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37화 (37/211)

< 제3장 - 3층 #6 >

&

“하아······.”

“하아······.”

“하아······.”

“온도가 정말 딱 좋아요.”

사막의 밤.

루카브론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애당초 사막이란 곳이 일교차가 크긴 했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 겨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온이 영하로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이 추위 속에서 루시엘은 발가벗고 있었다.

그녀만이 아니라 아우라엘, 라구엘, 에이젤까지 그러했다.

뜨거움 숨을 토하며 아늑함을 느꼈다.

“진짜 좋다······.”

탕 속에 몸을 푹 담그며 라구엘이 진심에서 우러난 감탄을 토했다.

본래 반신욕을 겨우 할 수 있을 정도로 속이 얕은 목욕탕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2층에서 포레스트 엘프들과 용의 무녀들에게 못을 비롯한 약간의 재료를 얻은 천호는 일단 목욕탕부터 개조를 했다.

1층에서 카사브론드와 싸울 때 파괴되었던 책장을 완전히 부순 뒤, 그 자재로 목욕탕 높이 상승 공사를 시행한 것이었다.

덕분에 탕의 깊이는 두 배가 되었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수면의 높이가 가슴을 덮었다. 조금만 숙이면 아예 어깨까지 담글 수 있었고 말이다.

“하아··· 아름다운 밤이에요······.”

에이젤이 발개진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책장을 세워 만든 벽 위에는 렛맨들의 옷을 기워 만든 덮개가 덮여 있었다.

하지만 에이젤은 저 너머에 있을 검푸른 밤하늘을 쉬이 상상할 수 있었다.

1층과 2층에서는 그저 무섭게만 느껴져서 올려다보는 것조차 두렵던 밤하늘인데, 지금은 달랐다. 당장이라도 덮개를 걷고 밤하늘을 우러르고 싶었다.

“죽을 것 같아······.”

아우라엘이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 같은 얼굴이 되어 달뜬 숨만 토했다.

대미궁에서 뜨거운 물로 목욕이라니.

그것도 탕에 몸을 담그고.

상상도 하지 못 한 일이었고, 하고 있는 지금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꿈만 같아.’

요 며칠간의 고생이 다 꿈인 것 같았다. 꽃잎을 뿌려 향이 나는 뜨거운 물이 그야말로 몸에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음.]

목욕탕 중앙.

와이어로 고정된 채 목욕탕 물을 데우던 미트라는 미묘한 신음을 흘렸다.

무언가 분통을 터트리고 싶은데, 천사들이 너무 행복해하니 무어라 싫은 소리 한 마디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어······.”

“죽으면 싫어요··· 선배······.”

라구엘과 에이젤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속으로 맛이 갔다는 표현을 떠올린 미트라였지만 굳이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미트라와 라구엘, 에이젤을 바라보던 루시엘은 방긋 웃더니 옆에 앉은 아우라엘을 돌아보았다.

“언니, 좋죠?”

“응··· 너무 좋아······.”

“우리 용사님 솜씨에요.”

루시엘이 젠체하며 아우라엘의 팔을 끌어안았다. 탕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한 번 비누칠을 한 터라 무척이나 매끈했다. 샴푸 대용품 덕분에 머릿속도 말끔했고.

“루시엘.”

“네, 언니.”

“대미궁 들어오자마자 용사님 만났다고?”

“네, 1층에서 바로 만났어요.”

“그럼 그때부터 쭉 같이 다녔고?”

“네.”

“그럼 목욕도 진즉부터 했겠네?”

“물론이죠. 밥도 얼마나 잘 먹었다고요. 한 끼도 안 굶었는걸요.”

헤헤 웃은 루시엘은 자기 배를 가만히 만져보았다. 아우라엘은 그런 루시엘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루시엘.”

“네, 언니.”

“이따 한 대만 맞자.”

“네, 언··· 네?”

아우라엘은 수증기가 찬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만감이 뒤섞인 한숨을 토했다.

그리고 때를 맞추듯, 그런 아우라엘의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가 있었다.

따스한 냄새.

무언가 고소하면서도 담백하면서도 자꾸만 맡고 싶은 냄새.

“아아······.”

이미 반쯤 넋이 나가있던 라구엘과 에이젤이 황홀한 표정을 지었고, 아우라엘은 마른침- 아니, 군침을 삼켰다.

루시엘이 다시 젠체하며 말했다.

“진짜 맛있을 거예요. 용사님 요리 스킬 레벨이 상당하거든요.”

“그래, 그러니까 일단 한 대만 맞자.”

아우라엘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루시엘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

같은 시각.

네 천사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목욕을 즐기는 그때.

책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천호는 시선을 돌려 모닥불을 보았다.

