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5화 (5/211)

< 제1장 - 1층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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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죄송해요. 너무 흥분했어요.”

“음.”

아뇨, 괜찮습니다.

부디 자주 흥분해주세요.

더 흥분해도 좋습니다. 대범해지셔도 좋고요.

물론 속으로만 한 생각이었다.

루시엘은 하얀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천호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렛 오거를 돌아보며 말했다.

“1층에서 렛 오거를 잡다니··· 그것도 두 방 만에! 렛 오거면 1층에서 나오는 괴물들 중에서도 무척 강한 편에 속하거든요. 진짜 대단하세요!”

“음, 그렇군요.”

어쩐지 존나 세 보이더라.

솔직히 운이 좋았다.

내공을 사용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조금만 미흡했어도 지금처럼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천호는 주먹을 불끈 쥐어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으로 사용한 내공의 힘에 전율했다.

사실 천호가 내공을 사용한 체술을 시도한 것은 분위기에 취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평범한 화살이나 나이프 투척으로는 도저히 놈을 단시간에 무력화시킬 자신이 없어서였다.

화살이었다면 수십 발이 박혔어도 미쳐 날뛰었으리라.

투척용 나이프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였고.

그런데 내공을 사용한 체술로는 제압이 가능했다.

‘아버지.’

내공과 마력에 대해 가르치시던 당시의 아버지께서 왜 그런 표정을 지으셨는지 알 것 같았다.

지구의 환경 때문에 내공을 쌓지 못 하는 아들이 안타까우셨겠지.

“저, 저기.”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회상 모드에 들어가려던 천호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루시엘이 두 손을 모아 쥔 채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처, 천호님.”

“네.”

“그··· 뭐하시던 분이세요?”

‘역시.’

이 질문이 나올 거라 예상했다. 그래서 천호는 미리 시뮬레이션 해두었던 대로 대답했다.

“그냥 학생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으니까.

자고로 용사는 신비로움이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그래야 더 멋져 보이는 거라고.

“그, 그렇군요.”

루시엘은 어색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역시··· 정상은 아니야.’

분명 좋은 사람이지만, 믿음직한 용사님이지만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식탁에 무기도 숨겨두고.

“그나저나 히든 퀘스트가 발생했군요.”

“마, 맞다. 히든 퀘스트!”

짝 소리가 나게 손바닥을 친 루시엘이 다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천호님, 일단 렛 오거의 마력 정수부터 챙기세요. 흡수하시면 천호님의 마력이 증가할 거예요.”

“마력이요?”

“네, 손에 꼭 쥐시고 흡수한다는 이미지를 떠올려보세요.”

거기까지 말한 루시엘은 렛 오거의 앞에 놓인 탁구공 크기의 검은 구슬을 집어 천호에게 내밀었다.

‘아이템 드랍 같은 건가?’

렛 오거의 시체는 그대로였는데, 마력 정수만 따로 떨어져 나왔으니.

어찌되었든 일단은 루시엘 말대로 흡수가 먼저였다.

천호는 루시엘에게 받아든 렛 오거의 마력 정수를 한 손에 꼭 쥐었다.

흡수한다.

생각하니 정말 그대로 되었다.

그리고 천호는 깨달았다.

아버지의 말씀대로였다. 마력과 내공은 같았다. 단지 어디에 축적하느냐에 따라 서로 길이 갈리는 것뿐이었다.

이미 천호가 내공을 운용했기 때문인지 렛 오거의 정수는 천호의 단전에 축적되었다.

‘아아, 아아아.’

내공의 축적량이 단번에 두 배 이상이 되었다. 애당초 축적해둔 양이 너무 적어서이긴 했지만, 분명 장족의 발전이었다.

‘쩌, 쩐다.’

이게 바로 내단이란 것인가.

렛 오거에서 마력 정수가 나왔으니 다른 놈들한테도 마력 정수가 나올 터였다.

나오는 족족 흡수하면 그냥 혼자서 천마신공 연마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내공을 쌓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리한다면-

‘진정한 무공.’

지금 당장은 무리였다.

하지만 내공을 충분히 축적하면 사용할 수 있게 되리라.

아버지께 배운 절세의 무공들을.

호세사천왕과 천마신공을!

“천호님, 어떠세요?”

“음.”

자기가 더 두근거리는지 루시엘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물었다. 천호는 애써 평온을 가장한 채 답했다.

“마력을 흡수했습니다.”

“거부 반응은 없었고요?”

“네, 그냥 잘 흡수했습니다.”

“다행이다.”

후-하고 안도의 숨을 토한 루시엘은 조곤조곤 설명했다.

“아무래도 마물들의 마력은 정순하지 못 한 경우가 많으니까요. 렛 오거의 마력을 무리 없이 흡수하신 걸 보면, 여간한 마물들의 마력은 다 흡수가 가능하실 거예요.”

“그렇군요.”

아무래도 천마신공 덕분인 것 같았다.

세상 만물의 기운을 오만하게 짓눌러 천마의 힘으로 삼는 것이 천마신공이었으니까.

“그럼 히든 퀘스트에 대해 설명 드릴게요. 아, 어떡해. 막 두근두근거려. 잠시만요. 조금만 진정하게요.”

“네, 얼마든지.”

루시엘은 가슴을 누른 채 심호흡을 했고, 천호는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평온을 되찾은 루시엘이 말했다.

“히든 퀘스트는 이름 그대로 숨겨진 퀘스트에요. 그냥 단순히 대미궁을 내려가기만 해서는 발견할 수 없는 퀘스트죠.”

