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장 - 3층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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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곳에 방문했을 때, 천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지도의 확보였다.
다행히 엘리엘의 등짐에는 제법 세밀하게 제작된 지도가 들어있었다.
정찰부대의 대장인 전투천사 마구엘이 직접 제작한 지도였다.
“애당초 4층 계단 쪽에 작긴 해도 사막이 있었다는 이야기네요.”
“그렇습니다. 아마 의식이 치러지고 있는 제단과 신상 역시 4층 계단 부근이 아닐까 합니다.”
엘리엘의 설명을 들으며 천호는 지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3층 계단이 서쪽 끝에 있다면, 4층 계단은 반대쪽인 동쪽 끝에 자리했다.
적들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곳은 북동쪽.
현재 일행은 남쪽에서 북서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우리 부대가 흩어진 장소는 지도 중앙부근이다. 이후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지······.”
엘리엘과 카지엘, 유지엘이 발견된 장소는 지도 남쪽 부근이었다.
지금 찾아가고 있는 무지엘과 라엘은 지도 북서쪽에 위치했는데, 퀘스트 유지 시간이 넉넉한 걸 보면 제법 멀쩡한 상태일 가능성이 높았다.
“락 드워프들은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중앙 부근에도 마을이 몇 개 있었지만··· 모두 사라졌다고 봐야겠지.”
사스치엘이 낮은 으르렁거림에 한탄을 섞어 말했다.
“지도에서 남서쪽 끝으로 가면 락 드워프들의 도시가 나온다. 무지엘과 라엘을 구조한 뒤에는 바로 남하해서 락 드워프들의 도시로 향하는 것이 순리에 맞겠지.”
“적들의 상황은 어떻죠?”
천호의 물음에 카지엘이 답했다.
“중앙 부근까지만 점령한 이후에는 딱히 남하하지 않고 있다. 이미 의식에 의해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마당이니 구태여 공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지. 공격에 대비해 방비를 굳히고 있다든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당장 세 천사들을 구조하는 와중에 조우한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무지엘과 라엘이 있는 곳까지 직선 경로로 간다면··· 중앙 일대를 지나야 하니 주의하는 게 좋을 거다. 지금처럼 대놓고 날아가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지.”
사스치엘의 말에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어제 만든 물건을 사용하도록 하죠. 사스치엘도 도와줄 거죠?”
“···그래, 약속했으니.”
약간 떨떠름한 투였지만 사스치엘이 동의했다.
천호는 씩 웃으며 등 뒤를 돌아보았다.
한때는 책장이었던 썰매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실 그다지 많은 공정을 가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가공한 썰매 다리 두 개와 그늘을 만들어줄 가죽 천장, 천장과 썰매 본체를 연결해줄 가느다란 기둥 네 개, 기둥 사이에 설치한 바람막이용 담요.
사스치엘과 썰매를 연결해줄 마구는 요정의 숲에서 구해온 목재와 와이어, 덕 테이프를 이용해 적당히 만들었다.
“엘리엘 먼저 들어가요.”
“으음··· 미안하다, 사스치엘.”
“괘념치 마라.”
천호만 탄다고 했으면 썰매끌기 따위 단호히 거절했을 사스치엘이었지만, 애당초 이 썰매는 거동이 불편한 엘리엘을 위해 준비한 물건이었다.
덤으로 루시엘과 천호도 타기는 했지만 말이다.
“미트라도 잘 부탁해요.”
[음.]
뚱한 목소리로 답했지만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때문에 천호는 즐거운 마음으로 요정검 엘렌디아를 뽑은 뒤 썰매 끝부분에 만들어둔 홈에 엘렌디아의 손잡이를 꽂았다.
“엘리엘.”
“알겠습니다.”
썰매에 몸을 눕힌 엘리엘이 주문을 읊조리자 엘렌디아- 즉, 미트라와 엘리엘 사이에 놓인 나무 받침대 위로 커다란 얼음덩이가 생성되었다.
본래 적을 향해 날리는 아이스 미사일을 응용한 결과였다.
“음, 좋아. 미트라?”
천호의 부름에 미트라는 응답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거절은 아니었다.
잠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미트라는 이내 바람을 일으켰다.
“오오, 오오오.”
“아······.”
