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31화 (31/211)

< 제2장 - 2층 #12 >

&

[그대는 너무하다. 아무튼 너무하다.]

늦은 밤.

엘리와 레나가 가져온 커다란 나무통 안에서 각종 과일들과 고기들을 갈갈갈 갈아댄 미트라가 원망 섞인- 아니, 그냥 대놓고 원망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천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갑자기 떠오른 발상 때문에 미트라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 한 탓이었다.

“핫! 미트라, 엄청나게 좋은 생각이 났어요.”

어차피 포커페이스가 통하지 않는 미트라였다.

때문에 미트라에게는 그냥 속내를 드러내기로 마음 먹은 천호였다.

[좋은 생각이라니?]

“진짜 좋은 생각이에요.”

천호가 흥분해서 말하자 방금까지 원망어린 목소리를 흘리던 미트라도 관심을 보였다.

어찌되었든 용사, 그것도 미궁 세계가 인정한 진짜 용사가 아니었던가.

천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히트 대거의 힘도 쓸 수 있으니 열을 낼 수 있다는 거잖아요? 열과 바람을 같이 사용하면 문자 그대로 열풍! 건조기로 쓸 수 있다는 사실!”

[건조기가 무엇인가.]

“빨래 말리는 기구요.”

천호는 즉답했고 미트라는 침묵했다.

아니, 사람이라면 아마 눈을 깜박이며 당황했을 터였다.

그리고 당황에서 벗어난 그 순간, 미트라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대여! 나를 무어라 생각하는 것인가!]

[나는 성검이다! 목욕탕 데우는 기구도, 조리기구도, 빨래 말리는 기구도 아니란 말이다! 으앙!]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루시엘도 아니고 미트라가 으앙하고 울 줄이야.

더욱이 서러움이 가득한 목소리가 측은하기 그지 없었다.

이쯤되니 천호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 울지 마요, 미트라.”

[운 적 없다. 없단 말이다.]

미트라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물기가 어린 목소리였다.

천호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요정검 엘렌디아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미트라. 미트라는 성검이에요.”

[그럼 이제 음식 만들 때 나를 사용하지 않을 건가?]

“아뇨,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미트라가 다시 바로 우는 소리를 내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천호가 조금 더 빨랐다.

“대신 미트라, 제가 아버지의 조언 하나를 알려드릴게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니 미트라에게도 도움이 될 거예요. 제가 이날 이때까지 잘 해나갈 수 있었던 것도 다 아버지의 조언 덕분인걸요.”

[······무엇인가.]

천호의 아버지라면 미트라도 흥미가 좀 있었다.

대체 어떤 작자이길래 자식을 이렇게 키웠을까.

잘못 키웠다는 건 아니었지만, 잘 키운 부분도 많았지만, 아무튼.

미트라가 관심을 보이자 천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먼 곳을 바라보며, 최대한 아버지의 표정을 흉내내며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어요. ‘포기하면 편해.’ 포기해요, 미트라. 이게 다 운명이란 거예요.”

[야 이······!]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미트라는 결국 다시 흑흑거리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 금방이라도 칼날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미트라.”

[그대는 정말로 너무하다. 레온은, 레온은 날 훨씬 더 소중히 다뤄주었단 말이다. 매일 손질도 해주고······.]

“손질이라면 저도 매일 해드릴게요.”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해줄 건가?]

“두 번이 뭐에요, 세 번이라도 해드릴게요.”

무기 손질은 매일 해야 한다고 아버지께 배웠으니까.

더욱이 미트라는 훌륭한 성검인 동시에 유용한 조리도구였다.

‘음식 만들 때마다 씻어야 하니.’

밥은 하루에 세 번 먹으니까.

하지만 이런 천호의 속내를 모르는 미트라는 조금이지만 기운을 차린 듯 한결 나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한 거다.]

“약속했습니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네.

천호는 작게 웃으며 다시 미트라의 칼날을 마른 수건으로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기분 탓인지, 금방이라도 갸르르-거리는 고양이 같은 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그런데 미트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무엇이 궁금한가.]

“레온··· 그러니까 초대용사가 미트라에게 마법검을 먹여가며 힘을 키웠다면··· 지금도 그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아요?”

히트 대거를 먹어치웠을 때 분명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종류는 다르지만 초대용사 역시 요정검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했었고.

천호의 물음에 미트라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사실 거기에는 한 가지 사연이 있다.]

“들을 준비 되었습니다.”

천호의 즉답에 미트라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국 수호검은 사실 성검이 아니다. 정확히는··· 여신께서 벼리신 신검이 아니다. 진짜 신검은 마왕과의 싸움에서 파괴되었으니까. 지금의 제국 수호검은 마왕과의 결전 이후 레온이 새로 만든 검이다. 그마저도 이제는 부러졌지만······.]

“어, 그럼 진짜 신검이 부러지면서 미트라도 그간 축적해온 힘을 잃은 건가요?”

[비슷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이르겠지.]

