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8화 (18/211)

< 제1장 - 1층 #17 >

&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들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 하는 법이다.’

‘잘 먹으라고요?’

‘물론 잘 먹는 것도 중요하지. 하지만 아들아, 세상은 먹는 게 다가 아니란다.’

아버지는 언제나 옳으셨다.

때문에 천호는 이번에도 아버지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했다.

“용사님?”

루시엘은 호기심과 기대감과 의아함이 뒤섞인 목소리를 흘리며 천호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천호의 작업이 지금까지와는 꽤 달랐기 때문이다.

[그대여, 내게 대체 뭘 썰게 하는 것인가.]

미트라의 목소리도 썩 좋지 못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에 약간의 불만이 어려 있었다.

“음.”

천호는 책장을 썰고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묘사하자면, 칼날을 가열시킨 히트 대거로 책장 안의, 책을 꽂아 놓기 위한 판자들을 잘라내는 중이었다.

저걸 잘라서 대체 무얼 하려는 걸까.

장작이라면 내려오면서 채집한 나무 뿌리와 가지가 한 가득인데.

루시엘은 궁금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천호가 하는 일이었으니까.

뭐가 되었든 삶의 질을 향상시켜 주리라.

루시엘의 신뢰와 달리 미트라는 마뜩찮은 목소리로 계속 침음을 흘려댔다.

하지만 천호는 묵묵히 작업을 계속했고, 마침내 책장 안의 판자들을 모두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음.”

판자들을 다 뜯어내니 남은 것은 과거 책장이라 불렸던 커다란 나무통뿐이었다.

‘좋아.’

사포고 뭐고 없어서 다듬지 못 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이 정도면 할 만 할 것 같았다.

눈대중으로 다시 책장이었던 무언가를 재본 천호는 냄비로 샘물을 퍼 책장 안에 뿌려보았다.

책장의 표면이 젖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틈바구니로 물을 뿌려보았지만 물이 새지 않았다.

“용사님?”

[그대여, 지금 대체 무얼 하는 건가?]

천사와 성검의 궁금증은 계속해서 커졌지만 천호는 그저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사실 당장 할 수 있는 책장 작업은 다 끝났기 때문이다.

“루시엘, 책장 안을 물로 가득 채워주세요.”

“책장 안을요?”

“네, 부탁드려요.”

천호의 부탁에 루시엘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인 뒤 열심히 냄비로 물을 푸기 시작했다.

천호는 그런 루시엘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두 번째 책장의 판자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슥삭슥삭.

철퍽철퍽.

묵묵히 작업을 이어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루시엘이 책장의 물을 반쯤 채웠을 때 두 번째 책장의 판자 제거 작업을 마친 천호는 바로 다음 작업에 착수했다.

‘나무 괴물의 나무열매.’

4층에서 주워온 물건들이었다.

천호는 역병신의 신관들이 입던 신관복으로 나무열매의 껍질과 씨를 잘 싼 뒤 짧게 쥔 워해머로 천을 탕탕 내려쳤다.

[그대여, 무언가 요리를 하는 건가?]

요리에는 무지한 미트라였지만, 그래도 지금 천호가 하는 짓은 요리라 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천호는 대답하는 대신 작업에 몰두했고, 이내 나무열매의 껍질과 씨가 천 안에서 으깨지고 부서졌다.

‘좋아, 아주 좋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천호는 나무를 대충 파서 만든 그릇 위에서 천을 꽉 쥐어짰다.

레벨 업에 힘입어 강해진 힘으로 마구 짜대니 생각 이상으로 기름이 잘 나왔다.

[음, 어디에 쓰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좀 탁한 것 같군.]

기름을 짜는데 쓴 천이 좋지 못 하다 보니 불순물이 섞인 탓이었다.

하지만 천호는 개의치 않았다.

용도를 생각하면 애당초 지금 같은 형태가 좋았기 때문이다.

천호는 탁한 기름에 소금을 뿌린 뒤 휘휘 저었다.

‘이걸로 대강 완성.’

천호가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샴푸의 대용품이었다.

진짜 샴푸에 비하면 성능이 나쁠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하필이면 샴푸 대용품을 만든 이유.

“용사님, 다 채웠어요.”

책장을 가득 채우기 위해 수십 번도 넘게 냄비로 물을 푼 루시엘이 두 팔을 늘어트리며 말했다.

천호는 찰랑찰랑 거리는 수면을 바라보다 루시엘에게 물었다.

“루시엘, 목욕하고 싶지 않아요?”

“네?”

“뜨거운 물로 목욕.”

사실 천호 자신부터가 하고 싶었다.

미궁 세계에 온 요 이틀 동안 땀을 엄청나게 흘려댔으니까.

더욱이 오늘은 피까지 많이 흘리지 않았던가.

물론 샘물이 있으니 그냥 물을 퍼서 대충대충 씻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런 샤워 같지 않은 샤워보다는 제대로 된 목욕이 하고 싶었다.

