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 1층 #11 >
&
[천마신공 Lv2가 되었습니다.]
[인내심 Lv3이 되었습니다.]
“용사님, 눈이 퀭하세요. 못 주무셨어요?”
눈을 뜨자마자 들려온 물음에 천호는 애수에 찬 미소로 화답했다.
‘자긴 잤지.’
해 뜨고 나서 한 시간 정도.
[천마신공 Lv2]
밤새도록 운공을 한 덕분인지 천마신공의 레벨이 하나 올라 있었다.
미궁 세계의 스킬들은 소위 말하는 숙련도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레벨을 올리는 가장 빠르고 명확한 방법은 해당 스킬을 많이 쓰는 것이었다.
‘인내심은 두 개나 올랐네.’
올라야지. 오를 수밖에.
“그런데 루시엘.”
“네, 용사님.”
“뭔가 신기한 게 떴군요.”
천호는 그리 말하며 머리 위에 뜬 빛의 창을 가리켰다.
[미궁 세계가 당신의 요리를 기억합니다.]
[요리의 신이 당신이 이룬 성과에 감탄합니다.]
[요리의 신이 당신을 축복합니다.]
[감칠맛 부여 Lv1을 획득했습니다.]
루시엘은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에에에?”
저게 왜?
아니, 저게 대체 왜 뜨는데?
“루시엘?”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사실 딱히 해석할 여지도 없었다.
문자 그대로였으니까.
미궁 세계가 천호의 요리를 기억했다.
마치 업적이나 이야기를 기억하듯이 말이다.
코카트리스 스켈레톤의 뼈를 우려 만든 닭고기 스튜 흉내내기.
‘부, 분명 대단하긴 한데, 신기하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미궁 세계가 따로 기억을 할 정도일까?
‘할··· 것도 같다?’
생각해보니 이해가 가긴 갔다.
이제까지 미궁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 코카트리스 스켈레톤의 뼈로 닭고기 스튜 맛을 내려고 한 자는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솔직히 맛도 엄청 좋았고.
“으음, 요리의 신께서 천호님의 요리가 마음에 드셨나 봐요.”
그리고 요리의 신.
천호가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루시엘, 지난번 치유의 신님 건도 있고 해서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용사님.”
“신들은 언제 어디서든 우릴 지켜볼 수 있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곤란했다.
역병신 또한 천호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다행히 루시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건 불가능해요. 퀘스트나 이번 일 같이, 뭔가 특별한 일이 생겨서 미궁 세계의 시스템이 천호님을 주시할 때만 가능해요.”
“역병신도요?”
“역병신과 관계된 일이라면 가능할 거예요. 하지만 이번처럼 요리에 관한 일이면 역병신은 물론이고 치유의 신님도 천호님과 절 관찰하실 수 없어요.”
“음.”
대강 알 것 같았다.
확실히 미궁 세계의 신들은 전지전능하다기 보다는, 특별한 힘을 가진 초인에 가까운 것 같았다.
“아무튼 좋군요.”
요리의 신이 내려준 축복.
‘감칠맛 부여라니. 이거 완전 다시다 아냐?’
그렇잖아도 각종 조미료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감칠맛 부여는 문자 그대로 신의 은총이었다.
“그, 그러게요. 요리의 신께서 천호님의 요리가 정말 마음에 드셨나 봐요.”
사실 루시엘도 요리의 신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치유의 신처럼 활발히 활동하는 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이한 걸 좋아하시는 분인가?’
루시엘이 그렇게 생각할 즈음이었다.
“루시엘, 미궁 세계에서는 마물을 먹는 일이 드문가요?”
요리의 신이 천호 자신의 요리를 마음에 들어 한 이유.
‘그냥 맛있어서는 아니겠지.’
솔직히 재료가 부족해서 솜씨를 다 발휘하지는 못 했으니까.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역시 희소성이었다.
특이한 요리.
대미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요리.
천호의 물음에 루시엘은 다시 눈을 깜박였다.
‘그럼 흔하겠어요?’
쥐고기는 둘째치고 코카트리스 스켈레톤의 뼈로 국물을 우려내는 일이?
목구멍에서 멈췄다.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꿀꺽하고 마른 침과 함께 말을 삼킨 루시엘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거의 없어요. 사실 들어본 적도 없어요.”
“음.”
왜 그럴까.
왜 다들 안 먹는 걸까.
천호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자 루시엘은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지만, 잠깐 뿐이었다. 어째서 천호와 루시엘 자신 사이에 이토록 큰 생각의 차이가 발생했는지를 불현 듯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먹거리가 있으니까요.”
“네?”
“정상적인 먹거리요.”
천호가 섣불리 말을 잇는 대신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엘은 그런 천호를 보며 생각했다.
‘쥐고기랑 코카트리스 스켈레톤 사골도 정상적인 먹거리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요.’
물론 전부 맛있게 먹긴 했지만.
음, 맛있긴 했지.
