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장 - 2층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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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퀘스트를 완수했습니다.]
[크로니클 퀘스트를 완수했습니다.]
[새로운 크로니클 퀘스트가 주어집니다.]
거기까지 읽은 천호는 잠시 빛의 창을 정지시켰다.
루시엘과의 포옹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서만이-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음.”
천호가 정면을 보았다. 천호를 꽉 끌어안고 좋아하던 루시엘도 순간 흠칫 하더니 천호를 안은 팔을 풀었다. 돌아서서 천호와 같은 곳을 보았다.
[신상에 남은 찌꺼기일 뿐이다.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미트라가 낮게 말했다. 두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구태여 이런 말을 꺼내야 할 정도로 신상에서 순간 피어오른 힘이 불길하며 강렬했다.
소리는 없었다.
굉음도, 폭발음도, 날카로운 비명도 없었다.
그저 부서진 신상에서 솟구친 녹색의 기운이 하나로 뭉쳤다.
1층에서 제단과 신상을 파괴했을 때처럼 녹색의 연기가 하나로 뭉쳐 거대한 쥐의 머리 형상을 이루었다.
그것으로 세상이 진감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저 그 존재만으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도망치던 렛맨들이 발을 멈추었다.
이성보다 본능에 휘둘리는 자이언트 렛들은 아예 부서진 신상 쪽으로 돌아서기까지 하였다.
사스치엘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엘리는 빛의 기둥을 등으로 가리며 마른침을 삼켰고, 레나는 거친 숨을 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루시엘이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녀는 천호의 등 뒤에 숨는 대신 이를 악물고 정면에서 쏟아진 시선을 마주하였다.
역병신.
대미궁의 지배자인 마신의 수하들 가운데 하나.
심층에 도사리고 있는 강대한 존재.
[잘도 해주었구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몇 개나 되는 뿔이 달린 쥐의 머리에서- 저 녹색의 연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아니었다.
주변 일대 전체에서 목소리가 시작되었다.
마치 세계가 직접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압도되었다.
작은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억양이 없는, 그저 읊조리는 것 같은 목소리에도 모두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너희의 죄는 이미 깊었다. 그리고 그 죄는 이제 더 이상 씻을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역병신의 두 눈이 타올랐다. 심연의 불꽃 같은 그 시선에 직접 노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렛맨들과 자이언트 렛들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렛 오거 가운데는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숨기는 자들도 있었다.
엘리는 빛의 기둥 앞에 필사적으로 버텨섰지만 손이 떨리는 것만은 막지 못 했다. 다리 역시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레나는 엘리에게 가고 싶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너희를 기억한다. 너희를 잊지 않는다. 너희에게 끝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줄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 것이다.]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지하 1층에서 2층으로.
보다 심층에 가까워졌기 때문인지 역병신의 힘이 강해졌다.
그의 신성을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말은 공포를 자아냈고, 공포는 상상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천호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미트라 역시 성스러운 힘을 발해 조금이라도 역병신의 악의를 막아내고자 했다.
그리고 루시엘이 날개를 펼쳤다.
주먹을 꽉 쥐더니 그대로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웃기지 마! 오히려 네가 떨어야 할 거야!”
필사적인 외침이었다. 하지만 초라했다. 역병신의 악의와 신성 앞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작고 연약했다.
하지만 분명한 외침이었다. 루시엘은 비록 눈을 꽉 감았을지언정 멈추지 않았다.
“1층과 2층의 제단을 파괴했어! 3층도 파괴할 거야! 4층도 파괴할 거라고!”
그리할 것이다.
그리될 것이다.
루시엘은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심층에서 구경밖에 못 하는 주제에!”
[할 말은 그게 다인가?]
역병신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노여움이 어려 있었다.
루시엘은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 이내 이를 악물었다. 천호에게 말한 그대로, 천사 역시 너무나 작고 초라하다하나 신성을 가진 존재였다.
그냥 이대로 압도될 생각 따위 없었다. 욕이라도 한 바가지 쏟아줄 요량으로 다시 입을 벌렸다.
“으!”
하지만 그녀는 이내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역병신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뭐, 뭐라고 욕하지?’
태어나 제대로 된 욕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루시엘이었다.
1층에서도 기껏 한다는 말이 ‘흥이다’였지 않은가.
천호의 생각대로, 진짜 천사같은 천사 루시엘이었다.
[어린 천사야. 어리석고 나약한 천사야. 너에게는 보다 특별한 고통을 안겨 주겠다. 제발 죽여달라 애원하게 만들어 주겠다.]
