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장 - 2층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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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높고 큰 가지다!”
“나는 두꺼운 가지다!”
“나는 무척이나 긴 가지다!”
트리언트들이 저마다 떠들면 진군했다.
숫자는 불과 서른 남짓에 불과했지만 하나 같이 덩치가 크다보니, 흡사 숲이 이동하는 것 같은 위세를 뽐낼 수 있었다.
“찌직! 찍!”
자이언트 렛 백여 마리가 그런 트리언트들을 향해 돌진했다.
스카브론드가 내린 역병신의 축복- 저주나 다름없는 힘을 부여받은 놈들은 두려움을 몰랐다. 놈들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트리언트들을 갉아먹고 싶다는 욕망뿐이었다.
트리언트들이 커다란 가지를 휘둘렀다. 자이언트 렛들을 짓밟고 터트렸다.
“쏴라!”
렛맨들이 불화살을 쏘았다. 빗나간 화살이 자이언트 렛들을 불태웠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높고 큰- 가지다!”
높고 큰 가지가 포효하며 렛맨들을 향해 돌진했다. 렛맨들은 손에 쥐고 있던 조잡한 무기들을 버리고, 마치 자이언트 렛처럼 이빨을 세웠다. 트리언트들을 향해 마주 달려나갔다.
스카브론드는 나서지 않았다.
포레스트 엘프들의 작은 왕도를 뒤덮고 있던 병력의 절반 이상을 트리언트들에게 돌렸지만, 결코 본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양동이 분명하다.’
걸려들 수밖에 없는 양동을 걸고 다른 방향 어딘가에서 공격해오리라.
스카브론드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렛 오거들과 트리언트들이 충돌하며 굉음이 터졌다. 서쪽의 싸움이 점점 더 과열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스카브론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늘!”
밤을 찢고 강하했다.
떠오르는 달의 조각을 등진 채 포효했다.
포레스트 드래곤.
숲의 수호자.
죽음을 눈앞에 둔 늙은 용.
제단을 향해 똑바로 쏟아져 내리는 그것을 노려보며 스카브론드가 거대한 도끼를 쥐었다. 렛 오거들 가운데서도 특히 거대한 스카브론드만이 다룰 수 있는 특별한 무구였다.
“쏴라!”
렛맨들이 소리치며 화살들을 쏘아댔다.
하지만 대부분이 제대로 닿지 못 했다. 조준이 나쁜 것도 있었지만, 포레스트 드래곤- 알레이스타의 날갯짓이 일으킨 바람이 화살들을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찌직!”
“찍!”
렛맨들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자빠졌다. 가슴에는 화살이 하나씩 박혀있었다. 용의 무녀인 레나와 엘리의 솜씨였다.
“크헝!”
알레이스타에 이어 지상에 강림한 사스치엘이 크게 포효했다. 스카브론드를 향해 똑바로 달려나갔다.
“죽다 산 천사놈이!”
스카브론드가 그런 사스치엘을 향해 돌진했다. 역병신의 기운을 일으키니,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놈의 덩치가 더욱 크게 변하였다.
쾅!
도끼가 지면을 찍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예 갈아버렸고, 옆으로 크게 뛰어 공격을 피한 사스치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예상했던 그대로 만만찮은 스카브론드의 힘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곳에 스카브론드를 붙잡아 두어야 했다.
“커헝!”
사스치엘이 포효하며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바로 그때 천호는 지상을 달리고 있었다.
퍼퍼퍽!
세 개의 소리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연이어졌다.
나이프에 미간이 꿰뚫린 렛맨들이 나자빠졌고, 천호는 제단을 향해 돌진했다.
[포레스트 엘프들의 여왕과 왕녀이다!]
미트라가 말했다.
천호도 제단을 보았고, 제단에 몸이 결박된 채로 쓰러져 있는 이들을 확인하였다.
단 둘을 제하고는 모두 손바닥만한 포레스트 엘프들이었다.
“찌직!”
놈의 소리보다 천호의 손이 더 빨랐다.
칼을 꼬나 쥔 채로 제단 위의 포레스트 엘프들을 돌아보던 렛맨이 꿰뚫린 목을 붙잡고 쓰러졌다.
천호는 제단을 향해 달리기를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고, 그런 천호의 머리 위를 알레이스타가 뛰어넘었다.
“어림없다!”
스카브론드가 포효했다.
알레이스타가 제단을- 그 위에 자리한 역병신의 신상을 노리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었다.
알레이스타는 스카브론드의 포효를 무시하듯 역병신의 신상을 향해 꼬리를 휘둘렀다. 몸길이만 30미터에 육박하는 거체의 힘이 모두 실린 일격이었다.
콰강!
굉음이 터졌다.
하지만 돌로 만든 신상은 건재했다. 역병신의 신력을 상징하는 진한 녹색의 아우라가 신상을 보호하고 있었다.
“놈을 막아!”
사스치엘에게 도끼를 휘두르며 스카브론드가 소리쳤다.
아직 제단 근처에 남아있던 백여 마리의 렛맨들이 눈을 노랗게 빛내며 알레이스타를 향해 돌진했다.
