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장 - 2층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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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하고 고결하며 정의로우며 엉큼한 포레스트 드래곤.
엘리와 레나는 어떻게든 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레나였다.
“전···장에 다른 이들도 많았으니까. 용사님이 쓰러트리신 역병신의 사도도 있었고.”
“음흉하게 생기긴 했지.”
엘리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전장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건 천호지만, 둘째를 따진다면 역시 역병신의 사도였을 테니까.
“그렇겠죠?”
루시엘이 어쩐지 안도한 얼굴로 그리 말하자 레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엘리는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겠지?”
엘리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천호가 있었다. 천호는 언제나와 같이 멋진 표정으로 응답했다.
“음.”
아마도.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게 있는 법이지.]
미트라가 이상한 말로 스스로를 설득하는 그때, 엘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무튼 잘 키우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알레이스타님이 환생하시는 거니 이상하진 않겠지. 거기다 예전보다 재미있을 것 같고.”
“엘리.”
레나가 한숨을 토하자 엘리는 오히려 킥킥 웃었다.
루시엘이 물었다.
“빛의 기둥에서 알레이스타님이 다시 태어나시는 건가요?”
“음··· 정확히는 조금 달라. 지금은 빛의 기둥 형태지만 조금 있으면 알로 변할 거거든. 그 알에서 새로운··· 새로운 포레스트 드래곤이 태어나는 거지.”
영혼과 육신.
재료가 되는 것은 모두 알레이스타였다.
하지만 재구성이었다. 말 그대로 환생이었다.
다시 태어난 존재는 온전한 알레이스타라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엘리는 일부러라도 씩씩한 미소를 지었다. 레나는 빛의 기둥을 어루만지며 슬픔을 달랬다.
[사스치엘이 돌아오는군.]
미트라의 말에 천호는 고개를 돌렸다.
포레스트 엘프 여왕을 등에 태운 사스치엘이 날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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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백성들을 구해주셔서, 왕도를 점령한 악신의 무리들을 소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왕국 전체를 대표하여 감사를 표합니다.”
포레스트 엘프는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포레스트 엘프 내에도 여러 갈래가 있었고, 포레스트 엘프 여왕- 아리안의 이끄는 것은 요정의 숲에 거하는 엘프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왕국이었다.
여왕인 그녀가 지금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하는 것은 쉬이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천호가 그런 아리안을 일으키며 - 손을 잡아줄 생각이었지만 반영체라 만질 수 없었다. - 말하자 루시엘은 흐뭇한 미소를 그렸고, 아리안 역시 빙긋이 미소지었다.
“용사님과 그 일행 여러분 덕분입니다. 천사님들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도와주러 오신 트리언트 일족분들도요.”
“헤헤헤.”
“의무를 행했을 뿐이다.”
“나는 높고 큰 가지다.”
차례대로 루시엘, 사스치엘, 높고 큰 가지였다.
거기까지 말한 아리안은 숨을 한 번 크게 고르더니 빛의 기둥 쪽으로 다가섰다. 엘리와 레나는 그런 그녀에게 길을 열어주었고, 아리안은 빛의 기둥에 손을 올렸다.
“알레이스타······.”
위대한 숲의 수호자.
이 숲과 시작을 함께한 포레스트 드래곤.
용사의 용기와 알레이스타의 과감한 결단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 했으리라.
아리안은 빛의 기둥에 마력을 조금 흘려 넣었고, 빛의 기둥에서는 은은하지만 밝고 따스한 빛이 일어났다. 아리안의 마력이 좋게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멋지고 강한 포레스트 드래곤이 태어날 것 같군요.”
“축복의 말씀, 감사합니다.”
레나와 엘리가 동시에 예를 표했다.
