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28화 (28/211)

< 제2장 - 2층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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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전투 훈련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잘 보는 것이었다.

단순히 동체시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천호는 달리며 전장 전체를 보았다.

수백에 달한 렛맨들이었지만 그것들 하나하나를 구분하는 대신 뭉쳐있는 정도에 따라 덩어리로 파악했다.

그리하여 길을 찾았다.

스카브론드를 향해 질주하며 생각했다.

‘인간형.’

스카브론드는 렛 오거의 강화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즉, 머리가 쥐라서 그렇지 그 외는 사지가 달린 인간과 흡사했다. 놈이 정말 렛 오거의 강화판이라면 내부 구조 역시 동일할 터였다.

키는 3미터 가량.

주무기는 거대한 양날도끼.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을 뿐 딱히 갑옷을 두르지 않았지만 전신의 돌 같은 근육은 갑옷이나 다름없었다. 여간한 칼로는 흠집조차 내지 못 할 것 같았다.

놈이 천호를 보았다. 무어라 소리를 질렀고, 양손 도끼를 움켜쥔 채 천호를 향해 돌진했다.

보는 것은 천호만이 아니었으니까.

놈 역시도 천호를 꺾는 순간 이 싸움이 사실상 종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해가 일치했다.

놈은 직접 천호를 해치워 부하들의 기세를 되살릴 생각이었다.

천호에게 있어 놈과의 직접 대결은 작금의 상황을 극복할 유일한 방안이었다.

시시각각 거리가 좁혀졌다. 렛맨들과 자이언트 렛들이 물러섰다. 눈치 빠른 놈들은 사이에 끼어들어봤자 자신들만 손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덩치 차이는 컸다.

체중 차이는 몇 배에 달했다.

그리고 속도가 호각이었다.

쾅!

놈의 도끼가 지면을 찍었다. 덩치가 컸지만 근육도 많았다. 체중이 무거웠지만 놈의 힘이 워낙에 엄청났다.

천호는 가까스로 피했다. 미트라가 소리쳤다.

[악신의 기운이 없다!]

역병신의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역병신의 기운이 없었다.

지금의 놈은 그저 괴력을 가진 렛 오거일 뿐이었다.

‘차이가 뭔데!’

속으로 소리친 천호는 바삐 발을 놀렸다. 호흡을 차분히 했고, 차갑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렛맨들이 움직였다.

놈들은 알레이스타가 변한 빛의 기둥을 포위한 채 슬금슬금 거리를 좁혔다.

기둥 앞에 선 엘리가 활을 들어 올렸지만, 숫자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빛의 기둥에서부터 내뿜어지는 빛이 조금만 약해져도 놈들이 달려들 게 분명했다.

루시엘은 천호와 엘리를 보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레나의 다리에만 집중했다. 그런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사스치엘이 날았다. 포레스트 엘프들을 안전한 곳에 내려두기 전까지는 전투에 참가할 수 없는 그였다.

“쥐새끼 같은 놈!”

스카브론드가 욕지거리와 함께 손을 놀렸다.

천호는 자아비판이냐며 받아치는 대신 발을 놀렸다. 놈의 왼손을 피함과 동시에 속도를 끌어올렸다.

쾅!

천호가 도약했다. 아니, 정확히는 놈의 몸을 타고 올랐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스카브론드의 허벅지를 박차 오른 천호는 놈의 머리높이까지 치솟았고, 스카브론드는 급히 손을 놀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천호가 기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스카브론드의 어깨에 손을 얹고 몸을 회전시키는가 싶더니 어느새 스카브론드의 등에 달라붙었다.

“놈!”

스카브론드는 등 뒤로 손을 뻗는 대신 가볍게 뛰어올랐다. 그대로 등부터 떨어져 천호를 깔아뭉갤 요량이었다.

설사 실패한다 할지라도, 천호가 등을 떠날 터이니 나쁠 것이 없었다.

[그대여!]

천호는 움직였다. 스카브론드를 향해 도약한 그때 이미 히트 대거를 허리춤에 꽂은 천호의 두 손은 비어있었다.

아니, 그 손에는 분명 쥐어져 있는 것이 있었다.

스카브론드의 몸이 낙하를 시작했다. 천호가 놈의 가슴팍으로 몸을 굴렸다. 놈이 지면에 충돌하는 그때 중력을 거스르며 몸을 던졌다.

쾅!

