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7화 (7/211)

< 제1장 - 1층 #6 >

&

“천호님, 대단해요! 정말정말 대단해요! 굉장해!”

“음.”

루시엘은 천호의 목을 끌어안은 채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정말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순간을 계속 즐기고 싶은 천호였지만 아쉽게도 무리였다.

연속해서 떠오른 빛의 창을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모름지기 과유불급이니. 남자는 때론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왜냐고? 그쪽이 더 멋있기 때문이지······.’

아버지께서는 늘 옳으셨다.

천호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은 뒤 루시엘을 아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그런데 루시엘.”

“네?”

“역병신이 분노했다는군요.”

“아.”

입을 동그랗게 벌린 루시엘은 그제야 다시 빛의 창 쪽을 돌아보았다.

[역병신이 자신의 사도를 쓰러트린 당신에게 격한 분노를 토합니다.]

솔직히 불안했다.

어쨌든 신이지 않은가, 신.

하지만 루시엘은 씩씩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역병신의 격노가요?”

“네, 역병신은 대미궁에 존재하는 여러 악신들 가운데 하나인데, 심층 깊은 곳에 틀어박혀 있거든요. 격노해봐야 별 짓 못 할 거예요.”

나름 코웃음까지 치는 루시엘이었다.

하지만 천호는 여전히 신중한 얼굴로 물었다.

“악신들은 마신의 부하들인가요? 그리고 심층에 있다는 건··· 실체가 존재한다는 뜻인가요?”

언제나 정보는 중요했다.

천호의 구체적인 물음에 루시엘은 장난기를 지우고 답했다.

“네, 대미궁 안에는 마신의 수하인 여러 악신들이 거하고 있어요. 다들 저마다의 신체를 가지고 있고요. 사실 신체를 지닌 건 다섯 여신님들과 마신도 마찬가지에요.”

아무래도 천호 자신이 생각하는 신과는 개념이 좀 다른 모양이었다.

“저 같은 천사들도 급수가 무척 낮긴 하지만 나름 신에 속해요. 최하급 신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역병신도 말이 신이지 그냥 저보다 좀··· 아니, 많이··· 으음, 아무튼 저보다 좀 세고 대미궁의 층 하나를 통으로 지배하고 있어서 그렇지, 그렇게까지 대단한 존재는 아니에요.”

‘충분히 대단해 보이는데.’

사실 말하는 루시엘도 그리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냥 말하다보니 저리 되었다고나 할까.

삐질삐질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음. 아무튼 당장 피해를 입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군요.”

“네, 바로 그거에요. 그리고 어차피 역병신은 우리의 적이니까, 애당초 분노를 사든 안사든 별로 차이도 없고요.”

“알겠습니다.”

일단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그러자 루시엘이 다시 빛의 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보다 천호님, 이것 보세요. 미궁 세계가 천호님의 업적을 기억했어요. 이거야말로 대단한 일이라고요!”

“음, 뭔가 이득이 있나요?”

“당연하죠! 미궁 세계가 천호님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에요.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쌓이기 시작하면 천호님의 격이 높아질 거고요! 나중에는 정말 신이 되실 수도 있어요!”

“음.”

천호는 일단 무표정하게 답했지만 속은 아니었다.

살짝이지만 허벅지까지 꼬집어야 할 정도로 표정을 관리하기가 힘들었다.

‘신이라고?’

물론 지금까지의 흐름상 천호 자신이 생각하는 전지전능한 신과는 거리가 멀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신.

그냥 어감만으로도 굉장한 신!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아니, 솔직히 말해 엄청 되고 싶었다.

숱한 시뮬레이션 중에서도 신이 되는 결말을 맞이한 경우는 별로 없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좀 말이 안 되었으니까.’

여신이랑 결혼하는 망상은 좀 해봤어도.

“흠흠.”

“용사님?”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는 루시엘의 모습에 묘한 죄책감을 느낀 천호는 다시 헛기침을 토한 뒤 말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나중의 이야기니 일단 당면한 문제에 집중하겠습니다.”

“네, 천호님.”

“일단 보상부터 확인하죠.”

쥐 떼를 학살하고 미치광이 크라울러까지 잡았더니 레벨이 어느새 15가 되어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신기하네.’

레벨이 오르면 마력과 신체능력이 상승한다.

정말이었다.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미궁 세계에 왔을 당시의 천호 자신의 기본 신체능력이 전국 체전에서 메달 딸만한 고교생이었다면, 지금은 대충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정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것 보세요, 천호님. 쓸 만한 물건이 나왔어요.”

[미치광이 크라울러의 마력 정수]

[강철의 카이트실드 +1]

크라울러의 시신 앞에는 새카만 카이트실드와 새카만 마력 정수가 놓여 있었다.

렛 오거의 마력 정수가 탁구공이었다면, 크라울러의 마력 정수는 야구공쯤 되는 것 같았다.

‘아이템도 드랍하네?’

그냥 가지고 있던 물건을 떨구는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게임처럼 본래라면 들고 있지 않았을 물건까지 드랍하고 있었다.