역병신이 저주의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천호가 루시엘의 귀에 속삭였다. 고작 며칠에 불과했지만, 루시엘과 함께한 천호는 지금 루시엘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천호의 귓속말을 들은 루시엘은 눈을 깜박였다. 저도 모르게 천호를 돌아보며 눈으로 물었다.
‘정말요?’
이게 욕이라고요? 이러면 된다고요?
천호는 루시엘의 눈을 마주하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언제나의 멋진 표정이었다. 저도 모르게 안심한 루시엘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저주의 말을 늘어놓고 있는 역병신을 노려보았고, 있는 힘껏 소리쳤다.
“역! 병신아!”
[···무어라?]
“역! 병신이라고 했다! 이 역! 병신아!”
악센트를 하나 주었을 뿐인데 신기하게 정말 욕이 된 것 같았다.
연기가 뭉쳐 만들어진 역병신의 두상이 멍한 표정을 지었고, 사스치엘과 엘리, 레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졌으면 사라져!”
루시엘이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일갈하자 거짓말처럼 역병신의 두상을 이루던 연기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애당초 미트라가 지적한 것처럼 찌꺼기뿐인 힘이었기도 했지만, 역병신의 당황이 큰 것도 원인이었다.
[이··· 이··· 간악한 천사가!]
역병신의 연기가 단번에 흩어졌다. 동시에 남아있던 모든 기운이 하나 되어 루시엘을 향해 벼락처럼 쏟아졌다.
“꺅!”
루시엘은 짧은 비명을 질렀고, 천호는 급히 루시엘을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미트라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녹색의 기운은 루시엘과 천호에게 닿지 못 했다. 허공에 만들어진 빛의 방패가, 순백으로 된 힘이 역병신의 기운을 저지했기 때문이다.
[치유의 신의 가호가 당신을 수호합니다.]
[치유의 신이 만족스런 미소를 짓습니다.]
[치유의 신이 당신의 천사를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역병신의 진정한 대적자인 치유의 신.
심층에 가까워져 역병신의 힘이 강해진 것처럼, 치유의 신의 힘 또한 강해져 있었다.
[치유의 신의 가호 Lv2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천사에게도 치유의 신의 가호가 내립니다.]
천호와 루시엘의 머리 위로 하얀 빛의 무더기가 쏟아져 내렸다. 치유의 신의 가호였다.
“후우.”
역시 빽은 빽으로 막는 법이었다.
천호가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토하자 루시엘 역시 온몸을 늘어트리며 폐부 끝에서부터 끌어올린 것 같은 한숨을 토했다. 그대로 털썩 주저앉기까지 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이었다.
역병신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나마 남아있던 신상의 잔재는 완전히 재가 되어 흩어졌고, 잠시 발을 멈추었던 렛맨들과 자이언트 렛들은 다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늘이 변하였다.
구름이 걷혔다.
빛이 쏟아져 내렸고, 하늘이 푸름과 맑음을 되찾았다.
숲 또한 변하였다. 너무나 큰 그늘에 가려 어둠만이 가득하던 지역에 빛이 닿았다. 가지들의 각도가 변하며 틈이 생겼고, 오랜 시간 한기만 가득하던 땅에 따스함이 번졌다.
[요정의 숲이 해방되었습니다.]
[미궁 세계가 조금 안전해졌습니다.]
[2층의 세력도가 조금 변하였습니다.]
세계의 일부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2층을 지배하고 있던 마신의 힘이 조금 약해진 대신 다섯 여신의 힘이 조금 강해졌다.
[히든 퀘스트 ‘왕족 구출’을 완수했습니다.]
[크로니클 퀘스트 ‘역병신의 대적자 #2’를 완수했습니다.]
[히든 퀘스트 보상 : 포레스트 엘프의 친구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히든 퀘스트 보상 : 포레스트 엘프 여왕의 강한 호의 - 이로 말미암아 포레스트 엘프 여왕에게 특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히든 퀘스트 보상 : 포레스트 드래곤의 동맹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히든 퀘스트 보상 : 용의 무녀들의 강한 호의.]
[크로니클 퀘스트 보상 : 치유의 신의 열쇠]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미궁 세계가 당신의 빛나는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줄줄이 이어지는 빛의 창을 바라보던 천호는 다시 루시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미 주저앉은 상태인데도 몸을 더 늘어트리는 것이, 당장 일어서는 것은 무리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이동하기는 해야 했다.
여전히 빛나고 있는, 알레이스타가 변해 만들어진 빛의 기둥 쪽에 가봐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음.”
잠시 고민한 천호는 결국 결심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루시엘에게 말했다.
“루시엘, 업혀요.”
“네?”
“업어드릴게요.”