아리안은 앞으로 태어날 포레스트 드래곤을 돌볼 두 사람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다시 천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용사님, 비록 전장이 되어 난장판이 되었다고는 하나 이곳은 저희 포레스트 엘프들의 왕도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안내해 드리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아리안의 표정에는 약간이지만 단호함까지 어려 있었다. 무언가 결단을 내린 표정이었다.
천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아들아, 왕들이 어디 가자고 하면 둘 중에 하나다.’
‘함정이요?’
‘그런 경우도 있지. 아니, 그런데 왜 함정부터 떠올리는 거냐? 세상이 팍팍하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란다.’
‘아무튼 다른 경우는 뭔데요?’
‘뭐긴 뭐야. 보물고지!’
아리안이 설마 자신을 함정으로 끌고 가겠는가.
‘왕도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강한 마력이 필요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한 번 더 희생해주시지요!’
상상해보니 제법 그럴싸했지만 역시 개연성이 부족했다.
때문에 천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다른 분들도 함께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리안이 그렇게 말하며 빛의 기둥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신비하게도 빛의 기둥이 돌연 밝은 빛을 발하더니, 빛이 사라졌을 때는 기둥 대신 농구공 크기의 녹색 알이 자리했다.
“새로운 포레스트 드래곤께서도 참관하고 싶으신 듯 하군요.”
아리안이 작게 웃자 레나가 알을 안아들었고, 엘리는 알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빛의 기둥이 그러했던 것처럼 알 역시 따뜻했다.
“아리안, 포레스트 엘프의 여왕이여. 참관이라 한다면 무언가 보여줄 것이 있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용사님께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혹시가 역시구나.’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꽉 쥔 천호는 표정을 관리했고, 루시엘이 눈을 반짝였다.
“용사님께요?”
“네, 지금부터 함께 가시도록 하죠.”
아리안이 앞장서기 시작했다.
사스치엘이 호위하듯 뒤를 따랐고, 연이어 천호와 루시엘, 엘리와 레나, 높고 큰 가지가 줄줄이 그 뒤를 이었다.
‘생각해보니 여기가 왕도구나.’
싸우느라 정신이 팔려 제대로 보지 못 했는데, 이제보니 오밀조밀한 미니어처 마을이 참 귀엽고 예뻤다.
인형의 집들로 마을을 만든 느낌이었다.
“높고 큰 가지님, 제단을 치워주실 수 있을까요? 본래부터 움직일 수 있는 제단이니 높고 큰 가지님의 힘이면 가능할 것입니다.”
“나는 높-고 큰- 가지-다.”
역병신의 신상이 놓여있던 제단을 가리키자 높고 큰 가지가 앞으로 나섰다. 돌로 만들어진 제단이었지만, 높고 큰 가지가 힘을 쓰니 어렵지 않게 옆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애당초 포레스트 엘프들의 제단이었던 모양이군.]
미트라의 말마따나 본래부터 왕도 한 가운데에 놓여 있던 제단이었다.
제단을 밀어내자 바닥이 드러났는데, 복잡하고 정교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아리안이에요, 길을 열어주세요.”
아리안이 마법진에 손을 올리고 작게 말하자 땅이 나선으로 소용돌이치더니 그대로 갈라져 아래로 이어지는 통로가 나타났다.
“이쪽으로.”
아리안이 이번에도 앞장섰다.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어둡지 않았고, 아래로 10미터 이상을 내려가자 얕은 연못과 한 가운데 자리한 빛나는 나무가 있었다.
“요정수입니다. 오랜 시간 우리 포레스트 엘프들이 지켜온 나무이지요.”
거기까지 말한 아리안은 연못을 지나 나무 앞에까지 이동했다. 나무에 손을 올리고 주문을 읊조리니 연못 전체가 푸른빛을 발했다.
그리고 드러나는 것.
나무 아래에서, 연못의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것.
[요정검!]
미트라가 탄성을 토했다.
요정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을 요정신검 클라우 솔라스는 아니었지만, 저것은 분명 달빛과 별빛으로 벼린 요정검이었다.