사막에 만든 임시 거처.

제법 넓고 쾌적했지만 만드는 방법 자체는 단순했다.

1. 책장을 세워 외벽을 만든다.

2. 2층에서 잔뜩 구한 렛맨들의 의복을 기워 만든 큰 천으로 천장을 덮는다. 혹시 모르니 이중으로 덮는다. 가운데에 환기구 만드는 걸 잊지 않는다.

3. 환기구 아래에서 모닥불을 피운다.

‘책장이 보배구나······.’

새삼 제국사서 노트랑을 위해 묵념한 천호는 다시 모닥불- 정확히는 모닥불 위에서 팔팔 끓고 있는 데저트 크로우 탕을 바라보았다.

2층에서 레나가 준 큰 솥이 아니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 했을 요리였다.

‘부족해.’

요리 이야기가 아니었다.

탕에 소금을 뿌리고, 마늘을 조금 더 넣은 천호는 감칠맛 스킬까지 사용한 뒤 손을 쥐었다 폈다.

데저트 웜들과의 전투에서 나이프 던지기가 통하지 않았다.

평범한 투척으로는 놈들의 가죽을 뚫을 수 없었다.

이제 겨우 3층.

아래로 내려갈수록 마물들 역시 강해질 터였다.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나온 괴물들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그런 신화적인 존재들 역시 나타날 게 분명했다.

강해져야 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내공.’

신체 단련이라면 지금도 매일 같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한 단련으로는 강해지는데 한계가 있었다.

레벨 업 덕분에 신체능력이 한층 강해진 지금, 천호 자신은 인간 한계에 도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여기서 레벨 업을 더 하면 인간의 한계마저 초월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무공.’

호세사천왕과 천마신공.

하지만 사실 둘 모두 불완전했다.

내공을 사용하지 못 하는 천호가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식과 형뿐이었고, 그나마도 비교적 단순한 기술들뿐이었다.

호세사천왕은 세상의 사방을 지키는 사천왕의 무위를 재현하는 무공이었다.

개중 천호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몇 가지에 불과했다.

증장천, 비루다카의 장 - 신속의 스칸다.

지국천, 드리타라슈트라의 장- 태산 밀치기와 벼락 떨구기.

광목천, 위루파크샤의 장 - 축기.

비사문천, 바이슈라바나의 장- 참철과 관철.

언제든지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도록, 내공의 순환이 원활하도록 매일 밤 반복해서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마신공.

아버지께서는 천마신공에 여섯 가지 기예가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작금 천호의 수준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때문에 천호에게 있어 천마신공은 아직까지는 내공심법일뿐이었다.

‘우레.’

용사의 피를 각성함에 따라 고유직업 용사를 얻으며 획득한 능력.

천호 자신이 이미 지구에서 수행한 여러 능력들과 달리 미궁 세계에서 습득한 완전히 새로운 힘.

현재 천호 자신의 레벨은 28이었다.

레벨 30이 되면 용사의 피나 용사 자체에 어떤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우레 외에도 새로운 능력이 생긴다든지.

아무래도 30은 21이나 22보다는 특별한 레벨이었으니 말이다.

‘루시엘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했고.’

레벨이 오름에 따라 루시엘도 성장하고 있었다. 당장 인벤토리 레벨이 2가 됨에 따라 수납 공간이 1.5배나 확장되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결국 단순한 이야기야.’

레벨을 높이고 좋은 장비를 모으고 반복해서 기술을 수련한다.

그리하여 언젠가 아버지와 같은 강함을 손에 넣는다.

아니, 아버지보다도 강해진다.

‘나도 참 단순하구나.’

용사이신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랐으니 어쩔 수 없으려나.

“용사님.”

바로 그때 들려온 다정한 부름에 천호는 바로 반응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음.”

루시엘이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웃고 있었고, 그녀 옆에 세 천사들이 나란히 자리했다.

에이젤은 루시엘이 평소 잠잘 때 입던 황실 시녀복을 입고 있었는데, 몸에 맞지 않아 팔 다리가 잔뜩 남는 것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그리고 아우라엘과 라구엘은-

[엉큼한 Lv4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엉큼한 Lv4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엉큼한 Lv4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천호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 것도 모르는 루시엘이 다가와 천호의 손에 미트라를 쥐어주었다.

“용사님, 여기 미트라님이요.”

“음.”

목욕한 직후의 루시엘은 역시 언제 봐도 예뻤다. 천호는 애써 태연한 척 미트라를 받았고, 미트라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번뇌가 가득하군.]

[포커페이스 Lv3이 되었습니다.]

표정을 유지하기가 한결 쉬워졌다.

