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장 - 2층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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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들아, 분노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진정한 힘은 분노가 아닌 용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옳으셨다.
그리고 천호는 늘 그랬듯이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고 있었다.
아니, 진짜로.
도약했다.
눈동자를 굴렸고, 전장 전체를 눈에 담았다.
평면이 아닌 공간으로서 전장을 인식했다.
렛맨의 숫자.
자이언트 렛의 숫자.
놈들은 넓게 산개해 있었다.
그 숫자가 스물을 넘어 서른을 헤아린다 한들 군데군데 빈틈이 있었다.
시간과 거리와 공간을 고려한다면, 싸움 방식에 따라, 천호 자신의 동선에 따라 대적해야 할 적의 숫자가 바뀔 수 있었다.
삼십 대 일이 아니었다.
일 대 일 혹은 이 대 일의 싸움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이었다.
후.
숨을 토했다. 그것으로 호흡을 정돈했다. 전환했고, 전신을 긴장시켰다. 내공을 퍼트려 육체의 성능을 끌어올렸다.
하.
다시 토했다. 지상에 안착한 그 순간 자세를 낮췄다.
렛맨 일부가 천호를 보았다. 마을에 정신이 팔려 아직 천호를 보지 못 한 놈도 있었다.
미트라가 무어라 말했다.
천호는 들으며 움직였다.
거의 기계처럼 포착한 적들의 순번을 정하였다.
쿵!
지면을 박찬 순간 소리가 터졌다.
천호가 지면을 밀어냈다. 지면이 천호를 밀어냈다.
쏘아낸 화살이 된 천호가 렛맨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찌직!”
“찍!”
자이언트 렛들이 시끄럽게 소리쳤다.
렛맨들은 너무나 빠른 천호의 움직임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 했다.
일수.
히트 대거를 휘둘렀다.
손에 포레스트 엘프 여인을 움켜쥐고 있던 렛맨의 손목이었다.
피가 솟았고, 놈이 비명을 질렀다. 놈의 손가락에 힘이 풀린 그때 천호가 다시 손을 놀렸다. 포레스트 엘프를 낚아챔과 동시에 손목이 갈라진 놈을 발로 차 날려버렸다.
쿵!
놈이 바닥을 뒹굴었다. 천호의 손에 들어간 포레스트 엘프가 짧은 비명을 질렀고, 천호는 그녀를 교복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왼손에 느껴진 감각에 얼굴이 약간이지만 화끈거렸다.
후.
다시 숨을 토했다.
몸을 회전시키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나이프들을 연달아 내쏘았다.
“칵!”
“컥!”
달려오던 렛맨 두 마리가 목에 칼이 박혀 나자빠졌다.
놈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천호는 다시 히트 대거를 휘둘렀다. 조잡한 칼을 휘두르려던 렛맨의 목을 가르고 다시 지면을 박찼다.
하!
높이 뛰어올랐다. 조금 많이 높았다. 2미터 이상을 수직으로 솟구쳤고, 그런 천호의 발 아래 공간을 돌진하던 렛맨이 그대로 지나쳤다. 어리둥절하는 놈의 뒤통수에 나이프를 꽂아주었다.
탁.
소리가 났다.
무척이나 작은 소리였다. 마치 고양이처럼 지면에 안착한 천호가 고개를 들었다. 일어남과 동시에 솟구쳐 올랐고, 다시 한 번 렛맨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왕국검법.
파이엔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하나인 검의 나라 달 세뇨의 검법이었다.
내공을 사용하는 무공이 아닌, 순수한 검술이었다.
찍고 가르고 찌른다.
렛맨의 눈을 찍었다. 그대로 땅으로 찍어 눌러 턱부터 자빠지게 한 뒤 히트 대거를 뽑았다. 그대로 휘둘러 달려드는 렛맨의 목을 갈랐다. 피가 튀었고, 천호는 움직였다. 한 걸음을 내디디며 몸을 틀었고, 옆에서 달려들던 렛맨의 심장을 찔렀다.
