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장 - 2층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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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가 늦었습니다. 제 이름은 아리스라 합니다. 마을의 촌장 직을 맡고 있습니다.”
촌장- 아리스가 새삼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무릇 촌장이라 하면 나이 지긋한 노인 남성인 게 정석이었지만, 아리스는 무척이나 젊고 예뻤다.
물론 손바닥만했지만.
“음.”
천호는 살짝 복잡한 눈으로 아리스를 바라보았고, 루시엘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다섯 여신님들을 모시는 천사 루시엘이에요. 저쪽에 계신 분은 전투천사 사스치엘님이시고요.”
천호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호감을 이끌어내는 루시엘이었다.
아리스는 마주 생긋 웃은 뒤 루시엘이 가리킨 방향을 돌아보았다.
사스치엘이 렛맨 하나를 짓밟은 채 으르렁거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심문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성검 미트라님이세요.”
루시엘이 천호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히트 대거를 가리키며 말하자 아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검 미트라라면 제국 수호검이라 불리는··· 마왕을 물리친 초대 용사님의 성검 말씀이신가요?”
목소리에는 경탄과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네, 바로 그 미트라님이세요. 우리 용사님과 함께하고 계세요.”
루시엘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어렸다.
아니, 애당초 그냥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흠흠.”
천호가 민망하다는 듯, 하지만 내심 싫지 않다는 투로 헛기침을 토하자 아리스는 눈을 깜박이더니 고개까지 갸웃했다.
“어··· 그런데 성검 미트라는 장검이 아니었나요?”
전설 속의- 아니, 역사 속의 성검 미트라는 검은 손잡이와 하얀 검신을 가진 대검이었다.
그런데 지금 천호의 허리춤에 자리한 히트대거는 누가 봐도 단검이었다.
순간 흠칫한 루시엘은 입술을 움츠리다 말했다.
“그, 그게 사정이 좀 있어서······.”
[음.]
미트라는 무어라 길게 말하는 대신 천호처럼 짧게 말했고, 천호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러자 그것에 만족했는지, 미트라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여, 나를 뽑아 아리스에게 보여주어라. 손잡이 가운데 박힌 보석을 보면 그녀도 믿을 것이다.]
천호는 순순히 미트라의 말을 따랐다.
미트라의 보석을 본 아리스는 처음에는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이내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정말 성검 미트라군요. 의심하는 투가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의아해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 아량이 넓으시군요. 탄복했습니다.”
천호가 신사적으로 답하자 아리스가 마치 루시엘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천호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손바닥만한 그녀였지만 말이다.
“음.”
그래도 어쨌든 미녀라- 아니, 누군가가 저런 눈으로 바라봐주니 기분이 좋은 천호였다.
하지만 루시엘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더니 얼른 다른 말을 꺼냈다.
“아! 사스치엘님이 오고 계세요.”
마침 잘 되었다. 왜 잘 되었다고 느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행이라 생각한 루시엘이었다.
“사스치엘, 포레스트 엘프 마을의 촌장이신 아리스님입니다.”
천호가 아리스를 소개하자 사스치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천사 사스치엘이다.”
“아리스입니다. 인사드립니다.”
여전히 공손하게 예를 표하는 아리스였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가까이 다가오는 사스치엘의 존재가 공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겁나 크네.’
누워있을 때도 컸는데, 저렇게 일어서서 날개까지 펼치고 있으니 장갑차- 아니, 탱크가 따로 없었다.
어깨 높이만 2미터가 족히 될 것 같았고, 몸길이는 훨씬 길었다.
천호 자신에게도 위압감을 주는 사스치엘의 덩치였으니, 손바닥만한 아리스에게는 마치 산이 다가오는 기분일 터였다.
“사스치엘님, 뭔가 정보를 얻으셨나요?”
루시엘이 묻자 사스치엘은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렛맨들은 겁이 많고 비겁한 놈들이라 조금만 위협하면 정보를 줄줄 내뱉는다. 이곳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 심지어 포레스트 엘프들의 여왕과 왕녀까지도 놈들에게 붙잡힌 것 같다.”
“아리스님에게 방금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요정족에게 있어 여왕과 왕녀는 인간의 왕족과는 의미가 다르다. 종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종족의 현재와 미래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반드시 그녀들을 구출해야만 한다.”
