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8화 (8/211)

< 제1장 - 1층 #7 >

&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들아, 요리는 무조건 익혀둬라. 요리 잘하는 남자는 인기가 있는 법이니.’

‘용사보다도 더요?’

‘어리석은 질문이구나. 요리 잘하는 용사가 되면 되지 않느냐!’

‘아앗, 아아앗!’

숙련된 용사셨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옳으셨다.

그리고 천호는 너무나 행복한 표정으로 고기를 먹는 루시엘을 보며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역시.’

작은 입으로 꼭꼭 씹어 먹는 모습이 참으로 어여뻤다.

‘자꾸 해주고 싶네.’

영양 밸런스를 생각한다면 야채가 좀 더 있었으면 하지만.

천호는 잡생각을 하며 고기를 계속 구웠다.

그리고 약 한 시간 여.

부른 배에 손을 올린 채 노곤한 표정을 짓던 루시엘은 긴장이 풀린 듯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천호는 그런 루시엘에게 불판- 카이트실드의 세척을 부탁한 뒤 다음 작업을 준비했다.

‘수통만으로는 부족하니··· 별 수 없군.’

언제까지 여기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으니, 최대한 많은 물을 담아가야 했다.

천호는 자이언트 렛과 렛 오거, 자이언트 크라울러의 방광을 뜯어낸 뒤 깨끗이 씻어냈다.

[재봉 Lv3이 되었습니다.]

생존키트에 들어있는 바늘과 실을 이용해 조잡하게나마 수통을 만들었다.

루시엘의 정화마법까지 더해지면 그럭저럭 물통으로 쓸 만 할 것 같았다.

‘그럼 나도 잠시 쉬어볼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루시엘 옆에 자리를 잡은 천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효율이 조금 나쁘지만 움직이면서도 내공을 쌓을 수 있는 운공의 요결대로 천마신공을 운용하였다.

천호의 단전에 내공이 축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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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님, 일어나셨어요?”

눈을 뜨자마자 들린 것은 루시엘의 목소리였다.

운공을 하던 중에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두 시간쯤 지났군.’

손목시계를 확인한 천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시엘 역시 활기찬 얼굴로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천호는 일단 샘물로 세수를 한 뒤 급조한 수통을 루시엘에게 내밀었다. 정화 마법을 받기 위해서였다.

루시엘은 방광 수통을 본 순간 얼어붙었지만, 아주 잠깐 뿐이었다. 이내 떨리는 손으로 정화마법을 걸어주었다.

“배도 채우고 휴식도 취했으니 이제 쥐구멍을 탐사해보죠.”

“네, 용사님.”

천호의 말에 루시엘이 언제나처럼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천호는 그런 루시엘에게 작은 나뭇잎 하나를 내밀었다.

“앙카브라이의 잎입니다. 앙카브라의 독의 해독제죠. 혹시 모르니 입에 물고 계세요.”

해독제 없는 독은 쓰는 게 아니라는 것이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루시엘은 시킨 대로 파란색 잎을 입에 물었고, 천호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물었다.

“루시엘, 치맛단을 조금 잘라도 될까요?”

“믐?”

입에 잎을 물고 있느라 목소리가 뭉개진 그녀였다.

천호는 다시 설명했다.

“코와 입을 가릴 천이 필요해서요.”

“믐믐.”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된다는 것 같았다.

천호가 가위를 내밀자 루시엘은 손수 치맛단을 잘랐다. 넉넉하게 자른 터라 발목 근처까지 오던 치맛단이 종아리 근처에서 멈췄다.

앙카브라이의 잎을 입에 문 천호는 루시엘의 치맛단을 물에 적신 뒤 얼굴에 둘러 코와 입을 가렸다. 루시엘에게도 똑같은 처치를 해준 뒤 미리 만들어둔 횃불에 불을 붙였다.

“가죠.”

와이어를 회수한 뒤 쥐구멍 안에 들어갔다. 직경이 2미터나 되는 구멍이었던 터라 서서 이동하는데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다.

‘내가 180이니까··· 루시엘은 160 초반쯤 되려나?’

예상대로 쥐구멍- 그러니까 동굴 안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앙카브라의 독에 중독되어 죽은 자이언트 렛 시체들이 곳곳에 나뒹굴었다.

