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9화 (19/211)

< 제1장 - 1층 #18 >

&

[번뇌력 Lv1을 획득했습니다.]

[고유 능력 : 번뇌력]

[인간의 오욕칠정에서 비롯된 끓어오르는 번뇌를 강철 같은 의지로 초월, 극복, 승화시켜 자신의 힘으로 삼는다.]

[1. 집중력 50% 상승]

[2. 용솟음치는 번뇌를 힘으로 바꾼다.]

[Lv 상승시 번뇌력의 새로운 능력이 개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궁 세계가 당신의 고유 능력을 기억합니다.]

[미궁 세계가 새로운 고유 능력을 개발해낸 당신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잠에서 깬 천호는 멍한 눈으로 눈앞에 뜬 빛의 창을 바라보았다.

천호의 솔직한 심정은 이러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잠에서 깰 때까지는 좋았다.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으니까.

억지로 깨는 게 아닌, 충분히 잠을 잤기에 가능한 기상이었으니까.

‘음.’

천호는 다시 빛의 창을 정독했다.

레벨 업이나 아이템 획득, 업적 달성 등과 달리 지금 같은 스킬이나 세부 능력치 확인은 오직 천호 자신만이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솔직히 남에게 보여주기 민망한 능력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와 별개로 천호는 생각했다.

‘괜찮은데?’

사용하면 집중력을 급격히 높일 수 있었다.

더욱이 번뇌를 힘으로 바꿀 수 있다니.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인지는 사용해봐야 알 것 같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쁠 것이 없었다.

‘아버지.’

천호는 잠시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나마 아버지께 감사했다.

아버지의 교육이 없었다면 지금 같은 스킬이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

번뇌조차 초월하는 강철 같은 의지의 힘이라니.

뭔가 병신 같으면서도 멋있었다.

상상 속의 아버지께서 엄지를 세우며 씩 웃으셨다.

그리고 미트라가 말했다.

[흠, 그대의 번뇌와 의지가 양쪽 모두 비범한 모양이군.]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따로 능력이 생길 정도이니 말이야.]

천호는 흠칫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트라에게는 빛의 창이 모두 보인단 말인가?

‘설마 내 마음까지 읽는다든가?’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속으로 미트라 욕을 몇 번 해보았지만, 딱히 반응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보다 그대여, 이제 슬슬 일어나는 것이 어떤가.]

[루시엘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천호는 다시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옆을 돌아보았고, 눈을 뜬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루시엘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음.”

다행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진즉부터 깨어있었는지, 루시엘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용사님, 좋은 아침이에요.”

“네, 좋은 아침입니다.”

답하자 루시엘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보아하니 진즉에 깼지만 천호 자신에게 날개를 덮어주기 위해 일어나지 않고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냥 깨워도 되는데.’

“곤히 주무셔서 조금 기다려봤어요. 어제도 잠을 통 못 주무신 것 같아서.”

천호의 속내를 읽기라도 했는지 루시엘이 연이어 말했다.

아무래도 어제 아침 퀭한 눈으로 일어난 것을 신경 쓴 모양이었다.

“음, 감사합니다.”

적당히 답하며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5분이었다.

이 정도면 조금 기다린 게 아니라 한 시간도 넘게 기다렸으리라.

늦잠을 잔 덕에 개운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좀 미안했다.

“마실 물 떠올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다시 생긋 웃은 루시엘이 샘물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천호가 무심코 말했다.

“진짜 천사 같지 않아요?”

어쩜 저렇게 착할까.

천호의 말에 미트라가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

[그대여, 그녀는 진짜 천사다.]

“음.”

생각해보니 그렇네.

천사 맞구나. 날개도 달렸고.

고개를 몇 번 끄덕인 천호는 샘물에서 물을 뜨는 루시엘을 보다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 아침에 할 작업과 2층으로의 출발 준비 등을 떠올리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

루시엘이 돌연 큰소리를 내었다.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천호는 루시엘을 보았고, 루시엘은 허공을 응시한 채 빠르게 손을 놀렸다. 무언가 빛의 창이 뜬 것 같았다.

