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장 - 2층 #2 >
&
7급 전투천사 사스치엘.
그는 금빛 갈기와 털을 가진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냥 사자가 아니었다.
등에는 새하얗고 커다란 날개가 달려있었고, 머리 위에는 빛의 고리가 있었으며, 몸에는 순백의 천과 황금으로 장식된 부분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옆으로 누운 채 몸을 늘어트린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피로와 고통이 묻어났다. 자세히 보니 몸 곳곳에 부러진 화살이 박혀있었고, 허리에는 길게 자상까지 나 있었다.
“사스치엘님, 전 9급 천사 루시엘입니다. 금방 치료해드릴게요.”
다급히 말한 루시엘이 사스치엘의 허리 쪽으로 이동했다.
루시엘과 비교해보니 상당히- 아니, 그냥 대놓고 거대한 사스치엘이었다.
‘동물원에서 보던 사자랑은 비교가 안 되네.’
덩치가 작은 편인 루시엘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사스치엘이 그냥 컸다.
둘의 덩치 차이가 과장 조금 보태 다섯 배 이상은 날 것 같았다.
천호는 바로 치료를 시작한 루시엘에게 다가가 함께 사스치엘의 상처를 보았다.
허리에 난 상처의 변색 정도를 보니 단순히 베인 게 아니라 독에도 당한 것 같았다.
“루시엘, 일단 정화마법으로 해독부터 하세요.”
“네, 용사님.”
“그리고······.”
천호는 루시엘에게 부탁해 인벤토리에서 담요를 꺼낸 뒤 루시엘과 사스치엘의 허리 부분을 뒤덮었다.
그늘로 인해 생겨난 어둠 속에서 루시엘이 발하는 분홍색 빛이 너무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답답하겠지만 조금만 참아요.”
“네.”
짧게 답한 루시엘은 바로 치료에 집중했다.
천호는 사스치엘을 한 번 돌아본 뒤 히트 대거를 허리춤에 꽂고 양손에 투척용 나이프를 나눠 들었다.
미트라가 낮게 말했다.
[마물들이 몰려오고 있다.]
천호도 알고 있었다.
사스치엘의 피 냄새를 맡고 근방에 모여들었던 마물들이었다. 루시엘이 처음 발했던 빛을 보고 확실한 방향을 잡았으리라.
[주변에 결계가 펼쳐져 있다. 아마도 저 사자 천사가 펼친 것이겠지.]
피 냄새를 맡고 모여들었음에도 마물들이 근방을 헤매고 있던 원인이었다.
천호는 앞으로 나서며 숨을 길게 토했다.
결계의 효과가 아직 유효한지, 마물들이 사방에서 일시에 달려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천호는 눈을 감았다.
어두운 그늘 속에서 시각에 의존하는 대신 청각에 의식을 집중했다.
동시에 기감을 넓게 퍼트려 주변을 감지했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기감이 놈들의 위치를 보다 명확하게 알려주었다.
천호의 양손이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나이프 두 개가 허공을 갈랐고, 이름 모를 마물 하나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동그라졌다.
발소리로 놈들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가벼웠다.
자이언트 렛보다도 작은 마물임에 분명했다.
외마디 비명이 터진 위치와 높이로 말미암아 놈들의 머리높이를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천호의 머릿속에 놈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이는 보다 정확한 투척을 가능케 하였다.
열두 개의 나이프를 던졌다.
열두 마리의 마물들이 바닥을 뒹굴었고, 미트라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토했다.
놀란 것은 미트라만이 아니었다.
[당신의 경이로운 투척술에 미궁 세계가 감탄합니다.]
[투척술 Lv5가 경이로운 투척술 Lv1로 진화합니다.]
[경이로운 투척술 : 어떤 자세로 던져도 투척물이 정자세로 던졌을 때의 힘과 속도를 가집니다.]
천호는 눈을 떴다. 더 이상 들려오는 발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루시엘 쪽을 돌아보니 여전히 담요 속에서 치유 마법을 연창하는 듯 했다.
[정말 놀랍군. 대체 어떤 교육을 받으며 자란 것이지?]
‘판타지요.’
아버지가 용사고 어머니가 마법사였으니 가정교육을 판타지로 받은 게 맞겠지.
하지만 사실 천호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이게 진짜 되네.’
미궁 세계에 오기 전에는 불가능한 기예였다.
레벨 업을 통한 신체능력 상승과 내공을 이용한 기척 감지가 더해진 결과였다.
조금이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 스스로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일단 회수부터 하자.’