“서둘러!”
엘리가 천호의 등 뒤에서 소리치며 활을 당겼다.
놈들의 주의가 알레이스타에게 쏠린 지금이 기회였다.
“루시엘!”
천호가 외친 그때 루시엘이 인벤토리에서 바구니를 잔뜩 꺼냈다. 레나와 엘리가 주변을 경계하는 사이 서둘러 제단 위의 포레스트 엘프들을 바구니에 담았고, 천호는 나이프를 흩뿌리며 제단의 중심에 올라섰다.
포레스트 엘프의 여왕과 왕녀.
두 사람 모두 아름다웠다.
아리스도 미인이었지만, 두 사람의 미모는 아리스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혹시가 역시였다.
‘어린애잖아!’
왕녀는 어렸다.
그것도 좀 심하게 어렸다.
인간으로 치면 일곱 살이나 되었을까?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어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여왕.
몸이 반투명했다.
마력- 내공을 다루게 된 지금은 알 수 있었다.
포레스트 엘프의 여왕은 반영체 상태였다. 쉽게 말해 반쯤 유령이란 소리였다.
[포레스트 엘프의 여왕은 존재 그 자체로 종족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동시에 동족들보다 진정한 요정에 한 발 더 다가선 존재이지. 그렇기에 다음대의 여왕이 될 왕녀를 낳고 나면 실체를 버리고 반영체를 취하게 된다.]
“음!”
미트라의 친절하면서도 빠른 설명에 천호는 짧고 굵은 어조로 응답했다.
저번부터 든 의심이었지만, 미트라가 일부러 이러는 것은 아닐까.
이것도 혹시가 역시인 것은 아닐까.
[서둘러라!]
심증이 깊어지는 가운데 천호는 반쯤 실신한 상태인 왕녀를 품에 안았다. 반영체 상태인 여왕은 역병신의 기운이 어린 구속구에 묶여 있었지만, 미트라가 괜히 성검인 것이 아니었다. 어렵지 않게 구속구를 끊어낼 수 있었다.
[아아, 이게 어찌된 것이죠?]
포레스트 엘프 여왕은 목소리도 고왔다.
하지만 맑고 고운 소리를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천호는 정면을 보았다. 크게 홰를 쳐 몰려든 렛맨들과 자이언트 렛들을 쳐낸 알레이스타가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드래곤 브레스!’
그랬다. 분명 일자왕의 권능이었다.
알레이스타가 역병신의 신상을 향해 브레스웨폰을 내뿜었다.
역병신의, 보기만 해도 불길한 기분이 드는 진한 녹색 연기와 대조되는 밝고 선명한 녹색의 섬광이었다.
콰강!
굉음이 터지며 지축이 뒤흔들렸다.
신상을 보호하고 있던 진한 녹색의 아우라가 모두 파괴되었다.
하지만 신상은 아직 건재했다.
그리고 알레이스타는 무척이나 거친 숨을 토했다.
이미 수명이 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에게 더 이상의 공격은 무리였다.
애당초 브레스 웨폰 조차도 전성기 시절의 그것이 아니었다.
“사스치엘님!”
레나, 엘리와 더불어 바구니를 챙기던 루시엘이 돌연 비명을 질렀다.
스카브론드의 도끼가 사스치엘의 어깨를 스쳤기 때문이다.
사스치엘이 비명을 삼켰다. 어깨가 크게 찢어지며 피가 솟구쳐 올랐다.
천호는 생각했다.
일단의 목표는 이뤘다.
신상이 남아있었지만, 산제물들을 모두 데리고 도망치면 당장은 의식을 진행할 수 없었다.
지금은 후일을 도모할 때였다.
“알레이스타님!”
천호가 포효하듯 외치자 알레이스타가 마지막 힘을 내었다. 날개를 크게 폄과 동시에 꼬리를 휘둘러 주변을 일소했고, 천호가 선 제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크헝!”
사스치엘이 포효했다. 신성한 힘으로 잠시나마 스카브론드를 밀어냈다. 날개를 크게 펼쳐 날아올랐다.
“어서!”
레나와 엘리가 알레이스타의 등에 올라탔다. 높이 날아오른 루시엘이 사스치엘의 등 위에 탔고, 천호는 왕녀를 안은 채 알레이스타를 향해 도약했다. 반영체인 여왕은 가볍게 날아올라 천호의 뒤를 따랐다.
“노옴!”
스카브론드가 크게 소리치며 도끼를 던졌다.
사스치엘은 더욱 높이 날아올라 도끼를 피했고, 알레이스타 역시 크게 홰를 침과 동시에 지면을 박차올랐다.
“성공이에요!”
바구니 하나를 품에 안은 루시엘이 환한 얼굴로 소리쳤다.
엘리는 하늘을 향해 불화살을 쏴 트리언트들에게도 퇴각명령을 전하였다.
루시엘의 말대로였다.
이제 이대로 빠져나가면 작전은 성공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천호는 움찔했다. 저도 모르게 옆을 돌아보았고, 목격할 수 있었다.