스카브론드가 등부터 떨어졌다.

하지만 애당초 그리 높이 뛰지 않았기에 타격은 별로 없었다.

천호가 바닥을 굴렀다. 팔을 세게 당겼고, 그 순간 스카브론드가 고통을 토했다.

“커헉!”

올가미.

스카브론드의 목을 와이어가 휘감고 있었다. 천호가 팔을 세게 당긴 그때 올가미가 조여졌다.

스카브론드가 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거칠게 손을 휘둘렀고, 천호는 와이어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무척이나 가느다란 와이어였다. 하지만 특수 제작되어 100kg 정도는 우습게 지탱하는 물건이었다. 결코 쉽게 끊어낼 수 없었다.

“커걱!”

목이 졸린 상태로 놈이 손톱을 세웠다. 제 목에 상처를 내었고, 이내 포기했다. 완전히 졸린 상태는 아니었기에 일단 천호부터 해치울 요량으로 다시 양날 도끼를 들었다.

그리고 그때 천호가 사냥돌을 던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실패였다. 스카브론드가 번개처럼 도끼를 움직여 다리를 휘감으려던 사냥돌을 쳐냈다.

천호는 숨을 토했다.

속으로 수를 헤아렸다. 처음보다 확연히 붉어진 스카브론드의 얼굴을 보았다.

노란 눈알이 튀어나와 있었다.

호흡의 장애는 여전했다.

고통이 놈의 운동능력을 좀먹고 있었다.

[그대여, 용사의 힘을 사용해라.]

미트라가 말했다.

히트 대거를 움켜쥔 채 천호는 새로이 생긴 능력을 깨달았다.

[번개. 그것은 하늘의 징벌. 하늘이 내린 용사의 상징과도 같은 힘이니.]

미트라의 목소리에 흥분이 어려 있었다.

천호는 왼손으로 와이어를 매만지며 정면을 보았다. 여전히 고통 속에 천호를 노려보는 스카브론드와 빛의 창을 보았다.

[우레 Lv1]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내공이 소모되었다. 동시에 히트 대거를 움켜쥔 천호의 손에서 파직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뇌전이 일었다.

아직은 작았다. 스턴 건이 떠오르는 번개였다.

하지만 미트라는 만족했다.

[내게 번개를 더하라. 진정한 용사의 힘을 발하라!]

천호가 히트 대거에 힘을 쏟았다. 푸른 뇌전이 히트 대거의 칼날을 타고 올랐다.

[아아, 아아아!]

미트라가 탄성을 토했다.

초대 용사 이후 처음이었다.

건국황제의 후예들은 성검 미트라가 아닌 제국 수호검을 휘둘렀다. 그저 용사의 후예일뿐, 진정한 용사가 아닌 그들은 결코 미트라의 진짜 힘을 이끌어낼 수 없었다.

[가라, 그대여. 진정한 용사의 힘을 보이는 거다!]

미트라는 환희를 느꼈다.

초대 용사와 함께 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제국 수호검이 아닌 성검으로서 살아가던 시절을 기억했다.

“우오오!”

스카브론드가 고통 속에 괴성을 질렀다. 놈 역시도 본능적으로 천호의 번개가, 미트라의 힘이 위험하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가라!]

천호가 지면을 박찼다.

썬더 블레이드- 뇌전의 힘이 어린 미트라를 스카브론드의 머리를 향해 집어던졌다!

[그, 그대여?!]

미트라가 당황했다. 하지만 성검의 당황과 별개로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스카브론드는 급히 도끼를 세워 머리를 보호했고, 푸른 뇌전이 실린 히트 대거는 도끼에 튕겨 바닥에 떨어졌다.

[어째서?!]

미트라가 경악한 그때 천호는 움직이고 있었다.

스카브론드가 미트라를 막기 위해 도끼를 든 그때, 모든 신경을 미트라에 집중시킨 그때 이미 치명적인 일격은 시작되고 있었다.

파칭!

발목을 돌리자 전투화의 끝에서 칼날이 솟구쳐 올랐다. 머리를 방어하느라 도끼는 물론이고 두 손까지 머리 가까이 올렸던 스카브론드가 급히 밑을 내려다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천호의 날카로운 발차기가 놈의 가랑이 사이를 강타했다.

“크아악!”

꿰뚫었다. 발목을 비틀어 찢어버렸다.

피가 튀었고, 천호는 뒤로 급히 물러섰다.