엘리엘 옆에 쪼그려 앉아있던 천호와 루시엘이 감탄했다. 엘리엘 역시도 정면에서 밀려오는 차가운 바람에 미소를 머금었다.
원리는 간단했다.
큰 얼음을 만든다.
미트라가 일으킨 바람이 얼음 앞을 지난다.
결과적으로 차가운 바람이 분다.
바람막이 덕분에 바람이 다른 곳으로 새지도 않는다.
“시원하긴 하군.”
썰매를 끄느라 천호와 엘리엘 바로 앞에 자리한 사스치엘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기하구만.”
“재주가 좋아.”
카지엘과 유지엘이 허허 웃었고, 천호는 어제 미리 만들어둔 음료를 루시엘과 나눠마셨다.
‘좋구나.’
과일과 얼음, 물과 약간의 꿀.
이 모든 걸 미트라로 갈은 뒤 루시엘의 인벤토리에 저장해두었다.
시간의 흐름이 사실상 정지하는 인벤토리 안이었으니 자연 차가움도 그대로.
냉장고가 따로 없었다.
“너무 좋아요, 용사님.”
그늘 아래에서 루시엘이 말했고, 엘리엘은 편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천호는 루시엘에게 미소로 화답한 뒤 미트라를 향해 잔을 들어올렸다.
“고마워요, 미트라.”
미트라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바람을 멈추지는 않았다.
‘역시 성검.’
이러니저러니 해도 착하단 말이지.
“출발하죠.”
“···그래.”
사스치엘이 사막 위를 아주 낮게 날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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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엘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거리가 벌어진 라구엘과 에이젤이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라구엘과 에이젤은 아우라엘 자신처럼 전투천사가 아니었으니까.
체력의 격차가 컸다.
아니, 사실 뜨거운 사막 위를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걷는 것은 아우라엘 자신에게도 힘겨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사막 위에서는 쉬어가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치맛단을 잘라낸 천으로 머리와 목을 감싸긴 했지만, 겨우 그 정도로는 사막의 열기를 막을 수 없었다.
‘나는 것도 쉽지 않아.’
비행은 마력과 체력을 동시에 소모하는 일이었다.
더욱이 급격히 사막화가 진행된 지형이었다. 적이 어느 곳에 숨어있을지 알 수 없는 와중에 하늘을 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낮게 나는 건 의미가 없고.’
높게 날며 바람을 탈 때보다 체력과 마력의 소모가 더 컸으니까. 차라리 걷는 편이 나았다.
‘그나마 반쯤 온 게 다행인가······.’
구조요청이 담긴 빛의 창은 건재했다.
아우라엘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라구엘이 자꾸만 비틀거리는 에이젤에게 계속해서 회복마법을 걸어주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한계인 것 같았다.
라구엘도 회복 마법을 쓰느라 더 지친 것 같았고 말이다.
“에이젤.”
아우라엘의 나직한 부름에 머리를 숙이고 걷던 에이젤이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어린 천사의 얼굴은 사막의 열기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업히자.”
“괜찮···아요.”
에이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우라엘도 힘들 터인데 업힌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괜찮아. 그리고 그런 식으로 걸으면 언제 도착하겠니. 고집부리지 말고 업히렴.”
좋은 말로 달랠 셈이었는데, 말하다보니 조금 짜증을 내는 투가 되고 말았다.
아우라엘 자신도 지친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무어라 보조를 해주었을 라구엘도 지금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입을 열 힘도 없는 그녀였다.
“네······.”
결국 수긍한 에이젤이 비척비척 아우라엘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우라엘이 돌연 고개를 들었다.
라구엘 역시 자세를 낮추더니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했다.
“서쪽!”
눈을 번쩍 뜬 라구엘이 소리쳤다. 아우라엘은 급히 서쪽을 돌아보았고, 마른침을 삼켰다.
모래바람.
아니, 모래폭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서에서 동으로.
아우라엘 자신이 서있는 방향을 향해!
“서둘러!”
라구엘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우라엘이 급히 에이젤을 업었고, 북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째서 조금 더 일찍 알아차리지 못 했을까.
지쳤으니까.
피곤했으니까.
핑계가 되지 못 했다.
어떻게든 모래폭풍을 피하는 것만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속도가 느렸다.
라구엘은 제대로 날지 못 했고, 아우라엘 자신의 비행 역시 엉망진창이었다.