렛맨들이 무작위로 쏘아댄 수십에 달할 화살들 가운데 하나가 알레이스타의 등 위에 닿았다. 거짓말처럼 레나의 어깨를 꿰뚫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하던 레나의 자세를 완전히 어그러트렸다.
“언니!”
레나가 알레이스타의 등에서 떨어졌다. 바닥에 추락했다. 어설프게나마 낙법을 펼쳤지만 높이가 높이였다. 다리부터 떨어졌지만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가 부러진 게 분명했다.
“언니!”
엘리가 다시 소리쳤다. 렛맨들과 자이언트 렛들이 레나를 향해 까맣게 몰려들었다.
스카브론드가 다시 알레이스타를 향해 도끼를 던졌고, 역병신의 힘이 잔뜩 실린 그것을 피하기 위해 알레이스타는 더 높이 날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포기해라!”
사스치엘이 일갈했다.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구하고자 내려간다면 그저 같이 죽을 따름이었다.
엘리가 사스치엘을 노려보았다.
사스치엘이 그런 엘리를 마주 노려보았고, 알레이스타는 다시 한 번 날갯짓을 했다.
레나가 소리쳤다.
“버리고 가!”
그녀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두려움과 공포 위에 결연한 각오가 어려 있었다.
엘리가 몸을 떨었다. 울부짖었지만 주먹을 움켜쥘 뿐 움직이지 못 했다.
사스치엘의 말대로였으니까.
이대로 내려가 봐야 그저 같이 죽을 따름이었으니까.
구할 수 없다.
포기해야만 한다.
레나는 정면을 보았다.
렛맨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자이언트 렛들이 흉악한 이빨을 세웠다.
레나는 가면을 벗었다.
울음을 터트리는 대신 단검이나마 손에 들었다.
두려움에 미칠 것 같았지만 끝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래서 볼 수 있었다.
선두에서 달려오던 렛맨들이 나자빠지는 광경을.
날카롭고 빠른 무언가가 놈들의 머리를 꿰뚫는 광경을.
“용사님?!”
“미친 것이냐!”
머리 위에서 동시에 목소리가 터졌다.
레나는 저도 모르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다시 단검의 비가 내렸다.
렛맨들과 자이언트 렛 몇 마리를 쓰러트렸고, 놈들은 장애물이 되었다. 렛맨들과 자이언트 렛들의 질주를 잠시나마 늦추었다.
그리고 그가 내려섰다.
레나의 바로 눈앞에서 낙법을 펼쳤다. 지면을 한 바퀴 구른 뒤 일어섰고, 다시 나이프를 뿌렸다.
어째서.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하지만 레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멍한 눈으로 천호의 등을 바라보았다.
사스치엘이 욕지거리를 토했다. 알레이스타가 지상을 보았고, 엘리가 숨을 헐떡였다. 루시엘은 천호에게 가기 위해 날개를 펼쳤다.
미친 짓이었다.
사스치엘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이 와중에 다리까지 부러진 레나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천호는 움직였다.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레나와 함께한 시간은 짧았다.
고작해야 이틀 남짓에 불과했다.
무언가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이야기나 주고받았던 엘리와 달리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눈 적이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아들이 맞구나.’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아버지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아버지께서 파이엔을 구한 용사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무심코 던진 질문.
‘왜 그러셨어요?’
왜 목숨을 걸고 싸우셨어요?
파이엔은 우리 세상이 아닌데.
그곳의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있어 생면부지의 남들일 뿐인데.
목숨까지 걸어가며 그들을 위해 싸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그들이 처음부터 대가를 약속한 것도 아닐 텐데.
이기적인, 하지만 합리적인 물음에 아버지는 답하셨다.
‘생면부지라 해도, 남이라 해도, 사람이 죽으니까.’
어린 천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남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바보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세상에 하나 정도는 있어도 좋지 않겠니.’
약속된 대가 없이도 남을 구하려 하는 이가.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이가.
정말로 힘겹고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가.
‘그리고 굳이 이유를 하나 더해야 한다면······.’
아버지는 어색하게 웃으셨다. 스스로도 민망하시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용사잖냐.’
시간이 흘렀다.
레나는 결국 소리 내어 묻고 말았다.
“어째서.”
렛맨들이 몰려왔다. 숫자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천호는 도망치지 않았다. 레나 앞에 버티고 섰다. 히트 대거를 꽉 움켜쥐며 놈들을 노려보았다.
자포자기하는 대신 어떻게든 레나와 함께 탈출할 방법을 모색했다.
최후의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레나의 물음에도 응답했다. 저도 모르게 아버지처럼 어색하게 웃었고, 왜 그날 아버지께서 그리도 민망해하셨는지 이해했다.
“용사니까.”
짧게 답했다. 뒤를 돌아보는 대신 사납게 미소 지었다.
몰려오는 놈들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디며 포효했다.
미트라가 함께 소리쳐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바로 그때.
[용사의 피 Lv2가 되었습니다.]
[고유직업 ‘용사’를 각성합니다.]
빛의 창이 떠올랐다.
순백의 빛이 천호를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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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 2층 #7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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