“어··· 설마 이 책장··· 아니, 통 안에 담긴 물로요?”

“네.”

애당초 목욕통으로 쓰기 위해 준비한 첫 번째 책장이었다.

루시엘은 책장 안에 담은 물에 손을 담가보았다.

“음··· 좀 차갑긴 하지만······.”

“아뇨, 뜨겁게 해드릴게요.”

대체 어떻게.

루시엘이 천호를 보았고, 천호는 성검 미트라가 깃든 히트 대거를 들어올렸다.

[그대여?]

“열 좀 내주세요.”

[뭐?]

“열.”

씩 웃으며 말한 천호가 책장 안에 히트 대거를 담갔다.

&

은거지로 삼은 좁은 동굴 안에 들어선 아우라엘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누가 봐도 지친 그 모습에 라구엘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좀 지쳐서 그래.”

작게 답한 아우라엘은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건틀렛은 물론이고 갑옷 곳곳에 마물들의 피와 살점이 묻어 있었다.

흑단 같던 머리칼은 기름지고 뭉쳐 엉망이었고, 얼굴에도 기름과 피, 먼지, 땀 등이 아무렇게나 묻어 있었다.

‘씻고 싶다.’

하지만 불가능한 소원이었다.

이곳은 대미궁 안이었으니까.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 하는 와중에 몸을 씻는다는 것은 사치를 넘어 꿈같은 소망이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이동하자. 대강의 경로를 살펴보고 왔어.”

“그래, 일단 이걸로 얼굴이라도 닦아.”

라구엘이 내민 것은 물에 적신 천 조각이었다.

반사적으로 천 조각을 받아든 아우라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실 물은?”

“어제 보충했잖아. 아직은 충분해. 그러니 이 정도 사치는 즐겨도 돼.”

라구엘이 그녀답지 않게 작게 웃으며 말하자 아우라엘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호의에 감사하며 적신 천을 얼굴에 덮었다.

“하아.”

그나마 얼굴을 닦아내니 좀 살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린 아우라엘은 얼굴에 이어 목까지 닦아보았지만 이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천에서 금방 검은 물이 흘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이틀 동안 온갖 흙 밭을 구른데다가 땀까지 잔뜩 흘려댔으니.

작게 말한 라구엘은 아우라엘에게서 천을 받아든 뒤 꽉 쥐어짰다.

마음 같아서는 천을 깨끗하게 빤 뒤 다시 물에 적셔서 주고 싶었지만, 거기까지는 무리였다.

“미안, 세수에 만족해줘.”

“세수라도 해서 다행이지.”

일부러 기운차게 웃어 보인 아우라엘은 라구엘이 건네준 짜낸 천으로나마 다시 얼굴을 닦은 뒤 벽에 등을 기댔다.

지부의 막내 천사인 에이젤은 동굴 구석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녀 또한 얼굴과 옷, 머리칼이 모두 엉망진창이었다.

“내일부터는 좀 더 나아질 거야. 샘물을 찾으면 씻을 수도 있을 테고.”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 오늘은 이제 그만 자자.”

깨어있어 봐야 배만 꺼질 뿐이었다.

옳게 여긴 아우라엘은 동굴 벽에 등을 기댄 뒤 날개로 스스로를 감쌌다.

라구엘은 에이젤의 곁에 가 누운 뒤 날개로 그녀를 덮어주었다.

‘루시엘.’

아우라엘은 눈을 감으며 루시엘을 떠올렸다.

자신은 괜찮았다.

조금이지만 비상식도 있었고, 이렇게 세수라도 하고 있었으니까.

루시엘은 어떨까.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살아만 있어주렴.’

아우라엘은 주린 배를 붙잡고 눈을 감았다.

루시엘을 위해 기도했다.

&

“하아······.”

같은 시각.

루시엘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책장- 아니, 목욕탕 안에 몸을 담근 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난 탄성을 흘렸다.

성검 미트라가 깃든 히트 대거의 성능은 실로 굉장했다.

책장 안에 담근 뒤 칼날을 달구자, 정말로 책장 안의 물이 데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후우······.”

다시 긴 숨을 토한 루시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개방된 공간이 아니었다.

책장을 쌓아 만든 벽이 주변을 잘 가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천호가 직접 만든 비누와 샴푸.

몸의 때를 씻어냈다.

머리도 감았다.

시원했다.

행복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용사님 최고······.’

이 업적을 경험하고도 어찌 천호를 찬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노곤노곤한 표정을 지은 루시엘은 돌연 코를 킁킁거렸다.

책장 너머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치익치익하는 고기 굽는 소리도 좋았다.

“헤헤헤.”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린 루시엘은 눈을 살짝 감았다.

문득 지부의 다른 천사들 생각이 났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들 잘 있을 거야.’

아우라엘은 강력한 전투 천사였고, 함께하고 있을 라구엘 역시 무척이나 현명하고 지혜로운 천사였으니까.

아마 지금쯤 다른 천사들이나 영웅들과 합류해 잘 쉬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일단은 걱정하지 말자.