심호흡으로 흥분을 가라앉힌 천호는 나이프 회수를 위해 마물들의 사체 근처로 발걸음을 떼었다.
마물들의 사체를 살핀 미트라가 다시 말했다.
[외뿔 토끼들이군.]
[머리에 난 뿔로 들이박거나 이빨로 깨물어 피를 빨아먹는 마물들이다.]
유니콘처럼 이마에 뿔이 난 토끼들이었는데, 예상대로 자이언트 렛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덩치가 제법 되었다.
‘고기가 꽤 나오겠네.’
털도 보들보들하고.
한국에서는 드물었지만, 외국에서는 고기와 가죽을 얻기 위해 토끼를 많이 길렀다.
탕을 끓여도 좋고, 구워도 좋은 게 토끼 고기였다.
‘단백질도 풍부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외뿔 토끼들의 사체를 모은 천호는 나이프들을 회수한 뒤 루시엘과 사스치엘 쪽으로 이동했다.
마침 치료가 끝났는지 루시엘이 담요 밖으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후, 급한 불을 껐어요. 이제 괜찮을 거예요.”
“수고했어요.”
천호가 웃으며 손수건을 내밀자 땀투성이가 되어있던 루시엘은 방긋 웃으며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어, 그런데 용사님, 그새 잡으신 거예요?”
“네, 오늘 저녁엔 토끼탕을 끓여드릴게요. 기대해도 좋아요.”
“네, 용사님.”
루시엘이 군침을 꿀꺽 삼키며 외뿔 토끼들을 보았다.
이미 쥐고기와 스켈레톤 사골국물을 섭력한 그녀에게 토끼탕은 참으로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요리였다.
“가죽은 벗겨서 베개를 만들까 해요.”
“와, 정말요?”
“네, 가죽이 많으니 장갑이나 목도리를 만들어도 좋겠죠. 색도 하얀색이라 예쁠 거예요.”
“용사님 너무 멋있으세요.”
“음.”
천호가 애써 미소를 감춘 채 멋진 표정을 지었고, 루시엘은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미트라가 말했다.
[그대들이여, 훈훈한 건 좋다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다.]
“음.”
맞는 말이었다.
정신줄을 챙긴 천호는 루시엘에게 물었다.
“루시엘, 사스치엘과는 대화가 가능한 상태인가요?”
“가능···하다. 용사여······.”
대답은 사스치엘 본인에게서 돌아왔다.
뭔가 좀 이상한 표현이었지만, 여간한 사람보다도 잘생긴 사자였는데, 목소리까지 중후하고 멋졌다.
‘눈도 파란색이네.’
문자 그대로 금발벽안.
천호는 어쩐지 모를 한숨을 토한 뒤 다시 물었다.
“사스치엘, 움직일 수 있습니까? 일단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근방에 모여든 놈들은 잡았지만, 일단은 이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사스치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알겠다, 용사여. 그리고··· 그대들에게 급히 전할 일이 있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운 사스치엘은 쥐어짜낸 목소리로나마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저층에서의 정찰 임무를 맡은 부대에 속해 있었다. 역병신의 무리들을 쫓아 변방에 오게 되었는데··· 놈들이 파놓은 함정에 당해 분대가 궤멸하고 말았다. 분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간신히 살아남은 난 놈들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이동하던 중 놈들의 사악한 음모를 알게 되었다.”
거기까지 말한 사스치엘은 숨을 몇 번 고른 뒤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자 했다.
하지만 루시엘이 조금 더 빨랐다.
“어··· 혹시 역병신이 저층에 제단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무언가 사악한 의식을 진행하고 있고요.”
루시엘의 물음에 사스치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그 사실을 어떻게?”
“어······.”
루시엘은 어설프게 웃으며 천호를 돌아보았고,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엘을 대신해 설명했다.
“이미 1층에서 제단을 파괴했습니다. 2층의 제단 역시 파괴할 계획이고요.”
“오오······.”
사스치엘이 마음에서 우러난 감탄을 토했다.
천호를 보는 눈빛 자체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용사여, 의식이 완성되면 미궁 세계에 크나큰 환란이 닥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의식이 완성되기 전에 놈들을 막아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천호가 그렇게 답한 순간이었다.
[크로니클 퀘스트 : 역병신의 대적자]
[전투천사 사스치엘이 2층의 제단 위치를 대략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스치엘과 협력해 역병신의 음모를 저지하십시오.]
때를 맞추듯 빛의 창이 떠올랐다.
그리고 연이어 새로운 빛의 창이 나타났다.
