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 1층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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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지.
거실에도 있고 화장실에도 있고 방에도 있고.
언제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만큼 쓸 일도 많은 휴지.
물론 진짜 휴지와 책을 만드는데 쓰인 종이 사이에는 부정 못 할 간극이 존재했지만 그래도 나뭇잎과 휴지 사이의 간극보다는 나았다.
‘용도는 휴지만이 아니야.’
종이는 잘 탔다.
변형이 쉬운 만큼 다루기도 쉬웠다.
사용처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막말로 잘 접으면 음식을 담는 그릇도 될 수 있었다.
‘정화 마법이 있으니 가능한 이야기지만.’
역시 루시엘은 유능했다.
홀로 고개를 끄덕인 천호는 책장에 책을 꽂으며 생각했다.
‘쓸모 있는 책도 있겠지.’
제국민을 위한 에티켓 100선도 제국민을 만나면 쓸모가 있으리라.
그리고 진정한 실용서들.
‘다른 세계에 갔으면 그 세계의 역사와 지리, 문화에 대해 공부해라.’
‘음, 정보는 중요하다는 가르침의 연장인가요?’
‘그것도 그런데, 그쪽이 호감을 사기 쉽거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나가는 금발벽안의 외국인이 막 한국에 대해 잘 알고, 문화에 대해 칭찬하면 어떤 생각이 드냐? 한국말도 좀 하고.’
‘좋은 사람이구나.’
‘그렇지. 그러니 공부해두려무나. 그쪽이 인기 끌기에 좋은 법이니.’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저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천호는 문득 루시엘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살짝 신기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엘?”
“아, 죄송해요. 무척 기뻐하시는 것 같아서요.”
정말 책을 좋아하시는군요.
루시엘이 생긋 웃자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탑에 들르길 잘한 것 같습니다. 특히··· 이 책장도 쓸모가 많을 거예요.”
“역시 그··· 네?”
책장?
책장이 왜?
순간 카이트실드와 투구가 떠오른 루시엘이었지만 일단 천호의 대답을 기다리기로 했다.
천호는 반질반질한 책장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미궁에서 이 정도로 상태가 좋은 판자를 구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요.”
대패가 없었다.
사포도 없었다.
그런 천호 앞에 잘 손질된 판자 수십 개가 나타난 셈이었다.
‘좋구나.’
이걸 뜯어내면 침대도 만들 수 있겠지.
굳이 복잡하게 만든 것도 없었다.
책장 안쪽의 판자를 다 뜯어낸 다음에 자이언트 렛 모피를 겹쳐 깔고, 그 위에 로브를 엮어 만든 요를 깔면 완성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질 루시엘의 날개 이불.
인벤토리가 있으니 침대 운반도 문제 없었다.
더욱이 침대는 시작에 불과했다.
“음.”
천호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책장을 바라보더니 다시 루시엘을 돌아보았다.
“루시엘, 인벤토리에 공간이 충분할까요?”
“어··· 여기 있는 책장을 다 넣으시게요?”
“가능하면요.”
“가능···은 할 것 같은데··· 그, 저번에 넣은 괴물이나 벌레 사체를 좀 버려야 할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죠. 부탁드릴게요.”
애당초 벌레 사체를 챙긴 이유는 일단 챙겨두면 체액이나 껍질 등을 쓸 데가 생기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수집욕 때문이었다.
천호가 허락하자 루시엘은 왠지 모르게 안도의 숨을 토하더니 1층 한 구석에 벌레 사체들을 쏟아냈다.
‘주머니가 깨끗해지는 기분이야.’
벌레보다야 책이랑 책장이 훨씬 나았으니까.
의욕이 난 루시엘은 책장과 책들을 인벤토리에 채우기 시작했다.
루시엘을 도와 책장을 싹쓸이한 천호는 계단 위에 깔린 융단에도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쓸모가 있을 거야.’
한기를 막기에는 더 없이 좋겠지.
그래서 천호는 융단도 챙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돌돌돌 만 뒤 인벤토리 안에 쏙 집어넣었다.
“그··· 우리 이래도 되는 걸까요?”
탑에 들어와서 한 일이 2층으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싹쓸이라니.
루시엘이 살짝 걱정된다는 투로 말하자 천호는 멋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겁니다.”
애당초 털려고 들어온 탑이었고.
주인도 없지 않은가.
“그보다 루시엘, 저 빛나는 돌은 벽에서 떼어내도 빛이 날까요?”
벽과 천장에 박혀 1층의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빛나는 돌들.
루시엘은 살짝 질린 얼굴이 되어 답했다.
“빛이 나는 건 탑에 걸린 마법 때문이라··· 떼어내면 빛이 나지 않을 거예요.”
“음, 그래도 뭔가 특별한 돌 아닐까요? 마석이라든가.”
“최하급이지만··· 마석은 마석이에요.”
“그렇군요. 돌아가는 길에 챙기기로 하죠.”
언제 또 마석을 볼 수 있을지 몰랐으니까.
챙길 수 있을 때 확실히 챙기는 게 중요했다.