스카브론드가 참담한 비명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인간형의 약점.

인체의 모든 내장기관 가운데, 사실상 몸 밖에 위치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단 하나의 장기.

천호가 왼손을 놀렸다.

와이어를 당겼고, 그 끝에 연결되어 있던 히트 대거를 회수했다. 다시 한 번 푸른 뇌전을 일으켰다.

[그대여, 끝나고 보자.]

미트라가 전에 없이 감정을 드러냈고, 천호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극한의 고통 때문에 제대로 된 방어조차 할 수 없는 스카브론드를 향해 돌진했다.

호세사천왕.

바이슈라바나의 장.

관철貫鐵.

강철조차 꿰뚫을 극섬의 찌르기였다. 이렇다 할 방어조차 불가능한 놈의 목에 히트 대거가 박혔고, 뇌전이 터졌다. 천호는 히트 대거를 비틀어 상처를 키웠다.

츠확!

히트 대거를 빼냄과 동시에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천호는 무릎을 꿇은 놈의 앞에서 몸을 회전시켰고, 놈의 가슴을 밀어 찼다.

쿵!

놈이 뒤로 자빠졌다. 목에서 피를 뿜으며 부들부들 떨뿐 일어서지 못 했다.

렛맨들이 눈을 부릅떴다.

렛 오거들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같은 편인 엘리와 레나조차도 멍한 얼굴로 천호를 보았다.

전장의 침묵 속에 천호는 홀로 움직였다.

히트 대거를 휘둘러 피를 털어냈고, 스카브론드가 떨어트린 양날도끼를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도끼를 휘둘렀다. 원심력까지 더해 멀리 집어던졌다.

목표는 죽기 직전인 스카브론드가 아니었다.

이 전장을 관찰한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적들의 사기를 단번에 박살낼 물건을 향해서였다.

쾅!

굉음과 함께 도끼와 신상이 충돌했다. 알레이스타의 브레스로 인해 이미 보호의 힘을 잃은 신상은 평범한 돌덩어리에 불과했다. 역병신의 모습을 본따 만든 신상의 머리가 부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콰강!

다시 폭음이 터졌다. 신상의 부서진 머리로부터 아직 남아있던 역병신의 힘이 새어나온 결과였다.

신상에 균열이 생겼고, 이내 완전히 부서져 흩어졌다.

“찍직!”

“찍!”

신상이 무너지자 렛맨들은 더는 버티지 못 했다. 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고, 렛 오거들도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놈들의 머릿속에 더 이상 수적 우위 따위는 들어있지 않았다.

“나는! 높고 큰! 가지다!”

“두꺼운 가지다!”

트리언트들이 그런 렛맨들을 더욱 내몰았다.

그리고 조금 늦었지만, 합류한 자가 있었다.

“내가 돌아왔다!”

커헝!

사스치엘의 포효에 자이언트 렛들이 기겁을 하며 도망쳤다.

그런 자이언트 렛들을 쫓으며 사스치엘은 당혹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상황이 변해도 너무 변했기 때문이다.

대체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하.”

빛의 기둥 앞에 서 있던 엘리가 활을 내렸다. 멍한 얼굴로 거친 숨을 토했고, 이내 바보 같은 웃음을 흘렸다. 빛의 기둥에 등을 기대며 천호를 바라보았다.

용사.

저것이 용사.

절망 속에 기적을 일으키는 자.

“후우.”

천호는 작게 웃었다. 숨을 크게 토한 뒤 고개를 돌렸고, 기분 좋게 보았다.

“용사님!”

레나의 치료를 마친 루시엘이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날아오고 있었다.

저만치에 주저앉은 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런 루시엘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음.”

천호는 표정을 관리했다. 당장이라도 품에 뛰어들 것 같은 루시엘을 위해 두 팔을 크게 벌렸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끌어안았다.

[···엉큼함이 또 오르겠군.]

미트라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용감함보다도 레벨이 높은 엉큼함이라니.

초대 용사가 보았다면 무어라 했을까.

미트라는 다시 한숨을 토했다.

하지만 어쩐지 모를 미소가 섞인 한숨이었다.

&

[히든 퀘스트를 완수했습니다.]

[크로니클 퀘스트 : 역병신의 대적자 #2를 완수했습니다.]

[새로운 크로니클 퀘스트가 주어집니다.]

< 제2장 - 2층 #9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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