“미트라?”

[미안하다 그대여. 아직은 이야기할 수 없다. 하지만 때가 온다면··· 그대가 진정한 용사로서 크게 성장한다면··· 내게 답을 들을 날이 올 것이다.]

“일단 당장은 알려줄 수 없다는 거군요.”

[그러하다. 미안하구나.]

“알겠습니다. 미트라에게도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동료가 이럴 때는 괜히 캐묻는 게 아니라고 아버지께서도 그러시지 않았던가.

[고맙다.]

“저야말로 늘 고맙죠.”

이제까지도 많은 도움을 받았고, 앞으로도 받을 테니까.

[뭔가 불길한 기분이 드는군.]

미트라가 작게 말한 그때였다.

“용사님.”

“읏.”

멀리서 들려온 루시엘의 부름에 천호가 움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잠잘 준비를 다한 그녀가 침대 위에서 날개를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엘 옆에서 자는 것은 정말 좋았지만, 동시에 고통스럽기도 한 천호였다.

[후후후. 어서 가지 그러나, 루시엘이 기다리지 않는가.]

“가야죠.”

전장에 나가는 장수의 얼굴이 된 천호가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런 천호를 보며 미트라는 다시 작게 웃었다.

그렇게나 엉큼하면서도, 막상 잠잘 때는 살짝 건드리지도 못 하는 것이 귀여우면서도 재밌었기 때문이다.

[용사답구나.]

“네?”

[아무 것도 아니다.]

“용사님!”

루시엘이 다시 천호를 불렀다.

천호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앞으로 나아갔고, 미트라는 다시 쿡쿡 웃었다.

&

다음날 아침.

번뇌력과 천마신공의 수련을 마친 천호는 조금이지만 더 강해져 있었다.

그야말로 평소와 다름없는 어제와 오늘이었다.

그런데 루시엘의 상태가 조금 달랐다.

“루시엘, 잠 못 잤어요? 눈이 퀭한데.”

“그냥 조금.”

어쩐지 모르게 잠을 설친 루시엘이었다.

[호오.]

미트라는 무언가 짐작이 간다는 듯 작게 말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저 쿡쿡 웃을 뿐 무어라 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아침 시간.

과일을 가느라 믹서기가 된 미트라 외에는 모두가 행복한 그 시간이 지나고 나자 아쉬운 이별의 때가 다가왔다.

“이제 다시 성지로 돌아갈 거야.”

포레스트 드래곤의 둥지가 있는 곳.

커다란 녹색 알을 품에 안은 엘리가 말했고, 옆에 서 있던 레나가 새삼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언젠가- 아니, 반드시 다시 만나 은혜를 갚을게요.”

“맞아, 꼭 다시 만나.”

레나에 이어 엘리도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천호와의 이별이 꽤나 아쉬운 눈치였다.

물론 천호도 그랬다.

미인 엘프 자매, 그것도 천호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자매와의 이별인데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번에도 천호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충실했다.

‘아들아, 남자는 쿨해야 하는 법이다. 질척질척한 남자는 여자들이 싫어한다.’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천호는 쿨하게 말했고, 엘리는 킥킥 웃더니 어제 그러했던 것처럼 다시 천호의 뺨에 키스했다. 레나도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반대쪽 뺨에 키스를 해주었다.

“그,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용사님께 무운이 함께하시기를.”

“히히히, 나중에 또 봐! 어젠 정말 멋있었어!”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레나와, 기분 좋은 미소를 그린 엘리가 뒤로 물러섰다.

다음은 포레스트 엘프 여왕 아리안의 차례였다.

“포레스트 엘프들을 구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리안 옆에 선 왕녀도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포레스트 엘프들도 왕도를 떠나는 건가요?”

“네, 포레스트 드래곤이 전장에서 전생의식을 치룬 것은··· 결국 저희 포레스트 엘프들에게 닥친 환란 때문이었으니까요. 용사님에게서 비롯된 기운들을 보다 강화하고, 전장에서 묻은 삿된 기운들을 씻어내기 위해 포레스트 엘프 모두가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엉큼한 용이 되겠군······.]

미트라가 한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다행히 들을 수 있는 것은 천호뿐이었다.

“음. 알겠습니다. 포레스트 엘프들의 앞날에 항상 축복이 가득하기를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용사님께도 요정신의 가호가 함께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공손히 예를 표한 여왕과 왕녀가 물러나자 포레스트 엘프들도 저마다 손을 흔들거나 고개를 숙이며 천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마지막은 트리언트 일족이었다.

“나는 높고 큰 가지다.”

“저는 박천호입니다.”

천호의 대답에 높고 큰 가지가 껄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가지를 흔들어 인사한 뒤 포레스트 엘프들을 태운 트리언트들과 함께 왕도를 떠났다.

“안녕! 나중에 꼭 다시 봐!”

엘리의 활기찬 인사에 마주 손을 흔들어주고 다시 몇 분.

