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33화 (33/211)

< 제3장 - 3층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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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엘, 정신이 좀 드나?”

“사스치엘······.”

전투천사 엘리엘이 신음섞인 목소리를 흘렸다.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과연 천사구나.]

미트라가 감탄한 목소리로 말하자 천호는 그저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전투천사 엘리엘.

순백의 천마天馬인 그녀는 사스치엘과 마찬가지로 순백을 기본으로 한 갑옷과 옷을 입고 있었다. 하얀 날개는 무척이나 커서 덩치 차이가 상당한 사스치엘에 필적할 정도였고, 천사의 고리 역시 크고 빛이 강했다.

‘안장이 있네.’

사스치엘과 달리 엘리엘의 허리에는 안장이 얹어져 있었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를 태우고 다녔다는 걸까?

“엘리엘, 마구엘 대장의 행방은 모르나?”

사스치엘의 물음에 엘리엘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단순히 거기에 그치지 않고 기운까지 흐트러져, 치료에 온 신경을 쏟고 있던 루시엘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 정도였다.

“마구엘 대장은 내 눈앞에서 전사했다.”

엘리엘은 최대한 담담히 말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목소리는 끊어졌고, 그녀의 눈에서는 의도치 않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가, 미안하다.”

“아니다, 사스치엘.”

[마구엘이란 천사를 태우고 다녔던 모양이군.]

천호는 미트라의 작은 중얼거림에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생각했다.

‘마구엘은 무슨 동물이었··· 아, 아니지.’

전사한 이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마음 속으로나마 마구엘에게 사죄한 천호는 루시엘에게 다가섰다.

“루시엘, 엘리엘의 상처는 어때요?”

“단순한 상처가 아니에요. 몇 개나 되는 질병이 엘리엘님의 육신을 좀 먹고 있어요.”

루시엘이 진지한 얼굴로 답하자 사스치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치료할 수 있겠나?”

“정화 마법으로 어떻게든 될 것 같아요.”

거기까지 말한 루시엘은 다시 엘리엘의 치료에 온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루시엘의 손끝에서 일어나는 분홍빛이 더욱 커졌고, 루시엘의 이마에선 굵직한 땀방울들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엘리엘, 소개가 늦었다. 이쪽은 9급 천사 루시엘과 용사 박천호다. 용사여, 이쪽은 7급 전투천사 엘리엘이다.”

“박천호입니다.”

“엘리엘입니다.”

치료에 집중하고 있는 루시엘을 제한 두 사람이 짧게나마 통성명을 했다.

사스치엘이 다시 말했다.

“엘리엘, 말하기도 힘겹겠지만 알려다오. 3층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나?”

사실상 부대가 공격당한 직후 2층으로 이동한 사스치엘이었다.

요며칠 3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사스치엘의 물음에 엘리엘은 눈을 감고 작은 신음을 토하더니, 그대로 목을 늘어트리며 말했다.

“3층의 상황은 무척이나 좋지 못하다. 역병신의 수하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의식을 성공시켰다. 그 결과 며칠 만에 사막화가 진행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침식 범위가 넓어져가고 있다.”

여기까지는 천호와 사스치엘도 아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을 달랐다.

“역병이 돌고 있다. 나는 천사이기에 어느 정도 저항이 가능했지만··· 이 땅의 원주민들인 락 드워프들의 피해가 심각하다.”

“어떤 종류의 역병인지 아나?”

“증상이 다양하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역병으로 죽은 자들은 좀비나 구울이 된다.”

사스치엘의 얼굴색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역병의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지금 이야기대로라면 이미 이 근방 일대는 역병신의 영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무언가··· 내가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불길한 느낌이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다.”

단순히 기분 문제가 아니었다.

천마 엘리엘에게는 미약하나마 예지 능력이 있었다.

“좌시할 수 없군.”

무언가 해야 했다.

제단과 신상을 파괴해 역병신의 힘을 거두어야 했다.

사스치엘은 조급함을 느꼈다.

엘리엘 역시 부상 때문에 힘겨운 와중에도 다급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에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요, 상황은 알겠어요. 그럼 일단 나머지 동료들을 구조하도록 하죠.”

천호는 침착하게 말했다.

엘리엘의 말마따나 상황은 심각했지만, 흥분해봐야 변하는 것은 없었다.

이런 때일수록 침착해야만 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라.’

아버지의 가르침.

천호의 말이 이어졌다.

