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2화 (2/211)

< 제1장 - 1층 >

제1장

평화롭고 한적한 오후였다.

수능 끝난 지 이틀.

컵라면에 뜨거운 물 붓고 막 자리에 앉았던 박천호는 눈을 깜박였다.

“음.”

식탁은 그대로였다.

식탁 위의 컵라면과 밀폐용기에 담긴 김치와 의자와 컵라면 먹으면서 보려고 했던 스마트폰까지 모두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일단 집이 아니었다.

천장과 벽과 바닥이 모두 달라졌다.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중세 유럽의 지하도 같은 공간이었다.

높은 천장과 넓은 복도.

돌로 만들어진 차가운 바닥.

달라진 것은 배경만이 아니었다. 눈앞에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분홍색 머리칼이었다.

다른 것보다 그게 너무 눈에 띄어서 일단 그것만 눈에 들어왔다.

밝은 분홍색 머리칼을 가진 하얀 얼굴의 천사.

등에 하얀 날개 달리고 머리 위에 빛의 고리가 있으니 천사 맞겠지.

하늘하늘한 하얀 옷을 입은 그녀는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무어라 기도하고 있었다.

“제발 5성! 제발 5성! 안 되면 4성이라도······!”

뭔가 익숙하면서 기묘한 말을 들은 천호는 일단 컵라면을 돌아보았다. 아직 라면이 익으려면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음.”

천호는 다시 생각했다.

낯선 공간.

처음 보는 여자.

그것도 뭔가 척 봐도 평범한 인간이 아닌, 열에 아홉은 천사라 단정 지을 것 같은 여자.

‘역시, 그건가?’

아버지께서 출생의 비밀(?)을 밝히신 이후 4년.

틈날 때마다 상상해본 어떤 사건.

“제발, 제발, 여신이시여! 제발!”

천사는 계속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천호는 일단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다 익었으니 불기 전에 먹을 생각이었다.

후르륵후르륵.

면발을 삼키며 스마트폰을 켜봤다.

예상대로 인터넷이 불가능했다.

와이파이는커녕 LTE도 안 잡혔다.

‘음, 역시.’

다시 후르륵후르륵.

콜라도 한 모금 삼켰다.

‘마침내 그 날이 오고야 말았구나.’

약간이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도 천호는 일단 컵라면 먹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컵라면이 될지도 몰랐으니까. 불기 전에 다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에?”

멍한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두 손을 모아 쥔 천사가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이제야 천호 자신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음. 안녕하세요.”

천호는 일단 먼저 인사를 해보았다.

천사가 기도할 때 중얼거린 말은 한국어가 아니었지만, 신기하게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 아마 그 역도 성립하겠지.

천호의 인사에 천사는 다시 눈을 깜박였다.

그대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허둥거리며 천호에게 다가섰다.

“어, 으. 요, 용사님?”

“음.”

천호는 평온을 가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용사님’이란 말을 들은 순간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전율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보셨다면 피는 못 속인다고 하셨겠지.

“일단, 사정을 좀 듣고 싶군요.”

이계로 소환되는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이라면 수십- 아니, 수백 번도 넘게 한 천호 자신이었다.

우호적인, 그리고 예쁜 소환자를 마주했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어··· 네. 서, 설명드릴게요.”

천호의 침착한 대응에 오히려 천사가 당황했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가슴을 누르더니 심호흡을 했고, 천호는 컵라면을 마저 먹었다.

후르륵후르륵.

그렇게 십여 초.

천호가 컵라면 먹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천사는 고개를 휘휘 내젓더니 나름 빠릿해진 얼굴로 말했다.

“제, 제 이름은 루시엘입니다. 다섯 여신님을 모시는 천사고··· 요, 용사님을 소환한 소환자입니다.”

“음, 그렇군요. 계속 말씀하시죠.”

“어··· 네. 그, 그러니까······.”

천사- 루시엘이 ‘이, 이게 아닌데······.’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말을 고르는 동안 천호는 남은 콜라를 마셨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콜라 특유의 맛과 시원함에 천호는 만족감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다시 십여 초.

겨우 진정한 루시엘이 다시 두 손을 모으며 설명했다.

“여, 여기는 미궁 세계에요. 마신의 침공으로 인해 세계 자체가 대미궁이 되어버린 세계죠. 대미궁을 공략해 세계를 해방하고··· 다섯 여신님들을 구하기 위해 용사님들을 소환하고 있어요.”

“음, 그렇군요.”

정석적이었다.

그냥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 미궁 세계라는 것이 좀 걸렸지만, 일단 여기까지는 예상 범위 안이었다.

“마신의 부하들에게 습격을 당해서 제가 속해 있던 본부가 파괴되었어요. 천사장님의 희생 덕분에 겨우 탈출했고··· 지부에 남아 있던 마지막 남은 소환의 돌로 용사님을······.”

루시엘은 말하다 말고 훌쩍훌쩍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천호는 콜라를 마시며 생각했다.

‘좋지 않아.’

상황이 예상보다 심각했다.

지금까지 해본 시뮬레이션들 중에서 최악의 경우들을 떠올려야 할 것 같았다.

“용사님! 제발 부탁드려요! 갑자기 이렇게 소환해놓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니, 애당초 이렇게 갑자기 소환한 것 자체가 정말 죄송한 일이지만! 제발 우리 세계를 구해주세요!”

루시엘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간곡한 어조로 애원했다.

천호는 일단 콜라를 마저 마셨다.

그리고 생각했다.