“꽤 질이 좋은 방패 같아요! 강화도 되어있고, 1층에서는 보기 힘든 물건이에요. 등급은 언커먼? 옵션도 몇 개나 붙어 있어요.”

루시엘이 생글생글 웃으며 카이트실드를 들어올렸다. 제법 무거운지 낑낑 거렸지만, 얼굴은 한 없이 밝았다.

“음.”

카이트실드를 잠시 바라본 천호는 일단 크라울러의 마력 정수부터 흡수했다.

렛 오거의 마력 정수와 마찬가지로 움켜쥐고 염원하니 흡수가 되었는데, 그 느낌이- 아니, 쾌감이 실로 굉장했다.

“으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탄성을 삼킨 천호는 천마신공에 의식을 집중했다. 흡수한 크라울러의 마력을 단전에 쌓기 위함이었다.

‘좋아.’

과연 네임드 몬스터. 축적된 내공의 양이 렛 오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단번에 단전의 내공이 세 배 가까이 늘어난 것 같았다.

“루시엘, 방패의 옵션은 뭐죠?”

“부가 능력이에요. 천호님도 직접 들어보시면 아실 거예요.”

루시엘이 다시 낑낑 거리며 들고 있던 카이트실드를 천호에게 내밀었다. 카이트실드라는 이름답게 한쪽 끝이 유달리 긴 마름모 형태의 방패였는데, 루시엘의 상체 전체를 덮고 남을 크기였다.

[1. 충격 흡수 : 방패에 가해진 충격 일부를 흡수합니다.]

[2. 경량화 : 방패의 무게가 다소 줄어듭니다.]

통으로 강철이다보니 무게가 상당했다. 경량화 옵션이 없었다면 루시엘은 아예 들 엄두도 내지 못 했을 물건이었다.

“흠.”

천호는 카이트실드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재질 자체가 검은색인지, 따로 염색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방어력이 상당할 거예요. 충격 흡수 옵션까지 있으니 렛 오거의 공격 정도는 가볍게 막아줄 걸요?”

“그렇군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천호는 일단 카이트 실드를 내려놓은 뒤 루시엘에게 물었다.

“그런데 루시엘, 히든 퀘스트가 아직 남은 것 같군요.”

“아······.”

루시엘은 서둘러 손가락을 놀렸다. 그러자 히든 퀘스트와 관련된 빛의 창이 다시 떠올랐는데, 확실히 천호의 말마따나 아직도 진행 중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조건이 크라울러의 격파와 제단의 파괴니 쥐구멍 안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군요.”

“괜찮을까요? 안에 아직도 연기가 있을 텐데. 정화 마법으로 어떻게 될 것도 같지만······.”

루시엘이 불안한 눈으로 말하자 천호는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간도 대충 가늠해본 뒤 결론을 내렸다.

“일단 좀 쉬도록 하죠. 쥐구멍의 규모도 명확히 알지 못 하는 상황이니.”

“네? 여기서요?”

“네, 여기가 가장 좋아요. 우리가 들어온 입구와 쥐구멍만 막으면 밀폐된 장소니 적습의 위험도 없고, 뭣보다 저게 있으니까요.”

천호가 가리킨 방향에는 작은 샘이, 정확히는 벽에 난 구멍에서 졸졸졸 물이 새어나오고 있는 작은 분수대가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발견한 유일한 수원이었다.

어쩌면 쥐구멍이 하필 이 방에 있었던 것도 저 샘물 때문일 가능성이 있었다.

쥐들도 물은 마셔야 했으니 말이다.

“정화 마법으로 정수도 가능하겠죠?”

“어, 네. 가능할 거예요.”

“좋습니다.”

천호는 숨을 깊이 삼켰다.

가볍게 눈을 감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점검하였다.

그리고 루시엘은 그런 천호를 보며 생각했다.

‘뭔가 불길해.’

아니, 정확히는 불길한 게 아니라 기묘했다.

그리고 루시엘의 이런 기묘한 기분은 천호의 다음 말로 더 강화되었다.

“그럼, 작업을 시작하죠.”

작업.

뭔가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

‘아들아, 남자는 말이다. 일단 생활력이 있어야 한단다.’

‘생활력이요?’

‘그래, 생활력. 여자는 생활력 있는 남자한테 끌리는 법이거든.’

[진지구축 Lv3이 되었습니다.]

[도축 Lv3이 되었습니다.]

천호는 일단 방의 입구부터 틀어막았다. 애당초 숨겨진 입구인 만큼 잔해 좀 쌓으니 금방 안과 밖을 분리할 수 있었다.

연이어 천호는 미치광이 크라울러의 시신을 인벤토리에 쑤셔 넣은 뒤 쥐구멍에 다시 와이어를 쳤다. 혹시나 남아있을지 모를 생존자- 아니, 생존쥐가 튀어나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가장 중요한 기초 공사가 끝나자 천호는 샘물 근처에 자이언트 렛들의 시신을 늘어놓았다.

‘일단 다섯 마리.’

