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32화 (32/211)

< 제3장 - 3층 >

제3장 - 3층

미궁 세계를 침식하고 있는 대미궁.

대미궁과 함께 나타나 다섯 여신과 대립하고 있는 마신.

대미궁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마신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들은 왜 미궁 세계를 침략한 것일까.

&

아우라엘, 라구엘, 에이젤.

세 천사들이 오랜만에 느끼는 포만감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 때, 루시엘은 천호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음!”

천호와 루시엘을 태운 사스치엘이 2층에서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통과했다.

나선형 계단을 빠르게 날아서 통과하니 마치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꺅.”

롤러코스터에 탄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루시엘은 묘하게 즐거움이 묻어있는 비명을 질렀고, 그때마다 천호의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아아, 아아아.’

천호는 만족했다. 이 시간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엉큼한 Lv4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하아······.]

새삼 떠오른 빛의 창에 미트라는 만감이 뒤섞인 한숨을 토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거의 다 왔다!”

사스치엘의 외침에 천호는 슬픔을 삼켰고, 루시엘은 꽉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미트라 역시 천호의 눈을 통해 전방을 보았다.

어둠이 걷히고 빛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빛은 2층에서 보았던 것처럼 밝고 선명한 빛이 아니었다.

회색.

낮보다는 밤에 가까운 하늘의 빛깔.

해방되기 이전의 1층보다도 더 심했다.

땅은 잿빛을 넘어 황무지였고, 먼 곳에서부터 뜨거운 바람이 밀려왔다.

“상황이 더 안 좋아졌군.”

지상에 안착한 사스치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문자 그대로 황무지인 대지에는 꽃은커녕 풀 한 포기조차 자라있지 않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먼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뜨거운 바람이었다.

천호는 사스치엘의 등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잿빛이었지만 뜨거운 햇살이 느껴졌다. 구름 때문이 아니라, 하늘 자체가 회색이었기 때문이다.

“용사님.”

루시엘은 멀리 보았다. 천호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황무지에 그치지 않았다. 저 너머에 자리한 것은 사막이 분명했다.

사막화.

그것도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스치엘은 3층이 황무지라 했었지.]

사스치엘이 3층을 떠나 2층에서 머문 시간은 고작 며칠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며칠 사이에 주변 일대의 지형이 변한 것이었다.

원인은 하나뿐이었다.

[크로니클 퀘스트 : 역병신의 대적자 #3]

[3층에 위치한 역병신의 제단과 신상을 파괴해야 합니다.]

[역병신의 의식에 의해 사막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막화 현상은 그저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더 큰 재앙이 닥치기 전에 역병신의 음모를 저지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제단과 신상을 갖추기도 전에 파괴되었던 1층.

의식을 제대로 진행하려던 차에 제단과 신상이 파괴된 2층.

하지만 3층은 달랐다.

이미 제단과 신상이 완성되었고, 의식도 진행이 되고 있는 상태였다.

[쉽지 않겠구나.]

애당초 사스치엘이 속해있던 천사부대를 궤멸시킨 것은 3층의 무리들이었다.

그들의 방어를 뚫고 제단과 신상을 파괴해야 했으니, 2층에서의 싸움보다 훨씬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용사님.”

루시엘이 천호를 불렀다. 그 순간 천호의 눈앞에도 빛의 창 여럿이 연속해서 떠올랐다.

[구조요청]

[발신인 : 7급 전투천사 엘리엘]

[구조요청]

[발신인 : 7급 전투천사 무지엘]

[구조요청]

[발신인 : 9급 전투천사 유지엘]

[구조요청]

[발신인 : 9급 전투천사 라엘]

[구조요청]

[발신인 : 7급 전투천사 카지엘]

무려 다섯 개나 되는 구조요청이었다.

사스치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동료들이다! 어서 구하러 가야 한다!”

[히든 퀘스트 : 구조요청]

[전투천사들의 구조요청들이 도착했습니다.]

[전투천사들을 구조해 동료로 삼으십시오.]

[3층의 적들과 상대하기 위해서는 동료가 필요합니다.]

“음.”

“서두르자! 가장 가까이에 있는 구조요청부터 찾아가는 거다!”

사스치엘이 바로 날개를 폈다. 하지만 천호는 그런 사스치엘의 갈기를 잡아당기며 그를 만류했다.

“잠시만요.”

“무슨 짓이냐!”

“기다려요. 이런 때일수록 침착해야 해요. 사스치엘, 부대가 당한 건 벌써 며칠 전이죠?”