천호는 다시 아우라엘과 라구엘 쪽을 보았고, 두 사람은 천호에게 활짝 웃어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잘 씻었어요.”

“감사합니다, 용사님.”

귀여운 에이젤이나, 성격 좋아 보이는 아우라엘만이 아니었다.

꽤나 도도한 인상인 라구엘조차 천호를 대하는 태도가 참으로 사근사근했다. 목욕탕이 정말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마음에 드셨다니 저도 기쁘군요.”

포커페이스 Lv3에 힘입어 느긋하게 답한 천호는 모닥불을 끈 뒤 환기구를 덮고 미트라를 천막 중앙에 배치했다. 미트라의 열기로 천막 안의 공기를 데우기 위함이었다.

루시엘이 곳곳에 조명 마법을 더하며 물었다.

“용사님, 사스치엘님 일행은 아직이신가 봐요.”

무지엘과 라엘을 구하기 위해 북쪽으로 간 사스치엘 일행이었다.

거리가 상당했으니, 아마 한밤중에나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 아예 내일 아침에 돌아온다거나.

“음,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리겠죠. 사스치엘 일행이 먹을 건 남겨두었으니 일단 우리부터 먹죠.”

“네, 용사님.”

바로 답한 루시엘이 천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머지 세 사람도 제각각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앉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어, 따뜻하다?”

분명 그냥 모래 위인데 신기하게 바닥이 따뜻했다. 천호는 씩 웃더니 모닥불에 넣어둔 돌을 건들며 말했다.

“여러분들 자리 밑에 불에 달군 돌들을 묻어뒀어요. 앉을만 하죠?”

“네······.”

“와······.”

라구엘은 자기가 앉은 자리를 새삼 돌아보았고, 에이젤은 조금이지만 모래를 파보기까지 했다.

불에 달군 돌을 모래 안에 넣어 자리를 따뜻하게 한다.

아버지께 배운 사막의 생존기술 가운데 하나였다.

“봐요, 언니. 우리 용사님 세심하시죠?”

“그래, 그러니까 한 대만 더 맞자.”

아우라엘이 루시엘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번에는 제법 아플 것 같은 일격이었다.

“일단 한 그릇씩 드시죠.”

허허 웃은 천호는 일행에게 데저트 크로우 탕을 한 그릇씩 퍼주었다.

“아······.”

“아!”

“하흣!”

이 얼마만의 고깃국물이란 말인가.

더욱이 그냥 고깃국물이 아니었다.

허기진 걸 감안한다 해도, 그냥 맛이 너무 좋았다.

“아아아······.”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세 사람의 수저질이 절로 빨라졌다.

루시엘은 방긋방긋 웃으며 국물을 마셨고, 천호는 흐뭇한 사나이의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맛있느냐고 물으면 하트 사연타를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미트라.”

[왜, 왜 그러느냐. 이미 요리는 다 된 것 아닌가? 설마 이렇게 추운데 과일화채를 먹일 셈인가?]

미트라가 흠칫하며 묻자 천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럴 생각은 없는데요.”

[흠, 그럼 무엇인가.]

묘하게 안심한 목소리였다. 천호는 그런 미트라의- 요정검 엘렌디아의 손잡이 가운데 박힌 황금색 보석을 보며 물었다.

“분신술 하는 마법검 같은 건 없을까요?”

[분신술?]

“네, 미트라는 하나인데 할 일은 많으니··· 목욕물 데우는 와중에는 믹서기랑 건조기를 못 쓰잖아요. 분신술 되면 좋겠다 싶어서.”

미트라가 한 자루 더 있었으면 천사들 옷을 세탁 및 건조까지 할 수 있었을 텐데.

[모른다. 그런 마법검은 모른다. 들어본 적도 없다. 절대로 없을 것이다. 없단 말이다!]

“그럼 말고요.”

[흑흑.]

뭔가 농락당한 기분에 미트라가 작게 울었다. 천호는 마른 수건을 꺼내며 말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이따 자기 전에 잘 닦아드릴게요.”

하루에 세 번씩 손질해드린다고 약속했으니.

천호가 미트라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네 천사들은 열심히 데저트 크로우 탕을 먹었다.

그리고 한 그릇을 다 비웠을 때였다.

“루시엘.”

“네, 언니.”

루시엘이 방긋 웃으며 돌아보자 아우라엘은 루시엘의 허리를 붙잡았다.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역시 조금 찐 것 같았다.

“어, 언니?”

“한 대, 딱 한 대만 더 때릴게.”

아우라엘이 손바닥이 루시엘의 등짝을 강타했다.

&던전 브레이커 표지가 나왔습니다.

Chyan님이 일러스트를 맡아주셨습니다.

< 제3장 - 3층 #6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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