“역병신과 맞서 싸우든, 아니면 이 지역을 탈출하든 일단 최우선 사항은 남은 동료들의 구출이에요. 그들을 구출하고 나서 대책을 논의해도 늦지 않아요.”

정론이었다.

천호가 계속해서 말했다.

“사스치엘, 아까 락 드워프라고 말했죠? 포레스트 엘프들처럼 마을을 이루고 있나요? 도시라든가.”

“도시다. 수천이 넘으니··· 포레스트 엘프들과는 규모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좋아요, 동료들을 모두 구출한 뒤에는 락 드워프들을 찾아가죠. 함께 이 지역을 탈출하든, 역병신에 맞서 싸우든 해야 할 테니.”

천호 자신과 천사들만으로는 무리였다. 현지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엘리엘, 나중 일은 말 그대로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쉬도록 해요. 잠깐 눈을 붙여도 좋고요.”

“알겠습니다.”

엘리엘은 아픈 가운데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천호를 바라보더니 이내 작게 웃으며 그리 말했다. 정말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사스치엘, 치료가 끝나면 바로 다음 천사를 구하러 갈 거예요. 혹시 엘리엘을 등에 태울 수 있나요?”

“가능하다. 다만 그러면 너와 루시엘을 둘 다 태우긴 힘들 거다.”

“전 제가 날아갈게요.”

치료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는지, 루시엘이 날개를 살짝 파닥이며 말했다.

“좋아요, 대강 정해졌네요. 그럼 하나하나 해결해보죠.”

마지막에 가서는 씩 웃었고, 루시엘과 사스치엘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는 용사구나.]

레온은 용사가 별과 같은 존재라 하였다.

나아갈 길을 인도하는 자.

어둔 밤 속에서도 빛나는 존재.

천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한 미트라는 속으로나마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사스치엘.”

“무슨 일인가.”

“그··· 갑자기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말을 좀 흐린 천호는 약간의 뜸을 들인 뒤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어보았다.

“동료들도 다 동물형태··· 인가요?”

“우리 부대는 대부분 그러했다. 정찰 부대이다 보니 기동성을 중시했기 때문이지.”

“그렇군요.”

천호는 고개를 끄덕인 뒤 마음속으로 긴 숨을 토했다.

남은 천사들도 다 동물들이니 기대를 버리자.

기대를 하니까 실망을 하는 거라고 아버지께서도 그러시지 않았던가.

애당초 기대를 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으니.

이너피스.

언제나 마음의 평화가 중요하도다.

‘그런데 엘리엘은 뭘 먹지? 말여물 주면 화내려나.’

사스치엘도 생고기 주니까 싫어했었지.

엘리엘도 구운 고기를 먹으려나.

그런데 말은 초식동물 아니었나.

잡상을 이어가던 천호는 문득 루시엘을 돌아보았다.

새삼 마음의 평화를 느끼며 생각했다.

‘그런데 다 동물들이라고 하니 또 궁금하네.’

이미 수사자와 암말이 나온 상황이었다.

정말 무슨 동물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그래도 전투천사니까··· 이번에야말로 암사자나 호랑이나 뭐 그런 게 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약 두 시간 뒤.

천호의 의문은 해결되었다.

“카지엘!”

“사스치엘! 엘리엘도!”

바위투성이인 돌산 깊은 곳에서 사스치엘이 7급 전투천사 카지엘과 포옹했다.

과장조금 보태서 집채만한 크기인 수사자와 말이다.

엘리엘은 여전히 힘겨운지 몸을 늘어트린 채 미소만 지었고, 루시엘은 활짝 웃었다.

“음.”

[음.]

천호와 미트라의 마음이 통했다.

용사와 성검은 한마음 한뜻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고릴라.

새하얀 성갑을 입고, 등에 하얀 날개가 달린, 그리고 머리 위에 천사의 고리까지 자리한 커다란 고릴라.

‘기동성 위주라며!’

고릴라가 빠르냐?! 빠르냐고!

[그래도 강해보이기는 하는군.]

미트라의 말대로였다. 엄청 강해보이기는 했다. 덩치도 컸고, 두 팔의 근육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말해 사스치엘보다 훨씬 셀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 뒤.

“유지엘!”

“사스치엘님! 카지엘님! 엘리엘님도!”

고릴라와 사자와 얼싸안고 좋아하는 백곰을 보며 천호는 생각했다.

‘음, 뭐 곰 정도야.’

[곰이 아니라 다른 게 나왔으면 더 이상했을 것 같다.]

‘남은 건 둘인데 설마 코끼리 같은 게 나오진 않겠죠?’