“그렇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황들이 다를 거예요. 남아있는 시간도 다를 거고요.”

천호는 침착하게 말했다.

낮고 평온한 그 목소리에 사스치엘은 덩달아 침착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남아있는 시간이 다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

“구조의 우선순위를 단순히 거리로만 할 수는 없어요. 누군가는 그럭저럭 버틸만한 상태일지 모르지만, 다른 누군가는 말 그대로 죽어가고 있을 수도 있으니.”

탑의 지박령들을 구했을 때처럼 히든 퀘스트 안에는 각각의 창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창들에는 저마다 다른 퀘스트 유지 시간이 적혀 있었다.

“퀘스트 유지 시간이 짧을수록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거겠죠. 그러니 남은 유지 시간과 이동에 필요한 동선을 고려해서 구조 순서를 정해야 해요.”

정론이었다.

사스치엘은 크게 펼쳤던 날개를 다시 접었고, 루시엘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 용사님이라는 말이 그녀의 주변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루시엘, 구조요청이 오고 있는 곳의 방향과 거리를 대략적으로나마 알려줘요.”

“네, 용사님.”

천호는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렸다. 서로 다른 다섯 개의 점을 표시했고, 남은 시간과 거리를 고려해 최적의 동선을 만들어냈다.

“좋아요, 이제 출발하죠.”

동선을 정했으니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첫 구조 대상은 7급 전투천사 엘리엘.

급히 날아오르는 사스치엘의 등 위에서 미트라가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설마 여자천사라 1번인 것은 아니겠지?]

‘아니거든요?’

그냥 남은 퀘스트 시간과 거리를 조합한 결과였다.

정말로 진짜.

하지만 그와 별개로 살짝 기대가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설마 암사자 천사가 있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잠시 사스치엘의 머리를 내려다본 천호는 다시 시선을 멀리 하였다.

약간의 기대와 불안 속에서 엘리엘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

대미궁 지하 4층과 3층을 잇는 계단.

검은 후드와 망토로 전신을 두른 자가 계단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후드를 깊이 눌러 썼지만 얼굴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검은 털이 난 쥐의 머리.

렛맨답게 허리는 굽었고, 엉덩이 쪽에는 무척이나 긴 꼬리가 자라 있었다.

그는 3층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잿빛 하늘에 역병신의 은혜가 충만했다. 대기 중에는 역병의 기운이 어려 있었고, 마치 세계를 침식하는 대미궁처럼 주변 일대를 집어삼키고 있는 사막에서는 저층이나 중층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심층의 기운이 희미하게나마 어려 있었다.

“도루마.”

나직한 부름에 도루마라 불린 렛맨- 정확히는 역병신의 사도들 가운데서도 문장을 받은 이만이 얻을 수 있는 ‘로드’의 칭호를 가진 자가 고개를 돌렸다.

3층의 제단 건설과 의식 진행을 명받은 역병신의 사도 루카브론드가 보였다.

회색 넝마를 뒤집어쓴 그는 스카브론드나 도루마와는 궤를 달리하는 자였다.

마법사.

그중에서도 저주와 질병에 특화된 역병법사.

앙상한 체구를 가진 그의 등 뒤에는 평범한 렛 오거들보다 덩치가 훨씬 큰, 개량된 렛 오거들이 서있었다.

약물과 저주로 강화시킨 자들이었다.

비록 도루마가 로드의 지위를 가진 자라 하나, 로드는 명예직에 가까웠다.

더욱이 루카브론드는 3층을 담당하는 자였다. 미묘한 서열관계였지만, 일단은 서로 평대를 해도 이상하지 않은 관계였다.

“과연, 그것들이 다섯 자루의 마법검들인가.”

루카브론드의 시선이 도루마의 전신을 핥듯이 훑었다.

양 허리에 찬 두 자루의 장검과 두 자루의 단검.

등 뒤에 비껴 찬 대검 한 자루.

루카브론드는 전사가 아닌 마법사였다. 때문에 검에는 본래 흥미가 없었지만, 마법검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도루마가 돌연 작게 웃었다. 오른손을 작게 까딱였고,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면을 뚫고 개미귀신처럼 생긴 사람크기의 마물이 솟구쳐 올랐다. 땅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지나가는 이의 진동을 느끼면 기습해 잡아먹는 3층의 마물이었다.

놈이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기습을 당한 이를 더욱 당황하게끔 하는 괴성이었다.

