

헤헤 웃은 루시엘이 어깨에 두른 담요 속에서 날개를 살짝 파닥였다.

“음.”

그래도 옷이 얇을 텐데.

데저트 크로우 깃털로 베개 말고 파카를 만들까.

잠깐이지만 진지하게 고민한 천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더 이상 밖에 나와 있을 이유가 없었다.

“들어가죠.”

“네, 용사님.”

루시엘과 함께 천막 안에 들어오니, 공기 자체가 달라졌다.

살짝이지만 후끈후끈.

차가운 밖과 달리 제법 따뜻한 실내.

[···왔는가.]

역시 성검은 성검이었다. 혹여 천사들이 추울까봐 열심히 열풍을 내고 있던 미트라였다.

천호는 다시 작게 웃은 뒤 루시엘에게 말했다.

“루시엘, 전 좀 씻고 올게요.”

“네, 용사님.”

웃으며 답한 루시엘은 한데 웅크려 자고 있는 천사들에게 다가갔다. 에이젤이 덮고 있는 이불을 고쳐주는 모습이 정말 천사 그 자체였다.

[이제는 지적할 마음도 안 드는군.]

낮게 말하는 미트라를 손에 쥔 천호는 목욕탕으로 향했다. 루시엘과 천사들이 사용한 물이 차게 식어 있었다.

“미트라, 부탁할게요.”

[···그래.]

역시 미트라. 부탁하면 결국 다 해주는 착한 성검.

천호는 목욕탕에 미트라를 담근 뒤 약간의 체조 후에 바로 물에 들어갔다. 어차피 더 쓸 사람도 없으니 땀을 씻고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약 이십여 분.

목욕을 마친 천호는 매일 밤 그러했던 것처럼 시험대 위에 올랐다.

“용사님.”

루시엘이 언제나처럼 날개 한 쪽을 펼친 채 잠자리에서 손짓했다.

“음.”

천호는 일단 와이어에 다시 미트라를 고정한 뒤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평소와는 조금 달라진 것이 있었다.

‘조, 좁아.’

그랬다. 둘이서만 자다가 여럿이 자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사실 천막이 별로 크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찌되었든 루시엘의 날개가 천호를 덮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루시엘도요.”

약간 딱딱하게 답하니 루시엘이 작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좁다 보니 평소보다 거리가 가까웠다.

‘아버지.’

천호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자 아버지의 가르침이 연달아 떠올랐다.

‘아들아, 야외에 천막을 만들 때는- 특히 동료들과 함께 잘 천막을 만들 때는 너무 넓게 만들지 마라. 어느 정도 좁게 만들어야 한다.’

‘왜요? 실내 온도 유지 때문에요?’

좁을수록 온도 유지가 쉬울 테니까.

어린 천호의 대답에 아버지께서는 사나이의 미소를 지으셨다.

‘그것도 맞지.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단다.’

‘그게 뭔데요?’

‘그날이 오면··· 너도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어린 천호의 눈에 먼 곳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 눈부셨다.

그리고 오늘.

지금 이 순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아버지.’

천막을 좁게 만들라 하신 이유를.

따뜻했다.

부드러웠다.

“용사님······.”

루시엘이 잠꼬대 하듯 작게 말하며 천호의 품에 몸을 기댔다.

“음.”

천호는 눈을 감았다. 긴 숨과 함께 마음을 다스렸다.

‘아들아.’

‘아버지.’

‘나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뜬금없는 환청을 들으며 천호는 의식을 집중했다.

길고 긴 밤을 맞이하였다.

[천마신공 Lv2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번뇌력 Lv2가 되었습니다.]

[현자의 시간 Lv1을 획득했습니다.]

&

아침이 밝았다.

누구보다 늦게 잠들었지만, 누구보다 먼저 눈을 뜬 천호는 일단 정면을 보았다.

“음.”

렛맨들의 의복으로 만든 터라 누리끼리한 천장이 보였다.

숨을 한 번 고른 천호는 시선을 자신의 가슴팍 쪽으로 옮겼다.

자세가 바뀌었다.

분명히 잘 때는 차렷 자세였는데, 어쩐지 모르게 루시엘을 품에 안고 있는 자세가- 정확히는 천호 자신이 한 팔로 루시엘의 어깨를 안고 있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

“음.”

뭐, 잠결이겠지.

루시엘도 편해 보이고.

“응······.”

루시엘이 품안에서 살짝 꼼지락 거렸다.

천호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시선을 위로 옮겼다. 빛의 창이 보였다.