인체에는 약점이 많았다.
인간형의 괴물들은 대부분 그 약점을 공유했다.
천호가 히트대거를 비틀었다. 심장이 찔린 놈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고, 천호는 놈과 함께 무게중심을 땅으로 향했다. 그대로 땅을 뒹굴 굴러 하늘에서 타작하듯 쏟아진 렛맨들의 창대 공격을 피했다.
파파팍!
창대가 맨땅을 때렸다. 천호가 다시 지면을 박찼다. 마치 고무공같은 탄력이었다. 천호는 지면을 향한 창대 위에 올라탔고, 당황하는 렛맨들을 향해 나이프를 던져주었다.
두 놈이 쓰러졌다.
한 놈이 창을 비틀었고, 천호는 놈의 힘을 이용해 뛰어올랐다. 공중제비를 돌며 던진 나이프가 놈의 미간 사이를 꿰뚫었다.
다시 탁.
다시 하.
착지하고 숨을 토했다. 그 순간 천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광경이 떠올랐다.
자신의 등 뒤로 무언가가 날아오는 모습이었다.
사람은 자신의 뒤통수를 볼 수 없었다.
때문에 진짜로 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천호는 그것이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수많은 전투경험이 만들어낸 상상은 현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대여! 등-]
미트라가 소리쳤다.
그리고 그때 이미 천호는 움직이고 있었다.
몸을 회전시켰다. 공기를 읽었다. 바람의 흐름을 느꼈다. 날카롭게 연마된 감각이 알려주었다.
착.
석궁에서 발사된 화살을 붙잡았다.
손바닥이 쓸렸다. 천호는 화살이 나아가던 방향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아직 남아있는 화살의 힘을 이용하듯 반 바퀴 회전한 그때 화살을 내쏘았다.
날아온 궤적 그대로 되돌려 보내면 그 끝에는 적이 있기 마련이었다.
퍽!
석궁을 들고 있던 렛맨의 가슴을 화살이 꿰뚫었다. 놈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눈을 크게 뜬 채 나자빠졌다.
후.
천호가 숨을 토했다.
그리고 전장이 고요해졌다.
아직 렛맨들과 자이언트 렛들이 몇 마리 남아있음에도 그리될 수밖에 없었다.
미트라조차 등 뒤에서 날아온 화살을 낚아채 사수를 쓰러트린 천호의 기행- 아니, 초월적인 움직임에 순간 말문을 잃었다.
차라리 천호가 어마어마한 크기의 오라 블레이드를 휘둘러 렛맨 수십 마리를 일격에 쓰러트렸다면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리고 모두가 압도된 그때 천호는 생각했다.
‘이, 이게 되네.’
솔직히 말해 얼결에 해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해냈다는 사실이었고, 천호는 당황하는 대신 진중한 전사의 표정을 유지했다.
“사스치엘!”
그 순간 천호가 소리쳤다.
전장의 고요를 만든 자가 다시 한 번 고요를 깨트렸다.
압도되어 있던 렛맨들과 자이언트 렛들이 움찔하며 눈동자를 굴렸고, 호명된 사스치엘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미트라와 마찬가지로 말문을 잃고 있던 그였다.
바로 반응하기는커녕 렛맨들과 마찬가지로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되었다. 천호가 바란 것은 사스치엘의 즉각적인 조력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한 순간.
렛맨들이 당황하게 되는 그때.
호세사천왕.
비루다카의 장.
신속의 스칸다.
전장에 한줄기 바람이 불었다.
천호가 질풍이 되었다.
등에 커다란 바구니를 메고 있는 놈을 향해 질주했다.
렛맨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천호의 히트대거가 놈의 심장을 후벼 판 직후였다.
“커헉!”
놈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천호는 바구니 안을 보았고, 포레스트 엘프들을 확인했다.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사스치엘!”
“크헝!”
이번에는 사스치엘도 바보처럼 굴지 않았다.