“퀘스트가 고정된 건가요? 그러니까··· 누군가가 발견하기 전까지는 계속 숨겨져 있다거나.”

“조금 달라요. 퀘스트는 미리 준비되어 있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실시간으로 발생하는 거거든요.”

“음.”

대강 알 것 같았다.

미궁 세계는 무척이나 게임 같았지만 정말 게임인 것은 아니었다.

유저들을 위해 제작자가 준비해둔 퀘스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상황이 발생하면 그 상황에 맞춰 퀘스트라는 형식이 주어지고, 그에 따라 보상이 주어지는 방식이었다.

‘다섯 여신들이 미궁 시스템을 역이용해 만들었다고 했지.’

목적은 영웅들을 지원하기 위해.

대충 앞뒤가 맞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히든 퀘스트는 희소하겠죠?”

“네, 그만큼 보상도 좋은 경우가 많아요. 가능한 해결하시는 게 좋아요.”

“음, 과연. 그럼 한 번 확인해보도록 하죠.”

제목만 봐서는 어떤 퀘스트인지 알 수 없으니.

“네, 천호님.”

정말 신이 났는지 밝게 답한 루시엘이 허공에 손가락을 놀렸다.

[히든 퀘스트 : 쥐구멍]

[사악한 역병신의 사도 미치광이 크라울러가 1층과 2층 사이에 커다란 소굴을 만들었습니다.]

[쥐구멍의 마물들을 소탕하고, 미치광이 크라울러를 쓰러트려 역병신의 사악한 음모를 저지해야 합니다.]

[쥐구멍을 소탕하고 역병신의 제단을 무너트리십시오.]

“음.”

렛 오거를 잡았으니 쥐와 관련된 퀘스트를 준다.

정석적이었다.

‘그런데 결국 무슨 음모라는 거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퀘스트의 목표 자체는 뚜렷했으니까.

“과연 히든 퀘스트··· 만만치가 않아요. 소굴이라고 하는 거 보니 자이언트 렛도 엄청 많을 거고요. 렛 오거도 여러 마리 있을지 몰라요.”

루시엘의 표정이 어두웠다. 방금까지만 해도 히든 퀘스트는 반드시 깨야한다고 주장하던 그녀였는데, 콕 찌르면 그냥 피하자는 말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일단 시도는 해보죠. 쥐구멍의 위치를 알 수 있을까요?”

“잠시만요.”

루시엘이 다시 손가락을 놀리자 허공에 빛으로 된 약도가 나타났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과 앞으로 길이 대강 나타났는데, 붉은 빛으로 쥐구멍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렇게 멀지는 않아요. 지도를 보니 숨겨진 길이 있는 모양이에요.”

“일단 베껴 그리죠.”

낯선 장소- 특히 이런 미궁 안에서는 지도가 무척이나 중요했으니까.

천호는 루시엘이 인벤토리에서 꺼내준 노트에 슥슥 약도를 그렸다.

[지도제작 Lv3이 되었습니다.]

대충 그리는 것 같았지만 거의 대고 그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정밀했다.

자연 루시엘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애써 입을 꾹 다문채 지도 그리기를 마친 천호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런데 혹시, 인벤토리 안에 시체는 수납이 가능한가요?”

“그··· 죽은 상태면 가능해요. 인벤토리 안에서는 시간이 정지하기 때문에 썩지도 않고요.”

“그렇군요. 그럼 자이언트 렛의 시체를 인벤토리에 넣어두죠.”

천호가 직전에 쓰러트린 자이언트 렛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일반 쥐보다 수십 배나 큰, 거의 대형견 크기의 쥐였다.

“너, 넣을 수는 있는데 어디다 쓰시게요?”

“식량이요.”

천호의 대답에 루시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물을, 그것도 쥐를 먹겠다는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먹고는 살아야 했으니까.

루시엘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인벤토리를 열었고, 천호는 자이언트 렛의 시체는 물론이고 렛 오거의 시체까지 인벤토리에 밀어 넣었다.

“그럼 출발하죠.”

“아, 그 전에 천호님. 한 가지 깜박한 게 있어요.”

“뭐죠?”

“파티요. 메인 레벨 5가 되셨죠? 그럼 파티를 맺을 수 있어요.”

“어··· 그룹을 구성한다는 말씀인가요?”

“네, 보통은 영웅분들끼리 맺는데, 천사와도 가능해요. 천호님의 경험치를 제가 조금 나눠받겠지만, 대신에 제 회복 마법이나··· 여러 가지 보조가 더 효율적이 될 거예요. 파티가 오래 지속되어서 파티 레벨 자체가 높아지면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지고요.”

“그럼 맺도록 하죠.”

“네, 잠시만요.”

루시엘이 얼른 손가락을 놀려 새로운 빛의 창을 만들어냈다.

[9급 천사 루시엘과 파티를 맺으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역시 9급이었구나.’

천사의 등급은 잘 몰랐지만, 높아보이진 않았다.

“천호님?”

“네, 지금 맺도록 하죠.”

빛의 창을 건들자 바로 파티가 형성되었다. 딱히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지만, 묘하게 루시엘과 연결된 기분이 들었다.

“잘 됐어요.”

“음, 그럼 이제 출발하죠.”

“네, 천호님!”

용기를 내듯 주먹을 꽉 쥔 루시엘이 힘차게 답했다.

천호는 작게 웃으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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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도를 따라 쥐구멍 앞에 도착한 루시엘은 눈을 깜박였다.

어째 대미궁에 들어온 이후 계속 눈만 깜박이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불 피웁니다.”

< 제1장 - 1층 #4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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