새삼 민망해진 루시엘은 헛기침을 토한 뒤 말했다.
“흠흠, 전에 설명 드린 것처럼 대미궁 안에는 제법 평범한 곳들도 있어요. 워낙 넓은 지역이니까요.”
“미궁화가 진행되기 이전의··· 그러니까 본래 평범했던 세계의 조각 같은 건가요?”
“어··· 네, 맞아요. 이쪽의 세력이 강한 곳에서는 농사도 짓고 가축도 키워요. 그렇게 생산한 식량을 영웅 분들께 공급도 하고요.”
“과연.”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던전 들어갈 때 도시락 싸들고 간다는 소리와 같았다.
‘그래도 급하면 다들 잡아먹거나 하지 않았을까?’
천호 자신이나 루시엘처럼 소지한 식량이 없으면 마물을 먹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인간형이라면 천호 자신도 손을 댈 마음이 들지 않았지만, 자이언트 렛이나 미치광이 크라울러처럼 그냥 커다란 마물이면 솔직히 늑대나 곰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아무튼··· 일단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처음 듣는 일이에요.”
“음, 알겠습니다.”
천호는 간단히 생각하기로 했다.
남이야 어찌되었든 지금 당장 먹을 게 마물 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더욱이 요리의 신이 잘 만들었다고 칭찬까지 해주지 않았던가.
‘좋아, 오늘 저녁에는 다시 새로운 요리에 도전해보자.’
요리의 신이 모처럼 감칠맛 부여 마법을 주었으니까.
‘냄비가 생겼으니 삶는 것도 가능하겠지? 수육을 해볼까? 아무래도 육회는 좀 그렇겠지? 아, 밀가루 갖고 싶다. 밀가루만 있어도 가능한 메뉴가 확 늘어날 텐데.’
천호는 진지한 얼굴로 메뉴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런 천호를 보며 루시엘은 생각했다.
‘미궁 세계의 구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시는구나.’
역시, 단순히 강하기만 한 분이 아니셨다.
사려 깊고 현명한, 정말로 믿음직한 분이셨다.
“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루시엘이 천호 자신을 무척이나 호감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만족한 천호는 저녁 메뉴 고민을 일단 머릿속에 저장해둔 뒤 말했다.
“아무튼 슬슬 출발할 준비를 하죠.”
“네, 용사님.”
생긋 웃은 루시엘이 가볍게 날갯짓을 했다.
&
천사인 루시엘은 의외로(?) 다재다능했다.
일단 인벤토리를 사용할 수 있었고, 그 외에도 정화 마법, 알람 마법, 치유 마법이라는 무척이나 유용한 마법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루시엘은 착하고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
‘아, 이게 아니지.’
휘휘 고개를 내저은 천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잿빛 하늘 위를 가르는 루시엘이 보였다.
비행.
루시엘의 날개는 폼이 아니었다.
이불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늘도 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루시엘은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다섯 여신들을 모시는 천사들의 기본 능력이라 했다.
다섯 여신들과 그 휘하 천사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대미궁을 공략해 미궁 세계를 해방하는 것이었으니까.
하나의 층에는 적게는 대여섯 개에서, 많게는 수십 개에 달하는 계단이 존재한다고 했다.
“용-사-님! 저쪽-에-!”
루시엘이 하늘에서 무어라 소리쳤다.
잘 들리지 않았기에 천호는 일단 멈춰 섰고, 루시엘이 비둘기처럼 활공하며 지상에 안착했다.
“방향은 저쪽이 맞는 것 같아요. 아직 좀 멀어서 명확히 확인은 못 했지만, 대충 형태로 봤을 때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맞는 것 같아요.”
그렇잖아도 추운데 하늘까지 날아서 그런지 루시엘의 하얀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목도리도 하나 만들어줘야겠네.’
미궁에 여우나 사슴은 없으려나?
털이 좀 곱고 부드러운.
“음, 그렇군요. 고생했어요.”
“아뇨, 이 정도는 해야죠. 그리고······.”
“그리고?”
“계단 쪽은 아닌데, 신경 쓰이는 걸 하나 발견했어요. 그리 멀지 않으니 조금만 더 가면 천호님 눈에도 보일 거예요.”
루시엘이 언덕 위를 가리킨 걸 보니 언덕 너머에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천호는 일단 고개를 끄덕인 뒤 루시엘과 함께 언덕으로 향했다.
“저쪽에 보이시죠?”
언덕 위에 서자마자 루시엘이 왼쪽 측방을 가리켰다.
과연 그녀의 말마따나 고대 도시를 연상시키는 유적들 사이로 눈에 띄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탑이군요.”
“네, 적어도 7층은 될 것 같아요.”
주변에 자리한 건물들이 높아봐야 2층이었던 터라 7층만 되어도 눈에 확 띄었다.
“계단은 저쪽 방향이에요.”
루시엘이 다시 정면을 가리켰다.
계단으로 직행한다면 굳이 탑에 들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천호는 계단이 아닌 탑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탑이 보이면 일단 들어가라.’