‘음, 좆됐구나.’

미궁 세계라는 곳에 소환되었다.

그런데 소환한 측이 제국이라든가, 왕국이라든가, 뭔가 강력한 집단 같은 게 아닌 망해가는 집단이었다.

더욱이 눈앞의 천사는 예쁘지만 약해보였다. 어쩌면 말단 천사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천사는 말했다.

마지막 남은 소환의 돌로 천호 자신을 불렀다고.

아군이 없다.

지원해줄 세력도 없다.

있는 거라고는 능력이 있을지 없을지 의문인, 말단일 가능성이 높은 천사 한 명뿐이다.

‘다시 생각해도 좆됐네.’

하지만 표정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여기서 좆됐다고 울고불고 해봐야 상황이 나아질 건 없었으니까.

‘돌려 보내달라고 해도 당장은 안 되겠지.’

딱히 바닥에 마법진이고 뭐고 안 보였다. 설사 돌아갈 방법이 있어도 당장 돌아가는 것은 무리이리라.

“음.”

천호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루시엘이 그런 천호를 너무도 믿음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용사님, 성함을 알려주세요.”

루시엘이 허공에 손가락을 놀리며 말했다. 빛의 창 같은 것이 뜨는데, 뭔가 검색 같은 걸 해보려는 것 같았다.

천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천호요. 성이 박이고, 이름이 천호요.”

“네, 천호 용사님.”

생긋 웃으며 답한 루시엘은 다시 빛의 창에 손가락을 놀렸다.

그리고 몇 초.

루시엘이 눈을 깜박였다.

미소를 잃었고, 나중에는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

“1, 1성이잖아요!”

검색에서 이름이 잡히지 않았다.

무명의 영웅들이라 불리는 1성 영웅들에게만 생기는 일이었다.

“음.”

“음이 아니라! 1, 1성이잖아요! 1성! 그런데 왜 그렇게 태연하신 거예요!”

“흥분해봤자 의미가 없으니까?”

“아, 아니. 맞는 말이긴 한데······.”

루시엘은 다시 눈을 몇 번이나 깜박이더니 열심히 심호흡을 했다. 겨우 숨을 가라앉힌 뒤 쏟아내듯 말했다.

“그, 그러니까. 소환의 돌로 영웅을 부르거든요? 보통은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분들이 오세요. 세상에 크나큰 업적을 세우신 영웅들이요. 그, 그 천호님 세계를 기준으로 하면··· 삼국지. 그래, 삼국지의 여포나 관우 같은?”

“음, 그런데 엄백호가 나왔다 이거죠?”

“본인이 엄백호잖아요! 아니, 엄백호도 아니에요! 이름이 검색이 안 된단 말이에요!”

루시엘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다시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인세에서 어떤 업적을 세웠느냐에 따라 별의 개수가 정해져요. 1성 영웅이면 사실상 일반인이랑 다름이 없다고요. 으앙. 망했어. 마지막 뽑기였는데, 천사장님이 남겨주신 마지막 뽑기였는데······.”

털썩 주저앉은 루시엘이 흑흑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호는 이해했다.

‘과연.’

천호 자신은 용사의 아들이란 점을 제외하면 일단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으니까.

1성이 뜨는 것이 당연했다.

천호는 일단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루시엘에게 내밀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준비해둔 고급 손수건이었다.

아버지의 조언대로 향수도 뿌려둔 물건이었다.

루시엘은 멍한 눈으로 손수건을 바라보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눈물을 닦아낸 뒤 입술을 한 번 크게 깨물었고, 그대로 다시 천호를 보며 말했다.

“죄, 죄송해요. 지금 제일 황당하고 힘드신 분은 천호님이실 텐데.”

“뭐, 어쩔 수 없죠.”

어쩌겠는가. 이미 소환되었는데.

더욱이 소환되는 상황을 수백 번도 넘게 상상했기 때문인지, 좆됐다는 생각과 별개로 그냥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루시엘은 천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파란 눈동자에는 굳은 의지가 실려 있었다.

“대미궁을 공략해 세계를 해방하는 것 외에는 돌아가실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네, 물론 무리한 일이죠. 1성 영웅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요.”

루시엘이 천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이제 책임감이 떠올라 있었다.

“천호님을 소환한 건 저에요. 그러니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게요. 최선을 다해서 지켜드릴게요!”

“음.”

루시엘은 진심이었다.

괜히 천사가 아닌지, 정말 성격이 착한 것 같았다.

그래서 천호는 평온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얼굴을 붉히는 대신 고개만 한 번 끄덕인 뒤 루시엘을 일으켜 세웠다.

“알겠어요.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같이 노력해 봐요.”

“용사님······.”

무척이나 감동한 얼굴이 된 루시엘이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천호는 그런 루시엘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정말 아무 것도 없나요? 용사로 소환되면 뭐 특별한 능력이 생긴다든가······.”

“이, 있어요!”

루시엘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고, 천호는 속으로나마 안도의 숨을 토했다.

“미궁 세계에 오셨으니까 시스템을 이용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일단 상태창을 불러보세요. 마음으로 염원하시며 상태창이라 말씀하시면 빛의 창이 나타날 거예요.”

시스템과 상태창.

저도 모르게 웃은 천호는 허공을 올려다보았고, 루시엘은 바로 보기 두렵다는 듯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모습에 다시 웃은 천호가 허공을 보며 말했다.

“상태창.”

빛의 창이 나타났다.

&

< 제1장 - 1층 > 끝

ⓒ 취룡

=======================================


0