사자답게 포효하며 아직 남은 렛맨들과 자이언트 렛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천호도 움직였다.
어느새 뽑아든 쿠크리가 천호의 왼손에 쥐어져 있었다.
“오오······.”
도망쳤던 포레스트 엘프들이 나뭇잎이나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긴 채 천호의 압도적인 전투를 바라보았다.
개중 몇은 마을 입구에 서서 차오른 숨을 고르고 있던 루시엘의 곁에 다가서기도 했다.
루시엘이 그런 포레스트 엘프들을 보았다. 저도 모르게 약간은 젠체하며 말했다.
“우리 용사님이에요.”
멋있죠?
루시엘이 환하게 웃었고, 포레스트 엘프들은 큰 눈을 깜박였다. 약간은 멍한 얼굴로 고개들을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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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퀘스트 ‘포레스트 엘프 구조’를 완수했습니다.]
[히든 퀘스트 보상 : 요정들의 조력자 Lv1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요정들의 조력자 Lv1 : 요정들이 당신에게 호감을 보입니다.]
[히든 퀘스트 보상 : 요정신이 당신에게 긍정적인 관심을 보입니다.]
연달아 떠오른 빛의 창에 천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타이틀이야 천사들의 조력자와 비슷했지만, 요정신의 관심이라니.
‘치유의 신과 요리의 신에 이어 세 번째 신인가.’
뭔가 상식적(?)으로 보면 여신일 것 같았지만, 어쩐지 흐름상 남신이 아닐까 의심이 되었다.
[요정신은 여러 여신들 가운데서도 아름답다고 정평이 난 여신이다.]
[그녀의 힘이 깃든 요정신검 클라우 솔라스는 나의 친우이지.]
“음.”
과연. 여신인가.
하지만 당장은 몇 마디 대화조차 나눌 수 없는 대상들이었다.
‘애당초 보상 때문에 구한 것도 아니고.’
히트 대거와 쿠크리에 묻은 피를 털어낸 천호는 바구니에 갇혀있는 포레스트 엘프들의 상태를 살폈다.
다들 많이 놀란 것 같았지만, 크게 다친 이는 없는 것 같았다.
‘근데 다들 진짜 예쁘네.’
작아서 정말 인형들 같았다. 뭔가 책장 같은 곳에 세워두면 뿌듯할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음.”
머리를 흔들어 이상한 생각을 털어낸 천호는 나름 정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투는 끝났습니다. 지금 바로 해방시켜드리겠습니다.”
얼굴에 눈물자국이 선명한 포레스트 엘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은 작게나마 대답했고, 고맙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다행이다.’
다친 사람이 없어서.
[그대여, 무언가를 잊고 있지 않은가?]
“아.”
미트라의 말대로였다. 천호는 얼른 교복 상의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은 뒤 안주머니 쪽에 말했다.
“이제 안전하니까 나오셔도 됩니다.”
그러자 잠시 후 포레스트 엘프 하나가 교복 안주머니 안에서 꾸물꾸물 기어나왔다.
나뭇잎 느낌이 물씬 나는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황금빛 머리칼이 엉덩이에 닿을만치 길었다.
“가, 감사합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고요?”
“네, 덕분에··· 정말 감사해요.”
금발벽안의 포레스트 엘프가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정말 마음에서 우러난 감사 같았다.
“흠흠.”
애써 표정을 유지한 천호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스치엘은 렛맨 하나를 발로 짓밟은 채 무어라 윽박지르고 있었고, 루시엘은 어느새 모여든 포레스트 엘프들과 마을에 난 불을 끄고 있었다.
“촌장님!”
“아아, 촌장님.”
“무사하셨군요.”
“무서웠어요.”
천호의 안주머니에서 나온 금발 포레스트 엘프의 곁에 다른 포레스트 엘프들이 모여들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마을의 촌장인 모양이었다.
“저··· 은인이시여.”
포레스트 엘프들에게 둘러싸인 촌장 엘프가 천호를 올려다보며 어색하게 말했다.