생활력 넘치는 천호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루시엘은 계단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용사님. 아무래도 이 탑은 제국과 연관이 있는 장소 같아요.”
“제국이요?”
그러고 보니 처음 꺼낸 책 제목이 ‘제국민을 위한 에티켓 100선’이기는 했다.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제국. 세계가 대미궁에 잡아먹히기 전에 존재했던, 가장 거대한 인간의 나라예요. 정식 명칭은 아이테르 제국이고요.”
“지금은 존재하지 않나요?”
“세계가 대미궁에 집어삼켜질 때··· 가장 크게 피해를 본 게 제국이에요. 수십 개의 조각으로 갈라져 대미궁 곳곳으로 흩어졌거든요.”
“그렇담 명맥 자체는 유지하고 있겠군요.”
“그렇긴 하지만··· 사실상 황실의 대는 끊긴 것으로 알아요. 과거 제국의 유력자들 가운데 살아남은 이들이 제국의 이름을 내걸고는 있지만, 구심점이 없는 느낌이고요.”
사실 이런 식으로 붕괴한 나라는 제국만이 아니었다.
대미궁에 집어삼켜진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비슷한 결과를 맞이하였다.
“세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대미궁에 잠식되고 있어요. 그리고 언젠가··· 세계 전체가 대미궁에 집어삼켜지면··· 그때는 정말 멸망뿐이에요. 우리 세계는 사라질 테고, 대미궁에 잠식된 우리 세계의 조각들과 사람들은 근본을 잃고 사라질 거예요. 진정한 의미로 대미궁에게 잡아먹히게 되겠죠.”
두려움이 섞인 루시엘의 목소리였다.
천호는 그런 루시엘의 손을 꽉 잡아주며 말했다.
“그렇기 되기 전에 막아야죠. 막을 수 있을 거예요. 아니, 막을 수 있어요.”
“용사님.”
루시엘이 반짝반짝이는 눈으로 천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빛의 창이 떠올랐다.
[엉큼한 Lv3이 되었습니다.]
‘아니, 왜?’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천호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루시엘에게 말했다.
“그러니 첫 걸음으로 일단 이 탑을 공략하도록 하죠.”
“네, 용사님.”
기운을 차린 듯 주먹을 불끈 쥔 루시엘이 환하게 웃었고, 천호는 만족했다.
아쉬움을 달래며 루시엘의 손을 놓았다.
“음, 아무튼 이 탑이 제국과 연관된 건물인 것 같다는 거군요.”
“네, 책장이나 바닥에 새겨져 있는 문장이 아이테르 제국의 문장이에요. 아무래도 제국··· 그 중에서도 황실의 일부가 대미궁에 잠식되면서 탑의 형태를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제국.
그리고 황실.
역시 용사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
척 듣기만 해도 돈 냄새가- 아니, 뭔가 있어 보이는 장소이지 않은가.
“제국은 어떤 곳이었죠?”
“검과 마법이 모두 발달한 곳이었어요. 대륙에서 제일 큰 나라인 만큼 인간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족들이 살고 있었고요.”
그리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이 이상의 정보를 얻어내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때문에 천호는 더 이상 이야기를 잇는 대신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2층으로 올라가보죠. 뭔가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네, 용사님. 그리고 조심하세요. 1층과 달리 2층에서는 마물의 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네, 루시엘도요.”
새삼 쿠크리를 고쳐 쥔 천호는 융단이 벗겨진 돌계단을 따라 위로 향했다.
그리고 막 2층의 입구에 도달했을 때였다.
“용-.”
루시엘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니, 조금 더 빠르게 천호가 움직였다. 왼팔을 길게 뻗어 루시엘을 보호하는 한편 자세를 낮추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정면에서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와 달랐다.
아버지와 산에서 캠핑하며 몇 번이나 마주쳤던 야생 동물이나 밀렵꾼의 기척과는 달랐다.
미궁 세계에서 마주했던 괴물들의 기척과도 차이가 있었다.
이질적인 기운.
하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감각.
[기척감지 Lv1을 획득했습니다.]
[기척감지 Lv3이 되었습니다.]
천호는 자연스럽게 천마신공의 호흡을 했다.
그리고 방금 느낀 이질적인 기운이 무엇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내공과 같았다.
마력.
마법적인 기운.
등 뒤에서 루시엘이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정면에서 마법적인 기운이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살기가 없어.’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천호는 방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낯선 미궁 세계였다.
더욱이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다. 루시엘을 지켜야만 했다.
그리고 몇 초.
마침내 마법적인 기운의 정체가 드러났다.
[오오··· 다섯 여신께 감사드리나이다.]
[살아있는 자가 이곳을 방문할 날을 얼마나 고대했단 말인가!]
푸르고 반투명한 사람의 형상이 문 앞에 나타났다.
루시엘이 작고 빠르게 말했다.
“용사님, 순수한 유령이에요. 고스트 계열의 몬스터는 아니고, 인간의 영혼이 지박령이 된 것 같아요.”
“음.”
천호는 다시 유령을 보았다.
남자에 노인.