어젯밤 겨우 하루의 휴식으로 풀릴 피로가 아니었다.
사막에서 생각 이상으로 체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라구엘!”
아우라엘의 외침은 라구엘에게 닿지 못 했다.
소리친 그 순간 모래폭풍이 세 천사를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라구엘이 필사적으로 주문을 외웠다.
아우라엘은 있는 힘을 다해 바람에 저항 했다.
견뎌야 했다.
버텨내야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모래폭풍이 멎었다.
아니, 모래폭풍을 빠져나왔다. 사실 정확히 어떻게 된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아우라엘은 눈을 떴다.
빠져나온 직후에 눈을 뜬 것인지, 아니면 한참동안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것인지 몰랐다.
온몸이 삐걱이는 것 같은 고통 속에 몸을 일으킨 아우라엘은 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라구엘!”
마르고 갈라진 소리가 새어나왔다.
저만치 멀리 모래에 반쯤 파묻힌 라구엘이 보였다.
아우라엘은 몇 번이나 넘어져 가며 라구엘에게 다가섰다. 다행히 의식을 잃었을 뿐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
“라구엘······.”
아우라엘은 라구엘을 끌어안고 안도의 숨을 토했다.
그리고 직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일행은 라구엘 하나가 아니었다.
뒤늦게 어깨에 손을 올려보았지만 잡히는 것이 없었다. 등에 업혀 있던 에이젤은 어디에도 없었다.
“에이젤. 에이젤!”
벌떡 일어선 아우라엘이 갈라진 소리를 토했다. 주변을 미친 듯이 둘러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저 모래만이 가득한 세상이었다.
“안 돼······.”
에이젤.
아직 어린 견습천사. 지부의 막내.
아우라엘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루시엘에 이어 에이젤까지 잃고 나니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아아··· 아아아······.”
아우라엘은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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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서 불어온 모래폭풍을 피해 썰매를 멈추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천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용사님?”
“뭔가 있어요.”
멀리서부터 불어온 터라 이미 약해져 있던 모래폭풍이 저만치에서 흩어져 사라졌다.
그런데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모래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요즘 들어 매일같이 보기도 하고 덮기도 하는 하얗고 큰 날개.
“뭔가 있다니, 적인가?”
사스치엘이 급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아무래도 일행 가운데 무언가를 포착한 것은 천호뿐인 모양이었다.
“적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가봐야 알 것 같아요. 카지엘, 유지엘, 엘리엘을 부탁해요. 사스치엘! 저와 함께 가죠.”
“알겠다!”
쉬기 위해 이미 썰매 마구를 벗어둔 사스치엘이었다. 천호와 루시엘이 얼른 사스치엘의 등 위에 올라탔고, 미트라의 찬바람과 과일화채 덕분에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던 사스치엘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날아올랐다.
“저쪽!”
천호가 방향을 지목했다. 사스치엘은 빠르게 날았고, 어느 순간 루시엘과 함께 목소리를 토했다.
“천사!”
천사들 간의 감응이었다.
천호도 기감을 통해 느꼈다. 두 눈을 통해 볼 수 있었다.
모래에 반쯤 몸이 파묻힌 어린 천사의 뒷모습.
“세상에.”
“루시엘?”
“에이젤! 에이젤이 분명해요!”
루시엘이 사스치엘의 등에서 뛰어내려 몸을 날렸다. 전에 없이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아는 천사인가?”
사스치엘이 지면에 착지하며 묻자 루시엘은 대답할 겨를도 없다는 듯 서둘러 에이젤을 모래에서 끄집어냈다.
“에이젤······.”
루시엘이 의식을 잃은 에이젤을 꽉 끌어안았다. 가늘지만 분명한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안도의 숨을 토했다.
“지부의 막내에요. 오 맙소사··· 대체 어쩌다 이런 곳에······.”
루시엘은 급기야 울기 시작했다. 천호는 그런 루시엘을 달래며 에이젤을 살펴보았다.
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어린 천사는 볼이 홀쭉하게 야위었을 뿐만 아니라 몸 곳곳이 더러웠다.
모습만 봐도 요 며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일단 데려가죠.”
“네, 용사님.”
천호는 에이젤을 품에 안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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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억.”
< 제3장 - 3층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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