천호 역시 어색했기에 자세를 낮춰 그나마 시선을 맞춘 뒤 바로 대답했다.
“박천호입니다.”
“우리 용사님이세요.”
어느새 다가온 루시엘이 천호의 옆에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기분 탓인지, 아니면 정말인지 ‘우리’에 악센트를 넣은 기분이었다.
“음.”
어쨌든 뭔가 좋은 기분이었기에 천호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그런데 불은 어떻게 한··· 헤에.’
끝에 가서 약간의 감탄을 토한 이유는 단순했다.
루시엘이 마을의 불을 어떻게 껐는지를 바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무식하면서도 깔끔한 방법이었다.
가장 큰 불이 난 곳 옆에는 속이 텅 빈 목욕탕이 세워져 있었고, 바닥에는 물이 흥건했다.
언제 물이 필요할지 모른다며 목욕탕을 채운 상태로 인벤토리에 넣어뒀었는데, 그 물을 한 번에 부어버려 불 끄는데 사용한 것이었다.
은근히 응용력이 좋은 루시엘이었다.
“잘 했어요, 루시엘.”
“네, 용사님.”
천호가 칭찬하자 루시엘이 생긋 웃었다. 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천호는 주먹을 꽉 쥐는 것으로 충동을 억눌렀다.
“저··· 그럼 용사님.”
“네, 촌장님.”
천호가 다시 촌장을 돌아보았다. 루시엘은 손바닥을 내밀어 촌장을 태우더니 그대로 들어 올려 천호와 눈높이가 맞게 해주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정말 용사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버지께 들었을 때는 오글거리기 짝이 없는 대사였는데, 역시 용사의 18번 대사였다. 연습해두길 잘했다고 천호는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천호의 대답을 들은 촌장은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그··· 이미 구해주신 분께 죄송한 말씀이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제발 저희를 도와주세요.”
“어떤 부탁이죠?”
“렛맨들이 저희 포레스트 엘프들을 납치하고 있는 건 제물로 쓰기 위함입니다. 이미 몇 개나 되는 마을들이 공격당한 걸로 압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왕족 분들도······.”
이야기를 하다 말고 촌장이 울음을 터트렸다.
루시엘은 그녀를 따라 울상을 지었고, 천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미 몇 개나 되는 마을이 공격당했다.
제물로 쓰기 위해 포레스트 엘프들을 납치하고 있다.
그리고 포레스트 엘프들의 왕족들도 놈들에게 붙잡혔다.
쉬이 넘길 수 있는 이야기들이 아니었다.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드리겠습니다. 제발 저희 동족들을, 왕족 분들을 구해주세요.”
촌장이 무릎을 꿇으며 간청했다. 주변에 있던 포레스트 엘프들 역시 무릎을 꿇거나 절하며 애원했다.
“용사님.”
루시엘이 천호를 보았고, 천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역병신의 제단을 파괴하기 위해 놈들과 한판 붙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트라가 말했다.
[포레스트 엘프의 왕족들은 특별하다.]
[평범한 포레스트 엘프들과 달리, 왕족들은 덩치가 작지 않다. 거의 인간과 대등한 수준이지. 때문에 알아보기 쉬울 것이다.]
“음.”
어차피 구하려 했다.
딱히 미트라가 무어라 하지 않았어도 천호 자신의 대답은 그대로였을 터였다.
가슴에 손을 얹고도 말할 수 있었다.
[히든 퀘스트 : 왕족 구출]
[포레스트 엘프의 여왕과 왕녀를 구출하십시오]
[여왕을 잃은 요정족은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포레스트 엘프들의 미래를 지켜주십시오.]
[퀘스트 유지 시간 : 102시간]
여왕과 왕녀.
불현 듯 떠오르는 아버지의 말씀.
“음.”
천호는 루시엘을 보았고, 연이어 포레스트 엘프의 촌장을 보았다.
용사다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포레스트 엘프들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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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 2층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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