하지만 도루마는 놈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루카브론드를 보았고, 비교적 평온하지만, 눈동자에 당황이 뒤섞인 루카브론드의 얼굴에 다시 작은 미소를 지었다.

만약 지금의 습격이 마법검의 위력을 보고 싶었던 놈의 수작이라면 용서할 마음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놈에게 다행히도, 정말 우연히 일어난 일인 모양이었다.

도루마가 손을 놀렸다.

마법사인 루카브론드로서는 눈으로 쫓기조차 힘든 빠른 움직임이었다.

다섯 자루의 마법검 가운데 두 번째.

혹한의 단검 블리자드 대거.

개미귀신의 몸에 사선이 그어졌다.

하지만 상처가 벌어지며 진액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쩌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상처가 얼어붙었다.

극한이 놈의 체온을 빼앗았고, 체액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쿵!

절명한 개미귀신이 바닥에 쓰러졌다.

루카브론드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보였고, 도루마는 블리자드 대거를 회수했다.

“안내해라.”

3층의 제단이 있는 곳으로.

역병신께서 지목하신 용사와 천사는 그곳으로 올 터이니.

루카브론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돌아섰고, 도루마가 그 뒤를 따랐다.

다섯 자루의 마법검들이 걸음을 따라 흔들렸다.

&

‘아, 어디서 얼음검 하나 안 나오려나.’

그럼 미트라한테 먹여서 이것저것 유용하게 사용할 텐데.

[그대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무언가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약간이지만 천호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미트라였다. 더욱이 성검. 촉이 보통 좋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의 실험 끝에 속내를 완전히 읽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파악한 천호는 세상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미트라, 음흉하다니요. 어떻게 하면 일행들이 좀 더 쾌적하게 여행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으음.]

“용사님? 무슨 일이세요?”

“아뇨, 별 일 아닙니다. 그저 제가 부족한 탓이지요.”

“용사님······?”

미간을 좁힌 루시엘은 반사적으로 미트라를 돌아보았고, 저도 모르게 움찔한 미트라는 약간의 주저 끝에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미안하다. 내가 오해를 한 모양이다. 용서해다오.]

[그대는 잘 해주고 있다. 약속한 대로 손질도 잘 해주었고.]

비록 직전에 과일을 갈아야 하긴 했지만.

“괜찮습니다. 오해할 수도 있죠. 앞으로도 많은 도움 부탁드려요.”

[그래, 앞으로도 힘껏 그대를 돕도록 하겠다.]

[으음.]

뭔가 훈훈하게 마무리가 되긴 했는데, 어쩐지 모르게 당한 느낌이 드는 미트라였다.

레온이랑 같이 여행할 때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거의 다 왔다. 신호가 느껴진다.”

세 사람의 대화에서 유리되어 있던 사스치엘이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루시엘도 퍼뜩 정신을 차린 얼굴로 정면을 보더니 빛의 창을 열며 말했다.

“바로 근처에요! 이 근처에 숨어 계신 것 같아요!”

너무나 급격히 사막화가 진행된 터라 발아래 펼쳐진 지형은 그야말로 뒤죽박죽이었다. 사막 위에 바짝 마르긴 했어도 숲이라 부를 만한 것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사스치엘은 급히 숲에 내려섰다. 마치 땅을 훑듯 낮고 넓게 퍼지는 목소리를 토했다.

“엘리엘! 구하러 왔다! 사스치엘이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사스치엘과 루시엘은 몸을 움찔하고 떨었다. 천사들만이 느낄 수 있는 무언의 신호를 접한 탓이었다.

천호는 기감을 널리 퍼트렸다. 과연 인기척이 하나 느껴졌다.

7급 전투천사 엘리엘.

사스치엘이 앞장섰다.

반쯤 달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급한 걸음을 따라가니 상처 입은 몸을 늘어트린 채 쓰러져 있는 천사가 보였다.

“아직 살아 계세요!”

“엘리엘! 금방 치료해주겠다!”

루시엘과 사스치엘이 엘리엘에게 달려갔다.

얼결에 홀로 남겨진 천호는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잘 되었구나.]

[정말로 잘 되었어.]

미트라의 목소리에 너무나 즐거운 웃음이 뒤섞인 것은 착각일까 아님 진짜일까.

천호는 우수에 찬 표정으로 엘리엘을 바라보았다.

날개달린 순백의 말.

아름다운 천마가 고개를 들어 천호를 보았다.

&

< 제3장 - 3층 > 끝

ⓒ 취룡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