모두가 떠나자 왕도에 남은 것은 천호와 루시엘과 미트라, 사스치엘 뿐이었다.

“우리도 슬슬 출발해야겠군.”

사스치엘이 북동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애당초 3층에서 올라온 사스치엘은 3층으로 이어진 계단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우리 부대의 생존자가 있다면··· 거의 대부분 3층에 머물고 있을 거다. 그들을 찾아야 한다.”

사스치엘의 동료인 7급 전투천사들.

저도 모르게 수사자인 사스치엘을 돌아본 천호는 아주 약간 의욕이 감퇴되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내자.’

남자도 여자도 사자도 모두 귀한 목숨이었으니까.

“용사님, 인벤토리 점검도 끝났어요.”

성지로 떠난 포레스트 엘프들은 왕도에 남아있던 식량들 가운데 4분의 3은 자신들이 챙겼고, 나머지 4분의 1은 천호 일행에게 주었다.

덕분에 루시엘의 인벤토리 안에는 각종 과일과 새로 얻은 소금, 꿀, 마늘, 파 등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역시 루시엘은 유능해.’

사스치엘은 정화 마법은 물론이고 인벤토리도 쓸 줄 몰랐다.

전투천사라 전투관련 마법을 주로 익혔다나.

그리고 인벤토리는 재능을 타고나야 하는 마법이라 익히고 있는 천사가 별로 없다는 것이 사스치엘의 첨언이었다.

“그럼 출발하죠.”

3층으로.

천호와 루시엘은 사스치엘의 등 위에 올랐고, 사스치엘은 날개를 펼쳤다.

맑게 갠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

그리고 약 한 시간 뒤.

한참이나 숲을 헤매다 겨우 포레스트 엘프들의 왕도에 도달한 아우라엘, 라구엘, 에이젤은 눈을 부릅떴다.

“큰 싸움이 있었구나.”

왕도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여기저기 파괴된 곳이 많았는데, 특히 왕도 중앙의 파손이 심했다.

“아무래도 구조요청은 포레스트 엘프들의 위기와 연관이 있었던 모양인가······.”

라구엘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왕도 안에 살아있는 자의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레스트 엘프들은 어찌된 것일까.

설마 전멸한 것일까?

에이젤이 겁먹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자 라구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저 하늘을 보렴. 맑지 않니? 이 근방 일대가 해방되었다는 증거란다.”

“격전 끝에 승리했다는 이야기군.”

아우라엘도 말을 보태자 에이젤의 표정이 비로소 조금 밝아졌다.

“포레스트 엘프들은 아마 피난을 떠났을 거야.”

곳곳에 렛맨들이나 자이언트 렛들의 시신은 있었지만 포레스트 엘프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아예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거나, 발생했더라도 수습할 여유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구조요청을 보냈던 이도 무사할 가능성이 높을 거야.”

아우라엘이 스스로에게 말했다.

오는 내내 무거웠던 마음이 비로소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큰 싸움이 있었어. 아마 구조요청을 받고 달려온 천사들이나 영웅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겠지. 잘하면 그들과 곧 합류할 수 있을지도 몰라.”

라구엘도 평소답지 않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아, 선배님! 저기!”

에이젤이 가리킨 곳을 돌아본 아우라엘과 라구엘은 동시에 눈을 빛냈다.

“음식?”

“과일도 있어.”

오는 길 내내 작은 과일 하나 발견하지 못 한 아우라엘 일행이었다.

진실은 포레스트 엘프들과 천호가 싹쓸이를 한 것이었지만, 어찌되었든 덕분에 숲에서 먹을 것을 조금도 조달하지 못 했고, 결과적으로 숲에 들어온 이후 내내 쫄쫄 굶기만 한 세 사람이었다.

신나서 달려가 보니 나무 그릇에 먹다 남긴 것으로 보이는 구운 고기들과 과일들이 있었다.

그것도 제법 푸짐하게.

“먹자.”

아우라엘이 먼저 말했다.

라구엘은 잠깐 망설이는 듯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고, 에이젤은 활짝 웃으며 음식에 손을 뻗었다.

“맛있어요.”

정말이었다.

차게 식었지만, 그래도 정말 맛있었다.

“그래.”

먹다 남긴 음식이 분명하니, 차마 많이 먹으라는 말까지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에이젤의 미소를 보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 라구엘이었다.

“라구엘, 우리도 먹자.”

“응.”

살아야 했으니까.

다시 나아갈 힘을 얻어야 했으니까.

‘루시엘, 잘 지내고 있니?’

루시엘이 먹다 남긴 고기를 먹으며 아우라엘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새삼 다섯 여신께 루시엘의 안전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자.”

“그래.”

“네, 선배님.”

세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은 뒤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한 시간 거리까지 좁혀졌던 루시엘과 세 천사들 간의 거리가 다시 하루 이상으로 벌어지게 된 순간이었다.

제2장 - 2층 끝, 제3장 - 3층으로 이어집니다.

< 제2장 - 2층 #1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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