컴뱃 나이프로 가죽을 벗겨낸 뒤 샘물로 피를 씻어냈다.

루시엘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떨었지만 그래도 눈을 돌리진 않았다.

‘무두질은 당장 못 하겠네.’

짐승의 가죽을 쓰기 위해서는 일단 두 가지 과정이 필요했다.

1. 지방질 제거.

2. 털 뽑기.

지방질 제거야 그냥 칼로 벗겨내면 되었지만 털 뽑기가 문제였다.

잿물이나 탄닌에 가죽을 담가 털을 제거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가죽을 담글 정도로 큰 통이 필요했다.

물론 털을 그대로 살려 모피로 써도 되긴 했지만, 자이언트 렛은 털이 빳빳하고 날카로워 모피로 쓰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때문에 천호는 일단 가죽에서 지방질만 제거한 뒤 인벤토리 안에 가죽들을 쑤셔 넣었다.

인벤토리 안에서는 썩을 일도 없으니 부패를 걱정할 일도 없었다.

‘참 좋단 말이지.’

자이언트 렛의 발골 작업을 하며 천호는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본래라면 고기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 훈연 작업을 거쳐야 했지만, 인벤토리가 있으니 그냥 생고기 채로 저장만 하면 되었다.

천호는 자이언트 렛의 고기를 잘 싸서 반 마리 분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전부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지켜보며 루시엘은 생각했다.

‘진짜 뭐하던 분이시지?’

가죽 벗기고 발골하는 솜씨가 범상치 않았다.

문자 그대로 전문가의 포스가 느껴졌다.

더욱이 미궁 시스템의 영향 때문인지 손놀림이 점점 더 빨라졌다.

입구를 막고 가죽을 벗기고 피를 뺀 뒤 고기를 발라낸다.

이 모든 작업을 마친 천호는 샘물에 손을 씻은 뒤 다음 작업에 착수했다.

일단 잔해에서 쓸 만한 돌들을 챙긴 뒤 쥐구멍 앞에 대충 둘로 나눠 쌓았다.

그 사이에 다시 모닥불을 피웠고, 아까 타다 남은 고체 연료와 장작들을 밀어 넣었다.

‘화력은 이 정도면 되었고.’

눈을 가늘게 뜬 천호는 쌓은 돌 위에 카이트실드를 올렸다. 모닥불의 바로 위쪽이었다.

“요, 용사님?”

루시엘이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천호는 멈추지 않았다.

애당초 순수한 강철인지를 확인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맛있는 거 해드릴게요.”

“어, 으, 네?”

천호는 일단 가죽에서 벗겨낸 지방으로 카이트실드의 표면을- 불판을 닦았다.

치이익-

군침 도는 소리가 났다.

지방도 고기라고 냄새도 고소했다.

루시엘이 멍한 얼굴이 되었다. 천호는 만족한 얼굴로 얇게 썬 자이언트 렛 고기를 불판 위에 올렸다.

생존 키트에서 꺼낸 소금을 솔솔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끼지 말고 이것도 먹자.’

컵라면 먹을 때 같이 먹으려고 꺼냈던 김치.

밀폐 용기의 뚜껑을 연 뒤 김치 몇 장을 꺼내 불판 위에 올리니, 다시 좋은 냄새가 났다.

“루시엘, 미안하지만 날갯짓 작게 좀 부탁해요. 연기가 밖이 아니라 쥐구멍으로 들어가게.”

“어, 어, 네.”

루시엘이 날갯짓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불판 위에서는 먹음직스런 소리가 이어졌다.

치이익-

고기가 익는다.

기름이 끓고, 김치가 구워진다.

루시엘은 저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켰다.

천호가 젓가락으로 고기를 뒤집었다.

[요리 Lv4가 되었습니다.]

‘불판이 나와서 다행이야.’

천호는 생각했고, 루시엘도 살짝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제 먹죠.”

식탁에는 수저통이 있었고, 숟가락과 젓가락은 부족하지 않았다.

어설프게 젓가락을 쥔 루시엘은 다시 꿀꺽 침을 삼켰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본부를 탈출하기 전에도 밥 먹을 새는 없었으니, 거의 하루 종일 굶은 셈이었다.

‘언커먼 등급의 카이트실드······.’

그것도 옵션이 두 개나 붙은.

하지만 지금은 훌륭한 불판이었다.

‘자이언트 렛의 고기······.’

까놓고 말해 쥐고기.

하지만 루시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유혹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치이익-

소리에 굴복했다. 냄새에 무릎 꿇었다.

루시엘은 더 이상 미련 떨지 않고 고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아!’

씹는 순간 육즙이 터져나왔다.

자이언트 렛의 고기 따위 당연히 먹어본 적이 없었지만, 어째 닭고기랑 비슷한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해진 소금의 짠맛.

다년간에 걸친 수련을 통해 천호가 습득한 고기 굽기의 정수.

“맛있죠?”

천호가 물었고, 오물오물 고기를 씹던 루시엘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능에 따라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루시엘은 행복했고, 천호는 만족했다.

&

< 제1장 - 1층 #6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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