“루시엘?”

“용사님!”

짧게 답한 루시엘은 바로 천호를 향해 달려왔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테두리가 노란색인 빛의 창이 떠있었다.

“구조요청이에요. 다른 천사가 보낸 게 분명해요.”

루시엘의 목소리가 빨랐다.

천호는 그녀를 진정시키는 대신 빛의 창을 보았다.

노란색으로 점멸하는 것이 정말 위급한 신호 같았다.

“내용은요?”

“잠시만요.”

루시엘이 재차 손을 놀리기 시작하자 빛의 창이 커지며 세부 항목이 드러났다.

[구조요청]

[발신인 : 7급 전투천사 사스치엘]

[내용 : - ]

루시엘이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내용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내용조차 적을 시간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적을 수 없는 상황이라든가.]

그렇다면 심각했다.

하지만 루시엘은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더니 제법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란색 점멸이니 최악의 상황은 아닐 거예요. 보낸 이의 상황이나 위급도에 따라 점멸 색이 달라지니······.”

아무래도 천호보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

천호는 루시엘과 눈을 맞추며 차분하게 물었다.

“루시엘, 발신 장소를 알 수 있나요?”

가장 중요한 정보였다.

루시엘은 손가락을 몇 번 놀리더니 바로 답했다.

“2층이에요. 당장은 대강의 방향만 알 수 있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이 분명해요. 용사님이 탑을 해방하셔서··· 인근의 사기가 사라진 덕분에 2층의 구조 요청이 층을 넘어 여기까지 닿은 것 같아요.”

2층.

그리고 정황상 그렇게까지 멀지 않은 곳.

바로 그 순간이었다.

새로운 빛의 창이 천호와 루시엘 모두의 눈앞에 나타났다.

[히든 퀘스트 : 구조요청]

[7급 전투천사 사스치엘이 대미궁 2층 어딘가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7급 전투천사 사스치엘은 현재 무척 쇠약해진 상태입니다. 더 늦기 전에 사스치엘을 찾아내야 합니다.]

[퀘스트 유지 시간 : 48시간]

죽어가고 있다는 말에 루시엘이 헉하고 숨을 삼켰다.

하지만 천호는 오히려 진정할 수 있었다.

48시간.

저 정도 시간이 주어졌다면, 지금 당장 죽기 직전인 상황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애당초 먼 곳에 있었다면 구조요청이 닿지 않았을 터이니, 이틀이면 그럭저럭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침착해라. 냉철한 이성을 유지해라. 순간의 분노와 흥분은 분명 네 힘을 끌어올리겠지만, 통제되지 않은 힘은 결국 눈 먼 칼에 불과하다. 이성을 유지해라. 차분함을 잃지 마라.’

아버지의 가르침을 되새긴 천호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루시엘, 혹시 아는 분인가요? 같은 지부에 소속되어 있었다든가.”

천호의 물음에 루시엘은 움찔하더니 눈을 한 번 깜박였다.

마른 침을 한 번 삼키더니 침착함을 되찾았다.

“아뇨, 처음 보는 이름이에요.”

루시엘과 같은 지부 사람이 아니었다.

즉, 지부에서 대미궁으로 탈출한 천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애당초 대미궁에서 활동하던 천사일 가능성이 높겠네요.”

“아··· 네! 아마 그럴 거예요.”

그렇다면 좋았다.

어쩌면 구조요청을 청한 천사로부터 다른 천사들의 위치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아예 구조요청을 받고 움직인 다른 천사들과 조우한다든가.’

루시엘도 천호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서두르죠. 최악의 상황까지는 아니라 해도 위급한 상황이기는 할 테니.”

“네, 용사님.”

다른 천사들과의 합류 가능성은 부가적인 효과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구조요청을 보낸 천사를 구조하는 것이었다.