그렇게 이동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거의 외길이다시피 한 통로를 계속 내려가자 돌연 올라가는 구간이 생겼고, 이내 제법 커다란 공동이 나타났다.

“므므므믑!”

“앙카브라이의 잎을 충분히 오래 물고 있었으니 이제 뱉어도 될 겁니다.”

“허억··· 허······ 자, 잠시만요. 일단 숨 좀······.”

그간 숨 쉬기가 힘들었는지 작게나마 심호흡부터 한 루시엘은 공동 끝에 자리한 커다란 제단을 가리켰다.

“역병신의 제단이에요. 가운데 놓여 있는 게 역병신의 신상이고요.”

천호는 섣불리 접근하는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제단 쪽을 보았다.

어린아이만한 크기의 짙은 초록색 조각이 세워져 있었는데, 쥐의 머리를 가진 날렵한 인상의 괴물 형상이었다.

“아마 저 제단과 신상을 파괴하면 퀘스트가 완료될 거예요.”

루시엘의 말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인 천호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로브를 입은 쥐머리 괴물들이 나자빠져 있었는데, 복장을 보아하니 역병신의 신관들 같았다.

천호는 제단 반대편에 쌓여 있는 잡다한 물건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사장에서 쓸 법한 커다란 해머에 눈이 갔기 때문이다.

“혹시 저주 같은 게 걸려있나요?”

“아니요, 깨끗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화마법을 걸게요.”

루시엘의 손끝에서 일어난 분홍색 빛이 망치를 휘감았다.

[잘 부수는 워 해머]

원색적인 이름의 워 해머를 움켜쥔 천호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뒤 제단 앞으로 이동했다.

“부수겠습니다.”

“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루시엘이 응답했다. 두 팔에 내공을 모은 천호는 신상의 머리를 후려쳤다.

쾅!

단번에 머리가 박살이 났다. 계속된 망치질에 몸체가 부서졌고, 나무로 만들어진 제단 역시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변을 직감한 천호는 눈을 부릅뜬 채 시선을 높였다. 왼팔을 들어 루시엘을 보호했고, 루시엘은 그런 천호의 뒤에서 분홍빛 마력을 모았다.

녹색 연기가 솟구쳐 올랐다.

제단을 뚫고 솟구친 그것이 한데 뭉쳐 형상을 이루었다. 거대한 쥐의 두상이었다.

[다섯 여신의 사냥개들!]

[저주받아 죽을 비천한 잡것들!]

공동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단순히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등골을 서늘케 하는 무시무시한 목소리였다.

역병신.

질병을 지배하는 심층의 악신!

[내가 너희를 기억하리라!]

[내 사도를 죽이고, 내 신상을 파괴한 네놈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가장 끔찍한 죽음을 선사해주마!]

[제발 고통 없이 죽여달라 애원하게 만들어주마!]

역병신이 천호와 루시엘을 노려보았다.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이 금방이라도 두 사람을 불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천호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런 역병신을 마주하였고, 루시엘은 용기를 내 소리쳤다.

“우, 웃기지마! 요, 용사님이 널 혼내··· 아니, 물리치실 거니까!”

눈을 꽉 감으며 지른 외침에 역병신의 눈동자가 더욱 크게 불타올랐다.

동시에 천호는 생각했다.

아니, 속으로 소리쳤다.

‘자, 잠깐. 야, 잠깐!’

여기서 왜 내가 나오는데!

식은땀이 절로 났지만 천호는 티를 내지 않았다.

여기서 겁먹은 티를 내봐야 좋을 것이 없었으니까.

그저 담담함을 가장한 얼굴로 역병신을 마주하였고, 역병신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제법 대가 센 년놈들이구나. 하지만 잊지 마라. 항시 두려워해라. 내가 너희를 잊지 않을 것이니!]

“흐, 흥이다!”

루시엘이 다시 소리쳤고, 천호는 루시엘을 말려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그만두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었고,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역병신도 곧 사라질 것 같았다.

[기다려라. 죽음이 너희를 찾아갈 것이니!]

역병신의 두상을 이루고 있던 녹색 연기가 터지듯 흩어졌다.

그리고 몇 초.