잘 지낼 거라고만 생각하자.

마음을 정한 루시엘은 새삼 몸을 늘어트렸다.

천호가 만들어준 작은 행복을 만끽했다.

&

[이게 진짜 되는군.]

이미 한 번 해낸 일이었지만, 다시 봐도 신기했다.

히트 대거에 몸을 의탁한 미트라는 지금 책장 안에 있었다.

정확히는 책장 안에서 물을 데우고 있었고, 루시엘이 이미 한 번 사용해 미지근하게 변했던 목욕물에서는 슬슬 뜨거운 김이 일기 시작했다.

[그대여, 그대는 대체 무얼 하던 자인가.]

건국황제 레온과 함께 마왕을 무찌르는 여정 동안 야숙이라면 밥 먹듯이 해본 미트라였다.

하지만 이런 식의 야숙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책장으로 목욕탕을 만들고, 방패로 고기를 구워먹으며, 투구로 국을 끓인다.

거기에 나무 열매로 머리 감는데 쓸 향료 비슷한 것까지 만들었다.

싸우는 것을 보니 용사가 맞기는 한데.

미트라의 물음에 수온을 확인하고 있던 천호가 되물었다.

“저요?”

[그대 말고 여기 또 누가 있겠는가.]

“뭐, 그냥 이것저것.”

무릇 용사란 신비감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아버지의 가르침에 충실한 천호는 홀라당 옷을 벗은 뒤 냄비로 뜨거운 물을 퍼서 몸을 대충 닦았다.

[흠, 생각보다 실하··· 아니, 좋은 몸이군.]

여전히 낮고 허스키했지만, 묘하게 부끄러움이 섞인 목소리였다.

순간 저도 모르게 흠칫한 천호는 미트라에게 등을 보이고 몸을 돌렸지만, 그래봐야 발가벗은 것은 똑같았다.

[호오, 등 근육이 잘 발달되었군. 허리도 잘록하고.]

미트라가 아주 작게 말했다.

그리고 그 작게 말했다는 사실에 다시 흠칫한 천호는 얼른 탕에 몸을 담갔다.

“크어······.”

시원했다.

폭이 깊다고는 해도 책장이라 거의 눕듯이 몸을 담그지 않으면 겨우 배꼽이나 덮을 정도로 수위가 낮았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감지덕지였다.

기분이 좋아진 천호는 와이어에 고정된 채 탕에 몸을(?) 담그고 있는 미트라에게 말했다.

“미트라도 시원하고 좋죠?”

[그대여, 칼을 뜨거운 물에 넣어봐야 녹만 슬지 시원하겠는가?]

정론이었다. 그래서 천호는 다시 말했다.

“다음에는 뜨거운 기름에 넣어드릴게요.”

언젠가 튀김도 해먹어야 할 테니.

[······닦기만 잘 해다오.]

오랜만에 농담을 주고받은 천호는 다시 깊은 숨을 토하며 눈을 감았다.

‘아들아, 의식주가 괜히 중요한 게 아니다. 어디에 떨어지든 의식주를 충실히 하도록 하려무나. 잘 먹고, 잘 씻고, 잘 싸고, 잘 자고. 알겠냐?’

아버지는 역시 언제나 옳으셨다.

때문에 목욕을 마친 천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이행하기 힘든 현실에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용사님, 이리 오세요.”

루시엘이 침대 위에 옆으로 누워있었다.

판자를 제거한 책장 안에 가죽을 쌓은 뒤 담요를 깐, 침대라 부르기도 좀 민망한 물건이었지만 아무튼 제법 푹신푹신하고 잘 맛이 날 것 같은 곳에 누운 그녀가 한쪽 날개를 펼치며 손짓했다.

발갛게 물든 뺨.

물기가 조금 남아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

루시엘에게는 약간 큰 제국 시녀복.

그래서 살짝 드러난 쇄골과 하얗고 동그란 어깨.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킨 천호는 뻣뻣한 걸음으로 루시엘에게 다가섰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루시엘 옆에서 차렷 자세를 취했다.

‘아버지!’

불렀지만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그저 사나이의 미소를 짓는 아버지의 환영이 아른거릴 뿐이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용사님······.”

날개로 천호를 덮어준 루시엘은 어제 그러했던 것처럼 금방 곤히 잠들었다.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

작게 울리는 심장 소리.

‘아들아! 인내하는 거다! 인내! 번뇌를 너의 힘으로 승화시켜라!’

이를 악문 천호는 눈을 꽉 감고 천마신공을 운용했다.

그야말로 전력을 다한 운공이었다.

그리고 그런 천호의 모습을 머리맡에서 지켜보던 미트라는 끌끌끌 혀를 차며 말했다.

[번뇌가 차오르고 있군.]

그야말로 굉장하게.

밤이 깊었다.

루시엘은 곤히 잠들고, 천호는 잠들지 못 하는, 천마신공의 성취가 높아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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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력 Lv1을 획득했습니다.]

< 제1장 - 1층 #17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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