‘왜요?’
‘탑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지.’
‘아버지?’
‘음, 좀 진지하게 답하자면··· 탑에 갇힌 미녀든, 숨겨진 보물이든, 은둔하고 있던 마법사든 아무튼 뭐라도 있을 테니까. 참고로 난 네 엄마를 탑에서 처음 만났다.’
탑.
보물상자처럼 일단 마주하면 까봐야만 하는 대상.
‘거기다··· 뭔가 느낌이 와.’
용사 특유의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대박의 기운이 느껴졌다.
“루시엘, 일단 저 탑에 가보죠.”
“위험하진 않을까요?”
“위험하면 도망치면 돼요.”
루시엘은 눈을 깜박였다.
뭔가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한지 고작 하루였지만, 루시엘은 천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알겠어요. 조심해요, 우리.”
“네.”
짧게 답한 천호는 워 해머를 움켜쥔 채 앞장서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자이언트 렛 스켈레톤을 비롯해 뼈 괴물들 몇이 덤벼들었지만 느려터진 놈들 따위 천호의 상대가 되지 못 했다.
그렇게 약 30여분 뒤.
천호와 루시엘은 탑의 입구에 당도했다.
돌을 쌓아 만든 회색 탑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 규모가 상당했다.
“루시엘, 제가 앞장설 테니까 뒤따라 와요.”
“네, 용사님.”
마른침을 꿀꺽 삼킨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천호는 탑의 입구 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성문처럼 생긴, 하지만 성문보다는 훨씬 작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천호는 일단 성문에 귀를 대고 소리에 집중해보았지만 딱히 들리는 소리가 없었다.
‘가보자.’
일단 보물상자 안에 뭐가 들어있을지는 일단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것이었으니까.
천호는 동그란 고리로 된 두툼한 문손잡이를 잡아당겨 보았다. 다행히 잠겨있진 않았는지, 무겁지만 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우우-
마침내 문이 모두 열렸다.
안에서 밀려나온 공기가 밖보다도 더 차가웠다.
그리고 건조했다. 탑 안쪽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호는 루시엘에게 손을 뻗었고, 루시엘은 자연스럽게 미리 만들어둔 횃불을 꺼내 천호에게 건네주었다.
안에서 무엇이 나올 것인가.
천호는 워 해머를 루시엘에게 건네주고 한 손으로 다루기 쉬운 쿠크리를 손에 들었다.
“먼저 들어갈게요.”
“네, 용사님.”
루시엘이 긴장한 얼굴로 답했다. 천호는 천천히 탑 안 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직후였다.
어둠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천호가 탑 안으로 들어선 그 순간 천장과 벽에 붙어 있던 조명들에 일제히 불이 들어왔다.
천호는 급히 눈동자를 굴려 탑 안을 확인했다.
루시엘이 순수한 감탄을 토했다.
“와아.”
탑 안은 넓었다. 위로 이어지는 크고 호화로운 계단이 있었고, 계단 위에는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책장.
1층의 절반 가까이를 채우고 있는 책장들.
천호는 의식을 집중했다.
딱히 느껴지는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루시엘, 뭔가 마법적인 게 느껴지나요?”
“조금 더 접근해봐야겠지만··· 당장은 천장과 벽의 조명들 말고는 딱히 마법이 없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남은 것은 직접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횃불을 끈 천호는 조심스레 탑 안으로 들어섰다.
직경이 50미터는 족히 될 실내 한 가운데로 향하는 대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책장에 접근했다.
도서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책장.
그리고 그 안에 빼곡히 꽂혀 있는 책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루시엘이 정화 마법을 펼쳤다.
천호는 분홍색 마법의 빛이 지나간 책장에 손을 뻗었고, 조심스럽게 책 한 권을 뽑아들었다.
“음.”
[품위 있는 제국민을 위한 에티켓 100선]
처음 보는 글자지만 읽을 수 있었다.
천호는 책을 펼쳐보았다. 천천히 넘겨보았고, 아예 페이지를 손끝으로 만져보기도 하였다.
‘책을 좋아하시는구나.’
루시엘은 천호의 옆모습을 보며 그리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을 어루만지는 천호의 눈에 환희가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지적인 용사님.
루시엘이 흐뭇한 미소를 지은 그때, 천호는 마음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오오오! 이거라면 할 수 있어! 이거라면 가능해!’
책의 내용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제국민의 에티켓이고 나발이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중요한 것은 책을 이루고 있는 종이의 재질.
양피지가 아니었다.
종이였다.
현대의 종이에 비하면 질이 썩 좋지는 못 했지만, 어찌되었든 책을 만들 정도로 부드러운 종이임에는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
천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스무 개도 넘는 책장과 그 안에 꽂힌 책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마음 놓고 갈 수 있겠군.’
부드러운 종이.
천호는 휴지를 손에 넣었다.
&
< 제1장 - 1층 #11 > 끝
ⓒ 취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