[히든 퀘스트 ‘구조요청’를 완수했습니다.]
[히든 퀘스트 보상 : 7급 전투천사 사스치엘의 합류]
[히든 퀘스트 보상 : 천사들의 조력자 Lv1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천사들의 조력자 : 천사들이 당신에게 호감을 보입니다.]
[히든 퀘스트 보상 : 중급 힐링 포션]
“음.”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첫 번째 보상은 뭔가 저게 보상이 맞나 싶은 수준이었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가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번엔 레벨도 있네.’
쥐 학살자나 렛 오거 슬레이어에는 없던 레벨이었다. 어떻게 키워야 할지 감도 안 왔지만, 잘 키우면 생각 이상으로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회복 포션이야 언제나 좋고.’
손바닥 위에 나타난 붉은색 물약을 주머니에 챙긴 천호는 사스치엘을 돌아보았다.
“사스치엘, 그럼 일단 이동-.”
거기까지였다.
천호가 말을 끊었다. 사스치엘과 루시엘이 거의 동시에 다른 곳을 보았고, 천호 또한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들렸다.
어둠 저 너머로 불길이 보였다.
어두운 그늘 속이었기에 거리도 멀고 장애물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불길을 명확히 볼 수 있었다.
“안 돼.”
사스치엘이 불현 듯 말했다. 다급히 몸을 일으킨 그가 빠르게 덧붙였다.
“도주하던 중에 요정족의 마을을 보았다. 날 추적해온 놈들이 요정족의 마을을 공격한 게 분명하다.”
“요정족? 설마 포레스트 엘프들이요?”
루시엘의 물음에 사스치엘이 고개를 끄덕였고, 천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서두르죠.”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있다면 구해야 했다.
더욱이 요정족- 포레스트 엘프라 하지 않는가.
[포레스트 엘프··· 과거에 마주한 적이 있다. 종족 전체가 아름다운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숲에 사는 요정족이다.]
미트라가 말했고, 천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루시엘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불길이 일어난 방향을 노려보았고, 사스치엘이 힘겹게나마 지면을 박찼다.
[히든 퀘스트 : 포레스트 엘프 구조]
[위험에 처한 포레스트 엘프들을 구조하십시오.]
천호는 달리기 시작했다.
&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들아, 내가 파이엔에서 본 여인들 중에서 두 번째로 아름다운 여인은 엘프들의 여왕이었단다.’
‘엘프들의 여왕이요?’
‘그래, 엘프. 아아, 엘프.’
아버지께서 같은 말을 반복하시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때문에 어린 천호는 아버지의 말씀을 평소보다 더 깊이 새겨들었다.
‘음.’
딱히 흑심이 있는 게 아니었다.
용사로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서두르는 것뿐이었다.
구해야 할 대상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엘프.
귀가 긴 엘프.
천사와 달리 아름다운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포레스트 엘프.
갈기 달린 수사자 천사가 아니라 아름다운 금발의, 어른스런 느낌을 풍기는 연상의 여성 엘프.
천호는 집중했다.
지면을 박찰 때마다 소리가 커졌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이제는 비명 소리까지 들려왔다.
치솟는 불길.
불타는 마을.
마을을 공격하고 있는 마물들.
딴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히트 대거를 움켜쥔 천호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부상 때문에 발이 느린 사스치엘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였다.
어둠이 걷혔다.
숲 한 가운데 공터가 있었고, 공터 한가운데 마을이 있었다.
천호를 발견한 마물들이 무어라 소리를 질러댔고, 마찬가지로 천호를 본 포레스트 엘프들이 울부짖으며 구원을 청했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
애당초 그럴 생각으로 온 것이었고.
하지만 천호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음.”
손바닥만한 크기의 포레스트 엘프들이 열심히 달려서 도망쳤다.
몇몇은 천호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기까지 했다.
“음.”
작고 예쁜 인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포레스트 엘프들이 숲으로 숨었다.
마찬가지로 작고 예쁜 미니어쳐 마을을 공격하던 자이언트 렛들과 쥐인간- 포레스트 엘프들에게 있어서는 거인족이나 다름없던 렛맨들이 천호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용사님!”
등 뒤 멀리서 루시엘의 목소리가 들렸고, 사스치엘의 것으로 추정되는 포효 소리도 들려왔다.
“음.”
[그대여?]
미트라가 물었고, 천호는 숨을 길게 토했다.
히트 대거를 꽉 움켜쥔 채 렛맨들을 향해 돌진했다.
분노의 질주였다.
&
< 제2장 - 2층 #2 > 끝
ⓒ 취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