천호는 등을 보이고 앉았고, 루시엘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런 천호의 등에 몸을 기댔다.
‘가볍다.’
역시 천사답게 가벼웠다. 그리고 천호는 연이어 생각했다.
‘역시 플레이트 갑옷을 안 입길 잘했어.’
[번뇌가 차오르는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다······.]
미트라가 한숨을 토했지만 천호는 멋진 표정을 유지했고, 루시엘은 부끄러움과 기쁨이 뒤섞인 얼굴로 살짝 웃었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등에 업히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기도 했지만, 역시 상대가 천호라서였다.
“헤에.”
빛의 기둥 앞에 도달하자 어느새 기운을 차린 엘리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은근한 미소를 흘렸다.
“음.”
하지만 천호는 침착했고, 루시엘은 생긋생긋 웃을 뿐이었다.
연이어 사스치엘과 레나가 빛의 기둥에 다가왔다. 사스치엘은 일단 천호에게 치하의 말부터 하였다.
“정말 잘해주었다. 용사다운 활약이었다. 다섯 여신님들을 모시는 전투천사로서 그대에게 감사한다.”
괜히 전투천사가 아닌지 묘하게 군인다운 구석이 있는 사스치엘이었다. 천호는 사스치엘의 감사에 적당히 응대한 뒤 바로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레나가 담백하게 감사를 표했다. 말은 길지 않았지만, 그 눈이 레나의 모든 감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용사의 18번 대사이자, 결코 쉽지 않은 말.
레나가 작게 웃었다. 눈앞에 선 이가 진정 용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나도 고마워. 정말정말 고마워.”
엘리가 레나 대신이라도 되듯 격렬하게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아예 천호에게 바짝 다가서더니 기습적으로 키스까지 해주었다. 입술이 아닌 뺨에 한 키스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음.”
천호는 간신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했고, 천호에게 업힌 채 생긋생긋 웃던 루시엘은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천호와 미트라에게만 보이는 빛의 창이 떠올랐다.
[순진한 Lv1을 획득했습니다.]
[순진한 Lv2가 되었습니다.]
[호오.]
그랬구나. 그랬던 것이구나.
미트라가 묘하게 감탄하자 천호는 헛기침을 토했고, 엘리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워.”
“엘리.”
레나가 엘리의 목뒤를 잡아끌었다. 사스치엘은 어떻게든 분위기를 정리하려는지 헛기침과 함께 말했다.
“어찌되었든 잘 마무리되었군. 포레스트 엘프들도 하늘의 변화를 보았으니 일이 잘 된 것은 알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구체적인 사정을 몰라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소식을 전하고 오겠다.”
사스치엘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뭔가 이제보니 정리가 아니라 도망치는 걸로도 보였다.
[아무튼. 빛의 기둥인가. 포레스트 드래곤의 전생의식에 대해서는 들어만 보았지, 실제로 본 것은 나도 처음이다.]
천호가 미트라의 말을 모두에게 전하자 레나가 말했다.
“전생의식 중에는 주변에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실 걱정이 됩니다. 아무래도 사특한 기운이 가득했던 전장이니······.”
렛맨들과 주고받은 적의와 살의.
역병신이 직접 표한 악의까지.
하지만 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등 뒤에서 레나를 살짝 끌어안으며 말했다.
“괜찮아. 좋은 영향도 가득했으니까. 일단 이렇게 용사님도 있고.”
전장에서 가장 빛난 것은 천호의 용기였으니까.
엘리의 말에 레나 역시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말 나온 거 잠깐 확인해볼까? 시스템이란 것도 있으니 이제 알 수 있을 거야.”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새로이 태어날 포레스트 드래곤이 새로 어떤 특성을 얻었는지.
엘리의 말에 레나는 약간 꺼려진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걱정 반, 호기심 반 해서 궁금했기 때문이다.
“음.”
괜히 기대되기는 천호도 마찬가지였다.
루시엘은 엘리의 입술이 닿았던 천호의 뺨을 가만히 바라보다 정면을 보았고, 엘리와 레나가 빛의 기둥에 손을 올렸다.
[용감한 Lv1을 획득했습니다.]
[고결한 Lv1을 획득했습니다.]
[정의로운 Lv1을 획득했습니다.]
엘리와 레나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번졌다.
루시엘 역시 활짝 웃었다.
하지만 미트라는 불안한 마음을 버리지 못 했다.
그리고 그런 미트라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엉큼한 Lv1을 획득했습니다.]
“에?”
“어?”
엘리와 레나와 루시엘은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깜박였고, 미트라는 다시 한숨을 토했다.
“음.”
천호는 열심히 딴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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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 2층 #10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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