[음··· 나오면 강할 것 같긴 하군.]

날개 달린 코끼리라니. 잠시 상상해보았지만 이래저래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천호가 만난 전투천사는 모두 넷이었다.

그리고 그 넷은 모두 동물형태를 하고 있었다.

“루시엘.”

“네, 용사님.”

“그··· 혹시 전투천사들은 전부 동물형인가요?”

“아뇨, 저처럼 인간형도 많아요. 당장 아우라엘 언니도 인간형인걸요.”

“언니···요?”

“아, 친언니는 아니고··· 지부에서 절 친동생처럼 아껴주시던 선배님이세요. 사스치엘님처럼 7급 전투천사고요.”

거기까지 말한 루시엘의 표정이 순간 흐려졌지만, 잠깐뿐이었다. 이내 다시 표정을 정돈한 그녀는 천호를 보며 베시시 웃었다.

하지만 눈치가 아주 없는 천호가 아니었다.

‘같은 지부에 있었다면······.’

대미궁으로 긴급탈출한 루시엘과 마찬가지로, 아우라엘 역시 지금쯤 대미궁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무사할 거예요.”

중간 단계를 건너뛴 말이었지만 루시엘은 이해했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답했다.

“네, 언니라면 무사할 거예요. 정말 강하고 멋진 언니인걸요. 예쁘기도 하고요.”

루시엘이 약간은 동경한다는 얼굴이 되어 말했다. 자연 천호 역시 아우라엘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

아니, 만나야 했다. 다름 아닌 루시엘의 언니였으니까.

[번뇌가 차오르는군······.]

미트라가 낮게 말한 그때였다.

“유지엘, 소개하겠다. 9급 천사 루시엘과 용사 박천호다.”

사스치엘이 곰 천사- 유지엘에게 천호와 루시엘을 소개했고, 천호는 날개달린 곰과 포옹한다는 진귀한 경험을 획득했다.

“아무튼 오늘은 일단 쉬도록 하죠.”

천사가 아직 둘이나 남았지만, 퀘스트 시간에 제법 여유가 있었다.

엘리엘을 비롯한 천사들의 말에 따르면 밤에는 역병신의 힘이 더 강해진다 하였으니, 어설프게 설치고 다니는 것보다는 얌전히 틀어박혀 있는 쪽이 나았다.

“그리하겠다.”

어느새 천호의 말을 따르기 시작한 사스치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천사들도 이견이 없었다.

때문에 천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작업을 시작하죠.”

“네, 용사님.”

루시엘이 활짝 웃으며 답했고, 이미 몇 번 천호의 작업을 목격한 사스치엘 역시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미트라를 제외한 모두가 행복한 작업이었다.

&

다음날 새벽.

포레스트 엘프들의 왕도에서 눈을 뜬 아우라엘은 라구엘과 에이젤을 깨운 뒤 샘물로 세수를 하고 몸을 씻었다.

샘물이 무척이나 차가웠지만, 그래도 몸을 씻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행복한 그녀들이었다.

“3층에 가자.”

어제는 너무 지치고 힘들어 눈치 채지 못 했지만, 어제 먹은 음식들은 만든 지 그리 오래된 물건들이 아니었다.

구조요청이 사라진 게 며칠 전이라 왕도에서의 승리도 며칠 전이라 지레짐작했는데, 아무래도 오판한 것 같았다.

짧으면 한나절, 길어도 이틀 남짓.

구조요청을 보낸 천사를 구하고 왕도에서의 전투를 이끈 영웅 혹은 천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게 분명했다.

“서두르면 합류할 수 있을 거야.”

아우라엘의 말에 에이젤이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구엘 역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3층 계단으로 향하는 길은 순조로웠다.

이 지역 일대가 해방된 덕분에 길을 막는 마물들도 없었고, 주변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니 얼마든지 날아서 이동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해서 배도 불렀고.’

루시엘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제 오늘 너무 행복한 아우라엘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마침내 3층에 도달한 아우라엘 일행의 눈앞에 빛의 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구조요청]

[발신인 : 9급 전투천사 무지엘]

[구조요청]

[발신인 : 9급 전투천사 라엘]

두 개의 신호가 가리키는 방향은 거의 같았다.

거리가 제법 되었지만, 그렇다고 방치할 수 없었다.

“가자.”

“그래.”

“네, 선배님.”

아우라엘을 선두로 하여 라구엘과 에이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같은 시각.

천호 일행 역시 무지엘과 라엘이 있는 곳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

< 제3장 - 3층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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