“요정검 엘렌디아입니다. 언젠가··· 초대 용사님의 후인이 나타날 때를 대비해 보관하고 있던 기물입니다.”
[레온도 한때 요정검을 사용했었지.]
미트라가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고, 천호는 연못 위에 떠오른 요정검을 바라보았다.
칼날이 가늘고 길어 날렵한 느낌을 주었다.
손잡이에는 원형의 가드가 달려 있었는데, 면이 아닌 선으로 이루어져 다소 복잡했지만 아름다운 느낌을 주었다.
검신과 손잡이 모두가 은색인 아름다운 레이피어.
“용사님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히든 퀘스트 보상으로 언급되었던 특별한 보상이 바로 요정검 엘렌디아였던 모양이다.
천호는 자연스럽게 미트라를 돌아보았고, 미트라는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라.]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미트라- 히트 대거에서 돌연 밝은 빛이 일었다. 아리안을 비롯한 모두가 깜짝 놀라 히트 대거를 보았고, 천호는 침착한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히트 대거의 칼날이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미트라?’
[놀라지 마라. 히트 대거를 흡수한 것뿐이니.]
[히트 대거의 힘이었던 물을 데우는- 아니, 열을 발하는 능력은 내게 남았다.]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쇠약해지고, 천호의- 정확히는 천호 어머니의 마법에 의해 본체가 파괴되어 약해질대로 약해진 미트라였다.
그런데 히트 대거를 흡수했기 때문인지 약간이지만 힘이 강해진 느낌이었다.
‘설마 마법검들을 흡수할 수 있다든가?’
[가능하다. 레온도 그렇게 내 힘을 키워주었지.]
검 먹는 검이었을 줄이야.
이러면 무기 쪽은 되팔기나 물려주기가 어려워지는데.
[그대여, 무엇을 망설이는가. 나를 요정검에 가져다 대라. 요정검과 하나가 되겠다.]
“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천호는 미트라의 본체- 칠흑의 손잡이를 요정검에 가져다 대었고, 그 순간 다시 밝은 빛이 일었다.
[아아, 아아아!]
미트라가 탄성을 토했다. 온통 은색이던 엘렌디아의 손잡이가 검게 변하였고, 가드의 한 가운데는 황금빛 보석이 자리했다.
[훨씬 낫군. 훨씬 좋아.]
기분 탓이 아닌지 미트라의 목소리가 보다 선명해졌다.
낮고 허스키하던 중성적인 목소리도 여전히 허스키하긴 했지만 훨씬 더 미성이 되었다.
“역시 성검 미트라.”
“용사의 검답군.”
루시엘과 사스치엘이 감탄을 표하자 엘리가 물었다.
“여왕님, 엘렌디아에는 특별한 힘이 있지 않나요?”
“네, 엘렌디아에는 강한 바람의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그녀의 말대로다. 엘렌디아의 검신에 바람의 마법이 걸려있군.]
[그대여, 히트 대거에 열을 발하는 것과 같은 요령으로 바람을 일으켜 봐라.]
미트라의 요구에 천호는 엘렌디아를 높이 들어올린 뒤 내공을 주입했다. 그러자 엘렌디아의 검신으로부터 바람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오오.”
“저 상태로 찌르면 굉장하겠는데?”
천호가 생각해도 그랬다. 찌르기건 베기건 날카로운 바람의 소용돌이가 함께할 터이니 말이다.
‘그리고.’
천호는 다시 한 번 엘렌디아의 검신을 휘감은 바람을 보았다.
바람의 회전수를 조금 더 높여보았다.
부우웅!
위이잉!
어쩐지 낯익은 소리가 들렸다.
천호는 회전수를 더 높여보았고, 이내 눈을 빛냈다.
[그, 그대여?]
무언가 불길했다.
저 눈빛은 히트 대거로 목욕탕 물을 데우라 했을 때의 눈빛이지 않은가.