천호는 히든 퀘스트 봐서 이미 안다고 답하는 대신 기다렸다. 사스치엘이 뭔가 더 할 말이 있어보였기 때문이다.
“놈들은 붙잡은 포레스트 엘프들을 제단 한 가운데 모으고 의식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요정들을 역병신에게 산제물로 바쳐 의식에 필요한 힘을 만들어내겠다는 속셈이지. 참으로 사악한 놈들이다.”
아리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새삼 남의 입을 통해 들으니 가슴이 철렁했기 때문이다.
“여왕과 왕녀 또한 같은 곳에 붙잡혀 있는 듯 하다. 의식은 앞으로 대략 4일 뒤··· 달의 조각이 떠오를 때인 것 같고.”
달의 조각.
천호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대강 어떤 의미일지는 짐작이 갔다.
뭐 보름달이나 초승달처럼 특별한 의미를 가진 달이겠지.
천호는 미궁 세계에도 해와 달이 뜨냐는 질문을 하는 대신 보다 중요한 부분에 집중했다.
“4일··· 그렇다면 아직 여유가 좀 있겠군요. 히든 퀘스트에도 제한시간이 102시간으로 나왔습니다.”
산제물로 쓰기 위해 붙잡아둔 것이니 의식 전에 목숨을 빼앗거나 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문제가 쉽지 않다. 제단이 있는 곳에는 역병신의 무리들이 새카맣게 몰려 있으니 말이다. 그 숫자가 못 해도 수백을 우습게 헤아릴 거다.”
제단을 막 만들기 시작한 1층과는 사정이 달랐다.
2층에서는 이미 일단의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적의 숫자가 수백 이상이라면 지금의 전력만으로는 역부족이겠군.]
일행 중에서 싸울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천호와 사스치엘뿐이었다.
더욱이 이번 임무는 포레스트 엘프들의 구출이었다. 일당백의 힘을 가진 두 사람이었지만, 아무래도 일손 자체가 부족했다.
“저··· 제게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때 아리스가 손을 작게 들며 말했다.
사스치엘이 물었다.
“설마 함께 싸우겠다는 것인가? 마음은 고맙지만 무리이다.”
“아뇨, 그게 아니라··· 이번 일의 도움을 청할 만한 곳을 알고 있습니다.”
일손이 부족하다면 늘리면 되는 일이었다.
“오··· 근방에 트리언트 일족이라도 있는 것인가?”
살아있는 나무라 할 수 있을 트리언트들이 도와준다면 일이 훨씬 수월해질 터였다.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트리언트 일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말고도 반드시 도움을 청해야 할 존재가 있습니다.”
“누굴 말하는 것이지?”
“포레스트 드래곤··· 위대한 숲의 수호자께서 멀지 않은 곳에 계십니다.”
“오오.”
사스치엘이 감탄했고, 루시엘이 눈을 반짝였다. 천호 역시 속으로나마 탄성을 토했다.
‘포레스트 드래곤!’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존재인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드래곤이라 하지 않는가.
드래곤.
환상의 정수.
판타지의 꽃!
“그런데 아리스, 멀지 않은 곳에 포레스트 드래곤이 있다면 왜 진즉 도움을 청하지 않은 것인가.”
사스치엘의 물음에 아리스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포레스트 드래곤께서 응답하지 않고 계십니다. 포레스트 드래곤을 보필하는 용의 무녀들도 묵묵부답이고요. 하지만 천사님들께서 도움을 청하신다면··· 반드시 대답이 돌아올 것입니다.”
1층의 탑에서 만났던 지박령들도 그렇고, 미궁 세계의 주민들에게 있어 천사는 꽤나 큰 의미를 가진 존재인 것 같았다.
‘하긴, 말 그대로 신의 사자들이니까.’
신의 존재가 너무나 당연시되는 세상이니 신의 사자인 천사들이 대우받는 것은 당연했다.
천호는 새삼 루시엘을 돌아보았고, 시선을 느낀 루시엘은 천호를 돌아보더니 생긋 웃었다.
‘음.’
역시 루시엘이 최고였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방금 아리스의 말에는 신경 쓰이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용의 무녀들이요?”
천호의 물음에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포레스트 드래곤을 보필하는 요정족 자매입니다.”
그렇다면 포레스트 엘프라는 소리인가.
“저희와 같은 요정족이기는 하지만··· 차이가 큽니다. 그녀들은 쉐도우 엘프 출신이거든요.”