입고 있는 옷은 품이 넉넉해 보기에는 좋아도 움직이기에는 불편해 보였다.
안경도 그렇고, 학자라는 느낌이 드는 노인이었다.
“저는 박천호입니다. 이쪽은 다섯 여신을 모시는 천사 루시엘님이고요.”
천호가 쿠크리를 쥔 손을 살짝 내리며 말하자 노인의 얼굴이 보다 환해졌다.
[오오, 천사님이 오셨다니!]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다섯 여신께 기도를 올리는 것을 보고 일부러 루시엘에 대해 언급한 것이었는데, 제대로 통한 모양이었다.
천호는 루시엘에게 눈짓을 했고, 눈치 빠르게 이해한 루시엘이 앞으로 나섰다.
“다섯 여신님들을 모시는 천사 루시엘입니다. 죽음과 어둠, 새벽의 여신이신 이오스님께 돌아가셔야 할 분이 어찌하여 이 땅에 머물고 계신지요.”
루시엘이 성스러운 빛을 발하며 차분히 말하자 노인은 아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가 되었다.
천호 역시 평소와 다른 루시엘의 모습에 속으로나마 감탄을 토했다.
노인이 루시엘에게 답했다.
[소인은 제국 황실 도서관의 사서를 맡고 있던 노트랑 페이노트라 하옵니다.]
이후의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제국이 대미궁에 집어삼켜지는 그때 황실 역시 집어삼켜졌다.
루시엘의 예상대로 황실의 일부가 탑의 형태가 되어 이곳에 방치되었는데, 안타깝게도 탑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인간들이 아닌 마물들이었다.
[그때 목숨을 잃고 말았지요.]
하지만 노트랑의 영혼은 탑에 남았다.
대미궁에 들어오면서 탑 자체가 신비한 힘을 가지게 된 것도 있었지만, 황실의 사서로서 일부나마 황실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악한 마물들이 이 탑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천사님, 부디 부탁드리오니 마물들을 소탕하시고 최상층에 남겨진 제국의 비보를 지켜주옵소서.]
“제국의 비보요?”
천호가 묻자 노트랑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무척이나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네. 우리 아이테르 제국의 비보··· 황실 보물고에서도 제일가는 보물이 최상층에 있다네. 황실 도서관과 더불어 황실 보물고의 일부가 함께 탑이 되었기 때문이지.]
“어떤 보물이죠?”
[후후··· 놀라지 말게나. 다른 무엇도 아닌 제국 수호검- 성검 미트라가 바로 이곳에 있다네!]
“음!”
천호는 감탄했다.
난생 처음 듣는 검이었지만 아무튼 제국 수호검이라지 않는가, 성검이라 하지 않는가!
“이곳에 제국 수호검이 있다고요?”
루시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노트랑의 얼굴이 더욱 밝아졌다.
[그렇습니다, 천사님. 제국 수호검이 이 탑 최상층에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악한 마물 놈들이 탑을 점령하고 있··· 아니, 세상에!]
이야기하다말고 노트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경악한 얼굴로 1층을 내려다보았다.
[채, 책장이! 도서관의 장서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
1층은 문자 그래도 텅 비어 있었다.
[이, 이 사악한 마물 놈들이 기어코! 기어코!]
천호는 식은땀을 흘렸고, 루시엘은 그냥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루시엘이 눈빛으로나마 천호에게 물었다.
‘어쩌죠, 용사님?’
‘음.’
천호는 고민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노트랑은 천호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크윽, 혈압··· 있지도 않은 혈압이······.]
[천사님, 부디, 부디 제국의 비보를 지켜주옵소서······.]
뒷목을 붙잡고 끙끙 거리던 노트랑이 마지막 유언을 끝으로 승천- 아니, 소멸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를 이 탑에 붙잡아 두고 있던 가장 큰 미련인 황실 도서관의 장서들이 사라진 탓 같았다.
루시엘은 멍한 얼굴로 노트랑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천호 역시 그러했지만, 루시엘과 달리 겉으로는 일단 날카로운 표정을 유지했다.
[포커페이스 Lv2가 되었습니다.]
“음.”
천호는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는 루시엘의 손을 잡았다. 반사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그녀에게 말했다.
“노트랑씨를 위해 기도하죠.”
“어··· 네, 용사님.”
루시엘은 성의껏 노트랑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천사가 직접 기도를 올렸으니, 노트랑도 여한이 없으리라.
“음.”
뭔가 심하게 찔렸지만 아무튼 잘 해결된 것이겠지.
[히든 퀘스트 : 제국 수호검]
[탑을 점령하고 있는 사악한 마물들을 소탕하여 제국 수호검을 지켜내야 합니다.]
[서브 퀘스트 : 승천]
[탑의 주박에 사로잡힌 영혼들을 해방하십시오.]
[황실 도서관 사서 노트랑 1/1]
[황실 시녀 누아르 0/1]
[근위 기사 카틀랑 0/1]
때마침 빛의 창까지 떠올랐다.
제국 수호검.
성검 미트라.
천호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용사의 혼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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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 - 1층 #1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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