[현자의 시간 Lv1]

[아무리 긴급한 상황 속에서도 침착한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하다하다 별 게 다 나오는구나.’

하지만 쓸 만 했다.

항시 유지되는 패시브 스킬이 아닌 액티브 스킬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유용한 면도 있었다.

‘번뇌력도 레벨이 올랐네.’

아직 뭔가 덕을 본 건 없지만, 이것도 뭔가 쓸모가 있겠지.

레벨 올라서 나쁠 게 무엇이겠는가.

적당히 납득한 천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딱히 잘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급히 일어날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뿐이었다.

어느 순간 천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덕분에 덩달아 깨어난 루시엘이 멍한 얼굴로 말했다.

“용···사님?”

제대로 대답해줄 여유가 없었다. 천호는 일단 미트라에 손을 뻗었다. 미트라 또한 낮고 빠르게 말했다.

[심상치 않다.]

단순한 감이었다. 하지만 천호도 미트라도 그 감이라는 것을 무시하지 않았다.

천호는 일단 천막 밖으로 나섰다. 시선을 멀리하니 보이는 것이 있었다.

“사스치엘?”

날개를 활짝 펼친 황금빛 사자.

하늘 위를 문자 그대로 질주하는 그가 다급히 소리쳤다.

“용사!”

천호는 무어라 마주 소리치는 대신 사스치엘의 뒤를 살폈다.

저만치 멀리서 다른 전투천사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무언가 급한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사스치엘이 홀로 속도를 높여 날아올 정도의 일이.

“루시엘! 모두를 깨워요!”

천호는 일단 천막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네? 아, 네! 용사님!”

잠이 덜 깨 비몽사몽하던 루시엘이 정신이 번쩍 든 듯 크게 답했다.

천호는 다시 사스치엘 쪽을 보았다. 착지하기 직전이었다.

“용사!”

“무슨 일이죠?”

“락 드워프!”

사스치엘이 내뱉듯이 말했다. 너무 급히 날아오느라 숨이 찼는지,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천호는 다그치는 대신 오히려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덩달아 침착해진 사스치엘이 심호흡 뒤에 말했다.

“락 드워프들의 도시가 역병신의 수하들에게 공격받을 거다. 서둘러야 한다.”

락 드워프.

3층,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지역의 현주민들.

사스치엘 일행은 북쪽에서 왔다.

반면 락 드워프들의 도시는 남서쪽에 있었다.

북쪽에서 무언가 결정적인 정보를 얻었음이 분명했다.

천호는 남서쪽을 돌아보았다.

아주 먼 곳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

해가 떠오르기 직전.

가장 어두운 시간.

공격은 새벽과 아침의 경계에 시작되었다.

대군을 이용한 정면 공격이 아니었다.

락 드워프들의 자랑인 성벽 위를 도루마가 걸었다.

산보하듯 가볍게,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를 방해하는 이는 없었다.

성벽 위에서 성문의 개폐장치까지.

그 사이에 자리하고 있던 드워프 아홉은 자신들이 죽는지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했다.

어둠 속에서의 일격을 피할 수 있었던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도루마는 성문을 열었다.

이변을 눈치 챈 드워프들이 소란을 떨었지만 소용없었다. 너무 늦어버렸다.

“오라.”

도루마가 낮게 말했다.

마치 그 말이 신호였던 것처럼 아직 사막화가 진행되지 않은 황무지 언덕 너머에서 역병신의 무리들이 솟구쳐 올랐다. 모두 합쳐 천오백에 달하는 무리들이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성문을 닫아!”

“서둘러!”

우당탕탕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로 추정컨대 당장의 숫자는 일곱.

도루마는 작게 웃었다.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다섯 자루의 마검 가운데 하나인 샤프니스 소드였다.

“오라.”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역병신의 무리가 아닌 드워프들을 향해서였다.

우선은 일곱.

다음은 몇이 될까.

용사와 천사는 도시의 위험을 언제 눈치 챌까. 과연 도와주러 올 수 있는 거리에 있을까.

흥미로운 사색이었다.

도루마는 소리 없이 지면을 박찼다. 성벽의 그늘이 만들어낸 어둠 속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일곱 걸음.

일곱 번의 호흡.

개폐 장치를 향해 달려가던 드워프들이 종잇장처럼 갈라졌다. 피와 내장을 쏟으며 바닥에 나자빠졌다.

“다시 다섯.”

추가적으로 들리는 발소리.

도루마가 발걸음을 떼었다.

소리 없는 죽음을 양산했다.

&

< 제3장 - 3층 #7 (수정)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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