“쉐도우 엘프요?”
“네,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쉐도우 엘프들은 요정족 중에서도 특히 몸이 날래고 어둠의 마법에 능한 자들이다.]
[레온과 함께 모험한 동료들 중에도 쉐도우 엘프가 하나 있었지······.]
미트라가 급 회상모드에 들어간 그때 천호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버지,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뭐냐, 아들아.’
‘아버지 이야기를 듣다보니 생각난 건데요, 왜 다 여자에요?’
뭐 어디만 갔다하면 여자였다.
요정족 여왕, 어느 나라의 왕녀, 판타지의 단골인 성녀, 가끔 만나는 드래곤이나 악마도 하필 여자.
어린 천호의 순수한 물음에 아버지께서는 사나이의 미소를 지으시더니 먼 곳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글쎄, 왜 그럴까.’
어쩌면 어른의 사정인 것은 아닐까.
어린 천호는 아버지의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먼 곳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이 멋지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사실, 아버지의 이야기에는 남자도 많이 나왔다. 천호가 남자는 기억을 대충해서 그렇지.
“음.”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천호가 다시 아리스에게 물었다.
“아리스님, 포레스트 드래곤이 있는 곳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되죠?”
“저희 걸음으로는 며칠 걸릴 거리입니다만··· 용사님과 천사님들이라면 하루가 채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렇군요. 그럼 일단 밥부터 먹죠.”
“네, 그··· 네?”
아리스가 저도 모르게 되묻자 사스치엘 역시 눈을 껌벅였다.
“밥을 먹자고?”
“예, 점심때고, 한바탕 싸움도 했으니까요. 더욱이 의식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고요.”
서두른다고 능사가 아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충분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일단 평소에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어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 그렇긴 하군.”
“포레스트 엘프 분들도 많이 지치셨을테고요. 일단 배가 불러야 일할 힘도 날 테니 밥부터 먹죠.”
거기까지 말한 천호는 루시엘을 돌아보았고, 루시엘은 아리스와 사스치엘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미 익숙했으니까.
그리고 천호의 요리는 언제나 환영이었으니까.
“네, 용사님.”
활짝 웃은 루시엘이 인벤토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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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빛의 창을 따라 이동하던 아우라엘은 입술을 깨문 채 낮은 신음을 흘렸다.
지금까지 가야할 길을 인도해주던 빛의 창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구조 요청]
[구조 신호가 사라졌습니다.]
셋 중 하나였다.
구조 대상이 이미 죽었거나, 자력으로 위기를 벗어났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구조되었거나.
“어, 어떡하죠?”
에이젤이 불안한 목소리로 묻자 라구엘은 바로 답하는 대신 잠시 침묵했고, 아우라엘은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계속 가자.”
구조가 불가능한 상황에 처했다면 동료의 복수를 위해, 자력으로 위기를 벗어났거나 누군가의 구조를 받았다면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빛의 창이 사라지며 지도 역시 사라졌지만 대강의 위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그게 최선이겠지.”
라구엘까지 동의하자 에이젤은 우물쭈물 고개를 끄덕였다.
라구엘이 그런 에이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될 거란다. 너무 걱정하지 마렴.”
“네, 선배-.”
거기까지였다. 에이젤의 배에서 갑자기 꼬르륵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제법 커다란 소리에 민망해진 에이젤은 얼굴을 붉혔고, 아우라엘은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라구엘은 고개를 숙인 채 부끄러워하는 에이젤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더니 이내 품안에서 비상식을 꺼냈다.
“먹으렴.”
“어, 하지만 그건 선배님의······.”
“난 괜찮아. 배가 불러서 남겨둔 거니까.”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에이젤은 눈시울을 붉혔고, 라구엘은 그런 에이젤의 손에 비상식을 쥐어주었다.
“아우라엘, 출발하자.”
“그래.”
아우라엘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의 상황 때문만이 아니었다. 울먹이며 비상식을 먹는 에이젤의 모습에서 루시엘을 보았기 때문이다.
가엾은 루시엘. 홀로 떨어져서 얼마나 무서울까. 벌써 삼일 째인데 얼마나 배가 고플까.
“가자.”
라구엘이 다시 말했고, 아우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픈 마음과 주린 배를 움켜쥔 채 발걸음을 내디뎠다.
&
“꺼억.”
< 제2장 - 2층 #4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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