결코 강한 무기를 손에 넣은 전사의 눈빛이 아니었다.
미트라도 눈치챘다. 그랬기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그대여! 나로 대체 무엇을 할 생각인가!]
[내게 무슨 짓을 시킬 셈이냐!]
천호는 바로 답하는 대신 앞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렸다.
가공된 부속품이 필요할 터였지만, 그 정도는 손쉬운 일이었다.
레이피어의 검신에서 일어나는 강한 돌개바람.
걸리는 것은 무엇이든 갈아버릴 그것.
천호는 믹서기를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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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미궁의 심층.
역병신의 영역.
죽음과 고통, 비탄이 가득한 그 땅에서 노여움이 일었다.
주변 일대를 진감시키는 신의 분노였다.
역병신의 영역 전체가 두려움에 떨었다.
역병신의 휘하에 있는 모든 종족들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쥐에서 비롯된 괴물들만이 아니었다.
역병을 옮기는 온갖 종류의 마물들이 역병신의 휘하에 있었다.
그들은 역병신에게 거스를 수 없었다.
심층, 그 중에서도 자신의 영역 내에 있는 역병신의 힘은 실로 위대했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그는 진정 신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였다.
[간악한 것들. 찢어죽일 천사년.]
역병신이 노여움에 몸을 떨었다.
머리에 다섯 개의 뿔이 난 쥐의 머리와 세 개의 꼬리, 강철 같은 육신.
역병의 망토를 두른 역병신은 노란 눈을 빛냈다. 그의 머릿속에서 루시엘은 이미 수천, 수만 번의 죽음을 경험했고, 제발 죽여달라 애원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망상이 아니었다.
신의 생각이었다.
언젠가는 현실이 될 미래의 계획이었다.
역병신의 분노는 루시엘에서 그치지 않았다.
천사와 함께하는 용사.
천사를 향한 공격을 막아낸 치유의 신.
역병신은 발치에 엎드려 있던 이름 모를 렛맨을 짓밟아 죽였다. 그대로 시선을 돌려 바짝 엎드려 있는 대신관들을 보았다.
모두 쥐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렛맨이라 할 수 없었다. 렛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역병신의 눈에는 그저 하찮은 존재들일 뿐이었다.
그들은 감히 입을 열어 작금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 했다.
1층과 2층의 제단이 파괴되었다.
남은 것은 3층과 4층뿐이었고, 이대로는 의식의 진행이 어려웠다.
엿 같은 상황이었다.
1층과 2층을 지키고 있던 놈들은 약했다.
용사도 공략조의 영웅들에 비하면 약했다.
하지만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저층이었다.
심층에서 구경밖에 못 하는 주제에- 루시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역병신은 심층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억지로 올라갈 수는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힘의 격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역병신의 발치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다섯 마리의 대신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동원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저층이나 중층에 머물고 있는 놈들뿐이었다.
[적당한 놈의 이름을 대라.]
역병신이 내뱉듯 말하자 대신관들이 움찔했다. 그중 하나가 머리를 조아린 채 답했다.
“4층에 도루마가 머물고 있습니다.”
도루마.
기억에 있는 이름이었다. 잠재력이 무척 높아, 원거리에서나마 역병신 자신이 직접 사도의 문장을 새겨준 놈이었다.
[마법검을 여럿 다루는 놈이었지, 분명.]
“그렇습니다. 인간형의 적들을 상대하는데 특화되어 있는 암살기능자입니다.”
천사들과 영웅들을 상대하기 위해 길러진 자였다.
다섯 자루의 마법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마법검사.
나쁘지 않았다.
괜찮은 생각이었다.
[놈에게 명을 내려라- 아니, 내가 직접 신탁을 내리겠다.]
역병신이 고개를 들어 어둠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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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너무하다. 아무튼 너무하다.]
< 제2장 - 2층 #11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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