다리가 풀린 루시엘이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천호는 똑같이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래도 일단 버티고 섰다.

루시엘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죄, 죄송해요. 제가 멋대로······.”

“아뇨, 괜찮습니다.”

천호는 루시엘을 타박하지 않았다.

사실 루시엘이 말을 했든 안 했든 별로 달라질 게 없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적이니까.’

더욱이 애당초 루시엘이 무어라 하기 전부터 저주의 말을 쏟아내던 역병신이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말로나마 기개를 보인 게 나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현실이 되었다.

[히든 퀘스트 ‘쥐구멍’을 완료했습니다.]

[사악한 역병신의 음모를 저지했습니다.]

[미궁 세계가 아주 조금 안전해졌습니다.]

[미궁 세계가 당신의 빛나는 업적을 기억합니다.]

[크로니클 퀘스트 ‘역병신의 대적자’가 생성되었습니다.]

[역병신과 적대관계인 치유의 신이 역병신의 음모를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역병신에게 기개를 보인 당신과 당신의 천사에게 호감을 보입니다.]

[치유의 신의 가호가 내립니다.]

[치유의 신의 가호 Lv1]

[1. 치유 속도가 1.2배 향상된다.]

[2. 각종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1.2배 강해진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질병저항 Lv1을 획득했습니다.]

[히든 퀘스트 보상 : 타오르는 카이브스의 히트 대거]

빛의 문자가 연속해서 떠올랐다.

천호와 루시엘의 머리 위에 파란 빛의 무더기가 쏟아져 내렸고, 두 사람의 오른손등 위로 빛의 문양이 떠올랐다. 치유의 신의 가호였다.

“처, 천호님! 레어 등급의 단검이에요!”

루시엘이 반짝이는 눈으로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들었다.

검붉은 칼날을 가진 단검이었는데, 손잡이 부분에 박힌 주황색 보석이 마치 뱀의 눈과 같았다.

[타오르는 카이브스의 히트 대거]

[칼날에 불꽃의 열기를 더할 수 있는 단검.]

[1. 날카로움]

[2. 발열]

[3. 자동 수복]

확실히 제법- 아니, 대놓고 좋은 단검이었다.

만족한 천호는 함께 떨어진 가죽 검집에 단검을 넣은 뒤 오른쪽 허리에 장비했다.

그런데 보상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

돌연 탄성을 토한 루시엘이 부서진 제단에 다가섰다. 천호도 가보니 제단 속에 자리하고 있던 투구와 갑옷이 보였다.

루시엘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환된 영웅께서 남기신 물건이에요. 역병신의 제단을 만드는 제물로 희생되신 것 같아요······.”

“소환이라면··· 저처럼요?”

“네, 소환된 영웅 분들이 돌아가시면 시신이 남지 않아요. 빛이 되어 사라지시거든요.”

언제 소환된 영웅일까.

어떤 세계를, 어떤 시대를 살아가던 인물일까.

루시엘은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기도했다.

죽은 영웅의 넋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천호는 그런 루시엘의 곁에서 잠시 묵념한 뒤 투구와 갑옷을 살펴보았다. 기도를 마친 루시엘이 말했다.

“가져가도록 해요. 영웅께서도 그걸 원하실 거예요.”

미궁 세계에 소환되는 자들은 자기 세계에서 영웅이라 불렸던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루시엘의 말처럼 죽어서나마 자신의 장비들이 미궁 세계의 해방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터였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천호는 투구와 갑옷에 손을 뻗었다.

투구는 네모진 형태였고, 갑옷은 서양식 체인 메일이었다.

천호는 그 중 투구에 집중하였다.

네모난 강철 투구.

천호가 쓰기에는 많이 컸다. 안에는 가죽으로 안감처리가 되어 있었는데, 제법 부드러웠다.

“천호님?”

루시엘의 부름을 들으며 천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대강의 도면을 그려보았다.

‘할 수 있어.’

안감을 제거하고 코가리개 부분을 찌그러트린 뒤 약간의 가공을 가해 손잡이를 만든다.

그리하여 얻을 수 있는 것.

‘잘 쓰겠습니다.’

천호는 냄비를 손에 넣었다.

&

< 제1장 - 1층 #7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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