“루시엘,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게요. 7급 전투천사면 어느 정도 전투력을 가지고 있죠?”

상대가 약하든 강하든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데 주저치 않는 천호였지만, 상대의 강함에 따라 상황의 위험도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었다.

천호의 물음에 루시엘은 입술을 움츠리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확신은 못 하겠지만··· 지금의 용사님과 비슷하거나 약할 것 같아요.”

루시엘은 전투천사가 아니었다.

천호가 싸우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강약을 구분할 재주가 없었다.

“알겠어요. 정보 고마워요. 일단 떠날 채비부터 하도록 하죠.”

“네, 용사님.”

천호와 루시엘은 서로 분담해서 늘어놓은 물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침대와 목욕탕을 인벤토리에 넣은 뒤에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마지막으로 미트라를 챙겨 든 천호가 루시엘을 보았다.

“잊은 거 없죠?”

“네, 용사님.”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루시엘은 2층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천호도 더는 지체지 않고 탑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 1층을 나서려 할 때였다.

“아.”

루시엘이 작게 말했고, 천호는 왜 그녀가 목소리를 냈는지 이해했다.

루시엘의 시선이 벽에 박힌 마석을 향했기 때문이다.

천호 자신이 돌아갈 때 챙겨가자고 했으니까.

루시엘이 작업의 즐거움에 눈 뜬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지금을 마석을 캐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서두르죠.”

천호가 그리 말하자 루시엘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도 하나는 떼어가죠.”

전부 캘 시간은 없었지만, 이왕 멈춘 거 하나 정도는 캐 가도 괜찮을 테니까.

천호는 숙련된 동작으로 벽에 박힌 마석을 떼어냈고, 루시엘은 최하급 마석을 재빨리 인벤토리에 담았다.

무어라 말을 주고받은 것도 아닌데 물 흐르듯이 작업이 진행되자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작게 웃었다.

[손발이 척척 맞는군.]

미트라가 말했고, 천호는 동의했다.

“이제 진짜 서두르죠.”

“네, 용사님.”

두 사람은 탑을 나섰다. 2층 계단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시간의 흐름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천호와 루시엘이 2층으로 향하는 그때 심층에서도 움직이는 자가 있었다.

역병신이 천장을 노려보았다.

노란 눈에 증오를 담아 먼 곳을 보았고, 오염된 입으로 저주의 말을 읊조렸다.

가라.

움직여라.

역병의 사도들이여, 바람을 타고 일어나 불꽃처럼 번지거라.

중층에서 저층으로.

저층에서 다시 저층으로.

역병의 사도들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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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엘은 눈앞에 떠오른 구조요청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상당히 먼 곳에서 전해진 것이 분명한 구조요청이었다.

어찌할 것인가.

라구엘은 아우라엘을 돌아보았고, 아우라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구조요청이 날아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딱히 이야기를 나눌 것도 없었다.

위기에 처한 동료를 구한다.

거리가 너무 멀어 설사 제 시간에 닿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한들 포기하지 않는다.

아우라엘이 앞장섰고, 에이젤을 등에 업은 라구엘이 그 뒤를 따랐다.

&

대미궁의 2층.

진정한 대미궁의 시작이라 해도 좋을 그곳.

7급 전투천사 사스치엘은 가느다란 숨을 토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실낱같은 빛을 찾아 먼 곳을 바라보았다.

구조요청이 어찌되었을까.

누군가가 구조요청을 보았을까.

사스치엘은 간절히 기도했다.

구조요청이 강력한 영웅들과 천사들에게 닿기를 소망했다.

사스치엘 자신의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막아야 한다.’

2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대미궁의 변방에서 시작되려는 참극을.

사스치엘은 더는 버티지 못 하고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마치 바다에 잠기듯 천천히 의식을 잃어갔다.

제1장 - 1층 끝, 제2장 - 2층으로 이어집니다.

< 제1장 - 1층 #18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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